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의 수난사] 정병경.
ㅡ전성시대ㅡ
청명한 가을에 경희궁慶熙宮 뜰을 걸으며 사색한다. 서대문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에 휴식 겸 산책하는 모습을 본다. 강북삼성병원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어 몸과 마음이 아픈 환우와의 동병상련 장소다.
한양도성 서쪽 궁궐 우백호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이라고도 부른다. 사적 제 271호로 지정했다.
1617년(광해군9) 궁궐을 짓기 시작하여 인조 원년(1624)에 완공한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136년 만인 1760년(영조36) 경희궁으로 바뀐다.
원래 인조 생부 정원군(원종 추존)의 잠저潛邸였다. 왕기가 서렸다하여 광해군(15대)이 빼앗아 궁궐을 짓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 유배지 초가에서 생을 마감한다.
남양주 진건읍 송능리 산비탈에 부인 유씨와 함께 이장했다. 권력의 패배자가 누워있는 묘지를 보기 위해 지난해에 다녀왔다(사적제363호).공빈 김씨는 맞은편 능선에서 아들 광해군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 시대를 누린 왕의 묘역을 보는 순간 가슴이 멍했다.
ㅡ수난시대ㅡ
정문正門인 흥화문興化門을 비롯해 전각 100여 개로 면모를 갖춘 궁궐은 세월이 흐를수록 사정이 달라진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다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궁궐 대부분이 헐리게 된다.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을 철거했다고도 전한다. 흥선대원군 시절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경복궁영건일기' 기록에 대해 진위가 궁금하다.
궁궐 터는 1946년부터 서울중ㆍ고등학교부지로 사용하게 된다. 1980년도에 서초동으로 이전 후 표석을 남겼다. 정전正殿인 숭정전은 동국대로 이건되어 부처님을 모신 정각원正覺院으로 쓰이고 있다. 경희궁 숭정전에 걸렸던《崇政殿》 현판이 부처님 맞은편 벽에 걸려있다.
《正覺院》현판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내게 서예를 지도한 선생의 스승 형제다.
정문인 흥화문은 1832년 장충단공원 동쪽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춘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된다. 박문사는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이름에서 따왔다.
정각원의 목재는 관리를 잘 해주어 비교적 양호하다. 신라호텔 영빈관 입구 정문의 서까래도 여전히 세월을 잘 이겨내고 있다. 눈에만 담고 돌아서기가 아쉽다.
개인에게 불하한 경희궁궐에 쓰인 목재들이 어느곳에서 잘 쓰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고종이 세운 활터 황학정黃鶴亭은 1922년 사직단 뒤 등과정登科亭터로 이건된다. 사방으로 흩어진 경희궁 건축물이 원래 모습으로 제자리에 돌아오기엔 희망뿐이다. 미래를 생각지 못한 선대의 과오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숭정전과 자정전, 태령전이 복원되면서 겨우 궁궐의 모습을 찾게 된다. 숭정전을 비롯한 융복전ㆍ집경당 등 여러 부속 건물이 1829년(순조29) 화재로 인해 소실된 기록이 있다. 화재와 강제 철거로 인해 수난의 경희궁이다. 지난 13일에 갔을 때 태령전 뒤편 전각은 현재 보수중이어서 당분간 관람이 어렵다.
경희궁은 입장료 없이 무료개방이다. 단체로 온 학생들은 관람보다 공원에서 학습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5대 궁궐의 하나인 경희궁은 언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지 아쉬움이 남는다. 일부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서울시교육청',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등을 지으면서 규모와 면적이 줄게 된다.
문화재로서 면모를 갖추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날을 기다린다. 문화재청 관리가 아닌 서울시와 종로구에서 관리한다니 소홀함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다.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려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인조 원년부터 철종 때까지 10명의 왕 가족이 생활하던 궁궐이다.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고 승하한 곳이다. 경종과 정조가 즉위했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혜경궁 홍씨도 생활한 경희궁이다. 복원이 시급한 경희궁에서 새삼 조선시대 말기의 권력 남용을 실감한다.
2022.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