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일 목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세계 평화의 날) 교 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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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When they saw this, they made known the message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by what had been told them by the shepherds. And Mary kept all these things, reflecting on them in her heart.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당신 백성을 어떻게 돌보실지를 알리셨다.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와 은혜를 베푸시리라. 그대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고 모세를 통해 전하고 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 영의 현존을 전한다.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제2독서). 예수님의 강생을 기록한 복음은 지상으로 임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순박한 목자들의 찬양을 받으셨다고 전한다. 천사의 귀띔에 순종한 마리아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천사가 미리 일러 준 ‘예수’라는 이름은 ‘아빠! 아버지!’의 관계를 암시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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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찬미 예수님! 새해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어둠 깊은 밤 먼동 터지니 하늘이 열리는구나! 금년 해 오름의 징조가 좋다. 보라! 주님께서 눈부신 불 한 덩어리 솟아 내시어 온 누리를 비추신다. 작년 봄 애써 좋은 씨 뿌리고 김매고 땀 흘렸으되 손에 쥔 것은 깜부기 쭉정이뿐이던가. 어둡고 괴로웠지. ‘원수가 그랬구나!’ 나오너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시대에 행패하며 기승하던 위세의 잡귀 잡신 다 나오너라! 우리 임 울며 떨게 하던 어둠의 화살아, 어디 한번 쏘아 보거라.
해 넘어가 버린 서산을 바라보면 무엇 하느냐? 봐라! 몸을 일으켜 동녘 바라보라. 하늘 틈새가 갈라진다. 두 팔 쭉 펴라. 동산에 오르는 붉고 뜨거운 빛을 가슴에 안아라. 새 빛을 보는 자 올해에는 귀인을 만나겠다! 눈 크게 뜨고 들을 귀 열어 두라. 먼 데서 아기 울음소리 들리거든 문을 열고 종려 가지 들고서 달려가 맞으라. 새 역사를 여는 빛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광명 천지 새날이 온다. 평화의 노래를 합창하라!
귀인을 맞으려는 자 와서 아침을 들라! 새해 말씀에는 예수 마리아 요셉, 천사와 목동, 그리고 찬양이 울려 나오는 마구간 공동체를 주목하자. 유다 산골 작은 마을로부터 흐르는 기쁨과 희망의 빛이 그대 가슴에 메아리쳐 오리라.
-서공석신부-
새해 2015년의 첫 날입니다. 2015년은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곧 5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필요하였던 표현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세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14)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가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는 분이라 우리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시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베풀어진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 앞에 펼쳐진 또 한 행의 세월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
한 해의 시작을 성모님의 대축일과 함께 시작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복음에 귀 기울여 봅니다. 순박한 목자들이 기쁨에 겨워 아기를 경배하러 달려오고 돌아가는 움직임 한가운데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그분께서는 목자들이 전해 준 이야기를 곰곰이 새기고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동반하시는 성모님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하 느님께서 성모님이 아드님과 함께 걷기를 원하신 그 길은 다름 아니라 평화의 길이었음을, ‘세계 평화의 날’로 기념하는 오늘 새롭게 깨닫습니다. 아드님과 함께 평화를 위한 길을 걸으셨던 성모님의 삶의 여정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고자 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지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독일의 시인 힐데 도민은 그녀의 짤막한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치고 피곤해지지 않기를/ 대신에 소망을 작은 새처럼/ 가만히 조용히 손에 담고 가기를.” 평 화를 위해 걷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두렵고 귀찮아 습관과 타성이 이끄는 쉬운 길로 옮겨 가려는 유혹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먼저 아드님이 세상에 가져오신 평화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깊이 새기며 살아가셨고 우리가 그 길을 걷도록 도우시기에, 우리는 평화의 소망을 간직한 채 이 땅 곳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평화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
-전삼용신부-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2’에 ‘송이의 노란 우산’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사연입니다.
송이 엄마는 시장 좌판에 앉아 나물을 팔았다. 일곱살 송이는 아침밥을 먹고 늘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갔다. 어른들만 있는 시장에서 송이의 유일한 친구는 까만 때로 얼룩진 인형뿐이었다. 머리카락까지 듬성듬성 빠져버린 인형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 저 할아버지 너무 무서워. 할아버지 옆에 가면 이상한 냄새가 나."
송이는 멀지 않은 곳에 힘없이 서 있는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서 채소장소를 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할아버지는 슬픔으로 온종일 술만 마시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잤다. 할머니 병원비로 할아버지는 산동네 집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시장 사람들은 말했다. 할아버지가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잊지 못해서라고...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대낮에도 방앗간 옆 땅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시장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예전처럼 대해 주지 않았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비틀 거리는 할아버지에게 막말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장입구에는 가게를 지으려고 파헤쳐 놓은 길이 있었다.
어느 날 송이는 그 앞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송이가 넘어지는 순간 들고 있던 인형이 깊이 파헤쳐진 웅덩이로 떨어져 버렸다. 인형이 떨어진 곳엔 썩은 물이 고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더러운 물에 빠져서 다리만 간신히 내민 인형을 바라보던 송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송이는 훌쩍거리며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가 손가락으로 인형을 가리켰다. 떠름한 낯빛으로 지나칠 뿐, 더러운 물로 들어가 인형을 꺼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닭집 아저씨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왜 울어, 송이야."
"아저씨....."
송이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저건 안 돼, 송이야. 더러운 물 만지면 병 걸려. 엄마한테 인형 사주라고 아저씨가 말해줄게."
송이는 억지로 팔을 끄는 닭집 아저씨를 따라갔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송이의 눈은 금세 휘둥그레졌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몸을 비틀거리며 인형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신발을 신은 채 냄새는 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인형을 주웠다. 할아버지는 인형에 묻어 있는 더러운 물을 때 절은 옷소매로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다치지는 않았냐?"
"네.."
송이의 서먹한 대답에도 할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도깨비 뿔처럼 마구 헝클어진 하얀 머리가 송이는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저녁부터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송이는 노란 우산을 받쳐 들고 어둑해진 시장 길을 바쁘게 걸었다. 비를 맞고 누워 있을 할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방앗간 뒤쪽 처마 밑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는 비바람으로 얼굴까지 온통 젖어 있었다. 송이는 자기가 쓰고 있던 노란 우산으로 잠든 할아버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에 얹은 채, 멀리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송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람에 날아가 버린 노란 우산이 할아버지 옆에 벌렁 누워서 동그란 얼굴을 땅에 비비고 있었다. 송이는 서둘러 할아버지에게로 다시 달려갔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노란 우산이 날아갈까 봐, 송이는 할아버지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노란 우산 밖으로 나와 있는 할아버지의 새까만 팔을 노란 우산 안으로 끌어당기며 송이는 말했다.
"할아버지, 비와요.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송이는 여귀꽃처럼 가는 팔로 비에 젖은 할아버지 다리를 처마 밑으로 힘껏 당겼다. 할아버지의 때 묻은 손을 송이는 꼭 잡고 있었다. 때 절은 손이지만 더러운 물에 빠진 송이 인형을 꺼내준 고마운 손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할아버지의 눈가로 따스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젖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송이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멀리 엄마가 있는 곳에서 조그만 불빛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송이는 엄마 옆에서 때 절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때 닭집 아저씨가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송이에게로 다가왔다.
"송이야, 선물이다."
"아, 예뻐라..."
예쁜 인형을 받아 든 송이 눈가엔 어느새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송이야, 저기 봐,. 이 인형, 할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사주신거야."
닭집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킨 곳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개나리꽃처럼 활짝 피어있는 노란 우산을 흔들며 송이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가 끌고 있는 낡은 손수레에는 펼쳐진 종이 상자들이 가득히 쌓여있었다. 그날 이후로 시장 사람들은 못 쓰는 종이 상자를 하나하나 모아 할아버지에게 주었다. 할아버지도 더 이상 술에 취해 비틀거리지 않았고, 길 위에 쓰러져 있지도 않았다.
더럽고 냄새난다며 모두 할아버지를 멀리 할 때, 어린 송이는 말없이 다가가 할아버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송이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가장 더럽고 역겨운 곳까지 내려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아니 ‘가장 멸시받는 모습으로 나무위에 달려 높이 올려지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의 모욕과 멸시를 받는 그런 치욕적인 아들을 두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위의 이야기에서 송이의 더러운 인형을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구덩이에서 꺼내주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 때 그 사랑을 이해하는 한 ‘보잘 것 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눈에는 가난하고 가녀리고 힘도 없는 작은 시골 처녀에 불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 사랑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상관없으니 하느님의 뜻만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시도록 ‘아멘!’하셨습니다. 하늘도 인간 가운데 그런 사랑이 있음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역겹기만 하던 인간이 예전처럼 거북스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나마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의 뜻을 위하여 가장 더러운 곳까지 함께 가실 줄 아는 사랑을 보여준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어머니를 위해서도 천상영광의 관을 씌워주시고 그 어머니의 사랑을 닮은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마치 송이가 할아버지가 걱정돼 노란 우산을 들고 와 할아버지를 덮어드린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온 인간을 다시 사랑하시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 분을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새해 첫 날 이 신비를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같은 동료선수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초기에 박찬호 선수는 자신과 같은 소속 식구들에게도 왕따였습니다. 그리고 한 선수는 자신이 씹던 껌을 뱉어서 박찬호 선수에게 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박찬호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선수와 맞붙어 싸웠는데 말을 할 줄 모르는 자신만 징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밥은 잘 먹고 다니냐, 힘들면 돌아와라, 보고 싶다는 등의 어머니면 다 하시는 그런 질문들을 쏟아내셨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비록 멀리 있지만 어머니의 그 사랑을 다시 느끼며, 이런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통역 없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How are you?’라고 인사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말은 모르기 때문에 그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음식은 다 버리고 치즈와 미국 음식만을 먹었습니다. 느끼해서 토할 정도가 되었지만 참아냈습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 몸에서 나는 마늘 냄새였다는 것을. 그들은 박찬호 선수 몸에서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치즈 냄새가 나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동료들과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고 좋은 성적을 거둬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철환 작가는 ‘자식은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연탄길 2, 177)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도 혼자서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 머물러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루카 2,52)
그분이 몸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자랐다면 그분이 자라도록 누가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당신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려 눈물을 흘리신 분은 성모님이 아니고 누구시겠습니까? 또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그리고 당신 구원의 가시밭길을 가시며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실 때마다 당신과 항상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려주시는 어머니 때문에라도 힘을 얻지 않으셨겠습니까? 낳으신 것뿐만 아니라 기르시고 함께 해 주신 것에서도 성모님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 날입니다. 그리고 그 첫 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그분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을 낳으시고 기르셨듯이 당신의 자녀가 되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시어 우리도 보호해 주시고 길러주시기를 먼저 배워야 함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도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몸도 지혜도 날로 자라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도 작은 예수님으로 키워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013 년과 2014년. 결국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왠지 완전히 다른 날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저만의 특별한 느낌일까요? 사실 12월 31일만 특별한 날이 아닐 텐데 매년 이 날에 괜히 의미를 붙여서 밤새워 놀 생각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월 1일은 늘 깨어서 시작을 해야만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생각했지요. 그래서 어제는 정말로 평소와는 달리 특별한 날로 만들기 위해 일찍 한 9시쯤 잠들었습니다. 2013년이 아쉽다고 잠 못 이루는 것보다는, 보다 더 맑은 정신으로 누구보다 일찍 2014년을 맞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 긴 이 새벽에 일어나(2시에 일어났습니다. ㅋㅋ) 휴대전화를 보니, 예전의 저와 같은 모습으로 새해를 시작하신 분이 많더군요. 1월 1일 00시를 기해서 저한테 얼마나 많은 분들이 새해 인사 문자와 메시지, 메일을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예년과 달리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답니다.
이 새벽,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새벽을 열면서,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하시는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을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올해에도 열심히 새벽을 열면서 살 것을 약속드립니다.”
분 명 2013년에도 아쉬운 것들이 많았으며,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묵상하면서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려 보니 너무나 많은 부분에 있어 참으로 감사했던 한 해였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매 순간 함께 하셨고, 주님의 그 사랑으로 인해 이웃들과도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 수 있었던 기쁨의 시간들이었으니까요. 이러한 시간들을 기억해보니, 2014년에도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많이 받는 한 해가 분명히 될 것입니다.
그 래서 교회는 매년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지요. 어떠한 순간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명하시면서 희망을 놓지 않으셨던 성모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새해의 첫 날을 열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되라고 성모님 대축일을 새해 첫 날로 잡은 것이 아닐까요?
올 해에도 좋아하는 일만 내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일만 생기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내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때 좋아하는 일만 그리고 내 욕심만을 찾는다면 그 사랑은 절대로 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대신 주님께 기준을 맞춘다면, 분명히 가장 멋진 2014년을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2014년을 멋지게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멀 리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항상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을 가져오십시오. 이곳이야말로 우리 서로를 위한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니까요(마더 데레사).
멋진 2014년을 만들어 갑시다.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살면 참 좋겠지요. 어떤 어르신에게 “8899가 아니라, 9988이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고 하네요.
“88세까지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기를 원한다.”
이 렇게 아프지 않고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산 결과 생기는 병은 어쩌겠습니까? 오히려 나이 들어 몸에 찾아드는 신체적인 고통은 좀 고약한 친구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픈 것을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얻은 결과라는 쓸데없는 생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픔을 가져다주는 병은 훈장도 아니고,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가야 할 삶이 조건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나빠지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2014년에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고통 속에 놓여 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고통 자체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해 보십시오. 분명히 커다란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는 가장 멋진 2014년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
-김대열신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2,19) --- 1. 새로운 한 해가 또 시작되었습니다. 늘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운 어제와 희망의 내일을 만들어가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후회의 어제와 두려움의 내일이 아니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아주 많이 행복하세요. 저 역시 행복해지고자 최선을 다하렵니다. 올 한 해,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결과 상관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일년 후의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 교회가 성모님 대축일로 한 해를 시작하게 한 것에는 커다란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늘 그랬듯이 이 세상은 엄마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엄마, 어머니라는 이름은 모든 인간의 고향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더욱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 떠난 자식이 잘 지내기를 바라며, 이른 새벽 우물물 길어 사발에 담아놓고,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빌던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촛불 빛으로 아른거리는 그림자 만들며 자식들을 위해 눈물과 함께 묵주 기도 드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절실히 그리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엄마를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고와집니다. 올 한 해, 반목과 불신이 어머니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가 정말 옳게 살 수 있는 힘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불의가 정당화되고, 정의가 꼬리를 내리는 세상이 아니라,
옳은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는 세상이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서공석신부-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2014년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2014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2014년을 시작하는 정월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뜻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미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참다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는 데에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431년에 에페소 공의회가 결의하여 선포한 표현을 가져와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우리가 알아들으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14)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가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기에 이웃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며, 세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
-서공석신부-
새해 2015년의 첫 날입니다. 2015년은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곧 5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필요하였던 표현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세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14)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가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는 분이라 우리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시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베풀어진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 앞에 펼쳐진 또 한 행의 세월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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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