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귀농통문 가을 겨울호(홍천 모래무지)편을 보고 짧은 시간중에 만났던 카렌족을 엿볼 수 있는 기억이 생각났읍니다.
농업은 여유있는 사람에게는 道일 수도 있고 善을 행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생존을 위한 농업은 같은 농업이라도 善을 위하는 농업보다는 더 절실할 수도 있읍니다.
전쟁을 피해서 종속되지 않고 저항하는 아나키즘의 역사는 바로 소수민족 이동의 軌와 같이 합니다.
지배에 저항한 소수민족의 생존은 다랭이논과 같은 절박한 농업일 수 밖에 없읍니다.
중국 소수민족의 대부분은 1,200~1,400년前 수, 당나라 때 조상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빼앗기거나 전란을 피해 중국 윈난성 일대로쫒겨온 역사입니다.
비슷하게 쫒겨 들어온 인도 서북부, 태국북부, 미얀마북부의 역사도 같은 이유로 소수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죠.
중국공산당 공식역사에서는 이주배경을 확인 할 수 없지만 역사는 항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읍니다.
고구려 멸망은 중국 역사에서도 큰 흔적을 낳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들이 동북공정이라는 방법을 가지고 희석하려 해도 기록은 현재에도 남아 있읍니다.
고구려가 존속할 時에는 항상 돌궐(튀르키예)과 소통이 있었고,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고구려의 재건을 두려워하여 고구려백성 20만명을 중국 북경 위쪽 영주로 끌고 갔으며,당시 하북 일대에는 실제로 당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이정기 장군이 있었읍니다.
특히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의 서역침공 사실은 당나라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얼마나 두려워 했나를 가름해볼 수 있는 사료들입니다.
고구려 부흥 운동으로 탄생한 발해는 중국 침공으로 멸망하지 않고 화산폭발과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앙으로 자연스럽게 서쪽지방의 몽골계 요나라가 이주하여 공백을 메꾼 사실 뿐이었읍니다.
아나키즘의 관점으로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민족이동의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읍니다.
카렌족이 태국북부에 살기 시작한 역사의 시간은 고구려 멸망시간과 그 軌를 같이 하고 있읍니다.
내가 만났던 피풋 신부님은 어머니는 타이 원주민 출신이지만 아버지는 전란을 피해 중국에서 건너온 민족의 후예라고 분명히 소개하고 있었읍니다.
카렌족에서 내가 느끼는 정서는 그들의 얼굴도 동글한 團頭형의 태국 원주민의 얼굴보다는 우리와 비슷한 長頭형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토종 한국인인 나도 가름하기가 어려웠읍니다.
디아스포라처럼 이주한 저도 처음에 생존을 위해 논을 찾았읍니다.
논이 없는 절박한 이주자에게 농사짓기 쉬운 곳은 존재하지 않읍니다.
처음에 생각한 것은 찬 물이 나오는 샘터 근처의 빈 터 공간이었지요.
옛날에 쌀이 귀할 때 벼라도 잠깐 짓기도 하였는데 물이 차서 농사가 안돼 포기된 장소라고 하더군요.
두번째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질긴 바랭이 풀들이 자란 물찬 밭이었는데 인근의 다른 할배 주민이 냉사짓기에 적당하면 너의 차례도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귀띰해주길래 또 포기하고 말았죠.
의지의 한국인인 말갈농부는 여기서도 屈하지 않고 우리 변현단 대표님께 부탁하여 아마 돌아가신 한원식 선생님으로부터 건너받은 밭벼 볍씨로 파종하였지만 물기가 전혀 없는 자갈밭에는 응용할 수 없는 무모한 몸짓이 되었읍니다.
나의 수수재배는 우리의 자포니카 쌀나락처럼 동그란 벼를 대체하고픈 위로감에서 출발하였죠.
처음 재배한 키작은 수수는 아니었지만 봉화의 불유구님으로부터 받은 흰, 키 큰 수수는 여태까지 잘 심어오다가 주인이 바뀐 地主의 요구로 그동안 투입된 자원은 그대로 두고 安息에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물이 있으면 논으로
없으면 없는 데로 밭으로
밭마저 없다면 생각으로
생각이 없다면 몰라도 생각이 있으니까
생각으로도 농사지을 수 있어요.
오늘은 뭘 할까?
생각하다, 금방 세월이 흘러갔읍니다.
첫댓글 건강하소서~^^
항상 마음으로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