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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도플갱어
double gore
나는 숨 쉬고 있었으며, 내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내 이성과 감성은 나의 지배아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늦은 뒤였다.
망각과 착각.
그리고 뒤 늦게 그것들을 깨달았을 때,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온전한 나를 흠뻑 젖혀 버리는 허무함.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났으며 넌 또 하나의 너를 만났다.
우연의 연속과 필연의 연속 사이의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우리는 만나야 했다.
너와 내가 쫒고 있던 이상(理想)이 교차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은 시작되었다.
*_도플갱어_*
잿빛으로 반짝이는 모던한 도시의 중심에는 끝을 모르고 하늘로 치솟아 있는 은빛 건물이 있었다.
제각각 원하는 스타일대로 치장한 사람들이 제각각의 걸음세로 은빛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제각각이지만 감추어 진 듯 보여 지는 통일된 조직. 사람이 살아가는 곳- 그곳은 ‘사회’였다.
모두들 하나같이 단정했고 심플했다. 특별히 눈에 띄게 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은빛 조직에 들어서 조직원이라는 딱지를 단 그 순간부터
그 위치에서 그 조직에서 원하는 인재가 되어야 했다.
그 이상도 안 됐으며 그 이하도 허락되지 않았다.
솔직해서도 안 됐고 거짓으로 행동해서도 안 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들키면 안 됐다.
하지만 그건 여간 벅찬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회인들이 그랬고 앞으로도 끊임없는 분쟁과 투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법칙에 따르려면
그 정도 정신, 육체적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했다.
일명 은빛 건물이란 곳은 나라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 권력을 쥐고 있는 ‘은성’그룹의 본부였다.
그리고 100층을 넘어서는 그 커다란 건물의 최고층에 속하는 층들은 모두
은성그룹의 권력자들의 공간이었다.
은빛 건물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차 한 대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소품들과 인물은 사람들의 눈요기가 되기엔 충분하고도 넘쳤다.
화려한 리무진이 부드럽게 멈추었고 그 주변을 맴돌고 있던 새까만 정장의 한 남자가
뒷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큰 키를 가진 예쁘장한 남자가 내렸다.
작고 선이 가는 얼굴을 덮고 있는 짧은 커트의 머리칼이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얼굴을 더 작아 보이게 했다.
잿빛의 새미 정장은 맵시 있게 잘 빠져 있었고 모델마냥 서있는 그의 포스도 만만치 않았다.
긴 속눈썹 아래 크고 동그랗게 찢어진 눈매 안에는 촉촉이 젖은 맑은 다갈색의 눈동자가 담겨 있었다.
아담하게 오뚝한 코와 체리 빛 입술........
전체적으로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 희멀건 얼굴은 마치 하나의 석고상-,
아니 생기가 담기지 않은 사람-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인형 같았다.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수근 거렸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한 마디로 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경호원들 그를 마중 나온 고위 관리들이 함께 그들의 전용 승강기에 올라탔고
최고층에 다다르자 승강기가 멈추었다.
그가 매끈한 대리석 위로 발을 내 딛자 그를 맞이하는 안부의 인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그가 아닌 그녀는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모든 계획대로- 순리대로 24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은성그룹 회장의 무남독녀였고 자식이 없는 은회장에게
기적적으로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와 명예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보다 더 엄청난 것들을,
인간의 수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것들을 손에 쥐기 위해-
이미 지니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어야 했다.
**
나보다 머리 세 개는 더 큰 비서가 내 뒤에 섰다.
난 언제나 그래왔듯 창밖 세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귓가로 흘러드는 그의 목소리가 오늘은 조금 더 가라앉은 듯 느껴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스스로가 판단하고 느낄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그가 내게 보고한다고 줄줄 읊고 있는 것들은 다음 주 스케줄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는 한 치도 갈라짐이 없이 또박또박 읊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의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까지입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뇨.”
난 짧게 말했고 난 창으로 비친 그의 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허리 굽혀 인사한 후 몸을 틀고 있는 그였다.
난 계속해서 꿈틀대는 입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목소리가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저기.”
“네, 말씀하십시오.”
“신비서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어요.”
“.........어제 개인적인 일이 있어 잠자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럼 나가 보세요.”
“요즘 들어 비즈니스 이외의 사적인 말씀을 자주 꺼내시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일이 너무 빡빡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조금 여유가 생기네요.
그 공백이 나도 처음이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음날 잠시 잠잠했다 싶었던 나의 비즈니스 트레이닝은
다시금 빡빡한 스케줄로 채워져 되돌아 왔다.
그렇게 한 치도 다른 것에는 생각할 틈이 없도록 했다. 24년 동안.
다른 것들을 생각하기엔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난 나를 버리고 오로지 후계자가 되기 위해 후계자란 이름으로 자라왔다.
그것이 나를 잃어버린, 은세현이란 여자를 잃어버린 24년의 이유였다.
나의 생각 나의 느낌이란 것들은 뛰어난 이론들과 사상들 뒤로 물러나야 했다.
아니 비춰지지도 못했다.
나는 완벽해야 했고 그렇기 위해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석만을 담아야 했기에.
세뇌당해 버린 건지 진정 망각해 버린 건지 난 묵묵히 내 운명을 받아들이며 이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충실히 자라와 주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것, 수동. 이 전부였기에.......
그러던 어느 날 난 엄청난 쇼크에 심장이 진정으로 멈출 뻔했다.
내 심장도 내 것이 아닌데 난 내 마음대로 내 심장을 멈추려 했다.
투명한 쇼 윈도우 뒤로 또 다른 내가 존재 했다.
*
그날은 유난히도 날씨가 좋지 못했었다.
한주 내내 화창한 날씨가 애석하기 까지 했었는데 또 이렇게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니 마음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파장이 일며 울적해 졌다.
왠지, 지금 내가 추진하고 있는 이 일이 잘못된 선택일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서서히 내 숨을 조여오고 있었다.
그날은 4월 초였고 빡빡했던 스케줄이 조금은 느슨해질 무렵이었다.
올해는 적잖이 커다란 일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의 약혼식 거행이었다.
난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한 남자와의 결혼이 예견되어 있었고
올해 여름에 그와 약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의 집안은 뼈대 있는 가문으로 외국 곳곳에
우리나라의 이름을 빛나게 할 만한 큰 업적들을 남겨오고 있는
우리 그룹 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꽤나 만만치 않은,
앞으로 그 성장이 눈부셔서 투자가치가 높은- 그런 그룹이었다.
그 그룹 이름은 ‘Mars’였다.
마르스 회장의 장남인 그의 이름은 ‘최주민’이었고 그의 집안과의 상견례가 내일로 잡힌 것이었다.
그로 인해 난 처음으로, 난생처음으로 여자로서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했고,
그날 상견례 때 입을 예복과 그 외의 소품들을 맞추러
우리 그룹과 연이 깊은 한 유명한 디자인의 Shop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날도 역시 여느 때와 같이 난 묵묵히 그들이 권하는 대로 있어줬다.
같은 인형이었지만,
그날의 배역은 꽤나 기대와 설렘으로 기다려 왔던 것이기에 조금의 언짢음도 없었다.
크림색의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 입고 화려한 메이크업을 마쳤다.
머리장식은 짧은 커트라 더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었는지
드레스와 맞춘 심플한 크림색 헤어 띠로 마무리 했다.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리고는 내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유리 구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른 하늘을 마주 보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바다와 같은 아쿠아블루의 유리 구두엔
색색의 진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고 있자 옆에 서있던 보조가 입을 열어 재촉하듯 말했다.
“아가씨를 위해서 최주민씨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유리 구두입니다. 어서 신어 보시죠.”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난 한 발씩 들어 내 발에 꼭 맞는 유리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마법에 걸린 공주 마냥 또각. 또각. 거리는 구두의 경쾌한 소리에 감동하며
Shop 안을 조심스레 걸었다.
그리고 쇼 윈도우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이끌리듯 다가섰다.
투명하게 비춰지는 나의 모습에 눈물이 나오려 하는데........그 두터운 유리 너머로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감격에 벅차서 인지 서러워서 있지 그 알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난 무너지듯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가씨!!! 어서!! 어서 아가씨를 모셔!!”
웅성거리는 잡음 따위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난 잡아야 했다.
물어야 했다. 왜..........
Shop 문을 거침없이 빠져 나온 나는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나의 그림자와 그녀의 그림자가 나란히 되었을 때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마른 입술을 열었다.
“말도.........안 돼. 이건 꿈이야.”
나 또한 이것이 꿈일까 생시일까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얼굴은 나의 거울이 담고 있는 나의 모습과 완벽하게 똑같았고
목소리 톤조차 소름끼치게 똑같았기 때문에.
“나도 믿을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곳에 함께 있어서는 안 돼요.”
나의 머릿속의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꼭두각시 노릇밖에 못했던 내가 지금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다.
나의 인생 계획에 꽤나 비중 있는 일을 코앞에 앞두고서 말이다.
난 그녀의 팔목을 잡았고 그녀를 끌고 달아났다.
그 누구도 쫒아오지 못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의 아름다운 유리 구두는 이미 벗겨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나 뒹굴었고
난 주저 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렸다.
경호원은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자신들이 알고 지내왔던 은성그룹의 후계자 은세현이 이런 즉흥적인 일을 벌일 줄은.
그만큼 내 존재는 투명했다. 존재 했지만 그건 나의 빈껍데기의 허상이었다.
마치 데이터로 조작된 기계인간이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그녀와 내가 들어선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까마득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하는 당혹감이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미안해요. 놀랬죠?”
“놀란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 왜 날 붙들고 뛴 거죠?
당신의 거울 속처럼 똑같은 내가 궁금해서 인가요? 아님 너무 놀란 나머지 실성해 버린 거나.”
“아직도 믿을 수 없지만 난 당신이 왜 울고 있었는지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당신을 잡아 이끌었죠.”
“우린 똑같이 생겼지만 너무 달라요. 처음부터..........물론 끝도 그렇겠죠.
꿈을 꾸고 있었어요. 그 쇼 윈도우를 지날 때면 매번 눈에 밟히는 드레스가 있었죠.
그리고 항상 난 상상했어요. 그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난 어떨까.
그리고 죽기 전에 한 번.........단 한 번 그 드레스를 만져나 볼 수 있을까.
그런데 당신이 그곳에 서있었어요. 나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당신이 내가 꿈꾸던 드레스를 입고
그곳에 서있었어요. 난 잠시 망각해 버렸죠. 당신이 나라고..........그리고 또 다시 절망에 빠졌죠.
그 쇼 윈도우 위로 나의 처량한 모습이 교차되어 비추어 지고 있었거든요.
사실 난 지금도 미칠 것만 같아.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이 너무 무섭고 두렵고.............
이게 꿈이었음 좋겠어.
아니, 당신과의 만남은 필연일 수도 있었을 거야. 난..........또 다른 난 당신처럼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정말 무섭게 닮았죠, 우리?”
“아니면.........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법한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었을 건가요?”
“..........”
“심장이 한순간 멈출 것 같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와 동시에 황홀한 꿈에 젖어 들었던 것........
이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정말 날 정신병으로 몰고 갈 수도 있겠군요.”
“나 또한 그랬는걸요. 이렇게 심장이 뜨거워 졌던 것은 태어나서 두 번째에요.
내 의지로 그런 감정을 느끼고 반응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의미인 줄 모를 거예요.
난 쇼 윈도우에 비추어진 스스로의 모습에 끌려갔죠. 그만큼 난 스스로의 모습에 흠뻑 취해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보이는 당신의 모습에 그 모든 허상은 날아가 버렸죠.
좋아요. 출생의 비밀일 수도 있고 진짜 우연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 둘의 우연한 만남이 결코 스쳐지나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 처음 보는 당신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우린 똑같지만 결코 서로에 대해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안다 한들 ..........무엇이 달라져야 하죠?
당신과 난 친구가 되어야 하나?”
“친구.........하죠. 우리-. 좋아요, 그 조건으로 당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겠어요.”
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고 그녀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봤다.
“왠지 무섭지 않아요? 난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면 소름 돋는데..........”
“혹시 모르잖아요. 정말 우리가 쌍둥이 자매일지도...........난 오히려 기쁜걸요?”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면...........좋아요.
하지만 친구라는 건 어떤 조건을 내걸고 사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식의 제안은 거북스럽군요.”
“아, 그랬다면 죄송해요. 전 제 스스로 누군가와 사귀어 보거나 그런 적이 없어서 그만 실수했네요.”
“근데 왜 나하고 친구하고 싶어요? 닮아서? 단지 외모뿐인데요?”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이렇게 인연을 맺은 당신과 스쳐지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저.........느낌이군요.”
그녀는 흐르는 땀을 소매 끝자락으로 쓸어내고는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우리 친구 하죠. 대신 당분간은 선을 긋고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어요. 어때요?”
“원래.........친구가 그렇게 사귀어 지는 거라면 난 그렇게 하겠어요.”
난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고 그녀는 날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난 굳어 버린 줄만 알았던 나의 안면 근육들이 활짝........피어오르는 꽃처럼 활짝 미소 지어 지자
기쁨의 감격에 그만 흠뻑 젖어 들어 버렸다. 나를 웃게 만든 사람.............나와 같은 사람.
어쩌면 나의 자매일지도 모르는 사람...............드라마, 영화..........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분명 나의 첫 번째 친구였고, 나의 분신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 내 의지대로 ...........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을 만났다.
“그럼 오늘은 이만 헤어지죠.”
그녀는 말했고 난 한 순간 멍 해졌다.
여기서 헤어지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난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난 다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하는데.
24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지 않았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탈이라는 무서운 욕망이 가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난 잠시 고민하다 입술을 떼었고.........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 자유롭게 된 새는 날개 짓 할 수 있나요?”
그녀는 물었고 난 허공에서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내게...........날개 짓을 가르쳐 주실래요?”
“..........행선지는?”
“가르쳐 주신다면 그 시간동안 생각해 볼 거예요.”
나의 지나온 24년을 되돌아 볼 거예요.
나의 잊어버린 24년을 말이에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당신은 지금 지루함을 달래 보고자 잠시 일탈을 꿈꾸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이 세상을 몸소 접하고 있는 나로선 알아요. 결코 당신이 바라는 일탈은 이 세상에 없어요.”
“난 꿈꾸어 본 적도 없는 걸요. 단지 그 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배가 불렀어.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그 드레스의 가치가 얼만 줄이나 알아?
착각 하지 마.”
그녀는 냉소적으로 말했고 난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실소를 터뜨렸다.
“맞아. 난 나를 몰라서 아니....... 지금의 나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어서 어려요.
죄송해요. 날 이해해 주세요. 우린 친구니까..........다음에 또 만나면 웃어줘요.”
“.........”
“연락처 알려 주실래요?”
“저기..........”
그녀는 나의 제안에 말끝을 흐렸고 꽤나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내내 쿵쿵대는 심장이 바짝 긴장되기만 했다.
“난 당신과 친구가 되기로 했고 우린 친구니까..........친구는 서로를 도와야 하니까.
당신을...........도와줄게요. 당신이 날개 짓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못해요.
그건 스스로 만이 깨달아야 하는 거거든. 당신이 지금 모르고 있는 것은 아무도 답해 줄 수 없는 거예요.
난 사람을 좀 볼 줄 아는데 당신은 언뜻 봐도 적어도 보통 사람 이상으로 교육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나를 도와주시겠다고요?”
“...........네.”
그녀는 잠시 뜸들이다 대답했고 난 더 구체적인 대답을 원했다.
“어떻게........”
“당신에게 자유를..........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빌려주겠어요.
그동안 당신의 날개를 찾을 시간을 갖으세요.
그동안 난 당신이 머물고 있던 자리에서 당신의 대역이 되어 줄게요.”
순간 난 숨이 턱 막히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말려야 했다. 이건 지나쳤다........... 내 자리를 뺐어가다, 라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가 어떤 곳인지 알기에..........이건 말도 안 돼는 제안이었다.
자칫하면 정말 목숨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 곳이 그곳이었다.
적어도 이런 식의 도움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요. 내 생애 처음 사귄 친구를 그런 곳에 보낼 수 없어요.
나 대신에 그런 고통을 받게 할 수 없어요. 나만 좋자고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요.”
“괜찮아요. 평생 그럴 것도 아니고 잠시 뿐인데요.
내가 꿈꾸던 세상을 한 번 누려보는 것인데..............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죠.
난 좋은 걸요. 당신을 도울 수 있고 내가 꿈꾸던 세계를 맛 볼 수 있게 돼서요.”
“겉처럼 그리 화려하지 못해요. 어쩌면 그곳이 진정 지옥일 수도 있겠죠.”
나를 잃어 버려야 하는 것이............어떻게 보면 진정 지옥일 수도 있어요.
지금에서야 정신이 든 나는 이미 늦은 걸까요.
하지만 나도 참 이기적이에요. 도저히............도저히............당신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 못하겠어.
“그래도 좋다면..........당신의 도움 받고 싶어요.”
난 아니까. 자유롭지 못한 새의 운명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알아 버려서............
다시는 그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어.
자유의 쾌락에 빠져서 그런 게 아니야...........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을 뿐.
단지- 지금은 단지 그 뿐이에요.
*
난 그날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홀로 산다고 했다.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고 자신은 일 때문에 서울에 거주한다고 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다름 아닌 옥탑 방이었다. 말만 옥탑 방이지 깔끔한 성격의 그녀의 집은
아담하고 포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눈앞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야경이 더욱도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숨 막혔던 그곳의 야경과는 달랐다.
자유로운 새가 날아드는 도시의 트인 야경은 이루 견줄 수 없을 만큼 멋졌기에.
난 꾸준히 신문과 언론 매체들을 접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나의 부재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은연중 다행이었다.
그녀와의 동거가 시작 된지 일주일이 지났고 우리는 서로 맡아야 하는 역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난 한산한 저녁시간 새로 시작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안 것은.
난 공중파하고는 거리가 멀었었다.
매번 시청하는 것들은 지식의 교양을 위한 비디오나 DVD들 뿐이었다.
그렇게 과일을 먹으며 집중하고 있는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잘하는 것이 뭐야?”
“잘하는 거? 먼저도 말했잖아, 영어. 일본어. 불어. 독일어는 일반회화 문제없을 정도이고,
중국어나 러시아어는 공부중이어서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만 있다고.
또, 대부분의 악기는 다룰 수 있어. 그리고 ......... 그리고 말이지.”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 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 것 쌓아 올렸던 지식들이 경험들이............새하얘지고 있었다.
고작 일주일인데.
하지만 두려운 것도 잠시 다시금 마음이 차분해 졌다.
어차피 버려야 했던 것들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비어놓아야 했으니까.
“그럼 나 그런 것들 다 잘해야 해?”
“아니. 정작 쓸모는 없어서 쓸 일도 별로 없어. 그냥 만능이 되기 위해 배우는 거야.
말 그대로 교양이지. 네가 알아야 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해. 그럼 알 때까지 리플레이 해주니까.”
“..........그래?”
“그럼, 난 네가 다녔던 직장에 다니면 돼는 거지? 그곳에서 특별히 필요한 건 없고?”
“말했잖아. 그냥 솔직하게 대해. 다들 좋은 분들이니까..........그럼 돼.
네가 능력이 다분하니 내가 하는 일들은 껌일 거야. 그래도 가끔은 실수도 하고 그래야해.
그래야........인간적이지. 인간은 그래, 실수하는 동물이야. 너무 의기소침해 할 필요는 없어.”
“그래?”
“근데 너 곧 약혼식 한다고 했었지?”
“말했잖아. 나, 그 남자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프로필상에 올라온 것이 전부야.
넌 임기응변 잘한다며. 그냥 조신한척 하면 돼. 난 별로 말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근데 정말 약혼 해?”
“.............할 말이 없어.”
하라고 할 수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어.
아직은 이런 나라서..........뭐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어.
“자, 저녁 먹자. 배고프지?”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은 행복했다.
내가 말하는 행복은............내 마음이 평온했다는 말이다.
그저 사람들과 마주치고 나를 끌어내는 것이 좋았다.
예전엔 내가 대인 기피증인줄만 알았는데...........그건 도망치기 위한 망각이었나 보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고 난 실전에 투입되었다.
나는 긴 머리를 붙였고 거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코디했다.
전혀 다른 내가 있었다. 조금은 낯설기도.......재밌기도 한 나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길러온 머리를 과감하게 잘랐다.
그리고 내가 맨 처음 입고 있었던 드레스를 차려 입었다.
화장을 짙게 하고...........일어섰다.
그녀가 나를 보았고 난 그녀를 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었고 난 아차, 하고 발밑을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 구두가 뛸 때 벗겨졌나봐. 약혼자가 준비한 거라 했는데.”
“어차피 드레스가 길어서 발은 안 보여. 대충 뭐라도 신으면 돼지.”
“잘 할게. 정말 고마워.”
“나야 말로 고맙지. 난 실전에 투입은 아직 불가능하지만 오늘의 넌 꼭 해낼 수 있을 거야.”
난 옥탑 방을 나섰고 바깥으로 나왔다. 골목을 걷는 내내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녀와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세상에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지쳐서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새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나마 이 머릿속에 깊숙이 박힌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기회’에 관한 것이었다.
기회란 것은 기약 없이 불쑥 나타났다가 처음 왔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기에
왔을 때 죽을힘을 다해서 잡아야 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아니, 다시는 오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기회이다. 한 인생살이에 있어 기회란 것은 그리 쉽게 얻어지지도 그리 어렵게 얻어지지도 않는다 했다.
내가 잡아야 하는 것과 내게로 얻어지는 모호한 의미를...........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기회라는 것을. 생존경쟁에서 우두머리가 되려면 말이다.
난 그녀가 다닌다는 작은 출판사 앞에 도착했고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다들 날 한 번씩 바라보며 빙긋 웃어 줬다.
이런 사무실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다들 자신이 맡은 일에 바빠 남에게는 눈길조차 안주는
한기서린 사무실만 익숙했던지라..........기분이 한층 더 들떴다.
“어, 지하씨 왔어? 주말은 잘 지냈고?”
“네. 부장님께서는 그날 집에 무사히 들어가셨는지요?”
난 마른침을 삼키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우. 죽을 뻔했어. 집사람이 얼마나 달달 볶아대던지.”
“그럼 지하씨는 무사히 들어가셨어요? 오늘 얼굴이 아주 폈네. 이래서 젊음이 만만치 않다는 거야.”
“에이. 차장님도 피부 좋으시면서.”
난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옆에 앉아있던 동료 한명이 나에게 다가와 속닥거리듯 말했다.
“이봐, 근데 번역할 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까 부장님, 사장님한테 완전 깨졌잖아.”
“네? 어, 응? 정말??”
난 서둘러 부장이 앉아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아침에 깨진 사람의 얼굴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저럴 수 있을까.
내가 부하직원을 조금만 꾸짖어도 그들의 얼굴엔 핏기가 사라지곤 했었는데-.
난 조용히 일어나 부장자리로 가서 부장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응? 아아, 괜찮아.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자네는 아직 초짜가 아닌가.
실력은 그러면서 느는 거라네.”
“네?”
“그렇게 미안하면 따뜻한 차나 한잔 뽑아줘. 아주 집사람 바가지에 소화가 안 되나봐...........하하.”
난 애써 싱긋 웃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너무.........벅찼다. 사람의 정이, 진실 된 마음이.
가슴을 부여잡고선 자판기를 찾아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내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어졌고
동시에 나의 걸음도 멈추어 졌다.
“어?”
난 고개를 들었고 서둘러 다시 고개를 내려야 했다.
내 앞에 서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이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이 사장의 성질은 거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부딪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180이 훌쩍 넘는 커다란 키에 흐트러진 머리칼, 헐거운 복장이 영 거슬렸지만,
그녀의 말처럼 그의 얼굴은 가히 수준급이었다. 아, 하지만 성질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능가한다고 했지.
희지만 핏기 없지 않았고 약간의 홍조기 있는 우유 빛 건강한 피부였다.
쌍 커플 없이 큰 눈매는 또렷했고 오뚝한 콧대는 매끈했다.
잘생겼지만..............마주치면 곤란한 에베레스트 정상급 성질.
아아, 각인시켜야해.
“안녕하세요.”
난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고 그는 잔뜩 심통 난 얼굴로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그를 스쳐 지나가려 하는데 등 뒤로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신지하씨?”
아, 맞다. 아침에.........그녀의 실수. 아아, 어쩌지?
난 뒤로 돌아섰고 힐끔 그를 바라봤다.
“네?”
“따라와.”
그는 이를 앙 물고 말했고 난 그저 그녀가 언지한 데로 빠져나갈 구멍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코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난 왠지 이런 상황이 즐거워지고 있었다.
사람향이 느껴지는...........이 공간이.
무사히 일과를 마치고 회사 상사와 동료들에게 인사하고 뒤 돌아 섰다.
조금은 시린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길게 붙인 머리칼이 조금씩 살랑였다.
그리고 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잔잔히 퍼져나갔다.
난 그를 따라갔었고 그곳은 다름 아닌 그의 사무실 안이었다.
그는 있는 성질은 죄다 부리며 자신의 의자에 걸터앉았고 내 앞으로 작은 시 하나를 쑥 내밀었다.
그것은 불어로 된 시였다.
“이봐.”
“네?”
“해석해봐.”
그녀의 전공은 영어, 독일어였다.
진짜 그녀였다면.......정확한 해석은 못할 것이다.
진정 유명한 시라면 몰라도.
난 쭉 훑어 봤고 곧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빙긋 웃었지만 곧 웃음을 지워내고 그를 바라봤다.
“모르겠는데요.”
“사퇴서 쓰고 싶어?”
괜한 트집이었다.
“아. 이 문장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이 문장도 대충은.
계속 보니까 생각나네요. 저 요즘 불어공부 하고 있거든요!”
그는 피식. 웃으며 날 바라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내 눈 똑바로 쳐다보고 말해봐.”
“보이지 않는 당신을 쫒다가 문득 내 앞에 서있는 당신을...........”
난 말끝을 흐렸고 곁눈질로 슬그머니 사장의 표정을 살폈다.
거만하다. 아, 거만하다는 단어가..........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이었지?
갑자기 왜 머릿속이 새 하얘지는 걸까?
“꽤 하는데?”
사장은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고 난 묵묵히 다음 문장을 해석했다.
“나의.........사랑 당신.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
그는 잠시 움찔 하는 가 싶더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곤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난 빙긋 웃으며 뒤 돌아 섰고 그녀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
그 시간 은성그룹의 중심 내부 관계자들은 장차 후계자가 될 세현의 부재에 애를 먹고 있었다.
찾긴 해야 하겠는데 딱히 어떻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현을 찾는 일에 매진해 봤지만 모레사장의 바늘 찾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 찾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상하게도 세현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세현의 부재를 뒤늦게 알게 된 그녀의 약혼자 최주민이 은성그룹의 회장 은강진 회장을 찾았다.
넓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주민과 회장이었다.
주민은 침묵을 일관하고 있는 회장을 바라보다
피식. 웃어 보였다. 그의 조소가 회장의 미간을 좁아지게 했다.
“도망입니까.”
“흐음.”
“납니까, 아니면 이곳이랍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게나.”
“납치가 아니라 자기 발로 나간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네.
자켓 하나도 자기 손으로 벗어 본 적이 없어. 곧 제 발로 돌아 올 거라네.”
“어디까지나 여자인데..........숨이 퍽이나 조여 왔나 봅니다.”
“그 전에, 그 아이는 장차 우리 은성을 이끌어 나갈 큰 아이 일세.”
회장은 다문 입술을 떨었고 주민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회장실을 나온 주민은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성의 후계자 자리가..........그 위태로웠던 보였던 자리가 비워 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지금 벌어진 것이었다.
*
난 첫 출근을, 그녀를 대신할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오늘 재밌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난 결코 이, 대역이 끝날 때까지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작은 상 위에 찌개를 올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때? 괜찮았니?”
“할만 했어.”
“사장이 괜한 심통 안 부렸니? 걘 나만 보면 심술부리거든. 아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그녀는 사장의 흉내를 내며 수저를 들었다.
“잘 생겼어.”
“잘생기면 뭐해? 들이대면 그 성질 확. 올라서 다 튕겨 나가는 걸.”
“그런가?”
난 픽. 웃어 보였고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 저어 보였다.
“나쁜 인간 같진 않은데.”
“맞아. 겉은 그래도 직원들 은근히 챙기거든. 완전 병 주고 약주고지.
찌개 식겠다, 어서 먹어.”
다음날도 난 출근을 했고 내가 퇴근한 뒤 그녀와 나는 그녀의 대역을 위해 만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분란을 막기 위해서는 약혼식 전에는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은성그룹에 다시 들어가는 날짜는, 그러니까 그 후계자가 다시 들어설 날짜는 정해졌다.
그녀는 주말에 들어가기로 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그녀가 나의 대역을 맡을 날이 찾아왔다.
그녀는 내가 나왔을 때 복장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었다.
그녀가 모범택시에 올라탔고 난 그런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위험해 지면 연락해.”
“응. 너무 걱정 하지 마. 밥 꼭 챙겨 먹어야 하고.”
“알았어.”
“사장이 너무 힘들게 하면 그냥 막 대들어도 돼. 그럼 가끔은 꼼짝 못하거든.
대신 정말 가끔만 해야 한다. 응?”
“걱정 마. 잘 다녀와.”
“아, 그리고 넌 .......... 아무튼 네가 살던 세계와는 달라.
너의 배경 위치 여러 가지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넌 예전의 네가 아니란 걸 명심해.
넌 간혹 말이 짧아지고 명령조일 때가 있어. 무의식 적으로 그런 식의 말투 내뱉지 않도록 조심해.
사람들은 말투에 예민하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래, 알겠지?”
“걱정 마. 연기는 완벽 할 테니까.”
택시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곧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정말 모든 것이 시작 된 것이다.
난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을 하루 빨리 찾아야 했고, 항시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바라며..........
이런 인연을 만들어준 하늘에 감사하며 난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얹었다.
*
지하가 탄 택시가 은성그룹에 다다랐고 세현은 일러준 곳으로 연락을 취했다.
곧 연락이 닿았고 지하는 차근차근 또박또박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경호원들과 함께 회장이 모습을 내비쳤다.
지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택시에서 내려 회장 앞에 섰다.
“잘 다녀왔느냐.”
지하는 회장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고 회장은 두 눈을 감았다 뜨더니 뒤 돌아 섰다.
“그럼 됐다. 들어 가자구나.”
지하는 사뿐히 걸어 회장 뒤를 따랐다.
다음날 상견례가 바로 치러졌다.
그리고 그날 밤 단 둘이 있게 된 지하와 주민이었다.
지하가 본 주민은 꽤나 과묵하고 냉소적인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세현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느낌과 조금은 비슷했다.
둘은 야외의 시린 바람을 느끼며 푸른 잔디 위에 놓은 나무 의자에 앉아 마주보고 있었다.
둘의 오른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장시간의 침묵이 이어졌지만 둘은 전혀 어색해 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분위기를 즐기는 듯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리고 주민의 잔이 비워졌을 때 주민의 붉은 기가 도는 입술도 열렸다.
“생각 이상으로 미인이신 것 같군요.”
“고마워요. 주민씨도 멋지세요. 물론 소문을 들어 꽤 알건 안다고요.”
“소문이 어떻게 돌았죠?”
“알고 계신 걸 또 말하고 싶진 않은데요?”
주민은 피식. 웃어 보였고 지하도 따라 싱긋 웃었다.
지하가 웃지 주민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난 세현씨가 절대 포커페이스라 들었는데. 웃는 모습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나?”
“당연하죠. 꼭두각시가, 아니 인형이 표정을 바꾸는 걸 봤나요?”
지하는 아무렇지 않게 툭 내 뱉었고 주민은 순간 할 말을 잃어 잠시 방황해야 했다.
그런 주민을 알아본 지하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이젠 난 꼭두각시가, 인형이 아니니까. 그리고 난 더 이상...........”
주민이 지하의 입술을 응시했다.
“난 더 이상..........강요당하지 않을 거예요.
지난 24년 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내가 짧은 일탈 동안 깨닫고 온 거에요.
그러니 이젠 주민씨는 제 선택의 도마 위에 올려 진 셈이죠.”
주민은 지하의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두 손을 저었다.
“절대 토막 내는 잔인함은 보이지 말아 주세요.”
“주민씨보다 잔인할까.”
지하는 몸을 비틀고는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주민은 그런 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을 되짚어 봤다.
*
주기적으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고 꽤나 잘 지내고 있는 듯싶었다.
그렇게 되면 조금은 서운해 질 법도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아침도 분주했다.
시간 개념이 철저한 나였지만 실수투성이 지하가 되기 위해 항상 의도 적으로 5분씩 늦어 줬다.
그리고 매일 마다 사장의 구박을 있는 대로 받아야 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도 좋았지만 짧은 머리였던 내가 감당하기엔 조금은 벅차서
단발로 커트했다. 그리고 날이 더워질수록 나의 옷의 기장도 짧아져만 갔다.
난 5분 늦게 사무실에 도착했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은 나를 보며 한 마디씩 건넸다.
“어머! 머리 잘랐어? 얼굴이 예쁘니까 뭘 해도 어울리네.”
“지하언니, 정말 시원해 보이고 좋다. 완전 지적이게 보이는데?”
“허. 지하씨 우아해 졌다?”
“괜찮나요?”
“아, 그런데 사장님이 지하씨 오는 데로 사장실로 오라는데?”
난 애써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고 사장실을 찾았다.
노크를 하자 사장의 심술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난 들어섰고 사장이 오라고 할 때 까지 문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사장이 나를 봤고 한 동안 아무런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넓혔다 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장님. 찾으셨나요?”
“후. 머리가 왜 그 모양이야? 어디서 한판 했나?”
“네?”
“오늘 퇴근하고 뭐하나.”
“저요?”
“그럼 여기 또 누가 있나? 제발 말귀 좀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해서 말을 할 수 있어야지.
일을 그 모양으로 하면 말 귀라도 잘 알아들어야 할 거 아니야.”
“시간 없. 는. 데. 요.”
“뭐? 이번 주는 맡은 일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됐고, 오늘 퇴근 후에 출판사 앞, 갈비 집에서 보지.
토 달지 말고 나가봐. 다시 말하겠는데 시간약속 잘 지켜.
오늘 하는 거 보고 앞으로 짜를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알았어?”
어이가 없어서.
이런 말은 이런 상황에 꽤나 적절한 듯싶다.
점점.........머리로만 알고 있는 수많은 문자들이 피부로 느껴지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난 어쩔 수 없이 사장이 불러낸 곳으로 나가야 했다.
내가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자 사장이 자신의 자가용을 내 앞으로 세우더니 곧 내려섰다.
“타.”
사장은 짧게 말했고 난 잠시 생각을 멈추고 내 앞에 서 있는 잿빛의 고물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잿빛의 고물차라........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그만............미친 듯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사장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내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웃음이란 건 의지대로 멈추어 지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왜 내가 웃고 있지?
한 번도...........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호탕하게 웃어 본적은 없었는데.
내가 가까스로 숨을 꺼이꺼이 들이 마시며 웃음을 참아냈다.
내 웃음이 잦아들자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물어왔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내 고물차가? 아니면 내가? 그것도 아니면 이 상황이 웃기 다는 건가?”
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평소 그랬듯 자기 혼자 이래서, 저래서 줄줄이 늘어놓는 사장이다.
나 또한 대답할만한 정당한 이유를 찾아내야만 했다. 난 지금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음에 틀림없다.
“하루아침에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갔었던 적 있나요?”
“천국 이었다면 말이 안 나왔겠지. 지옥인가? 무엇이 지옥이지?”
“지옥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저, 하늘과 땅 차이에 대해서............”
나의 존재, 나의 가치,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너무 웃겼어.
천국과 지옥. 하늘과 땅.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과 한낱 작은 행성일 우주.
근데..........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거.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모든 것들...........
특히나 상대적인 것들.
근데 인간은 상대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아.
제 각각의 점칠 수 없는 운과 생명이 있을 뿐이야.
결국 남는 건..............그래,................
선택과 운에 맡겨진 50%의 확률.
“아니, 내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방금 깨달아 버렸거든요.
난 지옥을 가보지 못해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 몰라요.”
“깨달았다. 그럼 새로운 방향을 제시 하겠군. 무엇이지?”
“자유. 결국 내가 찾는 건.............내 자신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것이지.”
게을러지고 싶어서?
아니면? 어떤 해방을 말하는 거지?
아무런 간섭도 제약도 없는 그런 것?
난 또 찾아야 하는 건가?
내가 찾아야 하는 해방이............무엇인가에 대해.
“오호. 반말? 말까시겠다? 정령 사퇴서를 내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인가?
처음부터 의도된 행동이었단 말이지?”
“아니. 그 전까지는 분명 의도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고마워. 당신 덕분에 찾았거든.
내 스스로...........아니, 엄밀히 말해서 당신의 이 고물차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겠군.
아, 하지만 오해는 말아. 난, 이 고물차가 고물차로 보이지 않으니까.
이 차는..............지금 까지 내가 알아온 어떠한 차보다 값지게 보여.”
“..............”
사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장이 침묵을 유도하다니, 생각도 못해볼 상황이다.
아니,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임을 알아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물을 엎질러졌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야만 했다.
내가 서둘러 뒤 돌아 서려 하는데 팔목으로 강한 압력이 타고 올라왔다.
사장이다.
나의 예상대로 사장은.............
“웁!!!!!!!”
사장은..............그녀에게 마음이, 아니..........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남자의 힘이 여자보다 강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 부정될 수 없음을 알기에 묵묵히 받아들였던 내가
달라졌다. 부정. NO!!! Never!!!!!!! 이라며 외치고 있는 것이다.
사장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강하게 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키스가 아닌 접촉이다. 단순한 입술끼리 맞닿은 접촉.
짓누르는 압박에 나의 잇몸이 뭉그러지고 붉은 피가 나의 목을 타고 끈적 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만함과 퉁명스러움.
가식과 허위허식.
위선과 상사를 대할 때의 아부.
겉과 속.
왜곡과 진실.
나에 대해서..........나의 삶에 대해서 너무나 어울리는 어휘들이다.
진정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의 처음은 호기심으로 가득했지만............
조금씩 ‘나’를 알아가면서 ‘내’ 모습을 뒤 돌아 보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치밀어 오른다. 그 고통은 조금씩 ....... 조금씩............
물에 탄 잉크 마냥 내 온 자아를 점령해 가는 듯하다.
더 이상 ............ 나를 안다면 아니 그 이상을 알게 된다면
난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문어가 머금고 있던 먹물을 새까맣게 뿌려대는 것 마냥................
새 까맣게 내 마음이 내 정신이 점령당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스르륵. 딱 그렇게 사장의 압박은 풀렸다.
사장은 지쳤는지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내 얼굴 위로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소매로 흐르는 피를 닦아 냈고 주저 앉아있는 사장을 바라봤다.
“가지 마.”
사장은 말했다.
짧고 간단했다.
“정말?”
난 되물었고 사장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싫었다.
조금씩..........점점 무엇인가 내 안에서 꽈리를 꼬고선
꿈틀 거리더니 곧 그 꽈리를 풀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뭐지?
“너무 이르잖아?”
“뭐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
“그러니까 그게 뭐지?”
“..........”
뭐지?
말해!!!!!!!!
말하란 말이야..............
“꿈은 짧지만, 고통은 길어. 인생은 짧지만 꿈은 영원하지.”
“...........”
“가지...........마라.”
사장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붙잡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던 거라면 좋았다.
나쁠 건 없었다.
내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해도 그녀가 손해 볼 건 단 하나도 없을 테니.
근데 내 마음이............가슴이 답답해진다.
생각 이상으로 잘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내 가슴이 왜 이렇게 답답해지는 걸까.
“날.............사랑해?”
“모르겠어.”
사장은 대답했다.
난 다시 혼란의 중심에 서야 했다.
너무 의미가 모호했다. 이중적이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의 답답한 갈증이 점차 누그러진다.
정말...........웃기다.
50% 라는 확률은.
근데 사람은 엄밀히 말해 이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은................확률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 그럼 선택 해.”
“무엇을 선택 하라는 거지?”
“나야...........아님 지하야?”
“둘 다. 둘 다 너니까.”
모르겠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난 재 빨리 발길을 돌려 어디론가 달려갔고................
서둘러 그녀에게로 호출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숨이 멎어 버릴 것 같다.
신호가 가고..........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받았다.
[네, 은세현씨 폰입니다.]
“..........”
남자였다. 처음 들어보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아, 세현씨 어딨죠?”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간단한 용건이면 전해 드릴 수.........]
“아뇨. 아니에요.”
[성함이라도 전해 드릴까요?]
“아뇨. 다시 전화 하겠어요.”
폴더는 닫혔고 난 멍하게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비서는 아니야............처음 듣는 목소리야.
혹........
입술이 닫혔다.
혀가 꿈틀거리고 성대는 우물쭈물 거린다.
하지만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보이지도 형상이 있는지도 모르는...............정신보다 더 우월한 마음이라는 놈이 짓 꺼린다.
넌........찾은 거야. 드디어 네가 가야할 행선지를...........찾았어.
난 두 눈을 감았고 처음으로 신에게 나의 마음의 소망을 빌었다.
제발..........이 모든 것이 꿈으로.............짧고도 영원한 꿈으로 끝나기를.
하지만 내 두 눈은 눈부신 빛에 이기지 못해 떠져야 했고
짧고도 끝없는 현실이, 고통이 눈앞에 보였다.
찾았지만 갈 수 없기에 이 현실이 내게는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난 내 손에 쥐어진 작은 폰을 박살내 버렸다.
그녀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아니, 그것이 진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찾아낸 나의 유일한 행선지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한참을 어둠을 해매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가 있었다.
사장이었다.
그녀의 집을 찾아온 것일까?
나를 기다린 것일까?
사장의 인상이 꽤나 굳어져 있었다.
입술은 매 말라 갈라졌고 눈 밑엔 까만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었다.
“왜 찾아 왔지?”
“연락이 안 돼서...........불안 했다.”
“이상하다. 왜 아까부터 그 불같은 성격 죽이고 있어?”
“숨이 막혀서 목이 매여서 말이 안 나와.
성질도 체력이 있어야 낼 수 있는 거거든.”
“나 이렇게 괜찮으니까 돌아가.”
난 사장을 스쳐 지나갔고 사장의 한 마디가 내 발목을 잡았다.
“넌 지하가 아니야, 그렇지?”
“..........증거 있어? 멋대로 생각 하지 마. 아니, 그러려면 혼자만 알고 있던지.”
“맞아. 넌 지하가 맞아. 그래, 넌 지하야.”
“장난해?”
“넌 지하가 아니야. 그래, 넌 지하가 아니야.”
“장난 그만해.”
“어쨌든. 살아 있으니 난 이만 돌아가 볼게.”
사장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아예 사라졌을 때 쯤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알아 버렸다.
“당신이..............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지하였어.”
깨달았고 인정했다.
그가 모르겠다. 라고 말한 건 그는 이미, 내가 자신이 사랑하고 있었던 그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언제나 그랬듯 50% 확률로 결정이 났는데 마음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직 찾지 못했다.
행선지만 결정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아득해 지고 미쳐가는 것만 같다.
문득 이곳이 가상현실이라는 착각이 든다.
이것 또한 내가 만들어낸 하나의 망상일 테지만................
아, 어쩌면 또 모른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정말 다른 세상에서 존재하는 내가 꿈꿔본 수많은 것들의 일부분일지도.
망각. 환상. 꿈.
이 세상에 정말 기쁨과 행복은 무엇일까?
난 경험할 수 있을까?
짧고도 긴 생애 동안.............
짧고도 영원한 꿈에서나 가능한 얘기겠지.
지금 이 현실도 나의 망상도.
난 걸음을 서둘러 그녀의 옥탑 방으로 들어섰다.
불을 키고 방안으로 들어섰고 난 순간 기겁해서 심장이 달아나는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던 그녀가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제일 싫어했던 몸의 실루엣이 훤히 드러나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진한 화장과 업스타일의 헤어가 오늘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물론 그녀, 아니 나의 약혼자와 대동한 ...........
“휴. 놀랬잖아!!”
그녀는 뻣뻣한 고개를 들고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슨 일 있었어?”
“너야말로.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나와 그녀는 한 동안의 침묵을 지켰고 난 억지로 입술을 떼야만 했다.
“네게 전해줄게 있어.”
“응, 말해.”
“출판사 사장이 널 좋아해. 아니, 꽤나 깊게 빠져 있어.”
“뭐야,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난 입술을 닫았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픽. 웃었고 붉은 입술을 떼었다.
“그래서 일부러 나한테 더 틱틱. 댔던 거였지.
아, 나도 네게 하나 전해 줄게 있는데.”
“말해봐.”
“넌 모르겠지만 그, 그러니까 네 약혼자 말이야.
네가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널 처음 봤는데............그 때 첫눈에 반했데.
그때는 네가 은성그룹의 후계자 인줄도, 자신의 약혼자 인줄도 몰랐데.
단지 한 사람으로서...........한 여자로서 가슴에 담았었데.”
내 머릿속은 새 까매졌다.
처음엔 순백처럼 희더니 이젠 새 까매진다.
“뭐, 네가 누구인줄 안 다음엔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라.
사랑이 비즈니스가 되었고 네가 회사가 되었고.
모든 것이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
어떻게 생각해?”
“난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어.”
“궁금하지 않았니?”
“전혀. 나 또한 그가............사람이 아닌 수많은 일 중의 하나였으니까.”
“근데 나 그 사람이 좋아지려고 해.”
“뭐?”
“내가 물었지. 신데렐라 이야기를 믿냐고.”
“...........”
“모르겠데.”
이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내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서 지저분해져 가는데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이 풀릴 수 있지?
“그럼 넌, 사장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사장.............물론 좋아.”
“모르겠어!! 나야 말로.........네가 무슨 의미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모르니까. 당연히 너도 모르겠지.”
“뭐?”
“사장하고 그 사람하고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하라면.............”
“누굴 선택 할 거지?”
“만약 나에게 그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어 그녀를 불렀다.
“근데, 어떻게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지?”
“그가 도와줬어. 시간은 짧아.............빨리 돌아가야 해.”
난 할 말을 잃었다. 도무지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좋아. 선택했어. 나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 하겠어.”
“그게 누군데?”
“너도 잘 알잖아?”
“뭐?”
“아무튼 슬퍼할 겨를이 없어. 시간은 우릴 기다리지 않고 흐르니까.
그리고 곧 그가 날 데리러 올 거야. 나가야만 해.
아, 안심해도 돼. 그는 절대 두 말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가 말했거든. 절대 이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잠깐. 그럼 잠깐..........해결하고 가.”
“그래, 날 그렇게 찾았던 이유가 뭐야? 왜, 너무 힘겨워서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렵니?
아니면 네가 나설 행선지를 찾은 거니?”
“..........그 전에 네가 하나만 물을게. 넌 지금 이 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싶니?”
“넌?”
“네가 원한다면.”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힐을 신었다.
이 힐이 부러지면 난 다시 돌아 올 거야.
그녀가 사라졌고 방에는 나 혼자 남았다.
잠잠했던 가슴이 갑작스럽게 미친 듯이 발광했다.
난 고통스런 신음을 내며 가슴을 부여잡은 채 바닥으로 뒹굴었고 이대로 구르고만 있다면,
누군가가 날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죽음의 사자가............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내 눈 앞에서 아른 거렸다.
난 피나 철철 흐르는 입술을 깨물고는 현관으로 꺼이꺼이 기어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붉은 혈로 범벅이 된 나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소리가 섞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도와줘!!!!!!!! 지하야!!!!!!!!!!!! 나 죽을 것 같아!!!!!!!!!!!”
그렇게 나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무의식이 접어드는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녀는 안타까운 듯...........슬픈 어조로 내게 말했다.
“계단을 너무 급하게 올라왔나봐. 그만 힐이 부러져서 나 또한 뇌진탕으로 갈 뻔했지 뭐야.
다행이도 무사히 널 구하러 올 수 있어서 다행이지. 약속대로 우린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거야.
넌 너로, 난 나로. 이젠............알 것 같지? 나도 알아 버렸는걸.”
내 머릿속으로 사장의 얼굴과 약혼자라는 그 사람의 얼굴과 지하의 얼굴이 희미하게 모아졌다.
그리고 그 위로 나의 모습이...........겹쳐졌다.
모든 것은 되돌아가게 되는 것인가.
행선지도 뭐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찾아도 이상일 뿐이니까.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야............현실은............변하지 않아.
원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난 그런 세계에 한날 점으로 남을 뿐이지.
눈이 부셔서 또 눈을 떠야 했다.
머리가 무겁다. 하지만 곧 가벼워진다.
난 주위를 살펴보았고 곧 난 내가 내 원래 위치.........
아니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나의 위치에 놓였다는 것을 알았다.
짧은 숨을 내쉬곤 하얀 눈이 떨어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미안.........미안해. 지하씨...........미안.”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그녀의 말처럼 이탈은 나의 욕망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가진 자의 오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뵈는 느낌이다.
난 애써 몸을 일으켰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몸은 괜찮니?”
“네. 제가 오래 누워 있었나 봐요. 첫눈이 오네요.”
“...........”
아버지는 갑자기 나를 안으며 온 몸을 떨며 울음을 토해내고 계셨다.
난 아무런 생각도 안 나는데 눈물이...........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가슴이 아프다. 심장이 아닌 가슴이..........마음이 아팠다.
“돌아와 줘서 고맙구나.”
“그럼...........요. 아버지............죄송해요.”
“네가 죽는 줄 알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 이젠 무엇도 다 필요 없다.
난 너만 있으면 돼. 이제야 알았다. 내가 지킬 것이 진정 무엇인지.............
내가 바보 같았어...........네 어미를 잃을 때..........왜..........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애비가 천벌을 받은 게야.”
“..........천벌이라뇨............”
“네가............원하지 않는 건 이제 강요하지 않으마...............
약혼 싫으면 말하지 그랬더냐............이젠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으마............
그저 내 곁에만 있어 다오..........”
“아버지........”
“............사랑한다. 애야............나의 사랑하는 딸아................”
“응............나도 사랑해........사랑해.........사랑해........아빠...........사랑해요.”
아버지는 푸념을 놓으시며 꺼억꺼억 눈물을 토해내셨다.
난 나의 심장에 손을 대어 보았고 커다란 상처가 느껴졌다.
따끔거렸지만............정신이 혼미해 아픈 줄도 잘 모르겠다.
수술인가 보다.
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서 쓰러졌고, 그런 날 자신의 날개를 꺾어가며 구해준 은인이 있다.
지하는 .......... 내가 친구라서............또 그렇게 말해줄까?
난 의식을 찾고 재활치료에 매진 해 건강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지하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타인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더 열심히 병과 싸웠는지도 모르겠다.
사장도............얼굴이 조금은 그리워졌다.
그냥.........모든 것이, 그 곳에서 지하로 살던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난 길어진 머리를 다시 예전처럼 커트했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예전처럼 깔끔한 슈트였다.
내가 선택했고 내가 입은 것이었다.
이미 그녀가 알았듯 나도 알아버린 운명을 이젠 나 은세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수동이 아닌 능동으로..............바뀐 것이라면 단지 그 것 뿐이다.
단지, 라고 하기엔 커다란 것이겠지만.
난 지하의 옥탑 방을 찾아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녀가 가꾸던 화분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구조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난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결국 그날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난 다음날 그녀가 다니던 작은 출판사를 찾았다.
다행이도 그 곳은 그대로였다.
난 그녀가 일하던 사무실을 찾았고 사무실 문을 열자 예전에 따뜻한 인상을 남겨줬던
사람들이 그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난 그녀의 행방을 묻기 위해 마른 침을 삼키며 입술을 열었고
마침 그때 나의 뒤로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열었던 입술을 닫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심술궂은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이상하다.
이건............아니다.
적어도 이건.
“뭡니까? 당신은 어디서 왔지?”
“혹시 오후에 미팅하기로 한 이 작가?”
“............”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흐른다.
뺨을 적시는 눈물에 사장이 당황스런 시선으로 날 바라봤고
나 또한 요즘 따라 멋대로 흐르는 눈물에 욕을 퍼붓고 있었다.
왜,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해?
응?
그럴 순 없는 거잖아.
내가 분해하고 무서워하는 건 뭐지?
“한지하씨를 찾아왔어요.”
“그게 누구지? 우리 출판사엔 그런 사람 없어. 당장 나가!!”
“뭐라고요?”
장난..........
그래 사장은 남 골려주는 거 좋아했어.
아니.
아니야.........
사장은........
“나 모르겠어요?”
“잡상인이면 당장 꺼져줘!!”
난 쫓겨났고 당장 신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지하, 그녀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곧 다시 신비서 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래, 지금 그녀는 어디있지?”
[그런 사람. 존재하지 않아요.]
“다시 해!! 왜 일처리를 그따위로.............”
[동명이인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말하신 조건의 신지하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내 생각은 완벽하게 오류였다.
오류.
망각과 착각에서 나오는 오류.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그녀가 지나간다.
그리고 내게로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안녕.
시작도 끝도 존재 하지 않는 만남의 작별 인사를 그녀는 내게 하고 있었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잡아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그녀는 나였던 것이다.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 내 자아였다.
정신 분열증이라고 날 정신병자 취급해도 좋았다.
다만 난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모든 것이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나의 행선지는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어깨에 따뜻한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적시고 있다.
“한지하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까 내가 심했다면 미안해.
그래도 당신이 우리 출판사 앞에서 이러고 있으면 곤란해.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이러고 있다고 용서할 거라곤 생각 하지 마.
일어나기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집까지 태워다 줄까?
아, 난 나쁜 사람 아니야.”
“하. 알고 있어요. 그럼 태워다 주시겠어요?”
“흠. 그럼 잠깐 일어서서 기다리고 있어.”
사장이 바닥에 주저앉은 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곧 내 앞에는 잿빛의 고물차가 정차했다.
사장이 차에서 내리고는 차 문을 열어 준다.
“어서 타. 난 기다리는 거 질색이거든.”
난 사장의 차에 탔고 사장의 고물차는 몇 차례 시동을 걸고서야 앞으로 나갔다.
슬로우 모션처럼 스쳐가는 창밖의 세상이 현실이길 바랬다.
부디 이 순간만큼은..........꿈이 아니길.
그녀는 찾았을까?
내가 원하는 이상을 이루었듯 그녀도 실현되었을까?
난 어쩌면 내 약혼자에게 반할지도 모르는데................그럼 그녀가 질투할까?
아니, 그녀는 말했다.
나는 말했다.
이미 누굴 선택했는지는 알고 있다고.
난 차에서 내릴 때 나의 연락처를 사장에게 전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음을 참으며 자신의 선행이 왜곡되었다고 툴툴거리며 떠났다.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장님. 유현민씨..............사랑해요.”
나는 숨 쉬고 있었으며, 내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내 이성과 감성은 나의 지배아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늦은 뒤였다.
망각과 착각.
그리고 뒤 늦게 그것들을 깨달았을 때,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온전한 나를 흠뻑 젖혀 버리는 허무함.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났으며 넌 또 하나의 너를 만났다.
우연의 연속과 필연의 연속 사이의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우리는 만나야 했다.
너와 내가 쫒고 있던 이상(理想)이 교차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은 시작되었다.
도플갱어
double gore
첫댓글 재미잇게 잘 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