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느긋한 강인함, 편견과 싸우며 연기했다
2022년 1월7일, 94살의 나이로 시드니 포이티어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떠올리며 인종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에 그를 둘러싼 사회적인 논의는 배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그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당대의 일부 백인 커뮤니티는 그의 인기에 화를 냈고, 흑인 사회는 더 잘하지 못한 부분을 탓했다. 모든 논란은 그의 가치를 방증해주었다. 개인으로 힘겨웠던 부분도 있었을 테지만 모두가 그의 훌륭한 연기에서 기인한 결과였다. 혁명도, 인권 운동도, 찬란한 생애도 모두 배우의 운명을 따라 움직였다.
시드니 포이티어는 1927년 2월, 바하마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가 여행차 들른 마이애미에서 조산으로 태어났다. 15살 되던 해 소년은 바하마를 떠나 뉴욕에 정착한다. 당시 현실은 험난했다. 그는 설거지나 주차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버스 정류장에서 잠들 때도 있었다. 연기를 처음 접한 것은 흑인 전문 극단 ‘아메리칸 니그로 시어터’에서 무대 조수 일을 맡으면서였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는 바텐더와 함께 신문을 읽고 그릇을 닦으면서 라디오 아나운서의 억양을 따라 했다고 말한다. 독특한 바하마 억양도 수정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입대하여 퇴역군인 전문 병원에서 일했다. 그렇게 전쟁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다.
브로드웨이에서 경력을 쌓은 젊은 배우를 처음 스크린으로 데려온 것은 조지프 L. 맹키위츠 감독이었다. 오디션을 통해 <노 웨이 아웃>(1950)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의사’였는데, 당시 흑인이 의사를 연기하는 자체로 화제가 됐다. 할리우드 최초였다. 맹키위츠는 감정적으로 강렬하고 우아해서 그를 발탁했다고 한다. 영화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구성됐지만, 당시 계약상의 이유로 공식 포스터에서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심지어 미국 남부에서는 상영도 금지됐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배우로서 그가 걸어온 길이 상상 이상으로 험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출작을 제외하고 그의 출연작을 가늠하면 대략 50여편이다. 그중 초창기 흑백영화들이 커리어를 지탱하는 초석이 된다. 리처드 브룩스의 <폭력교실>(1955)이 당시의 대표작이다. “교실에선 절대 등을 보이지 마”라는 오싹한 조언으로 시작하는 영화에서 그는 빈곤하고 소외되었지만 카리스마 있는 청소년을 연기한다. 주인공 선생님 역은 글렌 포드가 맡았다.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작품 자체가 미국에서 일으킨 반향이 컸다. 그리하여 포이티어는 단번에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지금에 와서 영화의 진보적인 교사 역할은 다소 미지근해 보이지만 감독이 반미주의자로 의심받았을 정도로 당대 사회의 편견은 뿌리 깊었다. 라울 월쉬가 연출한 <검은 태양은 밝아온다>(1957)도 비슷한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만일 1950년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대표작 한편을 골라야 한다면 <흑과 백>(1958)을 언급하고 싶다.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 성공한 주연작이다. 쇠사슬에 손이 묶인 백인 죄수와 흑인 죄수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송 중이던 수송차가 급작스럽게 사고를 당하고, 두 죄수는 탈출한다. 처음에 둘은 인종차별로 서로를 적대시하지만 협력하는 것이 이득일 거란 판단으로 움직여서 마침내 친구가 된다. 포이티어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되었고 수상엔 실패했지만 같은 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60년대 30대 중반의 나이로 포이티어는 전성기를 맞는다. 출연작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히트작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그중 <들백합>(1963)이 가장 유명하다. 이 영화가 그에게 흑인 최초의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안기기 때문이다. 독일인 수녀들이 다수 등장하는 소재 탓으로 언뜻 종교적인 작품인 듯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심리적이거나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장르적으로 충돌적인 상황이 나열될 따름이다. 독일어와 영어의 간극, 백인과 흑인의 대비, 종교와 부딪히는 코미디의 요소를 통해 <들백합>은 ‘통합’이란 주제를 전달한다. 단언컨대 이 작품의 최대 강점은 연기자 포이티어다. 그의 꼿꼿한 육체와 단단한 얼굴에서 풍기는 느긋한 강인함이 영화를 따스하게 만든다.
1967년 개봉한 영화들도 인상적이다. 먼저 <밤의 열기 속으로>(1967)에서 그는 형사 역을 맡는다. 단지 기차역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지만, 사실 이 인물은 살인 사건 전문 형사다. ‘비질 팁스’란 이름의 주인공은 몇년 뒤 <외로운 추적>(1970)과 <대혈투>(1971)에 다시 등장해 일종의 시리즈를 형성한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은 더 흥행한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논란을 일으킨다. 소위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가지는 선입견을 충실히 그렸다는 이유로 공격받는다. 이 영화에서 그는 엘리트 의사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유색인종들이 직면한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참고로 미국의 대법원이 버지니아주의 ‘인종간 결혼금지법’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1967년이고, 마틴 루서 킹이 암살된 시기는 1968년이다. 시대를 가늠해도 당대 그의 역할이 소수자 인식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단 사실이 드러난다. 스파이크 리 같은 영화계 인사들은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반발을 강한 어조로 전달했다. “오늘날 우리가 있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만들어져야 했지만 사실 그가 한 일은 ‘완벽한 흑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 배우로서 그의 자리는 점차 줄어든다. 새로운 흑인 배우들이 등장한 것도 이유였지만, 반인종차별적인 주제의 영화 제작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방향을 돌려 그는 본격적으로 연출에 뛰어들었다. 첫 연출작 <벅 앤 프리처>(1972)는 흑인 카우보이를 주인공으로 한 서부극으로,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그는 8편을 더 연출한다. 그중 코미디와 스릴러의 중간에 있는 <행키 팽키>(1982)가 평이 좋았고, 빌 코스비와 함께 포이티어가 직접 출연한 <업타운 새터데이 나이트>(1974)가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당첨된 복권이 든 지갑을 잃어버리고 이를 찾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현재 리메이크 작업 중이다.
1950년에 출발한 그의 꿈은 일종의 표상이자 시대적 신화로 완성되었다. 만일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덴절 워싱턴이나 제이미 폭스, 할리 베리 같은 매력적인 흑인 배우들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비명이나 투쟁 없이도, 그는 점잖은 몸짓으로 세기의 혁명을 일으켰다. 분노는 긍정이 되었고 편견은 승리의 과정이 되었다. 한없이 미묘한 방식으로 세계를 뒤흔든 배우가 영면에 들었다. 그가 바하마의 유네스코 대사를 맞은 일화나 미국 민간인 최고의 영예라 불리는 ‘자유의 메달’을 수상한 일은 그의 커다란 업적에 가려진 작은 흔적일 따름이었다.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배우, 순수의 에너지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증명한 남자가 이제 세상에 없다. 미국영화의 아이콘이 된 그를 기억한다.
글 이지현(영화평론가)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