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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기저기 수정과 삭제의 흔적이 역력한 고로...
왜놈들 손을 집중적으로 탓을 난중일기와 왕조실록등 대표적인 사서들이 아닌...
여타 사료들을 들어...명량해전 전야의 개요부터 재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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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또 금오(金吾)로 대장을 삼아 20여 추장(酋長)과 군사 50여 만을 거느리고 청정(淸正)ㆍ행장(行長) 등의 두 번째 침범하는 세력을 도왔다. 금오는 이때에 16세였다.<<난중잡록>>
* 청정(淸正)이 병선 1만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서생포(西生浦)ㆍ두모포(豆毛浦)ㆍ죽도(竹島) 등의 옛 보루를 수리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좌수영으로부터 한산진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풍우를 만나 남해현(南海縣)에서 정박하는데, 정탐하는 배가 달려와 경상 좌수영이 소식을 보고하기를, “요시라(要時羅)가 사적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미 이달 10일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에 청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옛 병영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하였다. <<난중잡록>>
*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난중잡록>>
* 8월에 적선이 악양(岳陽)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영남 앞바다 5, 6십 리에 배가 꽉 차서 바라보니 바다가 없는 듯 하였다.
9월에 수가(秀家)가 섬진강(蟾津江)을 경유하여 한산에 들어와서 먼저 천여 척 배로 서해로 향하였다. 《일월록》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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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들 상으론...
왜군 총수는 과장 보테서 50여만명 이고...
정유재란의 왜놈들 총 대장은 금오(金吾)란 16세짜리 어린 왜놈으로...
그 권한이 형식적이지만...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보다 월등한 지위의 중요 다이묘를 승계한 자이기 때문이란다.
가등청정이 무려 대소선박 1만여척으로 대마도를 경유해 들어왔다 한다.
마치, 바다가 없는 듯 악양(또는, 어느기록들엔 무안,순천)의 온 바다를 메웠다 한다.
그 중 천여척이 이순신 수군이 있는 서해로 향했다 한다.
그 중...내도수(구로시마?)의 전함 수백척이 먼저 명량에 들어왔다 한다.
그러나...왕조실록과 난중일기는 몰라도...
상당수의 다른 조선기록들엔...틀림없이 마다시(馬多時)의 5,6백척이라고 명기했다.
고로,
왕조실록과 난중일기등... 대표적 사료들의 330척이니 그 중 133척이니도...
선발대인 내도수(구로시마?)의 병선숫자만 인용해... 왜놈들이 손을 봤단 정황같다.
왜 엄연히 존재하는 5,6백척이란 기록들은 다 부풀린 숫자라 해석하고...
왜놈들이 최소한 1번 이상 손을 댄 조선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의 330척이니 133척이니의 기록들만 신뢰하고 싶은지...
그 머릿통 뇌 구조를 파 헤치고픈(곡굉이로..) 심정이다.
혹여,임란시기 왜놈들 점령지에서 왜놈들이 퍼트린 유전자들이 발현돼서일까...?
일단,
왜놈들이 왜정시기에 지들 손꾸락으로 직접 필사해 그린...
조선역해전도( 명량해전도)를 보면서 역사기록을 대입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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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그린 조선역해전도.
일본 동경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림의 배경은 "명량해전"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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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날 아침에 바라보니,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유사(遺事)>>
* 순신이 군사를 돌려서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가리우고 왔다.
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본래 수전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유사(遺事)>>
*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적선 5~6백 척이 바다를 덮어 올라왔다.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원래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로서 바야흐로 서해(西海)를 침범하고자 하여 그 세력이 지극히 크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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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아침에 바라보니,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배를 타고 피란 나온 호남의 사서인(士庶人)들이 모두 진영 아래 모여서 공을 의지하여 생명줄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하여 먼저 피란선(避亂船)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해서 이들을 의병(疑兵)으로 삼고,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이때 적들은 공이 전함을 정돈하여 나온 것을 보고 각각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진격해 오는데, 정기(旌旗)와 누로(樓櫓)가 바다 가운데 그득하였다.
이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나가서 항구의 여울물이 매우 급하였는데,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에 돌진하니, 적이 사면에서 안위를 포위하므로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突戰)하였고, 공은 제군을 독책하여 그를 후원하게 해서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약간 퇴각하였다. 그러자 공이 노를 치면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승승장구하여 진격하니, 적들이 죽기로써 소리만 외칠 뿐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치므로, 공 또한 보화도(寶花島)로 옮겨서 진을 쳤다.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 四)>>
*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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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들이 그린 명량해전도와 똑같은 묘사 기록이다.
울돌목(벽파정해협)에서 밀물로 왜군이 못 빠져 나갈때 어쩌구가 아니라...
분명 명량구(鳴梁口,항구?)에서 썰물이 밀려 나가는 아침에 전투가 치뤄졌다 명기했고...
이순신은 일부러 적진속의 포위망으로 들어가고...
육박하여 난전이 돼었을 때...일제히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펼쳐 적선들이 불바다가 돼고..
쏘고...돌 던지고...창검으로 찌르고...불에 태워 죽였단다.
이게 근접 육박전 기록이 아니고 뭔가...?
포 사격이나 가능한 원거리에서...
조선군들은 ...무슨 수로 돌을 던졌단 건지?
조선군들은 모두가...올림픽 멀리던지기 몇 백미터의 초인적인 신기록보유자들인가...?
조선군들 창칼은 몇 백미터 짜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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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부네가 거대한 이순신의 판옥선에 근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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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적선 5~6백 척이 바다를 덮어 올라왔다.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원래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로서 바야흐로 서해(西海)를 침범하고자 하여 그 세력이 지극히 크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힘으로 싸워 이기기는 어려우므로 꾀로써 격파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피난하던 호남 지방 사람들이 모두 순신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피란온 배로 하여금 차례차례로 물러가서 늘어세워 포진하게 하여 의병(疑兵)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게 하고,
이순신은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바로 나오니,
적은 이순신이 배를 정비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각자 노를 저으며 북을 울리고 소라를 불면서 용기를 내어 곧장 나오는데 깃발과 망대(望臺)가 바다 가운데 가득하니, 우리 군사가 보고 실색하였다.
이때에 아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갈 때여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람이 빨라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바로 적의 앞을 충돌하니, 적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였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든 배를 독려하여 잇달아 진격하여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순신이 돛대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니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므로 이순신 또한 진을 보화도(寶花島)로 옮겼다.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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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침 썰물때에 빠른 조류와 뒷바람을를 이용해...
본의아니게(?)...엄청난 속도로 적선으로 현감 안위의 배가 돌진했고...
이순신의 여타 함선들도 안위를 돕기 위해 돌진했다 나온다.
안위가 죽기살기로 적선에 돌진했을 때...왜선과의 박치기(충파)가 없었다 할 수 있나...?
바로 안위의 전선을 왜놈들이 둘러싸고 거의 함몰전에 이순신의 대장선이 먼저 구해줬다 한다.
함몰이 뭔가...?
왜선들이 근접해 갑판으로 오르고 조선군은 막고... 백병전이 벌어졌단 말이 아니고 뭔가...?
제발 충파전법이 없었단 무책임한 옹알이질들도 삼가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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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위(安衛)는 일개 현령(縣令)으로 이순신(李舜臣)의 분부를 받아 큰 전함(戰艦) 한 척을 가지고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명량(鳴梁)의 어귀에서 적진(賊陣)에 충돌한 다음 더욱 강력하게 혈전(血戰)을 벌이어 끝내 적선(賊船) 5백여 척을 벽파정(碧波亭) 밑에서 격파하여 물리쳤으니, 적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전라 우도(全羅右道)를 엿보아서 곧장 충청도(忠淸道)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안위의 힘이었다.
당시에 안위의 승첩(勝捷)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한산(閑山)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장차 충청도를 곧장 범하여 바다를 따라서 올라오더라도 이를 물리쳐 금할 사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변란이 일어난 이후 10년 동안에 걸쳐 영천과 명량의 전투를 가장 장쾌(壯快)하다고 칭하는데,
그러나 안위의 일은 권응수의 일에 비하면 또 어찌 만 배만 더 장쾌할 뿐이겠는가. <<잡기(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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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천자총통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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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에 이르러 적선 3백여 척이 명량(鳴梁)을 경유하여 곧장 아군의 진영으로 진격해온다는 첩보가 있자, 순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나가 방어하였는데, 적들이 아군을 수십 겹이나 포위하고 군대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는 가운데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장수들이 사기를 잃고 모두 퇴각하여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때 순신이 바다 한복판에 배를 머물러두고 꼼짝하지 않자, 적들이 그것이 대장선(大將船)임을 알고는 마침내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차츰 죄어 들어왔다.
형세가 더욱 긴박해지매, 그리하여 순신이 대장기로써 지휘하여 나가 싸울 것을 독려하였는데, 이때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후퇴하려고 하므로, 순신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고함을 질러 안위의 머리를 잘라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위가 적진에 돌입하여 적과 교전하다가 배가 곧 함몰되려 하므로, 순신이 또 배를 돌려 그를 구해주니, 안위 또한 사력을 다해 싸웠고, 포시(炮矢)를 사방에서 발사하여 적병이 즐비하게 쓰러져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충무공유사 사실(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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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조선의 후대 사가들이 조상님들을 높이려고 뻥을 친 기록이라면...
안위는 당연 용감하게 자청해서 적진으로 돌격한 용장으로 기록해야 마땅하나...
그건 일부의 기록이고...
대부분의 기록엔...분명, 적들의 엄청난 숫자에 겁을 집어먹고서 뒤로 빠지다가...
이순신의 목을 벤단 불호령에 ...에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란 계산으로...
돌격했는데...본의 아니게 그 때가 아침 썰물때라 엄청난 속도가 나고...엎친데 덮친 격으로(?)...
뒷바람까지 항구쪽에서 외해(外海)로 불자...
말 그대로 쏜살같이 왜놈들 선박에 가서 드리 박으며
명량대첩의 초전이 안위의 본심관 다르게(?)... 용감무쌍하게 시작됐단 글이다.
솔직한 역사기록인 것이다.
왜놈들이 포위해 함몰 직전까지 갔다는데...
명량해전 때 근접백병전이 없었단 헛소리는... 과연 누가 퍼트린 대남방송&삐라 살포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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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통의 정체는 질려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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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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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일부러 이순신이 적이 포위해 접근하도록 유인하고...
일제히 포사격과...위의 그림에서 보듯...
상대적의로 월등히 높은 판옥선의 위치에서 기름과 화약을 내리 부으며
화공을 개시해서...순식간에 적선들이 불바다가 됐다 명기됐다.
잘란척 해 대는...먹물통들 말대로 근접백병전이 없었고 원거리 포사격만 했다면...
위와같은 불 항아리(질려포통?)를 포사격이나 가능한 수백미터 밖에서 왜선꺼지 던질
초능력자들이 조선 수군들이였단 소린가...?
역시, 활쏘고...창검으로 찌르고...불로 끄실러 바베큐를 만들었다는데...
근접 백병전이 없었다는 딴지쟁이들은...
조선군의 창검은 원거리 포사격 거리인 수백미터 짜리 창검이란 소리가 하고들 싶은 걸까...?
왜 그런 소리를 ..
마치 극우민족주의를 배제한... 객관적이고 고상한 역사학인 마냥 우쭐대며 설치는 걸까...?
혹,자신도 모르는 왜놈 조상들의 유전자를 보유해서... 무의식중에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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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적의 괴수 뇌도수(耒島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여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갑자기 장군의 배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이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는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
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는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에는 적장이 마다시(馬多時)라고 기록되었다.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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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도 역시...
이순신은 일부러 전의상실한 군대마냥 적의 포위망속으로 진입해...
적들이 바싹 다가와..왜놈들이 학수고대하는 유일한 전법인 갑판전을 벌이도록 유도하곤...
일제히 군호를 올려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벌였다 나온다.
뭔 원거리 포사격...?
포사격은...바로 측하단에 대 놓고 확실하게 먹여버린 정황이다.
부러 근접시켜 한방에 화공과 포격...창칼괴 돌로 때려잡았다 명기됐는데...
뭔 왜놈들 칼솜씨가 두려워,,저리 가... 저리가...허고 원거리 포사격만 했다 옹알대는지...
그 무책임한 매국적인 입들을 뺀찌로 찝어 뜯어 버리고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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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균이 패한 이후로 이미 한산도의 요새지를 잃은 터라, 순신이 중과부적으로 넓은 바다에서 교전하기가 어려우므로, 물러나 벽파정 아래 좁은 목을 지키면서 형세를 이용하여 의병(疑兵)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적선 3백여 척이 명량(鳴梁)을 경유하여 곧장 아군의 진영으로 진격해온다는 첩보가 있자, 순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나가 방어하였는데, 적들이 아군을 수십 겹이나 포위하고 군대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는 가운데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장수들이 사기를 잃고 모두 퇴각하여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때 순신이 바다 한복판에 배를 머물러두고 꼼짝하지 않자, 적들이 그것이 대장선(大將船)임을 알고는 마침내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차츰 죄어 들어왔다.
형세가 더욱 긴박해지매, 그리하여 순신이 대장기로써 지휘하여 나가 싸울 것을 독려하였는데, 이때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후퇴하려고 하므로, 순신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고함을 질러 안위의 머리를 잘라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위가 적진에 돌입하여 적과 교전하다가 배가 곧 함몰되려 하므로, 순신이 또 배를 돌려 그를 구해주니, 안위 또한 사력을 다해 싸웠고, 포시(炮矢)를 사방에서 발사하여 적병이 즐비하게 쓰러져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때 적의 맹장 마다시(馬多時)를 사로잡아 참수하였고, 적선 30여 척을 부수었으며, 죽은 적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포위를 풀고 도주함으로써 우리 군성(軍聲)이 다시 크게 떨쳤다.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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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 내도수(구로시마?)가 죽어서 물에 뜬걸 건져올려... 목을 처 돛대에 계양했다 했지만...
그건 뇌도수(구로시마?)일 뿐...마타시(馬多時)가 아니다.
마타시는 분명 물에 빠진걸...항왜가 그를 알아보고 마타시라고 수선을 떨었고..
긴 낫으로 건져올려 마타시란걸 확인한 항왜가 좋아 날리 굿을 쳤고...
생포 후...적들 보는 앞에서 일곱토막을 내 버렸단 별도의 기록들이 존재한다.
둘은 다른 놈이고...
고로, 침몰됀 왜선의 숫자는..33척 외에... 전혀 다른 엄청난 숫자일 수 있는 정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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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왜놈들 복장에 의문들이 없으신가...?
자세히 보면...팔다리의 근육들이 자칫허면 핏줄까지 적나라할 정도로 잘 드러나는
최첨단 스판재질의 티셔츠와 팬티스타킹을 착용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그 시대에...
20세기에나 실용화됀 최신 스판재질의 옷감을 왜놈들이 생산했다 볼 수 있는가...?
그런데 왜 그 몇백년 후에 조선사신단이 갔을땐...
사타구니의 연장을 땅랑거리는 헐벗을 복장으로 다시 퇴화했단 것일까..?
고로. 위의 기록화는...
원래 가죽쪼가리나 대나무갑옷 외엔 ...
아랫도리는 다 알몸인 왜놈 조상들이 민망스러워...
후대가 색칠을 해서 옷같이 위장한 눈물겨운 사연의 스판재질 쑈인 것이다.... ㅡ. .ㅡ
여타 왜구도(倭寇圖)나 임란기록화들에 다 그렇게 그려져 있다.
헤어스타일도 전부가 다 골룸스타일...즉,문어형 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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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아침에 바라보니,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배를 타고 피란 나온 호남의 사서인(士庶人)들이 모두 진영 아래 모여서 공을 의지하여 생명줄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하여 먼저 피란선(避亂船)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해서 이들을 의병(疑兵)으로 삼고,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이때 적들은 공이 전함을 정돈하여 나온 것을 보고 각각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진격해 오는데, 정기(旌旗)와 누로(樓櫓)가 바다 가운데 그득하였다.
이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나가서 항구의 여울물이 매우 급하였는데,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에 돌진하니, 적이 사면에서 안위를 포위하므로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突戰)하였고, 공은 제군을 독책하여 그를 후원하게 해서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약간 퇴각하였다. 그러자 공이 노를 치면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승승장구하여 진격하니, 적들이 죽기로써 소리만 외칠 뿐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치므로, 공 또한 보화도(寶花島)로 옮겨서 진을 쳤다.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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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보면...
분명 아침 썰물때 전투가 개전돼고...안위의 배가 본의아닌 쾌속으로 적선에 돌진하여 혈전을 치루고...이순신의 대장선과 여타 함선들이 접근하여 혈전을 했다 나온다...
포사격도 바로 옆에 대고 확실하게 갈겨버린 정황이지,,,원거리 포격이 아니였던 정황이다.
이 아침 초전에...이미 31척의 적선을 화장&수장시켰다 나오는데...
저녘 때 까지...
왜놈들도 이번엔 반듯이 이순신을 죽이고 서해진출하겠다고 죽기로 싸운 사생결단의 해전에서...
갸오 2척만 더 침몰시켜 33척 침몰시켰단 옹알이들을 믿고 싶은가...?
나머지 500척,이거나 300척 이거나 100여척의 왜선들은...
치욕적으로 참패해서 돌아가면... 다 할복자살해야 하는데...
갸오 20분지 1이나... 10분지 1의 함선만이 초전에 침몰했다고...
잠시 작전상 살짝 후퇴&전진은 몰라도...초전부터 완전히 도망갔단 얘긴가...?
그럼, 이순신의 13척 함선은...도망가는 적선들을 저녘까지 쫒아가며 놓치지도 않고 다 해치웠단 얘건데...?
그 손쉬운 추격전에서...갸오 2척만을 침몰시켰단 소리가 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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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내도수(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으니,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왜적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 한다.
<<난중잡록>>
*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는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울돌목) 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에는 적장이 마다시(馬多時)라고 기록되었다.<<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 이때 적의 맹장 마다시(馬多時)를 사로잡아 참수하였고, 적선 30여 척을 부수었으며,
죽은 적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포위를 풀고 도주함으로써 우리 군성(軍聲)이 다시 크게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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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들이 아주 중요하다.
먼저 내도수(구로시마?)의 머리를 잘라 돛대에 계양했다 나온다.
총대장이란 마타시(馬多時)가 아니다.
내도수(구로시마?)가 대장으로 나올땐...수백척이거나 300척이거나 133척인데...
마타시(馬多時)가 대장으로 나올땐...분명 5,6백척이라 명기됐다.
고로, 내도수(구로시마?)의 수군선발대 300이나 133척은...
명량해전 전투 전야전격인 백파정(울돌목) 야습때 죽은 내도수와... 33척 침몰 숫자이거나...
아침새백에 치뤄진 초전에서 먼저 박살난 내도수와 31척 침몰 숫자이거나 인걸...
왜놈들이 후대에..하도 망신스러워...5,6백척 전멸 부분을 지운 정황이라 하겠다.
나의 근거없는 과대망상이라고...?
위의 글 같이...왜군은 갸오 수십척만 탈출했다 분명하게 명기됀 기록들이 있다.
왜선 5,6백척 중 십여척만 도망에 성공했으면...500여척이 전멸했단 소리다.
왜놈들 주장대로 330여척에 10여척만 도망했다면...그래도 300척이 전멸했단 소리고...
완전 바겐쎄일로 봐 줘서...133척에 10여척만 도망했어도...100여척이 전멸했단 소린데...
뭔 달랑 33척만 파괴됐단 소린지...?
여러 기록들 중...
왜놈들이 손을 봤을 왜놈들 함선수와 침몰척수 300이나 133척중 33척이란 의심스런 기록들에도...
한결같이 살아 도망친 왜놈들 배는 십여척이라 나왔으니...
이는 역사왜곡 왜놈 학자들과 친일학자들이 놓쳐버린 실수이니...
왜정시기 왜놈들이 왜곡해야 했을 임란기록들의 양이 얼마나 방대했겠느냔 측은지심이 든다...
밑의 기록들을 보자...
분명, 아침새벽의 명량해전이 치뤄지기 이전 전야에...
벽파정 좁은 해역(울돌목)에서 적의 야습과 조선군의 반격이 있었다 명기됐다.
아마 뇌도수(구루지마?)는 이때 뒤졌거나...
이때 함몰됀 왜놈들 배의 총수가 31척이거나 33척인걸...
아침 명량항구(울돌목이 아니다)에서 치뤄져...저녁때까지의 사생결단 혈전에서...
5.6백척 전멸에 10여척만 탈출 이란 전무후무한 치욕적인 참패기록을...
벽파정 전야전 숫자와 뭉퉁그린 눈물겨운 왜놈들과 친일파들의 왜곡솜씨일지 싶은 정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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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각 군대를 정돈하고 경계를 엄중히 해야 한다.”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적이 과연 군대를 비밀리에 출동하여 쳐들어왔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말고 각각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하여 더욱 강력히 싸움을 독책하니, 적이 포위망을 풀고 가므로
공은 회군(回軍)하여 우수영(右水營)의 명량(鳴梁) 앞바다로 와서 있었다. <<유사(遺事)>>
* 그러자 조정이 급하게 여기어 공을 찾아서 재차 전직(前職)을 임명하였다.
이에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노량비명(露梁碑銘)>>
* 수군이 탕진(蕩盡)된 뒤에 순신은 일어나서 홀로 병들고 쇠잔한 남은 군사로 열 세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벽파정 앞바다에서 머뭇거리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어느 날 갑자기 군중에 영을 내려,
“오늘 밤에 적들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각기 군사를 정돈하고 엄중히 대비하라.” 하였는데,
그날 밤에 적들이 과연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오니 순신은 모든 군사들에게 움직이지 말도록 하였다.
이때 달은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비쳐 절반이 약간 그늘져 있었는데 적선이 그늘져 컴컴한 속으로 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때 증군에서 화포를 쏘면서 함성을 지르자 모든 배들이 따라 응하니 적군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조총을 쏘니 소리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순신은 싸움을 더욱 힘차게 독려하니 적군이 드디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왜적의 꾀가 간사스러움이 많아서 달이 없을 때라면 본래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또한 와서 습격할 듯하니, 경비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모든 배에 전령하여 척후를 세우고 변을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에 초탐선(哨探船)이 왜적이 온다고 급히 보고하니 이순신이 호령하여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에 달이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기울어 반쪽은 어두컴컴한데, 무수한 적석이 컴컴한 곳을 따라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이 화포를 놓고 고함을 지르자 모든 배가 호응하니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일시에 조총을 쏘아대어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이순신이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적이 드디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 달아나니 여러 장수가 모두 탄복하여 귀신같이 여겼고 이순신 또한 우수영(右水營) 명량(鳴梁) 바다 가운데로 회군하였다.<<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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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나오지 않나...
겨우 10여척만 살아 도망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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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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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뇌도수(구루시마?)가 바로 마타시(馬多時)라 하는데...
아니라는 설도 만만치 않은데...뭐시기 마타시즈"란 이름을 가진 부산포의 어느 왜장놈은...
그 정체를 모른다 하니...바로 그놈이 명량해전 본 전투의 왜장늠인 것이다.
내도수(구로시마)란 왜놈은...
명량해전 전야제 격인 벽파정(울돌목)야습에서 이미 목이 잘린 왜놈이거나...
명량해전 초전에 목이 잘린 선봉장수 격이고...
실상은..기록대로 마타시(馬多時)란 왜장놈이 5,6백척의 왜선 본대 총대장늠이고...
이 늠은...저녁까지 치뤄진 사생결단의 혈전중에...물에 빠져 허우적 대는걸...항왜(항복한 왜놈)출신 조선군이...
저기 저 놈이 마...마타시같스무니다!!! 하고 지적하자...
수군들이 긴 갈고리창으로 건저올려 생포하고...항왜가 맞다고 날리를 친...마타시로...
조선군의 맹포격으로 거리가 벌어져 포위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왜놈들이 다 지켜보는 한가운데서...
7토막으로 토막이 나서 머리가 뇌도수(구루지마)와 사이좋게 나란히 돛대에 계양돼고...
적의 간은 반듯이 취했단 이순신 후손의 기록대로...
이순신은 이 마타시늠의 간을 씹었을 확률 99.999퍼센트 인걸...
왜놈들이 하도 수치스러워...주요 기록들에서 철저히 삭제했던 정황이 있다.
그러기에 이 명량대첩은 후대에...
10여년간 치뤄진 모든 전투 중...가장 극적이고 위대한 전과라 회자됐던 이유고...
조선왕에게도 안하무인이던 명나라 수군장 진린제독도 이순신을 존대했다 한 것이고...
명황제는 이순신에게 좌도 수군제독이란 명나라 벼슬을 내리며...
황제의 제독인(제독도장)등 팔사품을 하사하기 까지 한 것인데...
질투쟁이 선조대왕께선,,,
하찮은 승리라 폄하하며...포상을 질질끌며 명나라 사신들에게 의문과 빈축을 사기도 한 이유다.
거북선이 맹 활약한 한산대첩도...명나라 수군도 합세한 노량대첩도...100이나 200척 안밖의 침몰인데...
어찌, 13척인 명량대첩 때...500여척에서... 최소 100여척 전멸일 수 있냐고...?
한산대첩땐...왜군들이 바로 꼬랑질 말고 도망쳤고...노량대첩도 명나라와 짜고 도망친 해전이지만...
명량대첩은...왜놈들이 서해진출의 한을 풀기 위한 절호의 기회에...
이순신의 단 13척 함대란 절호의 기회에...사생결단으로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아침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근접 백병전을 시도하다가...
조선군의 천자총통... 비격진천뢰(미사일)...불깡통등의 공격을 바로 지근거리에서 처 맞았기에 가능했던 전멸인 것이다.
반대로 조선 수군이 수 많은 왜병들의 조총공격에 무사했덙 이유는...?
판옥선이,,,대부분의 왜놈들 전투선보다 월등히 더 크고 높았기에...사각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적선의 높은 사대부터 포격으로 박살내면...조선군이 갚판싸이드에 머릴 내밀지 않는 한...
모두 사각이 유지돼기 때문이다.
또한 월등이 높은 판옥선에서...낮은 왜선으로 화약통과 기름을 드리 붙는 화공이 유리했고...
반대로 왜놈들은 거의 불가능했던 거다.
이순신은 천재였던 거다.
왜놈들이 힘들게 귀저기도 않찬 엉덩이를 보이며 높은 판옥선 갑판에 갸오 올라서도...목이 댕강...
난쟁이 왜병들을...조선 수군들은...간단하게 칼싸움에서 이겼던 것이다.
왜...?
뭘...?
우리 조상들이...
최소한 호남의 수군들은... 왜놈들 보다 칼싸움이 월등했다면 ...뭔 법에 걸리기라도 한단 건가...?
왜 조선군은 단지 2명만 사망하면 안 돼는 건데...?
왜 우리 조상이...난쟁이 왜놈들보다 월등히 칼싸움을 잘하면 안돼는 건데...?
왜 우리 조상들이 세계 어느 해전사에도 없는...전무후무할 기적적인 완승을 거뒀다면 안 돼는 건데...?
위와 같은 명백한 명량해전의 근접백병전(육박전)기록들이 있음에도...
조선수군은 난쟁이 왜놈들의 칼솜씨가 두려워 ...그저 멀리서 포격전만 해서 명량대첩을 거뒀단
근거없는 유언비어 빠라 살포질을 하는... 대한민국 자칭 먹물쟁이들의 매국적인 여물통들에...
아직도 개량하지 않은...우리동네 긍현이네 뒷깐의 묵은 떵물 한 박아지를 퍼 먹였으면 하는...
비통한 심정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나는 오늘 놀라운 사실에 직면했습니다... 감히 궐한님이 윤복현 수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에휴, 참으세요... 님은 맨발로 달려도 윤복현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인정 ㅡㆍㆍㅡ
안위의 배가 달려드니 왜놈 대장이 당장에 달려가 끝장내버려라고 명령..
적선이 달라붙어 기어올라왓고 백병전이 붙었습니다.이건 명확한 사실기록이지요.창 몽동이 칼이 많이 사용된 백병전입니다.
기진맥진 거의 함몰직전에 안위의 배를 이순신이 직법 달려가 도와주어 성공했다지요.
^^ 전사를 공부할 때는 전략과 전술까지도 알아야... 비로서 첫 관문에 들어선 겁니다... 님의 글에 나오는...안위의 전선에 달라붙은 왜군...... 그들은 일종의 특공대입니다... 특공대의 기본이 백병전입니다...시끄럽게 해서 적군이 알아채면 안되거든요... 그래서 현대전에도 특공대원들은 무성무기를 사용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 슬그머니 적에게 다가가 적의 목을 부러뜨러는 겁니다... 이건 무기도 필요없고, 소리도 안나거든요... 유병언이 이런 경로로 죽었을 거라고 믿는 1인으로써... 안위의 배를 공격한 왜군은 특공전술을 펼쳤지... 결코 백병전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백병전처럼 보이지만...아닙니다.
이글 긴글 많은 자료 조사하여 잘 쓴 글입니다 수고를 격려해주시는것이 옳은듯 합니다.
안위의 전선으로 몰려든 왜군들을 물리친 조선수군들을 칭찬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적의 특공전술에도 능란하게 대응했다는 점입니다... 특공전술의 기본이 기습이고... 맨 몸으로 부딪치는 백병전입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기본입니다... 반대로 그들과 맞섰던 조선군은... 훈련받은 대로.. 적의 기습을 충분히 막아낸 것입니다... 이건 백병전이 아닙니다... 사망자가 달랑 2명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사족을 답니다.
특수부대원들은 각개전투 개념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작전에서 은밀히 침투해야 하는데... 침투과정에서 각개전투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작전은 실패한 작전으로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과정에 적과 부딪칠 수 있지만... 이때도 낮은포복, 높은포복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에...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되거든요.
금자님은 구한말기까지도 130cm평균신장 의 왜놈들을...뭔 대단헌 전사들인냥 찬양하십니다...
그 심리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판옥선에 기오 올라오는 왜놈들 찍어 죽이고 갸오 뛰어 올라온 늠덜 목아지 자르고...그게 근접 백병전이 아니면...
뭔 갑판끼리 마주대고 상호간 간판에 뛰어 들며 벌이는 전투만이 백병전이란 겁니까...?
이순신장군이 바보이시겠습니까....?
근접 화공과 포격전을 아주 적절하게 시도하는 중...왜놈들이 판옥선에 기를 쓰고 기어오르는 것을...
적은 수의 조선수군들이 기를 쓰고 찌르고 쏘고 베고...이게 백병전이지 뭔 공성전...?
왜 그리 분리를 하며 아는척을 하시는지...참 그 심리가 궁금합니다
님과 같은 상상력으론 역사를 논하면 안된다니까요... 명량해전과 칠천량 해전을 비교해보세요... 피아간의 사망자 수를 비교해 보라구요...원균은 근접전을 허용해서 개박살이 난거고...이순신은 접근을 허용하지 않아서 적을 작살을 낸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총통이 있는데... 미쳤다고 적의 접근을 허용해서 백병전을 폅니까?
@金子 실록증거를 보여 드려도 님의 그 짧은 기존 지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계십니다.
적들이 근접하도록 부러 유도하고 일시에 포격과 화공으로 쓸어 버렸다지 않습니까...
왜 우리 조상의 위대한 승리를 제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으시려는지요....?
총통을 바로 옆에 대 놓고 먹이는게 적중률과 살상률리 좋겠습니까...원거리에서 하는게 좋겠습니까...?
적중률 낮은 원거리에서 수백척에게 포격하려면 칠천량에서 다 분실됀 화력들로 감당이 됀다 보십니까...?
왜놈들이 너무 안스럽습니까...?
@궐한 실록이요? ... 무슨 실록에 그렇게 나왔습니까?...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다... 영화와 현실을 착각하지 마세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순신의 함대에는 네가지 총통이 장착되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지요?... 왜? 한가지만 실으면 될걸... 한 배에 네가지 총통을 함께 장착했는지... 생각도 안했죠?... 모르면... 더이상 역사를 논하지 마세요.
@궐한 원거리에서 적중율이 떨어진다고요?... 님이 모르셔서 한 말이겠지요?... 천자총통은 포신이 가장 긴 총통으로... 무려 1Km 이상을 날아갔습니다...이건 인터넷을 뒤져도 나와요......여기에 위 댓글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왜 네가지 총통을 함께 장착했는지....
@金子 저 위의 기록들은 그럼 실록들이 아닌 쓰레시들입니까...?
왜 우리 조상들의 기록은 그리 무시하고 근거도 없는 백병전 없었느니 근접전을 회피했느니의 낭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지여...?
님의 주장이 바로 실록에는 없는 허구를 바탕한 자의적 역사왜곡이십니다.
@金子 그리고 위 기록화에 나오는 화통이 1km를 나갔는지 어떠했는진 몰라도...제가 제기한건 적중률입니다...
현대같은 초정밀 포가 아니니...근거리에서 쏠수록 적중률이 급상승하는 법이고...원거리로 갈수록 적중률은 현저히 떨어지니...화약과 포탄이 부족한 13척의 이순신함대는 최대한 적을 지근거리로 유도했을 수 밖엔 없고.,.,.기록에도 그리 적혔고...이전의 전투에서도 근접포격을 선호했단 기록들이 나옵니다...
좀 배우시고 우기십시여...
@궐한 그렇지요? 사거리보다 적중룰이 문제지요. . 그래서 네가지 포를 함께 탑재한 것입니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근접 유인하였던 것은 맞습니다만 이또한 명중율을 높이기 위해서지 백병전을 펼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거죠.
원균은 육군의 영웅으로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서도 육지처럼 백병전을 택해서 개박살이 났고... 이순신은 초급군관 시절... 지금의 전남고흥에 있던... 발포만호를 지냈기 때문에 원균과 전혀 다른 전술은 택했습니다... 당시 천하 최강인 조선의 총통을 바탕으로 포격전을 주 전법으로 삼은거죠... 요즘으로 치면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과 견줄 수 있는 분이....이순신 장군입니다... 더이상 개솔은 하지 맙시다.
기록근거도 없이 전혀 근거없이 말씀하십니다...원균은 부러 육지 백병전을 택한게 아니라...적들의 유인전술에 말려 대마도근처까지 갔다 온연후...지친 병사들의 식수보충을 위해 연근해에 접안하려다가 매복에 걸려 패전한 겁니다...배우시려면 좀 제대로 배우시고 우기십시오...
@궐한 원균은 척후도 세우지 않고 부산포로 진격하다가 개박살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하필 칠천량해협으로 숨어드는 중에 적의 매복에 걸려 ...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을 했죠.... 여기에 답이 있잖아요? . 척후병도 없었다. 고로 적과 바로 맞딱뜨렸으니 근접전이 벌어진다. 이래도 모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