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63. 만두하이는 여성 칭기스칸인가? ①
▶대작 영화 ‘칭기스칸’
[사진 = 영화 ‘칭기스칸’]
몽골인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작(大作)은 역시 ‘칭기스칸’이다.
지난 1992년 몽골 건국 7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몽골인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몽골인들의 동참 속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영화에 20만 명의 몽골인과 10만 필의 말이 출연했다.
당시 몽골의 인구가 2백만 조금 넘었으니 그렇게 말할 만하다.
백진 바르지남이라는 감독이 일본으로부터 필름과 촬영, 녹음기술의 도움의 받아 만든 4시간짜리 이 영화는
2시간 정도로 줄여서 한국에서 상영된 적도 있다.
[사진 = 영화 ‘칭기스칸’]
몇 편의 칭기스칸 관련 영화들이 몽골 밖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역시 몽골인들이 직접 만든 영화와는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영광과 고난의 역사가 몸에 배어 있고 자신들의 삶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는 몽골인들이
직접 만든 영화가 더 실감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88년에 선보인 영화 ‘만두하이’
[사진 = 영화 '만두하이']
몽골인들에게 또 하나의 자랑할 만한 역사 영화를 꼽으라면 ‘칭기스칸’ 다음으로 ‘만두하이’를 꼽는다.
몽골 역사에 등장하는 여걸 만두하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이 영화는 몽골에서 첫손 꼽히는 역사학자 나착도르지가 쓴 소설 ‘만두하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몽골과 러시아 일본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러닝 타임이 무려 6시간에 이르는 대작이다.
이 영화 역시 나중에 칭기스칸을 만든 백진 바르지남이 감독을 맡아 만들었다.
주인공 만두하이 역은 당시 42살의 남시라이 숍드라는 여배우가 맡았다.
아마 영화 속 만두하이가 42살의 나이로 17살의 다얀칸과 결혼한 것을 염두에 둔 캐스팅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영화가 몽골인에게 선보인 것은 지난 1988년으로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 경제체제로 옮겨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사진 = 영화 '만두하이']
당시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있었지만 소련에서 이는 개혁 개방 바람 덕분에 이 영화제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상연은 그 해 몽골에서 가장 주요한 뉴스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몽골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후 가장 먼저 한국과 수교를 한다.
이 작업에 공이 많았던 최서면(崔書勉)박사가 수교 기념행사로 이 영화를 들여와 한국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199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는 만두하이 역을 맡았던 몽골 여배우 남시라이 숍드가 한국을 방문해
영화 만두하이에 대해 자랑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공산체제 속에 살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몽골인들에게 이 영화는 상당한 자긍심을 안겨줬을 것이다.
몽골인들이 두 대작 영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곧 역사 속의 두 인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얘기다.
▶권력다툼 속에 사라진 남편․아버지
[사진 = 만두하이]
이제 몽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걸 만두하이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그녀는 오이라트가 서쪽으로 물러간 뒤 동몽골이 권력다툼의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 역사에 등장한다.
그녀의 등장으로 혼란에 빠졌던 동몽골은 통합의 가닥을 잡기 시작하고 결국 무너진 칭기스칸 가문도 부활하게 된다.
[사진 = 만둘 칸]
만두하이는 고비사막 남쪽의 지금은 중국 땅 하미(哈密) 오아시스 근처서 태어났다.
만두하이 아버지는 당시 오이라트의 에센의 보르지긴(칭기스칸 가문의 姓) 몰살정책에 반기를 들고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만두하이는 1464년, 16살의 나이로 25살 연상인 동몽골의 칸 만둘(Manduul)과 결혼했다.
만두하이나 남편 만둘이나 그 이름에는 상승(上昇), 즉 위로 올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타이슨칸이 에센에게 살해된 데 이어 서로 죽이고 죽는 권력다툼이 이어진다.
그 와중에 타이스칸의 아들도 칭기스칸의 이복 동생이었던 벨테구이 가문의 자손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후 한동안 칸이 없는 시대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타이슨칸의 이복동생인 만둘이 칸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만굴칸은 타이슨칸의 손자인 바얀 뭉흐, 볼후 진왕(晉王)과 전쟁을 벌이다 1467년 사망한다.
전쟁에서 이긴 타이슨칸의 손자인 바얀 뭉흐, 볼후 진왕(晉王)도 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피살된다.
권력다툼 속에 숨진 두 명은 바로 만두하이의 남편과 다얀칸의 아버지였다.
▶"황금씨족의 중흥만이 몽골 부흥 가능"
[사진 = 몽골의 소년]
죽은 만둘칸은 여러 명의 후비를 남겨 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젊은 후비가 바로 31살의 만두하이였다.
볼후 진왕은 죽으면서 6살짜리 아들을 남겨 놓았는데 그가 바트 뭉흐다.
그 많았던 쿠빌라이의 자손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는 점에서 바트 뭉흐는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귀한 황손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칸위 계승자가 될 만했다.
하지만 바트 뭉흐의 어머니 시케르는 이스마일 타이시에게 납치당해 가면서 바트 뭉흐는 버려졌다.
남편이 죽고 난 뒤 만두하이는 칸이 되고자하는 야심찬 남자들의 표적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몽골 왕비로서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길을 선택했다.
그녀의 그러한 선택에는 원대한 꿈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칭기스칸 황금씨족의 중흥만이 몽골을 부흥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거의 사라지고 없는 칭기스칸의 혈통을 찾아서 그 꿈을 실현시키려 한 것이다.
만두하이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유일한 인물이 바로 남편을 죽인 볼후 진왕의 아들 바트 뭉흐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남자인 우네 볼로드라는 남자의 청혼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사진 = 몽골의 어린이]
그는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칭기스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예로 적통이 아니었다.
오직 황금씨족만이 몽골족의 중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어린 황손 길러 칸으로 추대
그래서 어머니에게서도 버려진 채 여기 저기 떠돌고 있는 바트 뭉흐를 거두어 들였다.
만두하이는 칭기스칸의 유일한 후손이 있는 장소가 밝혀지면 납치되거나 살해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아이를 다른 가정에 입양시켜 신분을 감췄다.
보르지긴 황금씨족의 부활을 위해 원수의 아들이지만 기꺼이 거두어들인 것이다.
[사진 = 부르테 사당(칭기스칸 가묘)]
그리고 바트 뭉흐가 성장하면 그와 결혼해서 황금씨족을 부흥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칭기스칸과 보르테의 사당에 올라가 맹세를 했다.
“온전한 힘을 갖춘 폐하의 왕손이 태어났습니다.
폐하의 왕손이 작다고 숙부의 먼 집안에서 혼인하자는 데 육신의 욕망을 쫓아 혼인하느니 이 몸을 찢어서 죽이겠습니다.
성왕이신 칭기스칸 폐하! 경애하는 왕자가 태어났습니다.
진실한 말로서 영원의 맹세를 올립니다.
운명을 기원하며 빕니다. 힘을 내리소서. 저의 맹세를 받아주소서.
내가 입은 델의 속자락이여 7명의 아들을 낳아라!
내가 입은 델의 겉자락이여 한명의 딸을 낳아라!
보잘 것 없는 왕비인 나에게 7명의 아들을 낳는 운이 허락된다면 그 일곱 명에게 블로드라는 이름을 주어
칭기스칸 혈통의 불화로를 지키리.
폐하의 국토를 지키리."
[사진 = 뮤지컬 ‘칭기스칸’]
볼로드는 강철이라는 강인한 뜻을 가진 말이다.
그녀는 칭기스칸 혈통의 불화로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텡그리와 가자르에게 했다.
하늘 텡그리와 땅 가자르에게 하는 맹세는 몽골인들에 가장 단단하고 굳건한 것이다.
그 맹세에 따라 만두하이는 바트 뭉흐에 대한 동몽골인들의 충성을 이끌어 낸 뒤 그를 정식 칸으로 추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