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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NBA 원문보기 글쓴이: 에어니스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싸움'…한국인도 외면하는 '장진호 전투'
지도에서 보이는 x표시는 미군표시이고 밭전자는 중공군 10개사단이다 당시 미군은 병력이 10배가 넘는 중공군과 엄청난 혹한을 상대로 싸우면서 퇴각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장진호 전투란 1950년 6·25 때 미군 제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7개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의 철수에 성공한 작전으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 사이에 있었습니다. 미군 제1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때 원산항으로 상륙하여 서부전선에서 북상중인 미 제8군과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계곡을 따라 강계방면으로 전진하던 중 장진군 서한면 유담리·신흥리 일대에서 중공군 7개사단으로부터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높이 2,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남북으로 뻗어 낭림산맥을 이루고 있고, 흥남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철수작전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은 추위를 무릅쓰고 40㎞의 협곡지대를 돌파하여 철수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철수작전의 성공은 결과적으로 청천강일대에서 수세에 빠져 있는 미 제8군의 철수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또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을 2주간 지연시켜 국군과 미군의 흥남철수를 성공시킬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철수작전에서 미군은 6,532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습니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합니한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습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양쪽 군대 모두 절반이상 심한 동상에 걸렸습니다. 당시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고도 1000미터의 산악지형으로서, 낮기온 영하 20도, 밤기온 영하 45도였습니다.
▲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해병대원들이 1950년 12월 눈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50년 11월 함경남도 장진호(湖)까지 진격했던 미 7사단 3개 대대가 중국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당했다. 중국군이 개입하리라는 첩보를 무시한 채 무모하게 내린 북진 명령 탓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중국의 세탁·청소부 몇몇 때문에 멈춰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해병 1사단은 되도록 천천히 진격했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소신을 갖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은 곳곳에 병력과 보급품을 남겨두고 야전 활주로도 닦아 뒀다. ▶중국군 제9병단장 송시륜은 15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뒤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만 이동해 장진호 주변에 매복했다.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농민유격대장 출신 송시륜은 주력 부대를 산을 따라 배치해 도로로 진군하는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 영국 해병 등 3만여명을 커다란 자루에 넣듯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포위망은 계곡을 따라 23㎞에 이르렀다.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에 병사 절반이 동상에 걸렸다. 스미스 사단장은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고 독려했다. 선두에 섰던 장교는 훗날 이 길을 '지옥불 계곡(Hell fire valley)'이라고 했다. 미 해병은 사망 2500명, 부상 5000명에 이르는 사상자 대부분을 수습해 함께 퇴각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됐다.
▲ 17일간의 참혹한 전투. 패전에서 살아남은 전사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한다. 패배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고정일은 장진호 전투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더이상 외면하지 않아도 될, 불편하지 않 은 사실이다. ▶1983년 이 전투에서 싸웠던 미군들이 '초신 퓨(Chosin Few)'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일본 지도밖에 없었던 당시 장진의 일본식 지명 '초신'에, 살아남은 사람이 적다는 뜻의 '퓨(few)'를 붙였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마틴 러스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언은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펴냈다. 미 해군 순양함 중엔 '초신함(USS Chosin)'도 있다. ▶미 해병 대위 출신 영화감독 브라이언 이글레시아스가 장진호 전투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초신 퓨' 회원들을 인터뷰해 전멸 위기를 벗어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는다고 한다. 영화 제목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잊지 않고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6·25 휴전일인 지난 7월 27일을 참전용사를 기리는 국가기념일로 공포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이름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장진호 전투관련 동영상 링크입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3057077&q=%C0%E5%C1%F8%C8%A3%20%C0%FC%C5%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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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맥아더의 희대의 뻘짓......
미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사람이, 몇개월 못가서 '미군 역사상 최대의 참패' 를 이끈 존재가 되었죠. 해병대 사령관과 워커 중장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전혀 탐색 없이 무조건 개돌한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에 완벽하게 걸려든...
전 맥아더보다 만주에 핵 투하를 반대했던 트루먼에게 더 화가 나더군요. 중공군 기밀문서가 나중에 공개되었는데 그때 미군이 만주에 핵을 떨어뜨렸으면 발빼려고 했다네요. 중공군도 한국전쟁에 함부로 나설수 없었던게 남부에 장개석이 그때까진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트루먼도 쉽게 결정을 못내린게 이미 49년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을 해버려서 잘못하면 핵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간과할 순 없었겠죠. 소련이 만일 핵실험에 성공하지 못하고 미국이 계속 세계유일의 핵 보유국이었다면 혹시 모릅니다. 그래도 아마 미국 VS 소련을 중심으로한 3차대전 발발 가능성도 쉽게 보진 못했겠죠. 미국 입장에선 어떤 상황에서든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의 정식 참전을 바라지 않았을겁니다.
트루먼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맥아더의 정신나간 계획은 미군 합동참모본부에서도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소련도 사실상 핵무기가 있었구요.
당시 중공군은 대부분이 이미 한반도에 들어가 있었고 맥아더가 주장한 만주 폭격은 그냥 열받으니까 중국 민간인을 닥치고 살상하자는 식의 홀로코스트나 다름없는 정신병적 광기였습니다. 당연히 누구도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구요. 맥아더는 자신이 얕잡아본 중공군에서 처참히 패하자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해댔고 원폭 문제도 언플이라고 봐야 됩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미친 계획을 트루먼이 받아들였다고 치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만주는 소련 영토와 극도로 붙어있고 당시 중국은 사실상 소련의 하위국가였습니다. (스탈린 사후 중소분쟁으로 동등한 국가가 되지만) 소련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뭐 스탈린의 성향을 봤을때 뉴욕시를 날려 버리는 그런 짓은 안했겠죠. 그렇지만 한반도의 부산 정도는 어땠을까요?
미군에 직접적인 핵공격은 못해도 한반도의 부산이나 제주도 같은데를 날려 버려서 미국에 경고하기에는 충분했을겁니다. 맥아더의 언론플레이는 그냥 동아시아 민간인들이 다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극한의 이기주의였어요.
만주에 핵 투하라니... 그건 정말 맥아더의 미친 헛소리였어요. contradanza님도 말씀하셨듯이 트루먼이 그런 미친 짓을 했다면 스탈린도 남한에 핵 한발 정도는 얼마든지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그런 소릴 했단거 만으로 자신이 얼마나 생각없는 인간인지 증명한거죠.
그래도 후퇴과정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시킴으로써 미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게되죠.
맥아더ㅡㅡ
분단된것도 맥아더가 결정적이라는 글도 본적았는것 같은데..
맥아더 없었으면 지금 남조선 출신으로 출신성분이 나빠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겠지요. 컴퓨터,핸드폰도 못만져 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