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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印度) 여정기' (2 편)
(2005` 11, 10 ~ 11, 18)
인도에선 우리국토 두 바퀴 돌아
이렇게 인도 31개 주(州) 중 델리를 포함해 우타르프라데시 주와 마디아프라데시 주, 그리고 라자스탄 주 등 고작 4개 주를 돈 게 전부다. 델리에서 바라나시(Varanasi)로,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로, 카주라호에서 아그라로, 아그라에서 자이푸르로 이동했다. 델리에서 바라나시 사이의 920km와 바라나시에서 사트나(Satna)까지 250km, 자한시(Jhansi)에서 아그라까지 220km는 기차를 탔다. 나머지 구간은 모두 전세 버스 편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육로와 철도로 이동한 거리를 합산하면 모두 2.200여km에 달한다. 그러니깐 우리나라를 거의 두 바퀴 돈 셈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연장이 341km, 광주에서 부산까지 300km, 부산에서 포항까지 115km, 포항에서 강릉까지 251km, 강릉에서 서울까지 225km로 한 바퀴의 총연장이 1.230km 정도다. 우리의 도로사정으로 보면 시간당 70km로 달릴 경우 18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워낙 나쁘고, 버스 기관차가 낡아 2.200여km를 도는 데는 세 배가량인 50여 시간이 걸렸다.
원래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까지는 인도 국내항공편을 이용하도록 계약이 돼있었다. 출발 하루 전 갑자기 “국내선 예약이 취소됐습니다.”면서 환불을 받았다. 그래서 열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고된 일정을 보내야했다.
그러니 우리가 가보고 온 곳은 인도의 북부 내륙지방의 일부뿐이다. 하기야 인도의 한 주 면적이 한반도 전체보다 넓은 곳이 많으니깐. 제일 면적이 넓은 라자스탄 주는 34만㎢로 한반도의 1.5배에 이른다. 인구도 5천 6백만 명으로 남북한의 인구와 거의 맞먹는다. 또 인도에서 다섯 번째 큰 면적인 우타르프라데시 주 역시 면적이 한반도보다 더 큰 24만㎢이며, 인구는 무려 3배 가까운 1억 6천 7백만 명이다.
캘커타(Kolkata)가 위치한 동남쪽의 벵골 만(Bay of Bengal)지역이나 남쪽 끝 아래인 스리랑카(Srilanka)가 있는 인도양, 그리고 뭄바이(Mumbai)가 있는 서쪽의 아라비안 해(Arbian Sea), 동쪽인 방글라데시(Bangladesh) 인근의 아삼(Assam) 주 등지엔 가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인더스문명 발상지 못가 아쉬움 커
더욱이 아쉬운 점은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인 인더스문명이 열린 인더스 강(Indus R.) 유역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위치해 있기에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인더스문명, 두 문명의 발상지인 중동지역은 지금은 주로 사막지대로 변해버렸다. 이들 문명이 발달할 당시인 6.000 ~ 7.000년 전엔 그곳의 기후가 온화했고, 큰 강을 끼고 있어 기름진 토지를 가진 지역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아직도 팽팽한 긴장감이 맴돈다.
우린 델리 행 아시아나항공 OZ767편으로 11월 10일 오후 7시 30분 인천국제공항을 떠났다. ‘하나투어’의 인솔자는 최지연 씨. 외모엔 차분하고 꼼꼼함이 배어난 말쑥한 여성이다. 출국 전부터 전화로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을 해줬다. 그래서 신뢰가 더 갔다.
델리 인디라 간디 공항에 도착한 현지시간은 새벽 0시 20분이다. 비행시간은 7시간 40분. 입국심사대 앞에 이르렀다. 내 앞에 선 홍 사장에게 출입국관리 직원이 뭐라고 지적하면서 입국을 보류시켰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송정화씨 역시 마찬가지고. 우린 비행기에서 최지연씨에게 받은 출입국신고서를 그대로 제출했던 것이다. 그 신고서가 인도 ‘내국인용’ 용지였다. 그래서 셋은 뒤편에 있는 출입국신고서 작성 대를 찾아가 ‘외국인용’ 용지에다 다시 써 입국심사를 끝냈다.
다른 일행이 나온 출입국 게이트에선 트집을 잡지 않아 무사히 통과해 벌써 짐을 찾아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홍사장과 내 가방은 이미 나와 있었지만 송정화씨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화물을 내리는 벨트는 돌아갔다. 송정화씨는 인천공항에 늦게 도착해 짐을 붙였다. 그러면 반대로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조금은 불안했다. 돌아가던 벨트가 멈출 즈음 그녀의 큰 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올드델리 샤자하나바드 찬도니 쵸크 거리로 가는 도로의 한 장면. 오토릭샤, 릭샤, 행인들이 뒤엉킨 모습.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지켜져 사고없이 나들이가 이뤄졌다.)
공항에서 현지가이드와 만나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젊은 인도 청년이다. 이름은 ‘라올’이라고 했다. 공항 안은 침침했다. 전기 불 밝기가 영 시원찮았다. 첫 인상이 밝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 시간에도 공항 안은 인파들로 와글와글 붐볐다. 환영 나온 인파들을 헤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호텔이나 오토릭샤를 소개해주는 장사꾼들이 가방을 당기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그룹별로 모여 얘기를 나누는 팀들이 엄청 많았다.
첫 아침, 소란스러움으로 다가와
우린 공항을 빠져나와 어딘지를 분간하기 힘든 컴컴한 곳에서 버스를 타려고 한참을 기다렸다. 20여분이 지나 버스가 왔다. 호텔까지는 20여분이 걸렸다. 나는 모기에 유난히 약하다. 윗도리를 벗었고, 양말도 신지 않았다. 발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바로 모기가 피를 빤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양말을 신고, 윗도리도 다시 걸쳤다.
호텔에 도착해 방 배정을 받고 여장을 푼 시간은 새벽 2시가 가까웠다. 화장실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수도꼭지가 한쪽 벽 30cm정도의 높이에 붙어있고, 그 아래엔 1리터 정도의 물통이 놓여있다. 저 물통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궁금했다. 세면대 위엔 입을 씻어낼 깨끗한 물 컵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룸메이트 홍 사장에게 물어보려했으나 너무 피곤해 사워만 하고 그대로 의문을 가진 채 잠자리에 들었다. 뒤에 알고 보니 대변보고 뒤를 닦은 손을 씻어내는 물통이었다.
(릭샤와 행인이 뒤엉켜 도로가 막혔다. 누구하나 큰 짜증 내지 않고, 불평없이 기다린다. 릭샤왈라들의 표정도 여느 행인들과 다름이 없다. 두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포즈를 취해줬다.)
인도에서의 첫 아침을 맞았다. 오전 7시.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니 이미 소란했다. 인파와 자동차, 그리고 오토바이 릭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Fortune Global호텔의 아침뷔페는 좋았다. 싱싱한 과일이 그득했고, 야채도 종류별로 많았다. 다른 나라 호텔의 뷔페와 별다름이 없다. 더운 나라이니깐 배를 채워야 일정을 소화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이 먹었다.
델리는 원래 힌두교의 본마당이다. 기원전 1.500여년부터 이란고원지역에서 생활하던 북방의 유목민 아리안(Aryan)족이 인더스 강 유역과 갠지스 강 유역으로 거주권을 확대하면서 외침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힌두교는 밀려나고 그 자리에 슬그머니 이슬람교가 자리 잡아 안방을 차지하면서 인도역사의 주축을 형성해버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델리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봐왔다. 그래서 인도역사의 산증인이요, 인도의 다양성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인도문화의 중심지이다.
델리에 일곱 군데 신도시 만들어
이 도시의 넓은 공간 위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고, 또 다시 파괴하고 건설하고를 이어왔다. 면적은 1.483㎢로 서울특별시 605㎢의 두 배를 넘는다. 갠지스 강의 지류인 야무나 강의 서쪽 기슭에 자리 잡았다.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룬 도시다. 침략자들이 풍요로운 인도대평원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 예부터 정치적인 냄새가 흠뻑 풍긴다. 구시가지와 신도시 여기저기엔 다양한 인도 건축양식의 모스크 ․ 궁성 ․ 사원 등 유물이 옛 영화를 대변해주며,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자마 마스지드의 뒷 모습.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 이렇게 나중에 뒤편에서만 찍었다. 뒷 모습이지만 엄청 거대한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거창한 돔 지붕은 비둘기 놀이터인 모양이다.)
중세 무슬림제국들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도시를 세웠다. 델리에는 이런 새로운 도시 일곱 군데가 있어 옛 영화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1.060년 킬라 라이 피토라 궁성이 그 시초다. 그 뒤 투글라카바드, 자한파나흐, 페로즈 샤흐, 코틀라, 푸라나 킬라, 샤자하나바드 등이 차례로 건설됐다. 19세기 중엽부터 인도를 지배한 영국이 캘커타로 수도를 옮겼다가 100여년 뒤에 다시 수도를 델리로 옮겨 만든 신도시가 바로 뉴델리다.
이 도시는 기원 3.000년 전 ‘마하바라타’ 대서사시 신들과 영웅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묘사된 바로 그 곳이다. 무굴제국은 이곳에서 성장해 인도를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 3대 황제 M.악바르(Akbar: 재위 1.556 ~ 1.605)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겼다. 그의 손자 5대 황제 샤자한(Shahjahan : 재위 1.628 ~ 1.657)이 1.638년 수도를 아그라에서 다시 델리로 옮겨와 일곱 번째 도시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해 지금의 올드델리 토대를 닦았다.
샤자한 대제는 환도한 그 이듬해 1.639년부터 길이 900m, 너비 550m에 달하는 붉은 성이라고 불리는 랄 킬라(Red Fort) 왕성을 착공했고, 그 왕성이 완공되기 전인 1.644년부터 자마 마스지드(Jami Masjid)의 공사를 또 시작했다. 인도 최대의 이슬람 사원인 자마 마스지드는 6년간의 공사로 1.650년 완공됐다. 랄 킬라 왕성은 9년의 공사가 이어진 끝에 1.648년에 마무리됐고.
올드델리 중심 샤자하나바드 찾아
일행이 관광에 나선 시간은 오전 9시. 호텔은 공항근처에 있었다. 올드델리 샤자하나바드로 이동했다. 샤자한 대제가 건설한 샤자하나바드는 동서로 뻗은 큰 거리 즉 찬도니 초크와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이어진 좁은 골목길, 랄 킬라, 자마 마스지드가 자리한 지역을 말한다. 인도에서 가장 큰 사원인 이슬람 자마 마스지드 앞에 버스가 닿았다. 평원인 델리에서 이 사원만은 조그마한 언덕에 자리 잡았다. 2.000명의 이슬람교도들이 한꺼번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다. 공사금액은 당시 돈으로 1.000만 루피가 들었단다. 샤자한 대제 최후의 걸작품이다.
동 남 북쪽에 각각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라올’이 사진촬영비가 100루피라는 바람에 난 카메라를 버스에 두고 들어갔다. 그땐 인도 화폐 루피에 대한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회가 됐다. 폭 60m, 길이 36m의 거대한 모스크와 흰 대리석 돔, 높은 첨탑의 위용은 대단했다. 모스크는 붉은 사암으로 지었다. 모스크 주변 좁은 골목에는 온갖 상점들이 들어서서 북적댔다.
(자마 마스지드의 뒷골목. 이곳엔 은세공점 등 결혼예물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전기와 전화선이 외부로 노출돼있어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여길 나와 일행은 붉은 성 랄 킬라(Red Fort)로 갔다. 릭샤(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세 발 자전거로 만든 인력거)를 이용했다. 찬도니 초크거리를 통해 정문 라호르 앞에 내렸다. 이 성은 붉은색 사암의 높은 큰 성벽에 둘러싸여 있어 ‘Red Fort’ 또는 ‘델리 성’이라고도 불린다. 성안에는 여러 개의 궁전이 있다. 그 중 맨 안쪽의 보석을 박은 벽이나 흰 대리석 기둥이 서 있는 디와니이하스트 궁전은 너무 아름다웠다. 황제가 알라신에게 기도하기 전 목욕재계하는 대리석 목욕탕과 예배소 등이 있는 모티 마스지드가 퍽 인상적이었다.
돌아 나오면서 본 여름궁전 또한 특이했다. 이 궁전은 무굴제국 특유의 정원양식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궁전은 물을 가두어둔 풀 위에 세워져 더위를 식힐 수 있도록 했다. 그 물은 디와니이하스트 궁전과 모티 마스지드 등으로 물길이 연결돼 흘러가도록 만들어졌다. 여러 채의 궁전과 통로를 뺀 나머지 공간은 푸른 잔디와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을 꾸몄다.
추기 : 오늘(9일) 오후 인근 용암산에 올랐다. 봄기운이 가득했다. 산정상 부근에서 핀 할미꽃 한 포기를 봤다. 또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옻골'이란 경주최씨 집성촌에선 활짝 핀 개나리, 산수유, 매실꽃이 반겼다. 봄기운을 느꼈으면 하고 사진 올린다.
(할미꽃 한 포기가 마른 길섶에 피었다. 이제 겨우 꽃입을 열었다. 마른 풀 속에 파묻혀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털이 보슬보슬 나있다.)
(산 정상에서 겨우 내 모진 북서풍을 바로 받은 생강나무도 어느 틈에 이렇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며칠 지나면 이 부근을 노랑으로 물들일 것이다. 또 향내가 산야를 뒤흔
들어 놓겠지?)
(무에 그렇게 바쁜지 진달래도 꽃잎을 열고 말았다. 물론 양지바른 곳에 자란 나무지만 봄기운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곧 진달래가 산을 분홍색으로
물들일 것이다. 봄은 이렇게 가까히 다가왔다.)
(재실 후원에 심겨진 산수유가 노랑게 꽃을 피웠다. 소나무도 물이 올랐는지 한층 더 푸른 감이 든다.)
(담벼락을 따라 커 올라간 개나리가 샛노랗게 피었다. 어느 사이 벌이 날아와 꿀을 따고있다. 봄기운은 이렇게 산야를 뒤덮고 있다.)
(매실나무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오늘 필명 '게으른구름(윤금숙)' 님 방에서 활짝 핀 매화를 보긴 했지만 그 꽃은 가지를 꺾어와 집에서 피운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