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12월에 일본군이 태국에 상륙하였다.
일본은 미얀마의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일본군의 무상 주둔과 통행을 요구하였고, 쁠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총리는 이를 수락하였으며 당시 국왕도 국민과 나라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이를 수락 하여 1941년12월21일 일본과 동맹을 맺었으며 1942년1월25일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 하였다.
서양에서는 삐불(Pibul)로 불리는 쁠랙 피본송크람 총리는 민족주의자로서, 일본 세력을 업고 태국의 세력권을 확장하고자 하는 ‘대(大)태국주의’를 추구하였다.
↑일본군 군사 고문단으로 부터 조종 훈련을 하고 있는 태국 공군
1942년에는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세니 프라못(Seni Pramoj) 주미 태국대사는 미국에 대한 태국의 선전포고문 전달을 거부하고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항일 ‘자유태국운동(Free Thai Movement)’을 결성하였다.
1943년 이후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해지면서 미국 내 태국인들이 삐불 총리의 암묵적인 양해하에 ‘자유 태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군과 합동으로 태국 내에서 반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8월에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하였다. 1945년 8월에 태국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 내의 친일파를 제거하였으며, ‘자유태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고 있는 태국 총리
일본군 탱크로 무장한 태국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