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76
9월10일[연중 제2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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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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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9987P4xl5Ms
[서울대교구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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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기도 바칠 때, 온 삶과 정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지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파격적인 모습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그분의 적극적인 추종자로 따라나섰는데, 당시 12 사도단뿐만 아니라 72제자단도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더 많은 숫자의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셔서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다음, 그들 가운에 12사도를 뽑으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이루어진 일종의 주교 서품식이 막 끝난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간택된 열두 사도,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을 앞세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평지로 내려서시니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 이윽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어서 은혜로운 치유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 영혼의 질병, 마음의 질병, 정신적 병고를 앓던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목격했습니다.
이 모든 배경에는 밤을 꼬박 샌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너무나 간절하고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너무 힘든 분들, 꼭 한번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밤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최선책이 아니더라도 차선책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지금 처한 힘겨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적어도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과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냥 기도하지 않으시고 밤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어느 정도 열정과 마음이 담겨있는지요? 우리는 기도 바칠 때, 온 삶과 정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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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iJyXvzoz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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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만 현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 능력을 지니고 계셨지만, 제자들을 뽑으실 때는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이 되셔야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뽑을 때는 자기 생각으로 뽑지 말고 기도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를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도는 겸손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교만합니다. 대부분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합니다. 모든 죄는 다 이 교만에서 비롯되고 모든 고통도 그것 때문에 생겨납니다. 겸손하여지려면 결정이나 계획을 내가 하지 말고 미래를 아시는 분께 물어보는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할 줄 알지만, 어른이 되면 신이 되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미래가 현재이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마지노’ 방어선은 1930년대에 프랑스가 독일과의 동쪽 국경을 따라 건설한 거대한 요새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당시 프랑스 국방 책임자였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이 방어선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프랑스가 겪은 파괴, 특히 독일의 침략에 대한 대응책이었으며, 앞으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노 방어선 건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진행된 기념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콘크리트 벙커, 중포병 진지, 전차 장애물, 지하 막사, 다양한 요새를 연결하는 터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정교한 군사 방어 시스템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그이 프로젝트는 국가 방위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마지노 방어선은 강력한 방어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노 방어선은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정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을 위해 설계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빠르고 기동적인 전쟁 형태인 전격전이 부상했습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아르덴 숲을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여 방어선을 우회했습니다. 이 숲은 대규모 군대가 통과할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당신의 전차는 그 숲을 통과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전차는 그만큼 강력해졌던 것입니다. 마지노선은 그렇게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교만함은 이렇듯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렇게 지금까지도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보다는 적어도 바리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
영국이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강력한 하나는 항해술의 발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능을 믿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1707년 클라우즈리 쇼벨 제독이 영국 해안에서 실리 제도 근처의 함대 위치를 잘못 판단하여 4척의 배와 거의 2,000명의 병력을 잃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있었지만, 경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1714년 경도법을 통과시켜 바다에서 경도를 반도의 정확도로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최대 20,000파운드의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1714년 £20,000의 추정 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4~£5백만이 되고 원화로 환산하면 현재 환율 기준으로 약 70~80억 원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독학으로 시계를 만든 영국의 존 해리슨이었습니다. 해리슨은 경도를 결정하는 열쇠가 바다에 있는 동안 알려진 기준점(예: 그리니치)에서 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정확한 시계를 갖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원들이 자신의 위치와 그리니치 사이의 시차를 알고 있다면 경도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크로노미터를 사용해 영국은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나라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나아가 무역과 군사, 식민지 확장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나의 2만 파운드를 미래를 아는 지식을 위해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겸손의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끝까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주님께서 알려주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지상에서도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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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판관기 9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나쁜 지도자를 선택하면 피해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솝우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때 연못에 사는 개구리들은 그들 자신을 다스릴 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에게 왕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우스는 개구리들의 요청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통나무 하나를 던져 주었습니다. 통나무는 연못에 떨어져서 큰 소리를 냈고, 개구리들은 처음에 겁에 질려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통나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개구리들은 그것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개구리들은 곧 통나무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너무나도 무기력하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우스에게 더 강력한 왕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우스가 그들에게 황새를 왕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황새는 개구리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먹기 시작했고, 개구리들은 다시 제우스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제우스는 개구리들의 요청을 더 이상 들어주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나쁜 지도자를 선택하면 피해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의 역사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말기에 백성들은 ‘동학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동학은 잘못된 조정의 폭압과 폭정을 바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많은 백성은 동학의 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탐관오리와 부패한 관리들의 부정과 불의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가 동학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부패한 관리들을 엄벌하였다면 조선은 국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학의 기세에 눌린 조선 정부는 외세의 힘에 의존하였습니다.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일본에 원병을 청하였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와 패권 전쟁에서 이긴 후에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었습니다.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삼켜버리듯이, 황새가 개구리를 잡아먹듯이, 일본은 조선을 삼켜버렸습니다. 2024년 대한민국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습니다. 우리가 단결하고, 힘을 키우지 않으면 또 다른 가시나무와 황새가 우리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사제와 율법 학자들에게 잡혔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코스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칼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칼로는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만이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12명의 사도와 함께하셨습니다. 나의 신앙은 온전히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참된 내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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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2-19: 열두 제자를 뽑으시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12절)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이름 지어 주시기 위해서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로 임명하셨다. 그분은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으시고 어부들(마태 4,18 참조)과 세리들(마태 10,3 참조)을 뽑으셨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재물과 권력과 명예 때문에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논쟁 실력이 아닌,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제자직은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다. 그러니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게 해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예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 실행하여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닮을 수 있고,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고,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이다.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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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몇 가지 죄들을 열거하면서, 이러저러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폭력을 쓰시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실 때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교리에서 말할 때는, ‘지옥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로 표현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서 결정적인 것은 인간이 끝까지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그들 가운데에도 이런 죄를 짓던 이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코린토는 번화한 항구 도시였고, 도덕적으로 그렇게 훌륭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신자들도 전에는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다는 것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한 번 세례의 은총으로 죄가 없어지고 깨끗하게 되었는데, 이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간다면 하늘 나라도 다시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제 독서에서 묵은 누룩을 없애고 반죽을 깨끗이 하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다는 것을 핑계로 하느님께서 한 번 깨끗하게 하여 주신 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지금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다는 점도 살펴야 하겠습니다. ‘이교도들’과 구별되는 ‘성도들’은 바깥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공동체를 하늘 나라에 합당하게 간직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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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책>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2-19).”
1) 사도들의 명단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복음서에 사도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뒤의 8장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과 의미가 같은데, 하느님 나라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생명의 책’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20,12-15)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심판 때에 펼쳐지는 책은 두 권입니다. 첫 번째 책은 모든 사람의 모든 행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고, 두 번째 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2)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도 생명의 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는 에우오디아에게 권고하고 신티케에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뜻을 같이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나의 진실한 동지여, 이 여자들을 도와주도록 그대에게도 당부합니다. 이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나의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필리 4,2-3) 구약성경 시편에도 생명의 책이 나옵니다. “그들이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시편 69,29)
‘생명의 책’ 자체가 ‘구원’을 상징하는데,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고,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님께서 이름을 미리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기록되기도 하고, 기록된 이름이 지워지기도 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책에 내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는 것은 사실상 ‘나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의 명단이 ‘생명의 책’을 상징한다면, 왜 배반자 유다의 이름이 들어 있는가? 배반자 유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서 지워진 이름이지만, 처음에는 이름이 있었다가 나중에 지워지면서, 지워졌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지운다고 해서 흔적도 없이 지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이름이 기록되어서 영원히 보존되는 ‘세례대장’의 경우에, 중간에 다른 종교로 개종한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냉담자가 된다고 해도, 이름 자체를 지워 없애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위대한 사도이며 순교자로 영원히 그 이름이 남아 있겠지만, 배반자 유다는 배반자로 영원히 그 이름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 자신이 자기 이름을 배반자로 적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자신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4) 복음서 저자는 열두 사도 명단 다음에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든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확성기나 앰프 같은 것도 없이 예수님의 설교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상황에서는 군중 사이에 전달자들이 있어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다음 전달자가 그것을 듣고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다시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사도들이 그 전달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면, 그것을 들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역할. <그것은 교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사람들의 간청을 모아서 주님께 전해 드리는 일……. 그 일은 성직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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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자주 산에 오르시어 따로 기도하셨는데 (마태오 14,23 ; 마르코 6,46 ; 루카 9,28 참조), 특히 밤새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셨다는 언급은 오늘 복음에만 나옵니다.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일은 그분께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도’(apostolos)라는 그리스 말은 ‘파견하다’라는 뜻의 동사(apostello)에서 온 것으로 ‘파견된 자’를 뜻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제자’라고 부른다면, 사도는 복음 선포와 치유와 구마를 위하여 파견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동참하는 특별한 이들입니다.(마태오 10,1-4 ; 마르코 3,13-15 참조)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들 가운데에는 소박한 어부들은 물론, 동족에게서 외면당하던 세리, 무력으로 저항하던 열혈당원, 심지어 뒷날 그분을 팔아넘길 배신자도 있었습니다. 밤새워 성부께 기도하여 뽑으신 사도들이 이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인 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당신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며(루카 10,21 참조), 언제나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하여 크신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로마에 협조하던 세리와 저항하던 열혈당원, 예수님 앞을 막아섰던 자와 그분과 함께 죽기를 독려하던 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와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던 이, 이토록 서로 다른 이들이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 거룩하고 의롭게 된’ 우리도(제1독서 참조), 복음을 증언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치유를 전하는 주님의 사도로서 충실히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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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
예전에 보좌신부로 있을 때 일입니다. 병자성사 요청을 받고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연로하신 분이 병자성사를 청한 줄 알고 찾아갔는데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의 병자성사를 청한 것이었습니다. 사정을 듣고 보니 그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뇌가 없이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는 며칠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놀랍게도 수개월이나 엄마 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먹먹한 가슴을 누르고 병자성사를 마치고 나니, 아기 엄마가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예요.”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를 향해 눈길을 준 적도 없고 옹알이 한 번 하지 못한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서, 저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똑똑한 머리나 능력을 기준으로 뽑으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사람까지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셔서 당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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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셨다.” (6,12.13)
요즘 취업난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까닭은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취업하려는 사람들이 원하는 자리, 소위 고시考試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자리나 대기업에 마땅한 자리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취업 경험자들이 증언한 취업 성공 요건이란 자기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려는 담당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는 것입니다. 취업 성공을 위한 요건은 첫째, 관련 직무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는가, 둘째 좋은 태도와 매너를 가지고 있는가, 셋째 기본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결국 취업 성공의 비결은 채용하려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 실제로 이런 감각이 월등한 사람들은 보통 실용 지능이 높고, 회사에서도 신입사원으로 채용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맡을 사람, 곧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고 선택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성격이나 자질, 능력을 겸비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이후에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아 사도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아빠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누신 후, 아빠의 뜻을 세상에서 선포하고 증언할 사도들을 제자들 가운데서 뽑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동고동락해 온 많은 제자 가운데서 그들의 스펙이나 능력을 보고 선택하기보다 그들의 내적 태도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과 열정을 꿰뚫어 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사도로 뽑힌 것은 그들의 성품이나 능력이나 자질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1,27~29)라는 고백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렇게 적합한 제자가 누구인가를 식별하고 분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기 전에 산에서 기도하시고, 산에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점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산 혹 광야는 예로부터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곳이며, 그곳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소명을 내리셨습니다. (탈3,1;4,27;18,5;24,13; 1열19,8; 에28,14)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르9,2; 마태17,1; 루9,28) 그래서 예수께서는 산에서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내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제자 가운데서 열둘을 선택한 후,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들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여러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6,17)라는 묘사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 모여 들였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루카 사가는 이렇게 산과 평지를 구분하고 있는데, 산은 소명의 장소였다면,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미 예수님과 사도들은 산에서 기도하시고, 평지에서 치유의 활동이 시작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제자들 역시 제자에서 사도로 바뀜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역할에도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는 산과 평지, 즉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둔 이유가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모세가 십계판을 들고 내려올 때까지 백성들이 산 밑에서 기다렸던 것처럼 여러 지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를 복음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6,18) 산상수훈을 듣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처럼 이들 역시 예수님의 가르치신 말씀에서 위로와 위안을 받고, 질곡 같은 삶의 힘듦과 병듦에서 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몰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보루, 잃어버린 삶의 꿈을 일깨워 주는 희망의 선포자이며 안내자였겠지요. 그러기에 그들의 일차적인 바람은 질병의 치유나 악령으로부터 해방보다 우선해서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로 자신들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길을 보여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막막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존재 자체와 활동은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의 빛이며 끈이었으리라 봅니다.
그러기에 2014년 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한 한국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희망의 지킴이’로 살도록 권유하셨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여러분은 희망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주자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시행하여,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꾼은 언제 어디서든지 세상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불러 일크는 사람이며, 그것이 참된 신앙 선포의 핵심입니다. 복음 선포는 곧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고 활동을 전하면서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의 역할을 하는 게 최우선적인 사명이자 역할입니다. “주님, 당신의 심령으로 충만하도록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당신께서 하신 일을 지속하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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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사랑하는 상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좋게만 본다는 의미입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이렇게 콩깍지가 씌어서 결혼한 친구가 기억납니다. 자기 여자 친구라며 저와의 만남에 데리고 왔는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친구는 제게 물었습니다.
“정말 예쁘지 않니?”
솔직히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그래.”라고 말했다가는 이 친구에게 맞거나 의절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인데?”라고 말했더니, 너무 좋아서 웃던 이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생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의 전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자기를 바꿔놓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원하는 모습, 좋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를 싫어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연관된 모든 것이 좋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됩니다. 여기에 자기 욕심이나 이기심이 자리 잡지 못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건이 붙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니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진짜 사랑도 아니고, 자기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진짜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콩깍지가 씌어야 나의 진정한 변화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뽑아서,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 사랑을 직접 보고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지만, 주님의 사랑을 보고 또 마찬가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은 제자들이지만,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지도 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사랑하지 못하니, 세속적인 이익만을 챙기게 됩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을 통해 변화되지 못하면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 콩깍지가 씌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 역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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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르심은 자격이고, 응답은 능력이다>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와 허물이 많은,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한편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카6,12)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해질 것입니다. 겁이 많은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우울하고 회의적인 토마스도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에도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뽑힌 이들 조차도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기에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십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품이 커서 스승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특별히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뽑은 이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제들도 다양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제들을 일치하게 하는 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거기에서 기적의 힘이 나왔습니다. 기적의 힘은 사람의 유능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 온전한 의탁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은 곧 능력입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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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루카 6,12-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예수님과 군중)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을 만나러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만이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러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을 만난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함께하러
하느님과 함께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사람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러
사람과 함께합니다
사람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되러
하느님처럼 됩니다
하느님처럼 되는 사람만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러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되는 사람만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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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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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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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녀다운 삶, 제자다운 삶, 사도다운 삶>
-“기도가 답이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열정, 피곤하거나 지친 모습이 전혀 없는 영원한 청춘, 교황님의 활약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어제는 동티모로 국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믿음의 토착화를 강조하신 연설 한 대목이 참 신선했습니다.
“날마다 자기들의 믿음을 살아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문화가 되도록 하십시오.”
오늘은 주로 기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순교자성월 10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은 명실공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수확의 계절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생명줄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들의 삶은 살아있는 듯 하나 실상은 죽은 삶입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참으로 믿는 사람 모두에 대한 정의입니다. 자녀다운 삶에, 제자다운 삶에, 사도다운 삶에 기도가 답입니다. 여전히 날마다 만세칠창 기도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시작하여 “아멘” 하느님 감사로 끝나는 하느님 중심의 하루요 일생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날게 하는 영혼의 양날개가 찬미와 감사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기도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기도와 회개, 깨어있는 삶은 늘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오르막길은 어렵지만 끈기로 성취할 수 있고, 내리막길은 쉽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다산>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듯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담이 무너지듯 순간이다.”<다산>
젊을 때나 노년이나 한결같은 기도의 삶이 제일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않는’,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는’ 지혜도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수도원 입회후 사십년이 지났어도, 하루하루 날마다 기도해 왔어도 여전히 초보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배우고 공부해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삶만 봐도 언제나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기도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음도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의 배치도 의미심장합니다. 어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중 열두 사도를 뽑아 사도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개인의 한계를 절감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명실공히 ‘안으로는 제자로’, ‘밖으로는 사도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샘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 온통 집중하셨을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께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일치의 기도는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열두 사도들은 그대로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열두 사도들은 자녀다운 삶에, 제자다운 삶에, 사도다운 삶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두 사도의 면면이 다양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제자들이자 사도들의 한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예수님 중심의 다양성의 일치라는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서로 좋아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인 주님께 맞춰감으로 이뤄지는 다양성의 일치요, 이것은 우리 수도공동생활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어 열두 사도를 뽑으신 주님은 함께 내려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 모두를 낫게 하시니 그대로 기도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예수님 중심으로 커다란 치유 공동체를 형성된 모습이 흡사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주목되는 대목이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이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다시피 코린토교회 신자들중 일부는 다양한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고 있음을 봅니다.
교우들간의 송사문제에 이어 불의한 자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우상숭배자와 간음하는 자들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 자들, 즉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기도의 삶을 잊음으로 자초한 결과가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삶을 살게 하시고 온갖 더러운 영들을 퇴치해 주시어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미사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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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힘을 듬뿍 얻으려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제가 잘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에 비해 그 가운데서도 마태오 복음과 비교하여 평지를 강조하거나 산 위와 평지를 대조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 유명한 행복 선언을 비롯하여 중요 가르침들을 주님께서 산 위에서 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기에 그것을 특별히 일컬어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산상수훈과 병행하는 루카 복음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도와 제자들을 뽑으시는 것은 산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평지에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산에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지에서도 만날 수 있어야지요.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떠나고 오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제 주님께서 귀먹은 이를 데리고 나가 따로 만나주셨듯이 하느님과 나만을 위한 배타적인 시간과 은밀한 만남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주님과의 이런 배타적이고 은밀한 시간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데 늘 누가 껴있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배타적이고 은밀한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밀애를 나누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방해 없이 안식을 취하고 힘을 듬뿍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평지에 와서 지치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한 말을 묵상합니다. 이것을 조금 바꾸면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잃지 말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또 일하다 보면 정신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요즘 정신이 없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또는 생각 없이 내뱉습니다.
정신없이 살면 안 되잖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면 되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하는데, 먼저 차려야 할 정신이 기도의 정신/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랑이 올 때 등불을 들고 마중 나가는 것 곧 깨어 있음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헌신의 정신도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정신으로 주님의 영/성령만 제대로 모시면 헌신의 정신은 따로 차리려고 들지 않아도 차리게 되고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의 정신으로 주님의 영만 모시게 되면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루카 복음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는 루카 복음 6장을 읽는데 4장 공생활 시작 부분을 이렇게 묘사하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우리는 헌신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오늘 주님처럼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이웃에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쉬지 못해 지친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고 잘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쉬는 것이 잘 쉬는 것입니까? 하느님 안에서 쉬어야 잘 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쉬지 않아서 지친 것이고,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아 지치는 것임을 묵상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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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6,12)
<하느님의 일꾼들!>
오늘 복음(루카6,12-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군중에게 설교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사도로 뽑으십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6,14-16)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일꾼(협조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고, 예수님의 뒤를 이어 일을 해야 할 일꾼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뽑인 일꾼들이 바로 '열두 사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과 세상 복음화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에 필요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본당 주임신부'는 소속 교구장이 파견한 '본당 사목자'입니다. 나머지 모든 직분(본당수녀와 사무장과 사목협의회와 제단체장들)은 모두 '본당 사목자의 협조자들'입니다.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데에 필요한 '일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후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마태오처럼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으면, "예!" 하고 대답합시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으로 "예!" 하셨고, 남자를 알지 못했던 마리아도 "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십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하느님의 일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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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삶의 중심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를
만나게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기도입니다.
밤을 새우시는
예수님의 기도로
예수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삶의 첫자리에
언제나 기도를
두셨습니다.
기도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기도로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도가 있고
기도와 기도 사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기도로 선택하시고
기도로 이끌어가시는
주님의 방식입니다.
기도로 살아계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셨습니다.
마음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어야합니다.
구원의 첫시작또한
기도였음을 기억합시다.
삶의 중심은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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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필요한 것은 매일 매일의 기도이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로 탄생 되는 제자들이며 열두 사도들이다.
우리 또한 기도하는 자세로 살길 바라신다.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가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는 간절한 만남이며 하나 되는 간절한 일치이다.
삶의 길은 기도의 길이다. 기도의 삶은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 삶은 믿는 것을 기쁘게 실천하며 고통까지 겸허히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기도의 삶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기도의 삶은 새로운 삶의 뜨거운 시작이다. 힘든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내적 평화와 내적 기쁨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함께하시는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밖에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구하는 기도이다. 삶의 구심점은 간절한 기도이다. 간절한 기도로 재창조되는 우리의 마음이며 간절한 우리 삶이다. 사람의 삶이 기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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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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