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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음식을 들다
행 27:27-37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행 27:27-37 / 그레데 섬을 떠나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한 지 열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한밤중에 선원들은 육지에 가까이 온 것을 느꼈다. 28) 그래서 끈에다 추를 달아 물 깊이를 재어 보았다. 스무 길이었다. 조금 후에 다시 재니 열다섯 길에 불과하였다. 29) 그들은 해안이 가깝다는 것을 알자 혹시 해안선 부근의 암초에라도 걸릴까 두려워져서 고물에서 네 개의 닻을 내려놓고 부디 빨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30) 그런데 선원 몇 사람이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구명선을 내려 배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31) 바울이 이것을 보고 군인들과 대장에게 `저 사람들이 도망치면 당신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군인들이 밧줄을 끊어 구명선을 떨어뜨렸다. 33)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였다. `여러분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지가 열나흘이나 됩니다. 34) 이제 음식을 드십시오. 여러분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오.' 35) 이렇게 말하고 바울은 떡을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었다. 36) 그러자 사람들도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37)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276명이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사공들은 수심이 낮아지자 자신들만 살고자 거룻배를 내려 도망하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군인들은 바울의 지시대로 거룻줄을 끊고 거룻배를 떼어냈습니다.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27-29) 알렉산드리아호가 유라굴로를 만나 표류한지 열나흘 째 되는 날 밤에 사공들은 어두워서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육지가 멀지 않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육지가 가까운 줄로 생각한 사공들이 물의 깊이를 재보니 ‘스무 길’(약 35m)이었고, 조금 후에 다시 재보니 ‘열다섯 길’(약 27m)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공들은 수심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심이 낮아진 것을 확인하고 배가 암초에 부딪힐 것을 염려하여 배 고물에 네 개의 닻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30-32) 사공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운 줄 알고 배의 뒤쪽에서 닻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가 도망하려고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내렸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해준 말을 믿지 않고 거룻배를 내린 사공들을 보고서 백부장에게 그들이 없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배를 떼어 버렸습니다. 군사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사공들의 태도나 바울의 권고를 거부하던 전과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또한 순종하지 않는 사공들과 순종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33-37) 바울은 풍랑으로 인해 열나흘 동안 먹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먹어야 기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면 배가 난파되었을 때 제대로 헤엄을 칠 수 없을 뿐 아니라 널빤지를 잡고 해안에 도착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41-44절).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떡을 먹었고, 사람들도 안심하고 떡을 먹었습니다.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이백칠십육 명이었습니다.
적용: 바울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사공들과 순종한 군인들의 모습 중에서 현재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 가깝다고 생각하는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
우리의 삶이 내 생각과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의기소침해지고 좌절하고 깊은 어둠 속에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소중한 도움은 격려입니다. 그 격려는 어둠에서 헤어나올 용기가 되고 다시 일어설 기회가 되며 마음을 다잡아주는 기둥이 됩니다.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랜 동안 되뇌이며 선한 이름으로 남는다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뒤바뀐 지도자
이필재 목사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피면 참으로 신기하고 조금 우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276명의 사람을 태우고 유대에서 로마까지 가는 배 안에서 사람의 위치가 다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누가 배의 선장인지 죄수인지 누가 지휘관인지 상인인지 알 수 없게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분명한 일은 모든 사람이 자기 신분이나 직위에 해당하는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라고 하는 죄수가 선장 역할과 율리오 대장의 역할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지휘관이 뒤바뀌어 버린 이상한 광경이 배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서 지금 배는 표류 중에 있습니다. 배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배가 떠밀려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몇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바다로 끝없이 목적 없이 떠내려 갈 수가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태평양이나 대서양, 인도양 어디서든지 흔히 일어났던 일입니다. 표류하는 배는 구조선이 와서 구조해주기 전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왜? 배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냥 바다에 떠있을 뿐이고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렇게 된 것입니다. 14일째 그렇게 지중해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다가는 암초에 부딪혀서 파선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암초라는 것은 바다에 숨어있는 바윗돌을 말합니다. 이런 두 가지 위험이 있고, 마지막으로 요행스럽게 육지에 떠밀려가면 살 수 있습니다. 14일째 이렇게 사람들이 절망하고 낙심이 되어서 먹지 못한 상태로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배 안의 아구스도대 특전 사령부에서 파송된 군인들이 무슨 역할을 하겠습니까? 상인들도 똑같아지고 죄수들도 마찬가지이고 모두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이쯤 되니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배를 지휘하는 총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율리오 대장의 역할과 배의 선장 역할을 자신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초죽음이 되어서 운명적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는 정반대의 힘이 납니다. 신바람이 나는 듯한 모습으로 그의 영적이고도 대단한 감각적 능력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27절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 저리 쫓겨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바다에서 “이리저리”는 바람이 부는 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이쪽에서 불면 이쪽으로 밀려가고 저쪽에서 불면 다른 쪽으로 밀려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를 몰고 다녔던 사공들의 경험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육감적으로 ‘육지가 가까워오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바다의 깊이를 재어봤다고 했습니다. “아! 이십길 정도의 깊이가 되었다. 이게 점점 줄면 육지가 가까워온다는 뜻이다.” 경험에 의해서 생각했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조금 가다가 재어보니까 열다섯 길이라고 했습니다. 다섯 길이 줄었습니다. ‘아! 이것은 틀림없이 물이 점점 얕아진다는 증거다.’ 이렇게 육지에 접근하고 있음이 확실해 진 기록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말이 몇 가지가 나타납니다.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영감으로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고물은 무엇이고 이물은 무엇이고 거루는 무엇이고 닻 넷을 내려놨다는 말이 무엇인지 기도해도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육지가 가까워오는 데 왜 사공들이 여기서 도망을 하려고 했는가? 이것도 또 문맥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것을 해석하려고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이 배는 지금 바람에 밀려 기능을 잃고 바람 부는 대로 떠밀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 바다나 암초는 육지 가까이에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는 물이 수백길이 되는데 무슨 암초가 있겠습니까? 육지로 가까이 가면 그 바다 밑에 수없이 많은 암초 덩어리가 있습니다. 겉은 잔잔해도 바다 속이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나라 부산에 가보시면 오륙도라고 하는 바위들이 있습니다. 그 주변에 암초들이 웅크리고 잔뜩 있단 말입니다. 이 암초는 표면이 안 보이는 바다 속에 바위를 말하는데 육지 가까이의 암초들은 배들에게 있어서 절대적 위험 요소입니다. 왜? 배는 일단 항구에 정박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항구나 암초들이 있어서 어느 나라 항구나 큰 배가 들어오면 가까이 오지 못하고 어느 지점에 서도록 법으로 정해 있습니다. 암초가 있는 곳에는 절대로 못 들어옵니다. 그러면 어디에 암초가 있다는 것을 잘 아는 항구의 본부에서 작은 배를 가지고 마중을 나갑니다. 그래서 그 작은 배를 따라서 정박 지점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암초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항구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 흘러들어갔다가는 암초에 부딪혀 파선하고 맙니다. 그런데 육지가 가까워오니까 이 배는 인도자가 없이 그냥 떠밀려 내려가게 됩니다. 사공들은 오랫동안 배를 타고 경험에서 100퍼센트 배가 암초에 부딪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길을 따라 들어가도 위험한데 지금 제법 흘러서 육지로 가까이 가는데 이건 틀림없이 암초에 부딪혀 깨질 것이다.’ 점점 육지가 가까워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배를 끝까지 인도해나갈 사공들이 먼저 도망을 갑니다. 왜 도망을 가겠습니까? 그냥 떠밀려 내려가서 암초에 부딪힐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망을 하려고 작업을 했습니다.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이 말이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공들이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배는 깨져서 침몰할 테니까 ‘그러면 우리라도 살아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자기들만 도망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낱말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거루는 무엇인가? 구명보트입니다. 큰 배들은 유사시에 작은 보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객선이니 뭐니 다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항해를 안 시킵니다. 구명보트, 이것이 거루입니다. 지금은 아주 잘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조그마한 보트를 선원들이 유사시에 탈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것이 거루입니다. 침몰할 때 탈출하기 위한 작은 배를 큰 배들이 싣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 거루를 사공들이 바다에 내려놓거늘” 왜? 자기들이 타고 암초에 부딪히기 전에 도망을 가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고물로 닻 넷을 주고”라고 했습니다. 고물이 무엇이냐? 배 뒤편에 돛대 바로 아래는 배의 모양이 평평한 데가 있습니다. 거기가 고물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바로 배를 타고 가시다 이 고물에서 누워서 잠을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물은 또 뭐냐? 이것은 배 안쪽을 말하는 것입니다. 뱃머리 쪽 삼각형으로 된 부분이 있죠? 그것이 이물입니다. 설교하려면 별걸 다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사공들은 이 고물 쪽에 닻 넷을 주고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면서 거루를 바다에 띄워서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기들만 거루를 타고 도망가려고 이런 작전을 벌인 것입니다. 닻을 달고 가려는 체하고 이렇게 사공들만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자기들만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살 수 있고 다른 놈들은 죽거나 말거나….” 그런데 바울이 이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야! 이놈들이 고물에 닻 넷을 주고 닻을 올리는 거 보니까 배가 떠내려가라고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물에서 거루를 내리는 것을 보니까 이거 웬일이냐? 유사시에 자기들만 타고 도망가려고 작전을 피는구나!’ 그래서 31절과 32절에 바울이 군사를 시켜 사공들이 도망가려고 내려놓은 거루의 줄을 끊어버려 거루가 바다에 흘러가 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용을 못하게 해서 둥둥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지금 군사들은 바울 같은 죄수를 로마까지 데리고 가는 호송관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뒤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군사들이 바울의 말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꾸미셨습니다. 이제는 바울이 배의 총지휘관으로 특전 사령부 아구스도대 훈련대장도 꼼짝 못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군사들이 바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 거루의 줄을 끊어버려!” “왜 그러십니까?” “저 놈들이 타고 도망가려고 해! 빨리 끊어버려!” 그래서 다 끊어버렸습니다. 거루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암초에 부딪히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일을 시작합니다. “야! 이 배 안의 물건을 다 버렸지만 그래도 음식물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으니까 음식을 만들어서 모두가 먹자!” 그래서 음식을 차려먹도록 권유합니다. 건강을 회복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바울이 하는 일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어도,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가 있어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6명 모두가 바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지금 군인들이고 사공들이고 상인들이고 죄수들이고 모두 내 말을 들어야 산다! 내 말대로 해라!” 그래서 모두 밥을 먹자고 하는데 여기 276명 가운데 확실한 크리스천은 세 사람입니다. 시험 보겠습니다. 누구, 누구죠? 바울, 이 성경을 기록한 누가, 그 다음에 아리스다고입니다. 이 세 사람만이 하나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누가가 침착하게 이 장면을 기억하면서 다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이렇게 전달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 먹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다 산다.” 여러분, 떡을 만들어먹는데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성찬식 하듯 합니다. 35절에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이제는 바울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276명 가운데 예수님 믿는 사람이 세 사람 밖에 없는데 모두 성찬식에 참여를 시키고 식사 기도한 후에 떡을 먹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지금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자!” 할 수 밖에 더 있습니까? “먹어라!” 36절에 보면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이렇게 되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배 안은 이미 성령님의 역사가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성찬 집례를 해서 “야! 먹기 전에 기도해야지! 하나님께 기도하겠다.” 다 축사하고 기도하고 그 다음에 “떼어서 먹자!” 완전히 이 배의 모든 지휘관은 바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 누구도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사람이 미리 무엇을 말한다는 것은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게 맞아 떨어지면 그 사람은 신적 능력의 소유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 내가 앞날을 미리 알면 교인들이 나를 굉장한 영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잘 따를 텐데….’ 그런데 알 수 있는 게 한 가지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50퍼센트의 확률이 있어서 ‘이것으로 한번 해보자!’ 그게 뭐냐 하면 아기 가진 여자들에게 아들인가 딸인가 알아맞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자에게는 “아! 이번엔 아들입니다.” “아니,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좀 아는 게 있습니다.” 아들이 정말 나온 집은 목사님을 그냥 영적 권위자로 인정하고 “우리 목사님이 미리 아들 낳는다고 말씀해 주셨어요.”라고 말하고 다니고, 그게 맞지 않을 때는 “내가 기도를 덜 했는가 봅니다.” 그렇게 말했다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생명에 관계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도 안 죽어!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내 말만 잘 들어라.” 사람이 사선을 넘어야 되는 위험한 지경을 만나면 살기 위하여 뭐든지 하게 됩니다. 지금 선장 말도 믿지 못할 것이요 사공도 못 믿을 놈이요 죄수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상인들은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이 배 안에서 살 수 있는 희망은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 밖에 없기 때문에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배 참석하고 기도하고 밥 먹고 순종하고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데 권위 있게 보내시기 위하여 이런 역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세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놀라운 권위자로 로마에 들어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음번에 나옵니다. 이 배는 밀레도 섬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거기 가려고 해서 간 것이 아니라 바람에 떠밀려서 그곳에 간 것입니다. 그 섬사람들이 나와서 이 바울 일행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바울 선생이 뭐라고 추앙을 받습니까? 신이라고, 당신은 사람이 아닌 숭배적 찬양의 주인공이 바울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바울을 영적 권위자로 굉장히 높은 위치로 하나님이 올려놔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권위 있게 하심으로 이 배를 타고 로마로 들어가는 276명은 어떻게 됩니까? 다 선교사가 됩니다.
그래서 율리오 대장이 나중에 로마에 들어가서 바울을 위해서 어떻게 일을 했습니까? 바울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가게 되고 그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의 복음이 로마는 하층 계급이 아닌 고위층에 먼저 전달됩니다. 로마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믿고, 특별히 부인들이 예수를 믿어서 뒤엎어버린 것입니다. 그때에 크리스천 인구는 로마에서 7퍼센트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국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국교가 되어서 로마 교황청이 지금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를 미리 내다 보셔서 바울을 권위 있게 로마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배 안에 탔던 사람들이 가서 바울을 신으로 생각해서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타고 온 배에서 이 사람이 하는 말대로 모두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안 죽는다고 해서 276명 가운데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고 모두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부터 하자는 대로 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이 사람 말을 거역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사경을 넘는 경험은 평생토록 기억이 남습니다. 로마에 들어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라굴로 광풍 사건과 바울의 지시대로 살아난 경험을 아마 평생을 두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강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저는 서울대 병원에 우리 교우 심방을 갔었는데 나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숨을 잘 쉬지 못하기 때문에 산소 호흡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깜빡 멎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답답해서 말도 잘 안 나옵니다. “목사…님, 마,말이 잘 아,안 …돼요.” 세 가지만 가지면 행복하겠다고 하십니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숨쉬고, 말하고, 걸어 다니는 이 세 가지만 할 수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숨을 마음대로 쉬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점심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말을 하는 게 너무 행복하답니다. 지금 말이 잘 안되니까 얼마나 말이 하고 싶은지 죽을 지경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걸어 다니고 숨 쉬고 말하십니까? 그러면 행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를 그렇게 하고 왔습니다. 이 자매가 말하고 숨 쉬고 걸어 다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환상적 예언! “뵈닉스로 가게 되면 위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안 갔으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기고 갔습니다. 거기 가야 재미있는 겨울을 보낼 수 있으니까 선원들이 “여기는 아무것도 놀 것이 없으니까 유흥가에 가서 겨울을 재미나게 보내고 그리고 로마로 가야지!” “그러면 고생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말대로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 광풍을 만나서 사경을 헤맬 때 “너희 생명은 한 사람도 상하거나 죽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라!” 그대로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34절에 “머리터럭 하나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으로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기도할 사람입니까? 특전 사령부 아구스도대, 로마에서 파송된 군인들이 “야! 너희 죄수들 말썽부리면 죽여 버려!” 이런 특명을 받고 온 사람들이 “기도하자!” 기도할 사람입니까? 그런데 다 고분고분 순종하고 축사하고 성찬식 거행하고, “먹어라!” 다 먹고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배에 탔던 276명은 바울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느냐? 바울이 기침만 하여도 긴장합니다. “아이고, 네! 잘못했습니다. 뭐 어떻게 할까요?” “아니다. 기침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공들이 자기 지식과 경험에의 계산으로 거루를 타고 도망을 갔다면 그놈들은 틀림없이 풍랑에 휩쓸려 죽었을 것입니다. 군사들을 시켜서 “거룻줄 끊어버려!” 꼼짝 못하게 했기 때문에 모두가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바울이 배에 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복인이 하나 들어옴으로 얻은 생명의 행운을 이 사람들이 받은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있는 사람을 친구로 잘 선택해서 사귀라는 말입니다. 잘못 사귀었다가는 화를 만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 교훈의 첫 번째는 하나님은 결정하신 대로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말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두 번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 권위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되고 예언한 대로 됩니다. 세 번째! 위급할 때는 위급한 대로 하나님의 보호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역사 진행에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잘 이루어집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에서 해야 하는 구원의 사역을 바로 이 배 안에서 완벽하게 일차적 끝냈습니다. 큰 권위를 가지고 마치 전쟁에서 이기고 로마로 가는 개선장군처럼 영적 승리의 돛을 달고 로마로 진격합니다. 복음의 선교로 말입니다. 이제 로마로 들어가는 이 배는 빛을 보이기 위한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영적 무장이 다 되었습니다. 276명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 우리 모두가 하나님 일을 할 때 때로는 유라굴로 광풍 같은 것이 온다 하여도 정신을 차리고, 그때마다 성령의 환상을 본 바울이 그 말을 들어서 살았던 것처럼 성령님의 지시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장 선하고 좋은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역사가 나를 통해서 세상에 얼마든지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사의 손길을 바울서신, 사도행전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강해가 거의 끝나 가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되어진 바울의 행전을 한번 보면, 마지막에 로마에 들어간 바울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위해 “너는 이쯤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라!” 로마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의 피를 물들이면서 갔을 때 온 세계가 복음화 되고, 마침내 로마가 세계 복음센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교황청이 뭘 했다고 하면 온 세계가 다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교황청 건물 바로 한쪽에 바울 선생이 칼을 들고 서있는 동상이 있습니다. 성령의 검입니다. 또, 베드로는 무엇을 들고 있습니까?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동상을 쌍벽을 이루며 세워났습니다.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그래서 세계 복음의 중심지가 되는 영적인 역사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과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 진행에 쓰임 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바울을 쓰셔서 세계 선교를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도 세계 선교를 위해서 모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아니해도 우리들이 하는 이 작은 일이 언젠가는 세계 선교의 큰 빛을 비추게 될 것을 믿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갈보리교회가 가는 모든 선교의 역사를 지켜주시고 또 모든 인생이 광풍을 만났어도 결코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아니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보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머리터럭 하나라도
신성종 목사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8-12만개의 머리카락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8만개 정도, 동양 사람들은 10만개 정도 됩니다. 그런데 구약시대를 보면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습니다.
삿16:13-14절에 보면 삼손은 머리가 길었다고 했고, 삼하 14:25-26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도 긴 머리가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왕하2:23-24절과 이사야3:24절을 보면 대머리는 부끄러움으로 취급되기도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레위기 19:27절에서는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머리 깎는 방법은 구약시대 같으면 책망을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6:18절에서는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들은 머리를 길러서 헌신된 것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행18:1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불교의 승려들도 머리를 깎는데 그것은 세속을 버리고, 모든 것을 부처에게 맡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끔 머리를 깎아 어떤 결심을 보이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나실인의 서원에 기원합니다.
오늘은 34절에 “너희 중, 머리 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행27:34절의 뜻은?
머리털은 본래 머리를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따라서 머리 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무도 우리들에게 손 못 대도록 하며 우리의 생명을 지켜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머리털에 비유하여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눅21:18절에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또 눅12:7절에 보면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였고, 마10:30절에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작은 부분인 머리카락까지 지켜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2.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들을 보호하시는가?
하나님의 보호는 여러 가지의 방법과 형태를 통해서 하십니다.
(1)[사람들을 통해서] 보호하여 주십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믿는 성도들은 물론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바울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전에 살펴본 율리오라는 백부장이 바울을 보호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갈리오가 바울을 보호해주었습니다. 43절에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라고 했습니다.
또 행18:10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2)[자연을 통해서도] 보호하십니다.
바람이나 파도나 메뚜기 같은 것들을 통해서 보호하시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자연까지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을 태우고 가는 배가 파도로 침몰하게 되었을 때에도 44절에 보면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해서 바울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3)우리 성도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피하게도 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이기게도 하십니다.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지혜를 주셔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케 하여 마침내 총리가 되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바울도 우리와 성정이 같고,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4)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우리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인도하십니까? 시편48:1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이사야 58: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여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 말씀에는 세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첫째로 항상 인도한다는 것,
둘째로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한다는 것,
셋째는 물댄 동산처럼 풍성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의 방법입니다. 믿습니까?
3.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1)먼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내가 곤경에 처해있으나 주님께서 반드시 나를 인도해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2)[항상 기도]하여야 합니다.
파이로트를 보면 비행기가 격추되어 적의 후방에 떨어져도 본부와의 연락을 통해서 구원군들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본부와의 연락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교신이 끝이지 않으면 주님이 반드시 우리들을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3)[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들이 가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경에 처할수록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4)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길을 열어주시지만 문제는 우리들이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순종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비결입니다.
4.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우리가 하나님께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 것을 말씀해줍니다.
인간의 가치는 원소를 분해를 하여 값을 계산하면 만원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장기별로 계산을 하면 일억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2)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해주신다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안해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평강 속에 날마다 찬송하며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풍랑 속에서의 지도자 바울
사도행전 27:27-44 / 서금석 목사
중학교 미술 시험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품이 누구의 작품인가 하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답은 로뎅이었습니다. 한 모범생이 '로뎅'이라고 답을 썼습니다. 그 옆에 공부를 좀 못하는 녀석이 앉았는데, 답을 베껴 쓰려고 옆을 힐끗 쳐다 보았습니다. 답이 보이긴 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아이의 눈이 좀 나빠서 '오뎅'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로뎅'을 '오뎅'이라고 썼습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녀석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힐끗 옆 사람 답을 보니까 답이 '오뎅'이예요. 그냥 쓰기에는 너무 쉬운 답이라서 선생님께 옆 사람 것 보고 썼다고 들킬 것 같아 나름대로 고쳐 썼습니다. "뎀푸라" 그 옆에 있는 학생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옆을 보니까 답이 '뎀푸라' 입니다. 너무 쉬운 답이라서 자기 나름대로 고쳐 썼습니다. '어묵'
누가 만든 이야기이겠지만, 무엇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가 보고 배울 만한 제대로 된 모델이 없는 시대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처럼 살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정작 찾아보려고 하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위기의 상황임에는 분명한데도,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래 저 사람이야'하고 힘을 실어 줄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자녀들과 세상 사람들이 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삶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모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사람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벌써 풍랑 속에서 죽음과 싸워온 지도 14일이 되었습니다. 미항을 출발해 뵈닉스로 가던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폭풍에 밀려 미항에서 840km 떨어진 멜리데 섬 해안까지 휩쓸려 갔습니다. 멜리데 섬 해안에 이르자 그들은 육지가 가까이 있음을 짐작했습니다. 그들은 배의 뒷꼬리 부분인 고물에서 닻을 내려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한 후,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면서 두려움은 더해갔고 이를 이기지 못한 몇몇 사공들이 닻을 내리는 척 하면서 구명선(거루)을 내려 도망가려 했습니다. 바울이 이를 수상히 여겨 백부장과 군사들로 하여금 이를 저지케 했습니다. 그러나 군사들은 도망하려는 선원들은 막았지만 구명선까지 끊어버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먹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벌써 여러 날 동안 제대로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있는 힘을 다해 이 위기를 빠져 나가려면 먹어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먹자, 바울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풍랑에서도 재산이 될까 해서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밀까지 버리게 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육지를 볼 수 있게 되었고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킷줄을 늦추어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해 해안을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래톱에 걸려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죄수들과 선원들은 아우성을 쳤고 죄수들이 도망갈 것을 두려워했던 군사들은 죄수들을 모두 죽이려했지만, 백부장이 바울을 구하려 하여 죄수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부장은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헤엄을 치게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에 있던 물건들을 의지해서 육지에 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바울이 예언했던 대로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모두 무사히 상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얻어야 할 영적 교훈과 지혜는 무엇입니까?
1. 광풍과 풍랑속의 지도자 바울(27-32)
⑴ 도망가려는 사공(27-30)
먼저 27절로 30절까지의 말씀을 봅니다.
"27열 나흘째 되는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 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 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14일 동안 풍랑 가운데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선원들은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육감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육지에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배반의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닻을 내리면서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모두들 노력하고 있는 사이에 몇몇 선원들이 구명선을 내려 자신들만 도망가려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이들이 도망가려고 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그동안 목숨을 앗아갈 것 같았던 폭풍 속에서 속히 빠져나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온몸으로 겪던 불안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선원들입니다. 배를 안전하게 운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살고자해서 도망한다면 배에 남은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참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참 모습은 언제 드러나는지 아십니까? 평탄할 때는 모두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때에는 실체가 드러납니다.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위기의 때에는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주위사람을 격려하고 힘을 모아 해결하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거짓 지도자는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면서 자신의 것을 먼저 챙깁니다. 가족들을 먼저 피신시킵니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만 독려합니다. 진실은 밝혀집니다. 시간가면 압니다. 위기가 극복되겠습니까?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선원이 도망가면 풍랑이 멎는다 해도 배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더구나 모두 다 버려서 제 기능도 할 수가 없는 배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남 말할 것 무엇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속회지도자로서, 교사로서, 성도로서 교회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까? 강단에서 소리치고, 간곡하게 광고해도 멀리서 관망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 하겠지. 전도는 열심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몇 번 광고하다가 지치면 말겠지. 열심 없는 다른 사람이 청소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누군가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춘천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합니다" "예, 내가 하겠습니다" 도망가려는 선원들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⑵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지시하는 바울(31-32)
미항에서 출항할 때까지는 이 배의 모든 것은 백부장의 지휘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대로 폭풍이 심해지고 배도 사람들도 모두 위태로워지자 백부장과 선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31-32절을 봅니다.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사들이 거룻 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성도 여러분,
무엇이 보입니까? 바울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것이 보입니까?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명령합니다. 이제 바울은 속된 말로 실세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뒤바뀌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난세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바울이 모든 사람을 지휘하는 진짜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지도자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기의 상황을 헤쳐 나갈 힘이 없는 백부장에게 이 위기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가 되어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만 살려고 도망치려는 선원들을 백부장과 군사들로 하여금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벌써 세 달이나 된 이야기지만, 미국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죠지 W. 부시 대통령이 먼저 누구를 찾았는지 아십니까? 바로 빌리 그래햄(Billy Graham) 목사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앙의 힘에 의지하는 부시 대통령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시 대통령이 힘이 없어서 그랬습니까? 아니지요. 테러사건 때문에 죽은 영혼을 기리기 위한 추모예배의 설교도 빌리 그래햄 목사가 맡았습니다. 설교에서 빌리 그래햄 목사는 "테러는 당한 이번 주가 외면적으로는 엄청난 슬픔의 주일이지만, 영적으로는 새로운 기초를 세우는 놀라운 믿음의 주가 될 것"이라면서 모든 미국인들이 하나님께 의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일후에 국민일보 9월 18일자 신문에는 빌리 그래햄 목사야말로 미국 테러사건 이후 미국 사회를 하나로 묶는 영적 지도자"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기의 때에는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⑶ 선원도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기들만 도망가려고 했던 사람들을 발견한 후 그들을 막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은 바다와 풍랑에 대한 지식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처할 수 있는 지혜도 있었고, 이제 날이 새면 육지에 상륙해야 하는데, 선원들이 없다면 상륙하기가 힘이 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 일행이 풍랑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분명 바울 일행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역할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분명 위기의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원처럼 자신만 도망가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위기의 상황을 이겨나가는데 귀하게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자애로운 지도자 바울(33-37)
위기의 순간에 바울이 대처하는 모습을 보세요. 어떻습니까? 33-3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34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육인이러라."
⑴ 먼저 바울은 먹으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먹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오랜 풍랑과 싸웠기에 그들은 지쳐있었고 거기다가 제대로 된 음식은 먹어보지도 못했으니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지쳐 있기에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운 차리고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점을 미리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육지로 상륙하는 과정에서 헤엄을 쳐야 하는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되었습니까?
41절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그렇습니다. 모래톱에 걸렸습니다. 배 앞부분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게 되었고 배 뒤편은 높은 파도에 부서져 버렸습니다. 위기입니다. 구명선도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헤엄을 치거나 널빤지를 붙잡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사전 조치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힘이 없어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먹고 기운 차리게 함으로 헤쳐 나갈 힘을 갖게 했습니다.
⑵ 안심시켜주는 목회자.
바울의 자애로운 모습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34절을 함께 봅니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사실, 바울을 제외한 다른 선원들 머리 속에는 이 위기의 상황을 어떻게 하면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터에 바울이 먹을 것을 권해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한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은 자가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살고 싶다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리고 걱정마라. 너희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평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평온을 찾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지도자가 먼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힘들어하는 사람을 다그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위로하고 안심시켜 힘을 얻도록 해야 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때로 우리가 이런 것 잊을 때가 많지요. 힘들어하는 사람, 낙심해 있는 사람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불을 지피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할 수 있으면 바울과 같이 이웃에게 참된 평안을 갖게 해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⑶ 감사를 잊지 않는 바울
바울은 위급한 순간에도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35절입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바울은 다급한 상황이라고 해서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백부장과 선원들에게 있어서는 감사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먹는 것을 앞에 두고 여유 있게 감사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급할 때 일수록 감사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믿음의 승리(38-44)
38절 이후부터 위기를 극복하는 마지막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⑴ 밀까지 버리라.
먹을 것을 다 먹게 한 바울은 이제 배를 더 가볍게 하기 위해 밀을 버리도록 합니다. 사실 이 밀은 로마에 가서 장사할 밑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하물(18절), 배의 기구들(19절)을 버리고 닻까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밀은 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 정도로 밀은 그들에게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이 순간 밀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목숨 건지기 위해 모든 소유욕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내 목숨 죽으면 내가 가졌던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헛된 소유욕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보지 않습니까? "왜 저럴까? 저것을 진작 포기했더라면 인생이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텐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헛된 욕심은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욕심 버리세요. 어려울수록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욕심 버리세요. 세상 자리에 대한 욕심 버리세요. 물질 욕심 버리세요. 인생이 훨씬 밝아지고 편안해 집니다.
⑵ 마지막 기회
밀을 버림으로써 배는 경사진 해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원들은 닻을 끊어버리고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상륙을 시도합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닻까지 끊어버렸습니다. 닻을 끊는다는 것은 때로는 배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일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들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되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결심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향후 2-3년이 저나 여러분, 춘천 중앙 교회에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여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새 역사를 힘차게 열어갑시다. 열심히 합시다.
⑶ 바울 때문에 살게 된 죄수들
닻을 끊고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상륙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래 톱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자 죄수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도망칠 것만 같았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군사들은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비상시에는 법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수를 죽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까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군사들에게 죄수를 죽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려고 했을까요? 위기를 극복하는 바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겠지요. 쉽게 죽여서는 안 될 인물임을 깨달았겠지요. 바울의 신앙이 백부장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 한 사람만 살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다른 죄수들까지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이 말한 대로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모두 온전한 모습으로 상륙합니다. 275명이 모두 다 무사하게 살게 된 큰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로마에 가서 죽음의 위기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거자-전도자가 되라고. 오죽 잘 전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만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셋만 살아서 로마에 갔다면 항해 도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누가 믿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방인들이 믿겠습니까?
결론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바울은 감옥 생활을 하면서 생각지 못한 처지로 로마로 가게 됩니다. "너는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이 있었기에 그래도 바울은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으로 가긴 했지만 그러나 패배자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풍랑을 만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희망을 주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승리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바울을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했습니까?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이 힘이 드십니까?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바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