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1927년 정묘생, 올해 여든이다. 평안남도 태생으로, 일제 치하에서 살길을 찾아 남으로 내려오신 외조부모님의 4남매 중 장녀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 18세 어린 나이에 19세 아버지와 혼인하셨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버지끼리 친구였기에 사돈 맺자 하여 이루어진 혼인이라 한다. 어머니는 타고난 미모에다 성격이 깔끔하고 직선적이고 단순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부형 수업참관으로 교실 뒤쪽에 엄마들이 죽 서 계실 때 나는 우리 엄마가 제일 예뻐서 참 자랑스러웠다. 그래, 어머니보다는 엄마라는 호칭이 더 정겹고 자연스러워 지금부터 엄마라고 하겠다.
우리 동네분이 할머니께 그랬단다. "할머니 손녀딸들은 인물이 며느리만 못해요." 정곡을 찔렀다. 맏이인 나는 엄마와 시장엘 자주 다녔다. 시장 아주머니가 "시누인 가베요" 엄마와 별로 닮지 않은 나를 손아래 시누이로 종종 오해했는데, 엄마가 젊고 예뻤기 때문이다.
솜씨 있고 부지런한 엄마는 털실로 예쁜 무늬를 넣어 우리들의 옷을 떠 입혔고, 천으로도 옷을 잘 만들어 한복도 맵시 있게 지으셨다. 설날과 추석엔 내게 예쁜 한복을 지어 주셨다. 중학교 교복까지 엄마가 만들어 주셨다.
엄마는 20대 중반쯤에 양재학원엘 다니셨다. 어린 나와 동생을 할머니께 맡기고 열심히 다녀 졸업까지 했는데, 양장점을 낼 용기가 부족했던 걸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내가 뜨개질에 취미와 소질이 있는 건 엄마의 솜씨 대물림이다. 설거지를 돕는 아이까지 열 식구나 되는 대가족의 살림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윤기나게, 똑 부러지는 엄마의 성격만큼이나 잘 해내셨다.
그 바쁜 가운데에도 요리학원을 다니며 맛은 물론, 예뻐서 먹기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음식을 잘 만들어내셨다. 결벽증을 의심할 만큼, 마루도 닦고 또 닦고, 빨래도 헹구고 또 헹구고. 그러나 난 이렇게 안 하고 산다.
엄마는 국민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지만, 매일 신문을 구독하고, 늘 학구열에 목말라 하셨다. 공부도 뛰어나게 잘했다는데, 중학교 진학이 좌절되어 그 실망과 허탈감이 한이 되어 우리에게 여자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그런 엄마의 교육열정은 교사였던 아버지를 훨씬 능가했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는 남산동 언덕배기에 위치한 복명 초등학교에 다녔다. 규모도 작고 일류 중학교 진학률도 저조한 학교였다. 남산동에서 봉산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엄마는 나를 대구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도하셨다. 그러나 그 당시는 다니는 학교에서 허락을 안 하면 전학이 불가능 했다.
근처에 좋은 학교를 두고 먼 곳에 다니는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 엄마는 나를 큰고모님 댁이 있는 금호의 금호초등학교에 전학시켰다. 거기서 최소한의 수업일수만 채우고, 나는 원하던 대구 초등학교에 전학 올 수 있었다. 물론 편법이긴 했지만 불합리한 교육법에 대한 엄마의 한판승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동생도 많고 우리 집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니 효성여고 장학생 모집에 원서를 내라."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뚜렷한 목표도 야망도 없고 그저 그런 집안의 맏이라는 책임감에 난 아버지께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엄마가 강하게 반대하셨다. "내가 어떻게라도 공부 시킬 테니 경북여고에 원서 내라." 사실 아버지가 교육공무원이기에 기성회비는 면제고 수업료만 납부하면 되었다. 아버지를 따랐더라면 어쩔 뻔했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엄마의 지원 아래 나는 명문 경북여자고등학교에서 훌륭한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과 학창시절 3년을 보냈다. 엄마를 다시 보고 싶어지는 고마움이다.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365일 술에 취했고 통행금지가 다 되어서야 귀가하셨다. 월급이 엄마 손에 다 들어갈 수가 없는 건 불문가지(不問可知). 설상가상으로 동료 교사의 빚보증을 쓴 아버지가 고스란히 그 빚을 떠안게 되었다. 그 결과 봉산동 우리 집은 너무나 허망하게 빚으로 넘어갔고 대봉동에 낡고 작고 허름한 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현실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우리 집은, 대지 90평에 건축자재 하나에서부터 할아버지께서 손수 고르고 직접 감독하시며 혼신을 기울여 튼튼하게 지으신 우리에겐 작품 같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집이다. 우리가 제법 클 때까지 할아버지는 경제적인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귀하게만 자란 외아들이라 책임감이 없는 아버지는 엄마에게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 때 태어난 엄마의 근검절약은 자식들에게 산교육이 되었다.
연이어 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엄마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무리 절약해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교육비와 생활비를 위해 엄마는 계 조직을 하고, 바깥활동을 시작하셨다. 혼신의 힘을 쏟아도 전업주부가 얼마나 벌겠는가. 의과대학에 진학한 동생의 학비며 아래 동생들의 학비가 만만찮았을 때 엄마는 보따리를 들고 아는 집을 전전하는 장사치의 삶도 주저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우리들을 최고학부까지 보내겠다는 굳은 의지로 자존심을 버리셨던 것이다.
의과대학에 다니는 동생이 교재로 인골(人骨)이 필요할 때 엄마는 먼 곳까지 가서 의대생이 있는 아는 집에서 빌려온 일도 있다. 엄마의 깊은 사랑과 크나큰 희생으로 오늘 우리 형제들은 잘 살고 있다.
나도 내 자식에게 엄마만큼 할 수 있을까? 고개를 흔든다. 뜨개질 솜씨만 물려받았지 엄마의 정신력을 나는 못 물려받은 것 같다. 늦게 배운 게이트볼로 전국 대표 선수는 물론 일본 원정까지 다녀오신 엄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활력 있게 살아오신 우리 엄마! 이제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며 편하게 여생을 보내십시오. 그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엄마!
2006.3.7
첫댓글 2006년에 쓰신 글이군요.
대단하신 어머니시네요. 그당시에 좋은학교 보낼려고 그렇게 노력하시다니...
역시 어머니의 힘은 위대합니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지요.
가장 어려운 시대를 힘겹게 살아오신 우리 엄마, 그래도 씩씩하게 자신의 관리를 잘 하셨지요.
게이트볼 선수로 활동하셨고, 계명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열심히 공부도 하셨지요.
2년 전 세상을 떠나셨지만, 엄마의 은혜는 잊지 못 합니다.
다음 생에는 모녀인연 바꿔 태어나서 엄마의 은공 갚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들을 키우신 훌륭하신 어머님들
덕분에 언니나 저나 이렇게 살고 있는거
아닐까요? 언니어머니께서 요즘 세상에
태어나셨으면 많은 여성들을 리드하는
지도자가 되셨을것 같아요..
삼가 명복을 빕니다.
가장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힘들게 사시다 가셨어요.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전문직에 종사하고 활동가로 활약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우리들을 키우신 어머님은 위대하고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녀를 반듯하게 키웠으니까요.
엄마가 보고 싶네요. 많이.......
대단하신 어른이셨군요
그렇습니다.
온몸을 던져 자녀교육에 몸 바치신 엄마의 은혜로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어요.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그 은혜를 다 갚지 못 하고 자식에게 베풀고 있네요.
옥덕 아우 자매들 엄마 사랑 .효성 지극함응 생전에 강인하시고 지혜로우신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에서
더욱 투철한것 같아요. 최선을 다한 효심 지켜봐 알고 있지만 어머니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 오는 건
망각도 없답니다,누구라도....
엄마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지 못 한 것이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마지막 일년여동안 간간이 엄마곁을 지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엄마의 크나큰 희생으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주셔 그 은혜를 잊으면 안됩니다.
아직도 엄마가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걸 실감하지 못 하는 때가 있습니다.
선배님 글에 한참 머물다 갑니다.
그 시절 어머니들의 훌륭하신 삶의 태도는
꼭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 ..
엄마의 헌신적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겠지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힘들게 사시다 가신 우리 엄마.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면 엄마가 더 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