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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역량인(大力量人)
- 큰 능력을 가진 사람
원효도 해골도 물도 그대로, 생각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라
불교는 절대적 관념론 아닌 근본적인 경험론에 가까워
모든 것 ‘있는 그대로’지만 마음이 좋다 싫다 가치평가
말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혀 끝은 비로소 의식된다
송원 화상이 말했다.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또 말했다.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
무문관(無門關)20칙 대역량인(大力量人)
*(풀이) 1.너희들은 있는 그대로의 근본적인 경험을 직시하고 있는가?
2. 말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
말을 잘 할 때는 혀를 의식하지 않는다. 혀를 의식하면 말을 잘 하기가 어렵다. 송원 화상은 우리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화두를 던진 것이다. 다리도 마찬가지이다.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공을 찬다고 해보세요. 제대로 찬다면, 우리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헛발질을 한다거나 혹은 차고 난 뒤 발이 아프다면, 우리는 자기의 다리를 의식하게 될 겁니다. 다리가 아플 때나 불편할 때에만 우리는 다리를 의식하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노력을 의식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리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힘이 센 사람일 수 없습니다. 다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뜻이니까요. 반대로 힘이 센 사람, 그러니까 대역량인(大力量人)은 그냥 다리를 들고 무엇인가를 세차게 걷어찹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 아무리 힘쎈 사람도 다리를 들어올리는 것에 대한 미신, 터부 등 가치평가나 희론에 얽매인다면 그 쉬운 동작도 잘 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니 가치평가와 희론에 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자.
1. 美醜는 해골물에 있지 않다
초기에 서양학자들은 불교 사상을 절대적 관념론(absolute idealism)이라고 규정하곤 했습니다. 절대적 관념론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절대적인 관념, 그러니까 절대적인 하나의 정신이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절대적인 관념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가 바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입니다. 그는 세계가 절대적인 정신, 그러니까 가이스트(Geist)가 펼쳐진 결과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유 전통 속에서 성장한 서양학자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자마자, 헤겔을 연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一切]이 단지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정말 절대적 관념론일까요.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 겁니다.
불교의 사상이 절대적 관념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연수(延壽, 904~975)가 편집한 ‘종경록(宗鏡錄)’이란 책에 등장하는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 스님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기억나시는지요. 바로 해골 물 이야기입니다. 당나라로 불교를 공부하러 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지자, 두 스님은 황폐한 무덤에서 잠을 청하게 됩니다. 잠을 청하다가 원효는 너무나도 커다란 갈증을 느끼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어느 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더랍니다. 갈증이 심해서 물은 스님의 입에 너무나 달게만 느껴졌지요. 아침이 되자, 속이 토하고 싶을 정도로 불편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밤 자신이 먹었던 물이 해골이 담겨져 있던 시체가 썩어 만들어진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여기서 원효는 크게 깨달아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부처님께서 ‘모든 세상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三界唯心]’ ‘모든 대상들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萬法唯識]’라고 하셨던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아름답고 추하다는 가치평가, 그러니까 달콤한 물이라는 가치평가와 더러운 물이라는 가치평가만이 우리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결코 우리 마음이 해골이나 그 안에 담긴 물마저 만들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불교 사상은 절대적 관념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다. 동일한 물임에도 우리는 이러저러하게 마음을 지어내서 일희일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바로 ‘삼계유심’이나 ‘만법유식’, 혹은 ‘일체유심조’라고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단지 우리 마음이 내린 가치평가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널뛰기를 하고 있었을 뿐, 원효도 그대로고 의상도 그대로고 무덤도 해골도 그리고 물도 그대로 아닌가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여여(如如) 혹은 타타타(tathatā)라고 부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지요.
2. 깨달음이란 왜곡되지 않은 마음
그렇습니다. 불교는 절대적 관념론이라기보다는 미국 현대철학자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가 표방했던 ‘근본적인 경험론(radical empiric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정신이나 이데아, 혹은 영원불변하는 자아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실체를 상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경험에 입각해서 설명하자는 것, 이것이 바로 근본적 경험론이니까요.
싯다르타 이래 불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자리 잡은 무아(無我, anātman)이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가르침, 그리고 수행은 우리의 마음과 경험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가치평가를 낳는 우리 마음을 경험의 지평에서 바로잡으려고 노력합니다. 희론(戱論, prapanca)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논의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원효의 깨달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해골 물은 있는 그대로 있었을 뿐인데도, 우리는 함부로 “그 물은 매우 달았다”든가, 아니면 “그 물은 더러워서 역겨워”라는 가치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최소한 세 가지 마음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매우 단 물이군”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두 번째는 “더러워서 역겨운 물이네”라고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에게 일희일비를 제공하는 가치평가는 모두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야”라고 깨달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되지만, 사실 이 세 가지 마음은 모두 우리가 가진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원효도 일심(一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깨달은 마음이나 미혹된 마음은 모두 우리가 가진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날 뿐이라는 것이지요.
선불교에서 화두(話頭)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미혹되어 있는지, 아니면 깨달은 상태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깨달은 마음을 무엇인가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마음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깨달은 마음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보는 마음, 다시 말해 희론이나 가치평가에 물들지 않는 근본적인 경험을 직시하는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스무 번째 관문에서 송원 숭악(松源 崇岳, 1132-1202)은 두 가지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며, “너희들은 있는 그대로의 근본적인 경험을 직시하고 있는가?”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먼저 두 번째 것을 살펴보지요.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開口不在舌頭上).” 당혹스러운 화두입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혀를 움직이는 것이고, 따라서 혀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말을 할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본다면, 우리의 당혹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겁니다.
3. 다리는 불편할 때 인식된다
말을 하면 혀가 움직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우리는 혀를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평상시 혀를 의식하지 않고 우리는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혀를 의식한다면, 이것은 말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때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을 제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혀의 운동을 의식하지 않고, 반대로 말이 잘못 나왔거나 나온 말이 씹히면 우리는 혀를 의식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혀를 움직여야 말할 수 있다는 이론에 너무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말한다는 경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는 송원 스님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끼게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송원은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우리의 경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말을 할 때 우리는 혀끝을 의식하지는 않는 생생한 경험 말입니다.
이제 송원 스님의 첫 번째 화두도 쉽게 이해가 되시는지요.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공을 찬다고 해보세요. 제대로 찬다면, 우리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헛발질을 한다거나 혹은 차고 난 뒤 발이 아프다면, 우리는 자기의 다리를 의식하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다리가 아플 때나 불편할 때에만 우리는 다리를 의식하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노력을 의식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리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힘이 센 사람일 수 없습니다. 다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뜻이니까요. 반대로 힘이 센 사람, 그러니까 대역량인(大力量人)은 그냥 다리를 들고 무엇인가를 세차게 걷어찹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문 스님도 송원의 화두에 다음과 같은 시를 붙였던 겁니다. “다리를 번쩍 들어 향수해(香水海)를 걷어차서 뒤집어 버린다.” 향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를 요강을 차서 뒤집어버리듯이 뒤집어버리는 대역량인의 기백이 후련하기까지 합니다.
진정으로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엇인가를 세게 차서 뒤집어 버릴 뿐입니다. 그래서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들어 올려야 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법입니다. 당연히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 것이지요. 반대로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리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다리가 불편한 사람, 그러니까 힘이 약한 사람일 겁니다. 아직도 송원의 첫 번째 화두가 이해하기 힘든 딜레마로 보이시나요.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요.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린다는 의식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무엇인가를 걷어찰 수 있다는 것이고, 혀끝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는 제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don’t think, but look)” ‘이것은 이렇고 저것을 저럴 거야’라고 가치평가나 희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직시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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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용어
손 안에 있음(배려함) vs 손 안에 있지 않음(눈에 뜀)
문이나 손잡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자연스럽게 문을 열게 되는 일상적인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손 안에 있음 즉 '배려함'의 사례이다.결국 하이데거에게 '배려함'은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어떤 것과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문과 문을 열려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게 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띔'의 사례이다.
'눈에 띔'은 '어떤 것과의 친숙했던 관계가 좌절되어 어떤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눈에 띔'은 '손 안에 있지 않음(unzuhandeness)'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손 안에 있다'(배려함)는 것은 그 문이 나와 너무 친숙해서 그 문을 열려고 할 때 어떤 생각도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의미한다. 반면 '손 안에 있지 않다'(눈에 뜀)는 것은 친숙하게 열리던 문이 열리지 않아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