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착(狹窄)
P는 언제나 서울에 갈 때면 늘 기차, 그 중에서도 마지막 밤차를 이용한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의 밤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의 가슴을 묘하게 뛰게 한다. 어둑어둑한 역 앞에서 칼바람을 맞고 서 있을 때면 으레 떠오르는 10년 전의 기억 때문에 그렇다.
재수를 한 끝에 지방의, 원하지도 않았던 약대를 입학한 후, 4년 내내 그의 책갈피 대용은 자퇴 용지였다. 그 후, 이름 없는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7년 동안 지내면서 자퇴 용지의 역할은 사직서가 대신했다.
심장, 혹은 동맥 중요한 어딘가가 협착 된 혈관. P는 자신의 인생이 꼭 이렇다고 생각했다.
석 달 전 그 날 밤까지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그는 코트에서 담배를 꺼냈다. P는 유심히 곽 안을 들여다보았다. 각양각색의 사탕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아이처럼 그의 눈이 빛난다. 그는 담배 하나를 뽑아냈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이 별처럼 빛을 발하자 P의 주변을 나방처럼 맴돌던 붉은 얼굴의 사내가 허위허위 걸어온다. 햇볕과 술이 만들어낸 유쾌하지 않은 색이다. 그가 말했다.
“담배 한 대만 빌립시다.”
“아, 예.”
P는 아무런 주저 없이 오히려 반기는 기색으로 담배 하나를 꺼내 붉은 얼굴의 사내에게 주었다. 그는 담배를 받았지만 시선은 P의 손에 있는 담배 곽에 머물러 있었다.
“한 대만 더 주쇼.”
P는 웃으며 아예 담배 두 개비를 꺼냈다. P를 관찰하던 역 앞의 다른 붉은 얼굴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들은 저마다 손을 벌렸다. P는 당황했지만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그들에게 담배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사내들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졌고 어느 순간 누군가 곽 채로 낚아챘다. 곽은 거친 손길 사이를 오가다 결국은 찢어져버렸다. 그들의 손에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P는 만족스런 얼굴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P에게 그 광경은 낯설지가 않았다. S대 법대 입학의 부푼 꿈을 안고 면접을 보기 위해 밤차를 타던 10년 전의 그 날도 그랬다.
예비 수험생 P는 아직 지하철도 버스도 다니지 않는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P는 붉은 얼굴의 인간들이 풍기는 술 냄새와 발 냄새가 가득한 대합실 안에서 지하철 운행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면접 때 받게 될지 모를 질문이나 답변들로 복잡했다. 마침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얼굴의 인간들뿐이니 IMF나 사회 안전망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이제 곧 지하철이 운행될 시간, 허기가 진 P는 어머니가 싸주신 유부초밥이 떠올랐다. 그는 가방에서 빨간 보자기로 싼 도시락을 꺼냈다. 그 때 그는 알지 못했다. 수십 개의 충혈 된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유부초밥 세 개를 먹고 보온 물통을 가방에서 꺼내는 사이 붉은 얼굴의 인간들이 P를 둘러쌌다. 입술이 부르튼 붉은 얼굴의 사내가 도시락을 가리키며 P에게 말했다.
“이거 남기는 거냐?”
P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간이었다. 붉은 얼굴들의 인간에게 도시락이 넘어간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도시락이 빈 채로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붉은 손 하나가 P의 가방을 낚아챘다. P는 가방 안에 지갑과 수험표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입만 멍하니 벌렸다.
P는 10년 전의 바보스런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P와 붉은 얼굴들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어둔 밤하늘에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P는 S대에 떨어졌다. 혈류가 막혀버린 것이다. 참으로 인생이란 우스운 것이어서 그는 혈관 확장제를 연구하는 연구원이 되었다. 아무리 연구를 해도 그의 협착이 된 인생이 치료되지는 않았다. 행복이나 만족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P는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가 정한 선을 넘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P는 시계를 보았다. 열차 출발 시각까지는 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깊게 연기를 빨아들일 때 처음 P에게 말을 건넸던 붉은 얼굴의 사내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가슴이... 뜨끔하네.”
그의 옆에 있는 사내도 왼쪽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죽을 때는 우리한테 말하고 죽어. 며칠 전에 강씨처럼 화장실에서 일주일씩이나 썩는 냄새 풍기지 말고. 우리 같은 놈들 죽어봐야 누구 하나 신경도 안 쓰니까.”
P는 그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던졌다. 꽁초의 필터에는 검은 점이 찍혀 있었다. P는 대합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경쾌한 발걸음이다. P는 심혈관을 1시간 내에 완전히 협착 시키는 물질을 우연히 발견한 석 달 전 그날 밤 이후로는 언제나 걸음이 가벼웠다.
P가 서울에 도착하면 지하철도 버스도 다니지 않을 것이다. P는 사우나를 갈 것인지, 모텔에라도 들어가 세미나 시간까지 눈을 붙일 것인지 역을 나와 고민할 것이다.
담배라도 한 대 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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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한자 [단편소설]
누렇게 변한 흰 타일 3층 건물 입구에 붙은 낡은 세로 현판 하나가 K군의 눈에 들어온다. 그는 아래로 길게 새겨진 한자(漢字)를 찬찬히 읽었다.
自由民主主義守護市民聯隊
“자.유.민.주.주.의... 수.호.시.민...연.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 K는 다시 위에서부터 단숨에 읽어 내렸다.
“자유민주주의수호시민연대.”
스스로가 뿌듯한 지 K는 미소를 살짝 문 채 걸음을 옮긴다. 20살 대학생 K의 꿈은 일본어와 중국어를 마스터하는 것이다. 덕분에 수면 시간이 다섯 시간을 넘기지 않을 만큼 강행군중이다. 두 언어는 한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한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그는 이렇게 오가는 거리에서 보이는 광고나 간판, 현판들의 한자들을 꼭 읽고 넘어간다. 언어는 언제나 자주 접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K는 한 가지 사실에 놀랐는데 방금 읽은 것 같은 세로 한자 현판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교회가 많은 것에 놀라게 되고 룸살롱이나 바를 처음 경험하게 되면 유사 업소들의 간판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법이다. 사람은 관심 있는 대상은 참 잘 찾아내니 말이다. K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가지 K가 의아스러운 것은 현판의 의도였다. 어느 누가 긴 한자를 읽어줄 정성을 보이겠는가. 또 하나의 현판이 K의 눈에 들어왔다.
韓國隱退者權益追求會
“한.국...은.퇴.자...권.익.추.구.회. 한국은퇴자권익추구회.”
K는 만족스런 미소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K는 이제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한자들은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이런 현판을 거는 단체들은 어떤 지적인 오만함이나 일반인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폐쇄성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K는 마치 성벽을 무너뜨린 장수처럼 으쓱해졌다.
낡은 건물이 쉽게 눈에 띄는 쇠락한 거리라 그런지 금방 또 다른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K는 그 현판 앞에 서서 주의 깊게 훑어 내렸다. 난이도가 낮은지 K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친다.
大韓人肉料理硏究會
“대한인육요리연구회.”
두 번 읽을 필요도 없이 단번에 읽어 내렸다. K는 다시 만족스런 얼굴로 종종 걸음을 옮겼다.
- 원작은 박동식 작가의 글이고 허락 받았쒀.
첫댓글 재밌다ㅋㅋㅋ P 무서운자식
재밌다 나 이런 거 좋아하는데ㅎㅎ 좋은 글 고마워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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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마워 여시!! 수정해똬!!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우와 이거였구나. 나도 이해 안돼서 그냥... 좌절하고 자기가 죽으려고 점찍어놓은 담배 폈다는 걸로 이해하고 말았는데.ㅋㅋ 짱이다으 ㅋㅋ
난 담배 피고나면 필터에 생기는 반점 ㅇㅒ긴줄 알고 넘어가서 이해가 안된거구나!!
어어어어오우워어ㅑ양 재밌어!!!
우왕 재밌다ㅋㅋㅋ글 잘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