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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레비스트로스인가 ― <총·균·쇠>와 더불어 ―
<총·균·쇠>의 인류문명사적 위치가, 레비스트로스 <신화학>에는 못 미치겠지만,
토플러(A. Toffler)의 <제3의 물결>이나 벨(D. Bell)의 <정보화 사회와 문화의
미래(The Winding Passage)>에 버금 가는 수준이 아날까...
― 소생의 생각 ―
캘리포니아대학(UCLA)은 전통적으로 문화관련 연구로 전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다. 그 대학 지리학과 소
속인 다이아몬드(G. Diamond) 교수가 쓴 <총·균·쇠>는, 그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화지리학적 혹은 인
류지리학(anthropogeography)적 연구서다. 이들 학문의 주 목적은 문화의 지역적 다양성(혹은 그냥 간단히
문화다양성), 즉 인류의 문화가 이렇게 지역적으로 다양하게 된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탐구된 그 근본원인들 중 하나가, 기원 전 5세기 탈레스의 <물, 불, 공기> 이래 뿌리깊은 지리환
경결정론(자연환경결정론)이다. 저자는 <총·균·쇠>를 통해 지리환경결정론을 다시금 확실하게 주장했다.
<총·균·쇠>는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 되어있다. (1) 서구가 비서구에 앞서 총·균·쇠를 가지게 된 근본
원인은 다름아닌 유럽의 지리적(자연적) 환경이라는 것. (2) 총·균·쇠를 가진 유럽문명(특히 서유럽문명)
이 비유럽문명을 식은 죽 먹기로 간단하게 제압하고, 거기 자원과 부를 유럽으로 가져가 지금의 부유한 산업
국가들을 만들었다는 것(저자는 이로 인해 ‘고착화된 국가간 불평등의 폭발이 서방세계 테러’라고 했다).
(2)와 관련된 저자의 한 기록을 보자. 스페인의 피사로 곤잘레스(1471 - 1541)가 168명의 병력으로 8만
대군의 잉카제국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은, 그에 앞서 남미로 건너온 백인들이 퍼뜨린 천연두.홍역.
흑사병.발진티브스.독감 등이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염병으로 죽은 남북 아메리
카의 원주민 수는 콜럼버스 이전 인구의 95%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713년에는 유럽인이 가져온 천연
두에 의해 남아프리카 최대 부족인 산족이 절멸했다.
피사로 곤잘레스가 보병 106명, 기병 62명을 이끌고 잉카제국에 도착해서 황제가 있는 페루의
고원도시 카하마르카로 진군했을 때, 거기에는 아메리카 최대 제국 8만 병력의 방대한 숙영지가
정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튿날 그는 병력을 매복시킨 뒤 황제에게 ‘God’의 이름으로 정중하게
맞이하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정오가 되자, 피사로의 약속을 믿은 아타우알파 황제는 수천 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약속 장소인 광장으로 다가왔다. 뒤에는 수 천 명씩 무리 지은 전사가 대오를 지
어 끝없이 전진해오고 있었다. 황제의 행렬이 광장의 중앙에 이르자, 피사로의 신호에 따라 스페
인 병사들이 뛰쳐나와 무장하지 않은 인디오 전사들을 마음껏 쏘고 베었다. 황제는 넋이 나갔다.
피사로는 넋 나간 그를 간단하게 사로잡아 숙소로 끌고 갔다. 스페인 병사는 도망치는 인디오 병
사를 추격하여 마음껏 살해했다. 단 두 시간 동안에 인디오 전사 7000명 이상을 죽였다. 이 잔인
한 학살 극을 기록으로 남긴 스페인 사람들은 이를 한결같이 전지전능하신 ‘God’의 공으로 돌리
고 있다.
8개월 뒤, 피사로는 스페인을 사고도 남을 만큼 막대한 양의 황금을 받았다. 그리고는 약속을 저
버리고 아타우알파 황제를 죽여버렸다. 이후 피사로는 페루의 수도 리마를 건설하고, 페루를 식
민지로 삼았다. 지금 리마 중앙에는 피사로의 기마동상이 드높이 서있다. (<총·균·쇠>, 93-101쪽)
그 연구서가 갖는 한 가닥의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상기 (1) (2)에 내재된 (물론 저자의 의도와 무관한)이
면적 함의이다: 비유럽문명에 대한 유럽 제국주의문명의 악 짓으로 인해 오늘날 ‘지구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
는’ 비극의 원인은 따지고 들어가면 지리환경 탓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비극은 결국 숙명적이라는 것; 그러
므로 유럽문명의 원죄 ― 유럽문명이 비유럽문명에 가한 교묘·악랄한 제국주의적 악 짓 ― 가 은연중
에 덮어질 수 있다는 것; 설상가상으로, 헤겔 류의 목적론적 역사주의(teleological historicism) 철학이
[서양철학이라고 하면 그냥 껍뻑하는]'무식한 지식인들'에 의해 아직도 힘을 얻고 있는 현실에서 그 비극은 더욱 심
각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
이 대목에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문명관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23세 최연소 나이로 철학교수 자격시험
에 합격한, 소르본대학의 촉망받는 철학도였다. 하지만 대학강단을 박차고 나와 인류학도가 된다. 이유는 사
변思辨적 철학, 특히 당시 절대적이던 헤겔의 변증법과 역사주의 철학을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헤겔철학에 의하면, 현실은 이성이 이성 자신의 본질(자유와 합리)을 변증법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현장이
다. 과연 그런가? 레비스트로스는 열대 파라과이 중부에 있는 카두베오(Caduveo)족, 거기서 숲 속으로 더 들
어 가 있는 보로로(Bororo)족, 또 더 들어 가 남비콰라(Nambikwara)족, 그리고 볼리비아의 국경 가까이 있
는 투피-카와히브(Tupi-Kawahib)족을 답사했다. 그가 답사할 당시 이미 서구문명이 그들을 완전히 덮쳐버
렸다. 그들이 어느 정도 서구문명에 길들자, 서구인은 그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오직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로 전락되어 버렸다.
서구인은 오직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아름다운 열대인의 생활터전을 총·균·쇠로써 파괴해 버렸다.
열대인들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남비콰라족의 경우, 사바네(Sabané) 그룹의 인구는 원래 1천 명이 넘었
다. 그러나 1928년에는 남자 127명과 거기 딸린 여자와 아이가 전부였다. 이듬 해에 인플루엔자가 돌아 폐부
종으로 진전되어 48시간 만에 3백 명이 죽었다. 10년 후, 1938년에는 19명의 남자와 그 식구들이 겨우 생존
해 있었다. 또 다른 큰 그룹은 1927년에 발생한 인플루엔자로 인해 없어져 버리고, 겨우 6명만 생존해 있었
다. 10년 뒤에는 그나마도 3명만 살아 있었다. 한 때는 가장 큰 그룹 중에 하나이던 타룬데(Tarundé) 그룹은
1936년에 고작 남자 12명과 그 식구들이 생존했었고, 3년 후 1939년에는 그 12명의 남자 중에 겨우 4명만
생존하고 있었다 (C. Lévi-Strauss, 1971, Tristes Tropiques, p. 286). 헤겔이 말하는 그 이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유와 합리라는 자신의 목적을 변증법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현장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남비콰라족에 관한 한 기록이다:
원주민 무리는 18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남자는 여덟 명이었다. 이들 중 한 명은 매독
에 걸렸고, 한 명은 허리가 곪아 악취를 풍기고 있으며, 한 명은 발에 상처를 입고 있었고, 한 명은
비늘이 생기는 피부병이 온 몸에 퍼져있었다. 또 한 명은 벙어리에 귀까지 멀어 있었다 ... 남비콰
라 족은 우리에게 퉁명스러웠고, 거칠다 싶을 정도로 무례했다. 내가 훌리오를 보기 위해 그의 캠
프로 찾아가면, 그는 불가에 누워 있다가도 내게 등을 돌렸다 ... 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사무쳐 있
는 증오와 불신 그리고 절망감을 알려면, 그들과 함께 오랫동안 지내볼 필요도 없다. 잠시 동안만
같이 있어 보아도 그들에 대한 공감과 함께 우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위의 책, pp. 284-2
85)
오만하고 이기적인 서구문명에 의해 자신들의 삶터가 완전히 붕괴되고, 육체마저 처참하게 망가지고 황폐
되어 버린 ‘슬픈 열대’에 직면했을 때, 레비스트로스의 마음 속에는 가책과 고뇌가 깊이 저며 들어왔다. 투피
-카와히브족에 관한 한 기록이다:
젊은 처녀와 젊은 남자는 하반신이 마비되어 있었다. 여자는 지팡이 두 개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
고, 남자는 다리 없는 앉은뱅이처럼 자신의 몸을 땅바닥 위로 질질 끌고 다녔다. 그의 다리는 살점
이 거의 없어 무릎만 불쑥했다. 무릎 안쪽이 부어 올라서 혈장증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왼발 발가
락들은 마비되었고 오른발 발가락들은 아직도 조금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 둘은 별 애
로가 없는 것처럼 숲 속에서 먼 거리를 돌아다녔다. 문명에 접촉되기 이전에 이들이 척수회백질염
이나 혹은 다른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이 결코 없었다. 문명과의 접촉으로 인해 황폐되어버린
자연 속에서 이렇게 처참하게 살아가도록 방치된 이 불행한 사람들을 내가 보았을 때, 16세기에
투피족을 방문하고는 이들을 그토록 찬탄했던 테베(Thevet)의 글이 떠올라서 내 가슴은 찢어지
는 듯했다: “그들 역시 우리와 꼭 같이 만들어진 사람인데, 그들은 아직까지 문둥병, 중풍, 혼수상
태, 연성하감(軟性下疳), 그 밖의 어떤 다른 질병에도 감염된 적이 없었다”. 테베와 그의 동료들은
바로 자신들이 이런 악질적 질병을 그들에게 전염시키는 전위부대였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위의
책, pp. 340-341)
‘슬픈 열대’인은, 대 지각변동처럼 무자비하게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 총·균·쇠 때문에 자신들의 생명이 이
처럼 비참한 상태로 꺼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고한 아름다움의 휴
머니즘을 지니고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어느 날 밤 포켓용 작은 전등을 비추어 휘갈겨 써 놓았던 자신의 노
트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어둠이 깃든 열대초원 남비콰라족 숙영지에 모닥불이 타올랐다. 추위를 막는 유일한 수단인 그 모
닥불 주변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나뭇가지와 종려 잎으로 만든 허술한 가리게 뒤에서, 형편없는
잡동사니 일용품들을 담아놓은 광주리 옆에 이들은 맨 땅바닥에 누워있다 ... 부부끼리 서로 꼭 껴
안고 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버팀 목, 유일한 안식처로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일상
의 간난고초를 잊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을 발견하고, 때때로 자신들의 뇌리 속에 엄습해 오는 우
울함과 서글픔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보루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들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 고뇌스럽고 애처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이들은 마치 어떤 무자
비한 대 변동에 의해 짓밟혀서, 꺼져가는 불 옆에 벌거벗은 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이러
한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웃음소리와 속삭임으로 인해 이 부족의 비참함이 그래도 조금은 덜
해 보이기도 한다. 이들 부부는 마치 잊어버린 한 몸(a lost oneness)을 그리워하는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남들이 곁을 지나가도 그대로 애무를 계속한다. 그들에게는 자연의 큰 신선함이, 깊은
태평함이,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끄는 천진한 동물적 만족이 엿보인다. 이 모든 것의 근저에는, 인
간이 인간을 서로 극진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장 감동적이고도 가장 진정하게 보여주는 그 무엇
이 있는 것 같다. (위의 책, p. 285, 곽괄호 학수이)
‘슬픈 열대’의 이 참담한 현실. 이것 역시 인류에게 보다 큰 반성과 깨달음을 주기 위한, 그래서 세계사를 보
다 큰 자유와 합리라는 목적을 향해 진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러나 헤겔 자신이
최초로 간파해 낸 교묘한 ‘이성의 간지奸智’에 의한 작전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유럽 제국주의열강들은 자신
들이 저지른 비유럽문명에 대한 무참한 만행들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전 인류 앞에 떳떳할 수
있단 말인가!
‘슬픈 열대’의 이 참담한 현실. 이것 역시, (레비스트로스 젊은 시절, 프랑스 제3공화정을 떠받친)뒤르켐의
사회학적 철학[결국 헤겔 류]이 제시했던 것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전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열대
인 그들의 집합의식이 사회적 현상으로 표출된 집합표상이란 말인가! 혹은 그것 역시, (뒤르켐에 뒤이어 프랑
스 제3공화정을 떠받친)베르그송의 철학적[역시 헤겔 류] 주장처럼, 열대인 그들의 이성(실천이성)과 정신(엘랑
비탈)에 의해 발전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한 현실이란 말인가! 혹은 그것 역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소르본대학의 철학을 박차고 나온)사르뜨르의 실존주의에서처럼, 열대인 그들의 자유로운 실존적 선택과 기
투企投 그리고 이에 따른 앙가제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책임만 그들에게 있을 뿐이란 말인가! 그래서
유럽 제국주의열강들은 ‘슬픈 열대’의 그 참담한 현실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양심적 가책도 없다는 말인가!
혹은 그것 역시, [<총·균·쇠>가 <슬픈 열대>보다 먼저였다는 가정에서]<총·균·쇠>의 주장과 함의처럼, 애초에 그들이
처한 지리적 환경 때문인지라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국제기구를 통한 산업부국들의 [그 잘
난]‘따뜻한 휴니즘’, 혹은 개인이나 단체의 자선으로써 어떻게 해 나가면 그 뿐이란 말인가?
‘슬픈 열대’를 목격한 레비스트로스는 서구문명 참회록이기도 한 <슬픈 열대>를 썼다. 인류의 소중한 문명
적 자산인 문화다양성이 유럽 제국주의에 의해 초토화되어버린 현실을 그 누구도 레비스트로스처럼 설득력
있고 강력하게 백인들의 양심에 각인시킨 사람이 없다 (D. Pace, 1983, Claude Lévi-Strauss, the bearer of ashes, pp.
16-17). 보통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철저히 휩쓸어버리는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적 속성의 서구문명에 대해 그는 분노했다. 후
일 그가 카루소(P. Caruso)와 가진 한 대담에서 우리는 그 뜨거운 분노를 본다:
서구사회와 소위 ‘원시’사회 간의 차이는 고등동물과 바이러스 간의 차이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
이 나[레비스트로스]를 놀라게 한다. 근본적으로 바이러스는 어떤 형태의 제법製法의 프로세서에 불
과하다. 바이러스는 어떤 제법을 살아있는 고등동물의 세포에 주사해서 그 세포가 어떤 특정 모델
을 따라 스스로를 재생산하도록 한다 ... 서구문명은 이러한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우리 서구문명
은 비서구문명에게 바이러스가 하는 그런 식의 제법을 주사해서 그 문화가 [그들 문화를 영속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주사 된 것과 동일한 제법을 재생산하고, 동일한 방법을 복사하고, 그 복사된 방법
의 적용 범위를 확대해 나가도록 강요한다. (P. Caruso, 1966, Exploring Lévi-Strauss: Interview, Atlas,
Vol. XI, p. 245)
러셀(B. Russell) 경은 ‘어떤 형태로든지 공격하고, 자기와 유사하게 만들며, 그래서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서구문명의 변치 않는 속성’이라고 했다. 보통은 그 속성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
뿐이다[서양사대주의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그래서 자신은 절대 서양사대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다 보니].
슬픈 열대에 대해 ‘찢어지는 듯한’ 양심의 비통을 금치 못한 레비스트로스는 스승들의 이른바 정통철학(ort
hodox philosophy)과 영영 결별해버린다. 그는 그들이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사변
적 사고의 결과를 가지고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진리라고 선포하는 일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 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 속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이에 그는
많은 공부와 탐구조사 끝에 드디어 사변을 배제하는 (발로 뛰어 답사하고 일일이 자료를 찾아 고증하는)실증
주의인 구조주의인류학을 탄생시켰다.
*
‘구조주의 아버지’ 레비스트로스의 영향력은 모든 분야에서 최고다. 1981년 프랑스 최고의 권위 <리르(Lir
e)>가 작가, 교수, 기자, 정치가 등 지식인 600명을 대상으로 ‘사상, 문학, 예술, 과학 등의 발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생존 지식은 누구인지’를 조사한 결과 레비스트로스가 단연 1위였다. 그 뒤로 레몽이 2위, 푸코
가 근소한 차이로 3위, 그리고 라캉이 4위였다 (F. Dosse, 1997, History of Structuralism (vol. 1), pp. xxi-xxii, 밑줄:
구조주의방법론은 특히 과학의 발전에도). 임봉길 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방법론이나 사상이 이처럼 엄청
난 성공을 거둔 것은 전대미문이라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가능하다고 믿어진다”고 했다 (임봉길, 윤소
영, 송기형, 김성도, 정재곤, 2001, 구조주의 혁명, 서울대학교출판부, 표지 글).
20세기 후반을 구조주의시대라고 한다. 구조주의는 데카르트 이래 뿌리깊은 주체주의 인간관과 철학의 토
대를 허물어버렸고; 근대 이후 3세기에 걸쳐 지배적인 헤겔의 절대관념론인 역사주의와 그 철학을 실증적으
로 뒤엎었으며; 당시 세계적으로 풍미하던 후설의 현상학과 사르뜨르의 실존주의를 인식론적으로 해체했고;
또한 사회과학에서는 당시 거의 절대적이던 기능주의와 구조-기능주의의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서
양을 위시하여 모든 학문과 사상계를 풍미한 일대 혁명적인 이론이고 사상이다” (이광규, 1997, 한국문화의 구조인
류학, 3쪽). 푸코를 위시해 데리다, 바르트, 라캉 등을 흔히 후기구조주의자라고 해서 학문의 세계에서는 지금
도 여전히 구조주의가 지배적인 시대이다. 보통은 그런 줄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오늘날 서구문명은 ‘이항대대二項對待(binary opposition)’라는 구조와 이에 입각
한 ‘호혜성(mutual reciprocity)’이라는 원리에 배치되는 상기 바이러스 속성의 문명이기 때문에 이미 대책없
이 기울고 있다. 반면에 그는 고대로부터 중국사상보다 더 훌륭한 구조주의[이항대대=음양대대] 사유방식과 이
에 기반된 참다운 호혜성의 휴머니즘문명을 어디에서도 발견해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문명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아시아의 유교문명권으로 옮겨질 것으로 확신한다:
人類文化 中心地라는 것은 여기저기 옮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에는 문화의 중심지가
서양으로 옮겨온 감이 있습니다만, 다음 세기에서는 아니 이미 어떤 점에서는 문화의 큰 무게 중
심이 동아시아로 옮아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극동인들은 어떤 점에서 토인비가 말한 바
와 같이 서양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서양은 그 동안 당신
들이 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등 여러 측면의 성공에서 보여준 그러한 형태의 노력을 우리가 집중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서양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
리가 당신들을[동아시아 유학문명을] 보다 잘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C. Lévi-Straus
s,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편譯編, 1983,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한국학, 228-229쪽)
레비스트로스, 당신은 정녕 동양의 아들인가!
<kang40lava@hanmail.net>
첫댓글 길고 어려운 글이며 너무나 생소하고 재밋는 글 잘 읽었다.
<슬픈 열대>에서는 전율 같은 걸 느꼈다. 천착해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아야 하겠다.
학수이 존경스럽다.
변변찬은데
격려 고마우이 친구야...
그거 우짜꼬: 니 올래? 내 가까? 아이마 택배로?
이멜 보내도고.
한 번 더 읽어보니 대단하누마
앞으로 서구가 동양문명에 눌린다고...
실제로 서구가 앞선 것이 얼마나 되는지???
18세기 중엽(청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걸친) 이라는 것이 문명사가 전반의 견해인가 보이.
송 문명을 접한 서구사상가들은 놀라서 껍벅했고
15세기 전반 명의 정화함대는 규모와 무력에서 당시 타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최대였다는 기록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