♣복음말씀의 향기♣ No3975
9월9일[연중 제2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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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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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2Nb3LUeMpg
[서울대교구 정민하 율리오(사회교정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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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 각자 인생의 주역이 되십시오!>
언젠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이 오그라든 형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저는 습관처럼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순간 형제님의 표정이 묘했습니다. 악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어색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송구스러워 가슴을 치게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손은 참으로 고맙고도 유용하고, 성스럽고도 은혜로운 축복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손을 통해 각자의 일을 하고 생계를 꾸려갑니다.
손을 통해 시를 쓰고 하고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을 통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합니다. 손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축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안식일 날 회당 안에 앉아 있던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고통과 수모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생각합니다. 그토록 성스럽고 유용한 은총의 도구인 손이 오그라들었으니, 당사자에게는 참으로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회당에 들어온 다른 모든 사람들은 보란 듯이 멋진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했지만, 오그라든 손의 소유자는 큰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오그라든 손 때문에 평생 남의 눈을 의식하며, 위축된 삶을 살아온 사람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었기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고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그라든 손을 치유시켜 주십니다.
다음의 예수님 말씀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손이 오그라든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본의 아니게 평생토록 이 세상의 아웃 사이더로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시며 그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언제나 세상의 변방에서 빙빙 돌고 있는 우리를 무대의 한 가운데로 초대하셔서 적극적으로, 멋진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 인해, 그분이 우리 매일의 삶 한가운데 굳건이 현존하심으로 인해, 각자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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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1wMSF3dc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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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사의 은총을 받아가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졌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적은 회당에서 중심에 서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가르쳐줍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모든 병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연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총은 착한 사람에게 향합니다.
영화 ‘신데렐라 맨’(2005)은 대공황 동안 극심한 빈곤에서 복싱 경력을 되찾은 프로 복서 제임스 J. 브래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기 스포츠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이미 나이가 많고 부상이 잦아 권투 면허를 잃은 브래독의 일상으로 시작합니다. 일용직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들을 부양할 돈이 없는 브래독의 사정은 정말 딱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쫓아낸 권투협회에 가서 거지처럼 구걸합니다. 전 코치 조 고울드는 그에게 많은 돈을 기부해줍니다.
어느 날 조가 찾아옵니다. 한 권투선수의 부상으로 자리가 비었는데 권투협회에 브래독을 자신이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조는 다시 권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멋진 경기로 승리를 따내고 브래독은 승승장구합니다. 오른손 부상 때문에 왼손으로 막일을 해야 해서 왼손의 파워가 급격하게 높아졌던 것입니다.
세계 챔피언 결승전은 그야말로 드라마입니다. 현 세계 챔피언은 하도 무자비하여 링에서 선수 2명을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아내와 코치는 그래도 브래독을 믿어줍니다. 브래독은 상대선수가 다른 선수를 죽도록 패는 장면을 계속 돌려보며 그의 약점을 알아내고 결국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브래독은 ‘신데렐라 맨’으로 불렸습니다. 일용직 막노동꾼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코치와 그에게 감동하여 다시 기회를 준 권투협회의 힘이 컸습니다. 권투협회는 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을까요?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구걸까지 하는 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누구나가 부모에게 그런 자비심으로 키워졌기 때문입니다.
왜 신데렐라는 다른 언니들보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축복받았을까요? 착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김학배 안젤로 신부는 평화방송 강의에서 한 장애인 변호사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장애인이 사법고시를 준비 중일 때 명동성당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쩔뚝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자신을 보고는 함께 오르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 사람이 듣고 있었음에도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하느님 안 믿으면 저렇게 돼!”
이 말을 듣고는 그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성당 미사에 나갈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은총을 주실까요? 타인의 아픔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더 교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장애인이 자기 동생을 사랑하는 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혹시 길에서 자신과 마주치게 되면 아는 척을 안 하고 그냥 지나쳐 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장애가 있는 언니를 두었다는 말을 동생이 듣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매는 미사에 오면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는 착한 사람의 몫입니다. 레베카도 불쌍한 여행객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은총을 받으신 이유는 그러한 착한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들어오기 전에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아왔나를 되새기며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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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자동차는 신발과 같습니다. 이번에 자동차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자동차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일정 속도에 이르면 소리가 났습니다. 뉴욕에서 사용하던 자동차에 익숙해 있었기에 비슷한 차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중고차 르망을 사서 1년간 다녔습니다. 다음에는 현대 엑셀을 사서 7년간 다녔습니다. 경기도 적성 성당에 있을 때는 중고차 코란도를 사서 다녔습니다. 코란도는 비포장 길에도 잘 달렸고, 사륜구동이라서 눈길에서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로 연수 가면서 코란도는 동창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전자사전을 주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와서는 동창 신부의 권유로 소나타를 샀습니다. 그렇게 12년을 타던 소나타는 미국에 오면서 아는 분에게 드렸습니다. 뉴욕에서는 하이랜더를 탔었고, 댈러스에서는 제네시스를 마련했습니다.
33년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자동차의 기능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걸 보았습니다. 수동기어는 대부분 자동기어로 바뀌었습니다.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이 많아졌습니다.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스마트폰과 차량이 연결됩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전화를 걸 수 있고, 내비게이션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차량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시동을 걸 수도 있습니다. 차량 점검을 스스로 해서 교체해야 할 부품을 미리 알려 줍니다. 최근에 발전하는 부분은 자율주행 기능입니다. 차선을 유지하는 기능도 있고, 차선 이탈 방지 기능도 있습니다. 속도 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일정 속도를 정해 놓으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속도를 유지합니다. 앞의 차가 속도를 줄이면 같이 속도를 줄이기에 안전한 운행이 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되면 자동차는 움직이는 사무실이 될 것입니다. 운전자가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자동차는 인공지능과 함께 목적에 도착할 것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에서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 너무 크면 움직이기 힘들고, 너무 작으면 발이 불편하다. 발에 딱 맞는 신발이라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수가 있다.” 신발과 같은 자동차는 자기의 수준에 맞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차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사고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교통법규의 기본은 교통신호와 규정 속도입니다. 교통신호는 서로의 약속이기에 교통신호를 무시하면 큰 사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서면 돌발 상황에서 차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운전자에게는 안전운전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운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면 좋습니다. 화물차나, 과적 차량의 뒤는 가능하면 피하면 좋습니다. 앞의 차량과 뒤의 차량도 살펴보면 좋습니다.
결국 자동차는 운전자를 위한 도구입니다. 장미꽃을 포장한 종이에는 장미 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포장한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 자동차로 가족을 돌보면 자동차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자동차로 도박장을 다닌다면, 자동차로 남을 다치게 한다면 자동차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고, 죄인 취급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망각하는 겁니다. 안식일이라서 선을 베푸는 행동을 단죄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망각하는 겁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도 율법과 계명에 근거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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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6-11: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은 항상 인간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신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는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된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뻗게 해 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이다. 이제는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습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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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곱째 날에 쉬시면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측면과(탈출 20,8-11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음을 기억하여 인간이 해방을 누리게 하여야 한다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인간이 — 나와 식구들과 종들이 —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축과 이방인까지도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들은 그 두 측면에서 모두 그분께서 “안식일의 주인”(루카 6,5)이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첫째로 안식일이 주님께 속한 날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 규정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인간이 해방되는 날이기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제약에서 풀려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안식일 계명은, 주일이 주님의 시간이고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본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살아갈 때, 안식일 규정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주일은 평일에 하지 못한 밀린 일들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날이 되기도 하여 그 거룩함이 잊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인간이 해방되는 안식일의 본뜻을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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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일은 결코 ‘노는 날’이 아닙니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카 6,6-11)
1)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인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도적으로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안식일이라고 해도 모두 고쳐 주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상한 대로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시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고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생명이 위독한 응급환자가 아니면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뒤의 13장에 그들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루카 13,14-1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병의 치료’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랑과 자비’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악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랑과 자비는, 안식일 규정과는 상관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군중이 모두 기뻐하였다는 말은, 예수님 덕분에 율법의 억압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사실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닌데,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면, 그냥 ‘악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라는 말은, 그들의 ‘악한 의도’에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맞서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11절의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라는 말은, “그들은 분노와 증오심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을 서로 의논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고, 어떻게 죽일 것인지, 그 방법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3)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좋은 일’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 즉 선행과 사랑 실천을 뜻합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포함해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전부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았으면서도(알았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따라서 그 사제와 레위인은,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늘 해야 하는 일이고, 안식일에는 특히 더 많이, 특히 더 잘해야 하는 일입니다.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해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정리하면,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입니다.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입니다.>
4) 오늘날의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 즉 ‘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선행과 사랑, 목숨 구하는 일’을 실천해야 하는 날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그런 일들을 꾸준히 해야 하지만, 주일에는 특히 더 잘해야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하지만, 특히 주일에는 하루 전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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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행할 바를 깨닫게 하시며, 깨달은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어느 병원 게시판에 재미있는 글이 적혀 있어서 소개합니다. 「전갈에 물렸던 분이 여기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분은 하루만에 나아서 퇴원하였습니다. 또 어떤 분이 뱀에 물렸습니다. 그 분은 치료를 받고 3일만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미친개에게 물려 현재 10일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데 곧 나아서 퇴원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어떤 분이 인간에게 물렸습니다. 여러 주일이 지났지만 그 분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회복할 가망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극도로 악에 받힌 사람의 입김을 모아 독극물 실험을 해보면 코브라독보다도 강한 맹독성 물질이 나온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랑을 하거나 즐겁게 웃는 사람의 뇌에서는 암세포도 죽일 수 있는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일 때와 부정적일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긍정적인 사고로 세상을 사는 것이 당연한 하느님의 뜻일 터인데 예수님을 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틈만 나면 트집을 잡으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로 예수님 일행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태도를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보시고 통렬하게 비판하셨지요.
“마치 장터에서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하는 아이들과도 같다.”(루카 7,32)
오늘 복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셨는데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찾아와 고쳐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한편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병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안식일 법을 어긴 자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그들 눈앞에 서게 하신 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다.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루카 6,9)
명확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의 정신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틈만 나면 예수님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벼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형식적인 안식일의 법규만을 들 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답답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상관없이 불쌍한 병자를 고쳐주시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고 해석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지극히 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서로 의논”(루카 6,11)하는 것으로 오늘 복음이 끝이 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위법에 해당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을 제약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안식일 법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법이지 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법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법 조항을 들어 이웃을 단죄하고 억압하려듭니다. 법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칙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장치일 뿐이지 우리의 삶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면 규칙을 떠나서 어떠한 경우에도 좋게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바르게 볼 줄 아는 시각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정적인 마음으로 보는 사람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보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수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부활 신앙이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과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 삶의 자리에서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이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주님의 오늘 말씀을 잘 실천하는 참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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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사이에 일어난 단식 논쟁(루카 5,33-39 참조)은 안식일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유다인들의 구전 율법 미쉬나는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모든 경우는 안식일 법에 우선한다.’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시대가 지나면서 유다인들도 율법의 예외적 적용의 필요성을 점차 깊이 인식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경우, 그들의 의도는 처음부터 악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을 찾을 뿐, 안식일에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낼 수 있었던 당시의 통념마저 거슬러(마태오 12,11 참조), 정작 장애를 지닌 동족의 고통은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는 이때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마르코 3,5)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인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통하여 밝히셨습니다. 안식일이 ‘좋은 일을 하는 날’이며 ‘목숨을 구하는 날’이라 하신 것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창조의 일곱째 날로서 하느님께서 ‘완성이라는 일을 하신 날’이며(“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창세기 2,2])
당신 백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날’임을 기억하고(신명기 5,15 참조) 그 뜻을 실천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손을 뻗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편협한 마음과 잔뜩 오그라든 손으로 때때로 누군가를 가리켰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이 구워 낸 새 빵이 되어’(제1독서 참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새 삶을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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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손을 움켜쥐었다 다시 펼쳐 봅니다. 몇 번이고 움켜쥐고 펼쳐 보고, 그러다 잠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등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고생했다, 고생했다 ……. 지금껏 살아온 것만으로도 참 고생했다.”라며 스스로를 토닥여 봅니다.
얼마나 많이 쥐려고 애를 태웠을까요. 얼마나 내려놓으려 참고 또 참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숨지 마라, 더 이상 기죽지 마라, 그리고 더 이상 너를 다그치지 마라.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얼마나 우리 자신을 인생의 중심에 선보인 적이 있을까 싶어요. 누구 의 아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들 또는 딸로서 인생의 대부분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고, 정작 무엇인가 움켜쥐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허망한 손 하나만 남은 것은 아닐까요.
안식일에 합당한 일은 제 이름과 모습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 일은 우리 각자가 먼저 해 나가야 할 일이기도 하지요. ‘손을 뻗어야 하는 일’, 적어도 그 일을 먼저 하여야만 예수님께서 우리 삶 곳곳에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없애려 모여드는 이들은 여전히 손을 꼭 움켜쥡니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우기듯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줍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잃어 갑니다. 무엇을 쥐고 있는지, 도대체 왜 쥐고 있는지 모른 채 그들은 하느님을 고백하며 하느님을 죽일 것입니다. 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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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손을 뻗어라.” (6,10)
대인공포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과도하게, 지나치게 의식하기에 파생된 병이지요. 이런 심각한 병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오면서 계속 다른 사람의 시선視線을 의식하며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감이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겠지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 지가 내 행동의 방향 도우미가 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당신의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당대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다, 는 것은 분명 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올바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발단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마침 회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두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를 돕지는 못할망정 잠잠히 있으면 좋으련만,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시선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직감하셨기에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사람, 곧 도움이 필요한 오그라든 사람을 향한 시선이 전혀 달랐던 까닭은 사람에 대한 전혀 다른 시선과 접근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시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손수 지은 사람에 대해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아빠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 오그라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시선은 안식일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움을 필요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얄팍하고 편협한 시선에서 예수님의 행동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이 우선하는 세상이 아니라 법이 우선하는 세상임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6,8)하고 그를 이끄셨습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18,1.5)하고 말씀하신 장면이 오버랩해서 다가옵니다. 이런 육체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보내신 아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깊은 마음은 바로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라고 묻고 질책하심에서 잘 드러납니다. 오그라든 그 사람 또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 곧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이었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오그라든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하시고 실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오그라든 손을 가진 그 사람은 그로 인해 행동이 불편했겠지만, 마음은 오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이 오그라들지 않은 그들은 마음이 이미 오그라든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골이 잔뜩 난”(6,11)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손이 오그라들었던 그 사람은 “손을 뻗어라.”(6,10)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손이 다시 성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은 더 오그라들고 더 굳어졌겠지요. 어느 쪽이 더 인생을 아름답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것이 곧 문제입니다. 그 해답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 구원하는 일입니다. “주님, 혹여라도 제 마음의 오그라듦, 완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오늘도 제 손과 발이 당신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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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생각됩니다.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아주 낯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읽고 있던 책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 누나가 외출해서 자리에 없을 때 방에 들어가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과연 누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요?
흘리긴 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가 안 돼서 하품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떨까요? 지금도 책을 읽으며 울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에 동화될 때입니다. 책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동화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사해서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일상 속 기쁨도 주님을 알면서 더 커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원하는 것만을 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할 구실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것인지, 그냥 내버려둘지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커다란 스캔들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사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쳐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서로 논의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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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굽은 마음을 퍼라>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으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 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평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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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길 건네는 사람>
루카 6,6-11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눈길 건네는 사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차가운 사람들
눈길 거두어
어엿이
있음에도
차라리
없어야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벗에게
살가운
마음 담은
눈길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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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삶>
-늘 새로운 시작-
“주님,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 당신이 감싸시니, 그들은 당신 안에서 기뻐하리이다.”(시편 5,12ㄴ)
교황님의 파푸아뉴기니 3일째 방문 소식입니다.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많이도 감동하신 교황님같습니다. '아름다움(beauty)' 이란 말마디가 유난히 눈에 띕니다.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움을 퍼뜨리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움의 전문가들이 되라. 사랑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
교황님의 귀한 말씀이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은 물론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파푸아뉴기니 신자들은 물론 모든 국민들이 교황님을 '위대한 마음의 사람'이라 격찬하며, 파푸아뉴기니 백성들에 대한 교황님의 사랑은 이들을 믿음안에서 더욱 결합시킬 것이라 말합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사랑할수록 아름답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이미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쉬뀐 공작의 입을 빌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 말한 적도 있습니다. ‘
아름다움’하니 성가 둘이 생각납니다. 제가 세상을 떠나 장례미사를 한다면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되는 성가 402장을, 퇴장성가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부탁해 놓고 싶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축제와 같은 장례미사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삶과 세상을 위해 윗 두 성가를 자주 불러보시길 권합니다.
교황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교회의 아름다움이, 복음의 아름다움이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은 물론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느낌입니다.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 바오로의 말씀도 파스카의 삶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순결과 진실의 아름다운 삶을, 주님 파스카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미사보다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이자 교회 전례이자 성인들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 역시 우리를 아름다운 삶으로 이끕니다.
“주님, 당신 정의로 저를 이끄소서.”
정의의 아름다움이여 정의의 용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의 정의와 용기가 굴절됨이 없이 그대로 표현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신자들의 무지를 일깨우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감지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감시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상징하는 바, 온갖 근심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으로 위축되어 오그라든 마음의 우리들입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그대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어지는 물음이 적대자들의 정곡을 찌르며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악의와 사악의 묵은 누룩의 사람들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미 물음 안에 답이 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잣대로 보면 답은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들에 대한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한 정의와 사랑의 주님입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집니다. 우리를 향하여는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마디로 바꿔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입니다. 온갖 스트레스와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든 마음이 활짝 열리고 펴질 때 저절로 몸의 치유도 뒤따를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주시어, ‘늘 새로운 시작’에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주께서는 의인에게 복주시고, 사랑으로 방패 삼아 감싸 주시나이다.”(시편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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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무엇이 중헌디?>
율법 학자가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늘 무엇을 할 때나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무엇을 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 아니 저의 삶을 보면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이나 삶을 그르치지 않고 잘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가치가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생명과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고, 심지어는 주일 미사보다도 더 나아가서 나의 하느님보다도 중요합니다.
과거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곤 했는데 그때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지 하늘의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하느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불가에서 부처가 집착을 하게 하면 부처를 죽이고, 법경이 집착을 하게 하면 법경을 태워버리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럴 정도로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하지만 가치 정립이 머릿속에서만 잘 되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뼛속까지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의식화에 이어 무의식화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늘 의식하며 살다가 보면 차츰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늘 사랑을 중심으로 판단도 하고 행위도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무의식화 차원에서 저는 아직 의식하는 단계이고, 머리와 뼈 사이에서 아직 뼈까지 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제 있었던 것에 대입하면 짜증과 사랑 사이입니다. 어제는 수녀원 미사를 마치고 동포 미사를 봉헌하러 센터에 가기 전 식당을 들렀습니다.
식당 안팎이 주말 사이에 난장판 수준이었고, 센터에 올라가니 거기도 정리 정돈이 안 되어 심란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은 없고 이용하는 사람만 있다는 짜증이 올라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그래서 늘 제가 정돈해왔는데 어제는 정리하면서 짜증이 올라온 것이고 짜증이 있는 상태에서 짜증 내지 말아야지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며 오시는 분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럴 때 저처럼 이렇게 애매한 또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지 말고 얼른 사랑과 정리 정돈 중에 ‘무엇이 중헌디’ 하며 빨리 감정 정리해야 합니다. 사실 정작 정리해야 하고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은 물건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중헌디’ 물으십니다. 안식일이 중하냐? 사람이 중하냐?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온갖 갑론을박을 중단시키십니다. 아주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쾌도난마(快刀亂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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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6,7)
<우리가 선택한 길!>
오늘 복음(루카6,6-11)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겠다고 약속한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신성)이시며 사람(인성)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십자가의 길'이 곧 '부활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걸어가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쉼의 길(냉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받은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냉담하고 있다는 것이 교회의 통계입니다.
그 냉담이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부님과 수녀님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신자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쉼(냉담)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약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온 율법 학자들과 바이사이들, 하느님과 율법에 대해 좀 알고 있다는 그들의 태클 때문에 힘들어 하셨습니다.
당신께로 다가오는 많은 병자들 때문에도 힘드셨습니다. 그분의 삶 전체는 '십자가'였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엿보고 있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당당하게 손이 오그라든 손을 고쳐주시면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우리가 선택한 십자가의 길'은 '부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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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루카 6, 10)
주님과 멀어지려는
마음을 손을 뻗어
잡아보려합니다.
좀체 잡히지
않습니다.
마음은 잡는 것이 아닌
내려놓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오그라든 손처럼
오그라든 마음을
고쳐 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마음도 육체처럼
치유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치유는
먼저 일어나 가운데에
설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합니다.
오그라든 마음을
이야기 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음도 함께
나눠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손을 뻗으니
온기가 느껴집니다.
우리또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님을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의 자녀들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생명에서 생명으로
마음은 전달됩니다.
몸과 마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손을 뻗어야
손을 잡을 수 있듯
이제 예수님의 손을
마주 잡습니다.
몸과 마음또한
주님을 향해
뻗어 나가야 합니다.
주시는 주님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손을 뻗으니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을 만납니다.
우리 마음을
끌어올리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힘차게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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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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