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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마가복음 7:31-8:26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세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첫째, 귀 먹은 사람을 치료하십니다. 둘째, 7병 2어로 4천명을 먹이십니다. 셋째, 맹인을 안수하여 치료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적보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다고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탄식하셨을까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육신은 멀쩡했지만 영적으로 귀먹고 눈먼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너무도 안타까우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셨는가를 잘 배우심으로 어린 성도들의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도록 에바다하고 중보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육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7:31-37)
7: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을 지나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었고 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병자들을 주로 말씀만으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34절을 보면 이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이 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워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 이는 “Be opened” “열리라”는 뜻입니다. “막힌 귀야! 열릴지어다” 이는 병든 자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의 표현이요,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사람은 본래 양쪽 귀가 잘 들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귀가 잘 들려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가 있고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육의 귀가 잘 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없습니다. 들어야 믿음도 생기는데 못들으니 믿음도 생길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슬픔과 아픔을 탄식하시고 양쪽 귀에 손을 넣고, 입에 침을 발라 고쳐 주셨습니다. “에바다!” “열려라”
그러자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5절을 보면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그의 막힌 귀가 열렸습니다. 맺힌 혀가 풀렸습니다.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분명하게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와 들린다. 들려” “와 말이 제대로 나와” 이 일을 행하신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입니다. 이사야 35:5,6절에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능력을 갖고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가는귀가 먹은 귀머거리들입니다. 잘 못알아 듣습니다. 말씀이 달게 들리지 않습니다. 영적인 귀가 잘 열리지 않은 성도들은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입도 혀가 어눌해서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은혜의 말씀을 들어도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아멘도 하지 안하게 되고 찬송도 잘 따라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들을 위해 탄식하며 중보기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에바다” “열리라” 김00 에바다” “전00 에바다” 우리가 새벽마다 에바다 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반드시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이들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귀도 열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잘 안다가와서 답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절히 기도하면 에바다 귀가 열려서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인격적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귀와 입이 열리면서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탄식하며 기도하면 반드시 예례미야 23:29절 말씀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불방망이처럼 역사하여 바위같은 심령들의 귀가 에바다 될 줄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영적 귀머거리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8:1-21)
8:1절을 보면.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9절을 보면 이들의 숫자가 4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나 지났지만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기진하여 쓰러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멀리 이방 지역에서 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6장에 오병이어 사건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즉시 떠올리며 믿음으로 행동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묻기도 전에 그들은 떡을 들고 나와야 했습니다. “예수님, 여기 떡이 있습니다. 이 떡으로 다 먹게 해 주세요” 그랬더라면 예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축사하셔서 무리들을 먹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4절을 보면.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 때와 같이 불신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믿음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5절을 보면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물어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일곱이로소이다”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셔서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들고 온 작은 생선 두어 마리도 축사하사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때 4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기적을 행하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메시야구나 하고 믿어야 했습니다. 누구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제자들은 열을 가르쳐도 하나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실망치 않으시고 다시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교육학에서 반복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사들에 의하면 “5권의 책들을 읽는 것 보다 1권의 책을 5번 읽은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가 205장을 보면 “나 항상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했습니다. “또 들려주시오” 사람의 말은 아무리 좋은 말도 몇 번 들으면 싫증납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은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야 어느 순간 깨달아지게 됩니다.
11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의문을 제기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방금 전에도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4천명을 먹이는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전에도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또 기적을 보여달라고 할까요? 이는 예수님을 믿고자 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꼬투리 잡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여기서 누룩은 악한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누룩은 작지만 그것이 들어가면 금방 퍼져서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5:6에 보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악한 영향력은 금방 퍼져서 전체를 병들이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위선과 교만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음란과 권모술수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이지만 내면이 썩고 부패했습니다. 이들의 악한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랐을 때는 순수했습니다. 사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무리들이 모여들자 그들도 유명세를 얻다보니 허세가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교만, 과시, 탐심의 누룩이 들어와서 부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사랑, 세상사랑, 세상가치관의 누룩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누룩이 점점 퍼져서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을 멀리하고 영적인 가치관으로 힘써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룩’하시자 제자들은 ‘아 -- 떡’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16절에 보면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아! 양식이 없네 오늘은 뭐먹지?”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이 너무 답답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알듣는 영적 귀머거리였습니다. 이에 뭐라고 하십니까? 17,18절을 보면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인 눈과 귀를 없음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둔하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그동안 예수님을 배우고 따라 다녔으면 이제는 알아듣고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못알아 듣자 예수님께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교회를 다닌지 꽤 되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세상사람들처럼 허망한 것을 따라 산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왜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자기 생각에 너무 잡혀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꽉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4절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신, 즉 사탄이 마음을 소경으로 만들어서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귀가 없어 듣지 못하다보니 영적인 입이 없어서 영의 말을 못합니다.
사도바울도 교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의 피를 흘려가며 복음을 전했지만 전혀 못알아 들었습니다. 스데반이 창세기의 아브라함부터 모세, 다윗, 그리고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명쾌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하자 스데반이 말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목이 곧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회개하지않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던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깨닫게 됩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홀연히 큰 빛으로 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임하시자 완악한 그의 마음이 깨어나게 됩니다.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 예수님이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골2:3).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닫고, 자기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여러분은 과거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십니까?. 그렇지않다면 여러분은 아직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9,20절을 보시면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지하고 교만하더라도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을 상기하도록 도우셨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다시 물으셨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정말 깨닫지 못하는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옆에서 보고 삼 년 동안 같이 있어도 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누구나 소망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무지한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치 않고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고 마침내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렸습니다. 그들은 그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는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제자들을 오랫동안 인내하며 도우셨다면 우리도 소망 가운데 끝까지 도와주시줄 믿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단계적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22-26)
22-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한 맹인을 치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를 한꺼번에 치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계적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오늘따라 예수님은 침을 눈에다 뱉어 안수하시는 것이 좀 지저분해보이긴 했지만.. 이 맹인은 처음에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자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눈도 한꺼번에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단계적으로 열립니다.
유명한 토익강사 김대균 선생에 의하면 토익에서 리스닝이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영어가 잘 안 들립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들으면 어느 순간에 ‘뻥’ 뚫리면서 몇 퍼센트가 더 들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꾸준히 들으면 몇 개월이 지난 후 또 ‘뻥’소리가 나면서 리스닝이 업그레이드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게 되면 영어가 들리고 영어로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한 순간에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잘 안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말씀붙들고 기도하다보면 결국 점점 깨닫게 됩니다.
우리역시 예수님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게끔 에바다 하며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도 시편 119:18절 말씀처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주님을 알게 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엡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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