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
오늘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루카복음(10,25)에서는 율법학자가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마태 19,16)
그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 어떤 공로를 쌓고 그 공로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마태 19,17)
생명을 얻는 길이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은 ‘행위’를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러한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이 말씀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그리고 '당신께로 오라',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네 가지 행동의 실행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네 가지를 통한 ‘행동의 전환’을
말씀하고 계신다기보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곧 이 문장의 핵심은 뒤 구절에 있습니다.
뒤 구절은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는 존재,
곧 ‘당신께 속한 사람’, ‘당신의 소유’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 구절은 그러한 존재가 되는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자청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쥐락펴락하는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의 재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고, 재물을 따랐던 것입니다.
곧 '자신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적 전환을 요청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마태 19,22)
오늘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슬퍼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슨 위대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소유,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제는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