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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모음! (965)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기독론을 말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신앙상태를 이야기해 드리리다.'
기독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 신가'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고,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독론입니다. 즉,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독론, 예수님에 대한 확인이 곧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그리스도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입니다. 예수님이 그저 위대한 성인인 공자, 석가모니와 같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면 기독교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와 도덕으로 멈춰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서 중보의 삶을 사신 분,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분, 그리고 죽은 후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자녀의 영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현장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믿음의 분별력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의 분별력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과 섭리가 그 안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를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 뿌리신 하나님의 눈물’이라고 말입니다. 이 눈물에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감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픔과 슬픔도 있고, 탄식과 진노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액세서리처럼 생각합니다. 가슴에도 걸고, 귀에도 겁니다. 때로는 손에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십자가는 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가 시행했던 가장 처참한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거나 가까운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 때문에 얼마나 고통 받으셨는지에 대한 흔적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 십자가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들이 아파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그저 안타깝게 여기는 그 마음처럼 아니, 그것과는 상상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 십자가 속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께서 그냥 지켜보셨던 것은 하나님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혜가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천군 천사를 보내 그 일들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다 살라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기다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셨습니다. 바로 그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나님을 향해서 항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들보다 인간들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내가 대신 져야 하는가에 대한 울부짖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의 길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탄식이며 사랑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바울은 지적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지혜자라고 스스로 자랑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권력을 자랑했던 제사장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의 지혜와 권력을 무력화시키셨고 무효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아지심을 통해서 자기 자랑에 빠져있는 사람들, 자기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 자신이 가진 권력을 뽐내는 사람들을 다 끄집어내셨습니다. 있는 자, 스스로 자랑하는 자, 시기 질투하는 자에게 매를 들어 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 속에 숨겨진 비밀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9)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서 질문하십니다. '진정한 지혜자가 있더냐? 이 땅에 권력자가 있더냐? 이 땅에 지성과 이성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자가 있더냐? 만약 그렇다고 하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그를 적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느냐?'
결국 십자가 사건이 인간이 가진 지혜와 지성의 한계를 표현하는 것이고, 인간의 계획이 잘못되어 있음을 선포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바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팡세(Pensees)를 쓴 파스칼(Blaise Pascal)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자. 우리는 모든 것이 아닌 일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우리의 육체가 공간적으로 한계를 지닌 것처럼 우리의 지성도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과학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가 있고, 역사의 신비가 있고, 인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를 신비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파우스트(Faust)에서 생각하는 자의 고뇌와 탄식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더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 석사니, 박사니, 허울 좋은 이름만 들으며 그럭저럭 10년이란 세월을 위로 아래로 이리저리 내 학생들의 코를 끌고 다녔을 뿐. 우리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보니 내 가슴은 거의 타버릴 것만 같다'
이것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괴테의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 한계를 느꼈을 때, 우리는 파우스트처럼 마법과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덮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의 선배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 참된 믿음으로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수모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겪은 그 십자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지옥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 장로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가 '많다'고 대답했답니다. 이어서 '여기 침례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더 많다'고 대답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감리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셀 수 없이 많다'고 대답하였답니다.
자신이 감리교를 창시했는데 감리교인들이 지옥에 많다고 하니까 실망해서 천국으로 갔답니다. 거기서 동일한 질문을 했는데 장로교인, 침례교인, 감리교인 모두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에는 누가 있냐고 묻자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꿈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어떤 교파에 속해도 어떤 종교를 믿어도 영생과 천국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리석어서 스스로 천국 가는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 가는 길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울을 갖고 계시는데 한쪽은 선행의 무게를 재고 다른 한쪽에는 악행의 무게를 재어서 선행의 무게가 무거우면 천국에 가고 악행의 무게가 무거우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구원이란 현세에서 세 가지를 받는 것입니다. 첫째,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둘째, 천국에 들어갈 의를 옷처럼 받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로 지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 지내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현세에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얻는 것입니다. 현세에서 세 가지를 얻으면 내세에서는 무엇을 얻느냐? 내세에는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박동한 선교사는 진흙쿠키를 만들어 먹는다는 아이티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박 선교사는 대학을 졸업한 뒤 이 랜드에 입사하여 재무본부장으로 회사를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운 주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비즈니스(business)와 선교사(missionary)의 합성어인 '비지너리'(businary)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휴가를 얻을 때마다 제 3세계로 단기선교를 나갔고 선교사들의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2006년 7월,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을 내려 놓고 남미 도미니카로 직접 나갔습니다.
그는 편안한 삶을 내려놓고 선교의 최전선에 서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현장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평생 비지너리의 삶을 살아온 박 선교사의 삶의 경험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도미니카의 제2도시 산티아고에서 만성적자로 허덕이는 미션스쿨의 경영을 정상화시켰습니다. 비지너리의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니 도처에 할 일이 넘쳤습니다. 먼저, 도미니카의 인접국인 아이티의 굶주림이 보였습니다. 진흙쿠키를 먹고 있는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 박 선교사는 저 불쌍한 아이들을 아이티의 민족 복음화의 기수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는 대학생시절 가입한 CCC의 '순' 전도 방법으로 아이티 사람들에게 전도했고, 100여명의 청소년을 키웠습니다. 지금 그들이 아이티 전국에 흩어져 선교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이티에 무서운 지진이 일어나 굶주림이 더욱 극심해졌지만 박 선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선교로 아이티는 복음의 새 시대를 꿈꾸며 나가고 있습니다.
박 선교사 같은 분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잘 살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험난한 땅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세상의 스펙을 쌓으려고 힘씁니다만 하늘의 스펙을 쌓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박 선교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가 은퇴할 무렵 늙고 몸이 약하여 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사라졌고 자신의 강의에는 수강 신청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 그의 외로움은 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 대학 공원을 산책하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공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공원지기가 와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온 사람이요?' 공원지기는 문을 닫아야 하는데, 그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를 갈 곳이 없는 노숙자로 알고 갈 곳이 있는지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정신이 든 쇼펜하우어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요.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아는 것은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 뿐이요. 우리는 생명을 뒤로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소이다.'
사명 없이 사는 것은 실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어야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행2:42-47절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전병금목사) 제자대학을 하면서 집사님들께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성경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집사님들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집사님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집사님들은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2장의 말씀을 읽어 주고 제가 또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본받아 참된 공동체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까?' 집사님들은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2장의 말씀을 가지고 제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교회에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집사님들은 교회에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집사님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시렵니까?' '예 그렇습니다.' '집사님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자 한참을 생각한 후에도 '예 그러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 시원하게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기를 원하십니까?' 이 물음에는 집사님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재차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함이 없이 그 말씀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떡을 떼며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라는 말씀에는 담대하고 아멘하시더니,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라는 말씀에는 아멘을 하시지 않으십니까?'
이 때부터 많은 집사님들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만의 대답을 내 놓으셨습니다. 성경은 부분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둥, 지금의 시대에 적용되는 말씀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말씀이 있다는 둥, 지금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둥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제가 또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떡을 떼며 교제하라는 처음의 질문에는 그런 의견을 내지 않으셨고,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아멘하고 절대 순종할 것을 고백하셨기에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토'를 달지 않으셨는데, 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라는 말씀에는 그렇게 많은 '토'를 다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이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지금 서로 책임이 없는 일에만 열중해서 공동체 운운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떡을 떼며 모이기를 힘쓰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내가 조금만 희생하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약간의 책임감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라는 말씀은 행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여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막중한 부담감에서 벗어나고자 그 말씀에 토를 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재산을 팔아 교회에 봉헌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책임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서로 간에 책임이 없는 단체는 공동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인 것에 대한 적극적인 책임이 필요합니다.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라는 말씀을 행2장 말씀에서 빼버리면 공동체가 되기 위한 진정한 길을 막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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