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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卍) / 칠통 조규일
06.09.09 19:03
불자라면
초하루 초삼일 보름...
...00재일날 탄신일..성도일...등
무슨 날이면 절(卍)에 간다.
물론 일년에 한 번 석가탄신일만 가는 분도 있지만...
절에 뭐하러 가나요?
왜 절에 가는지요?
한 번 살펴 보세요..
절에 간다고
집을 나서서 절에 가지요.
불자라면
절을 모르는 분 없을 겁니다.
너무도 잘들 알고 있지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절에 대하여 묻겠습니다.
무엇이 절입니까?
어디에 절이 있습니까?
무엇을 절이라고 합니까?
살피고 살펴보소서
절은 어디에 있고
무엇이 절인지...
꽝!
Re:믿고 의지하며 행하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근본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칠통 06.06.15 09:44
선생님...문득 관세음보살을 맘속으로 되뇌이다 의문드는게 간절하게 아미타 부처님, 관세음
보살님등의 부름에 어떤 사람은 가피를 받고 어떤 사람은 가피를 받지 않음은 어떤일인지요?
과연 개인의 업의 무게에 따름인지요?...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을 몇번만 부르기만, 아미타 부
처님을 몇번만 부르기만 하면 어디서든 듣고 어디서든 보고 저희들 곁에 와서 고난을 극복하
게 해주신다는 말은 과장법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기도발이 잘 듣는 영험한 기
도처란 곳이 필요없지 않겠는지요? 그리고 제 생각엔 간절하게 모든걸 전심전력으로 그분들
에게 구하여야 오실까 말까 하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부처님카페의 영험등에 관한 글을 보면 생각드는게 어떤 글이야 과연 부처님의 가피이
겠지만 수많은 글중 어떤 글은 자기의 보호신이 될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최면, 우연적인 일,
그리고 자기의 자등명의 발현등 여러가지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부처님(아미타부처님, 관
세음보살님)의 가피로만 치부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밝은 가르침을 내려주세요...
선생님...문득 관세음보살을 맘속으로 되뇌이다 의문드는 게
간절하게 아미타 부처님, 관세음보살님등의 부름에
어떤 사람은 가피를 받고 어떤 사람은 가피를 받지 않음은 어떤 일인지요?
믿음과 간절함에 차이가 있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업의 차이가 있고
법과 진리 안에서의 일인지 아닌지에 차이가 있고
기도 염불하는 사람의 기운과 마음과 의식과 생각의 차이에 있고
기도 염불하는 사람이 입으로 생각으로 의식으로 마음으로만 그러할 뿐
행을 어느 정도 이루어지도록 행하느냐에 행하는 저마다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행으로부터 이루어지고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의식 인식한 대로 행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기도 염불하니까?
자연히 뜻과 의지가 기도 염불로 기도 염불만 하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 의식 인식 마음먹고 행하는 행을 게을리할 때
그 게으름과 부지런함 긍정과 부정적인 사고로 인한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의 자등명과 자성불이 드러나고 현현하는
잠재의식이라는 의식을 깨우고
전지 전능한 자기 자신의 자등명 자성불이 드러나고 현현하는데
그 차이가 있는 만큼 그 차이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과연 개인의 업의 무게에 따름인지요?...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을 몇 번만 부르기만, 아미타 부처님을 몇 번만 부르기만 하면
어디서든 듣고 어디서든 보고
저희들 곁에 와서 고난을 극복 게 해주신다는 말은 과장법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기도발이 잘 듣는 영험한 기도처란 곳이 필요 없지 않겠는지요?
이 부분은 이렇게 생각하며 됩니다
수많은 보살이 있고 수많은 보살은 자기 자신 안팎에 있습니다.
안으로는 자등명 자성불이 불이고 선업이 보살이며
밖으로는 우주에 두루해 있는 불이고 보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부르는 것만으로도 될 수도 있고
또한 부르는 것만으로는 아니 될 수도 있으며
안팎으로 부르면서 밖으로부터는 오시는 분을 맞이하고 안으로부터 부르는 분을 맞이하여
안에서부터는 자등명 자성불이 드러나고 현현하게 함으로써
전지전능한 자등명 자성불이 드러나고 현현한다 하겠으니
꼭 과장법이라 할 수 없고 또 과장법이 아니다 할 수도 없지요.
중요한 것은 부르되 부르는 불보살이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맞이하여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전지 전능한 자등명 자성불이 드러나고 현현하도록 함과 함께
체에 가만히 있는 전지 전능한 자등명 자성불을 깨워서
전지 전능한 자등명 자성불을 본체에 가만히 있게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는 전지전능한 자등명 자성불을 깨워서 쓴다는 활용한다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로 모든 종교 저마다의 믿음으로
어느 정도가 되었던 종교를 믿음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 말이나 글일지라도 ....
아니 꼭 종교가 아닐지라도...종단 종파 단체 ...등을
믿고 의지하며 행하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근본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기도발이 잘 듣는 영험한 기도처란 곳이 필요 없지 않겠는지요?
진리의 바다에서 그냥 진리를 마시면 되고
기의 바다에서 그냥 기를 머금으면 되지만
가만히 있는 듯한 바다의 물의 흐름 그 흐름의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그곳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있는 분으로부터의 차이가 있으니
기도발 기도처라는 것이 다르며
또한 자기 자신으로 보면 어떤 마음 생각 의식 인식이냐에 따라
보이지 않는 호흡문이 열리고 열리지 않고의 차이에 따라 다르지요.
그런 만큼 전체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이거다 할 것이 없이
수 없이 많은 현상들이 묘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겠지요.
그런 만큼 10선(善)을 행하고 8정도(正道)를 행하면
행하는 행을 따라 10만 8천리에 있는 극락 정토가 바로 여기
지금 님의 마음 안에 있다 하겠으며
또한 이루어짐 역시도 전지 전능한 자등명 자성불에 있다 하겠습니다
또한 부처님카페의 영험 등에 관한 글을 보면 생각드는 게
어떤 글이야 과연 부처님의 가피이겠지만
수많은 글 중 어떤 글은 자기의 보호신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최면, 우연적인 일, 그리고 자기의 자등명의 발현 등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부처님(아미타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로만
치부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 그런 면이 많지요.
그래야 종교를 더 믿고 더 의지하며
그래야 삼보에 더 귀의할 것 아니겠습니까?
죽을 때 아미타부처님 몇 번만 지극 정성을 부르면 극락 정토에 난다..
이를 모르는 스님들이 없을 것인 즉
큰스님이라는 분들의 49재는 없어야 할 것이며
스님들의 49재는 없어야 할 것이로되
큰스님이라는 분도 49재를 하고 스님들도 49재를 하고
일반 불교 신자도 49재를 하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고
자기 자신의 마음과 의식 생각에 있으며
마음과 의식 생각 속 10선 8정도를 행하는 행에 있으며
자등명에 있고 자성불에 있다 하겠습니다.
어떤 사고와 어떤 언행을 하느냐에 따라서 지금 있는 그곳이 다르다.
10.01.08 19:04
10선(十善)
10악(十惡)
8사(八邪)
8정도(八正道)
물든 마음
물들지 않은 마음
염불에 대하여 / 칠통
염불하는 사람들은 알지어다
염불(念佛)이란
말 그대로 부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고
염불수행(修行)이란
부처님을 깊이 생각하며
부처님을 생각하는 행을 통하여 업장을 닦아 가는 것이 염불수행이다.
염불을 한다는 것은
부처님을 생각하며 주문을 외우듯 하는 것이 아니고
주술을 부리듯 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듣도록 이름만 부르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을 생각하여 부르되 마음 깊이 생각하여 생각이 일어나기 전 마음에서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근본 성품으로부터
염불하는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인 본각(本覺)의 참 성품이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드러나도록 현현하도록 생각하며
부처님을 염하는 것이 염불이다.
염불이란 부처님과 염불하는 사람이 하나되는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처님이 화현하도록 하는 것이 염불인 것이다.
즉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등명(自燈明)이 드러나고 드러나서
드러난 자등명이 무량광(無量光)으로 빛나도록 하고
그 빛이 자기 자신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염불(念佛) 공부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살면서 많은 생각 속 번뇌에 시달리고
사량 시비 분별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가운데
염불을 통하여 사량(思量) 시비 분별을 여의고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근본 성품인 자등명의 무량광이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 속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자등명(自燈明)
무량광의 부처님이 현현하도록 하는 것이고
염불하는 사람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등명의 무량광에
염불을 통하여 가서 머물고 머물러서는 시방을 비추도록 하는 공부가
참다운 염불공부라 할 것이다.
염불선(念佛禪)이란
살아가면서 수많은 생각 속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한 생각 한 생각 깨어서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생각하고
부처님을 생각함으로 염(念)하고
부처님을 염함으로 자기 자신과 둘이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이 부처인 줄 알되 업장으로 구별된 지를 알고
업장을 녹이기 위한 행으로 업장을 닦기 위한 행으로
염불에 매진하는 것을 염불선이라 할 것이다.
염불삼매란
염불을 하는 행을 통하여 마음과 생각이 집중 몰입 선정을 통하여 삼매에 듦으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업장을 하나 하나 뚫고 또는 뚫는 과정에서
또는 자등명의 무량광에 들어서 삼매에 드는 것을 염불삼매라 할 것이다.
염불이 이러하고
염불공부가 이러하고
염불수행이 이러하고
염불선이 이러하고
염불삼매가 이러하거늘
염불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부처님만 부르면 부르는 소리에
부처님이 와서 자기 자신을 돌봐주고 살펴줄 것으로 믿고
자기 자신 밖에서 와서 자기 자신을 돌봐주는 것으로 알고 있고
염불을 하고 또한 염불을 통하여 자기 자신 주변을 돌봐 주기를 바라고
염불을 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염불을 통하여 기복을 바라는 것이고
염하는 부처님을 의지하여 가려고 하는 타력이라 할 것이되
사실은 염불도 염불하는 뜻과 의지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염불한다면 이는 타력이 아니라 자력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마치 부르면 달려와 돌봐 줄 것으로 믿고
또 부르기만 하면 만사 해결될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는 이름인 부처님을 부르는 것이고 상인 부처님을 부르는 것으로
진정한 부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그러한 일 또한 없다 하겠다.
왜 부처님은 형상으로 소리로 알 수가 없고 볼 수가 없다.
그러한 부처님을 마치 상으로 생각하고 소리를 듣고 와서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부처님을 염함으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처님이 간절함에 따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마음 안의 부처와 마음 밖의 부처가 서로 만남으로 현현하면서 일어나는 일이고
밖으로부터 돌봐지는 것은 조상신 내는 영계의 인연 있는 이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으로 보호하는 보호신장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염불은 부처님을 부름으로 부처님을 맞이해서
자기 자신이 부처인지를 모르고 있다가 부처를 부름으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처 스스로 깨어나서
마음 안으로부터 깊게 껴안고 맞이하고 감응하여
자기 자신 안의 부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염불하는 이들은 알지어다
염불하는 이는 입으로만 염불하지 말고
염불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주술 부리듯
부처님 이름만 부르지 마라
응당 염불을 할 때는
간절히 염하여 부처님을 맞이하고
맞이한 부처님을 간절하게 껴안고
부처와 자기 자신과 둘이 아니라 하나인 줄을 알고
염불하는 부처님이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와서
자기 자신의 자등명을 밝히고 밝혀지는 자등명이 무량광으로 빛나고
빛나는 무량광이 자기 자신이 온몸을 밝히고
온몸을 밝힌 빛이 점점 더 커져서는 시방세계를 밝히도록 해야한다.
이렇듯 염불도 제대로 하면 자력이다
그럼에도 염불하는 사람들이 타력이라 말을 하면 화를 낸다
그것은 염불을 하면서 자력이 아닌 타력 수행을 하기 때문이고
염불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고
염불을 하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염불인에게는 염불이 생명이라고 한다
이는 염불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염불에 대해서 제대로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염불과 기복 관계를 만들어 놓은 것에도 있고
또 그것으로 하나로 뭉치게 하려고 하는 끌어 모으려는 방편일 수도 있고
염불을 가르쳐 주신 분의 뜻을 깊이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
근기 약한 사람들에게는 자칫 독이 될 수도 있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깨질 수도 있고
염불함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지를 아는 것으로 아는
기복신앙으로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러워서
이 글을 써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다 썼다. *^^*
어쩌거나 이 글을 쓰게된 것은
염불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제대로 알고 염불을 재대로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2006. 04. 25. 18:43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마음에 꺼지지 않는 등불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2550년 석가 탄신 일을 맞이하여
석가탄신일만 되면
평소에 절에 가지 않던 사람들도 절을 찾아가 등(燈) 공양을 올린다.
그리고 등에다 가족이면 가족... 조상이면 조상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일년 무사히 잘 지내도록 잘 보내도록 기도 축원 발원을 하고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편안하도록 마음을 담아 등불을 밝힌다.
이미 등을 달면서
아니 등을 밝힌 등값을 내면서
마음 안으로부터 바라는 것이 밖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을 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가지고 등을 달고
어떤 마음으로 등불을 밝히는가가 더 중요하고
등을 달기 위해 등값을 낼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등값을 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겠으며
등을 밝혀놓고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하겠다.
절간에서야
일년 식량이 거의 다 석가탄신일에 들어오는 것으로 보면
석가모니 탄생의 축하도 축하려니와
대단한 날임에 분명하고 행사 중 가장 큰 행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만큼 스님은 스님대로 바꾸고 불자는 불자대로 바꾸다.
아니 불자보다 스님이 더 바꾸고 스님보다 주지 스님이 더 바쁘다.
사실 절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는 불자님들이 더 바쁜가요?
불자야 등값만 가져가서 밝히면 되고
밝히는 놓은 것만 보고 오면 그것으로 임무를 완성이라도 한 듯
절에 갔다 왔다. 석가탄신일에 등을 밝혔으니
올 한 해는 무사하리라...생각들을 한다.
사실 이런 것 아무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등값을 내고 등을 밝히고 그러면서 가족의 이름을 올리고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이름을 올리면서
이미 마음 안에서 심법이 작용하여 밖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디 등을 돈으로 살 수 있겠는가?
어느 등은 얼마....어느 등은 얼마...
이름 있는 누구는 대웅전 어디에..누구는 어디에...
사람들의 사리 분별과 크고 작음에 받아드리는 마음에
이기적인 생각이 작용하기에 스님들도 거기에 따르고
속세법을 따라기보다는 세속법에 따르고...
불자들 역시도 세속법을 따라 등을 밝힌다.
석가탄신일 전부터 불을 밝혀서 ...탄신일 다음날 등을 떼고
등을 떼었다가 다음에 쓰기도 하고....종이는 뜯고..다음에 또 쓰기도 한다.
비록 며칠이지만 절에 가서 등불을 밝히는 것이
바람이 불면 꺼지고 며칠 지나면 자취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그래도 등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등을 밝히며 평소 갖지 않았던 마음을 갖게됨으로 심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석가모니께서 태어난 뜻과 의지를 생각해 봐야할 것이며
석가모니께서 태어난 뜻과 의지를 받들고
그 뜻과 의지를 더욱 더 분명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부처님과 같이 장차 성불하고 말겠다는
굳은 신념과 의지를 가져야 할 것이며
그러한 길을 열어주신 부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함과 함께
정성스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등불을 켜야 할 것이다.
마음에 등불을 밝혀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에 불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등불을 밝힘으로
아무리 깜깜한 어둠이라도 아무리 작은 빛이 있다 하더라도
그 빛으로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이 무명에 가려 악업을 짓고 있는 마음에 등불 밝히는 인연으로
무명의 어둠을 물리치고 사라지게 하고 밝은 곳을 향하도록 하고
마음이 가는 곳마다 마음먹은 대로 마음이 행하는 행마다
마음의 등불로 밝혀감으로 지혜를 얻고 지혜를 얻음으로
두루 밝혀 확연히 살펴 앎으로 성불해야할 것이다.
절에 가서 등불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며
지혜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도반님 모두 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등에 불을 밝혀서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 밝히는 인연으로 무명 번뇌를 끊고
해탈 성불의 인연을 만나 해탈 성불하시고
사람마다 있는 자등명의 자성불이 무량광으로 화현하여
시방세계에 꺼지지 않는 광명을 밝히시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2006. 05. 03. 08:02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을 받는 것과 심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몸이 오직 나이고
이 몸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보다는
어느 종교가 되었던 종교를 믿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이 몸이 나이되
이 몸이 다하면 믿는 종교에서 말하는 곳으로 가도록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자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자기 이득이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갈 것이나
후자의 경우는
보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자기 자신도 생각하지만 남도 생각하고
또한 죽은 뒤의 세계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됨으로
비록 삶이 힘들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고
힘들 때마다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좋다고 하겠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하나님나라에 태어나고 천국에 태어난다
또 하나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 정성을 다하여 이루어질 기도만 하면
기도를 들어준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도 선(禪)이 아닌 염불로 보면 역시 그러하다.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을 가지고 불보살님들에게 의지하여 기도만 하면 이루어진다
심지어 몇 번만 불러도...가피력을 받고 얻는다.
기독교에서 은혜를 입고 성령을 받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자력이라기보다는 타력이라고 하고
불교는 타력이라기보다는 자력이라고들 한다.
자력이라고 말하는 불교에는 선(禪)과 교(敎)가 있다.
불교를 공부함에는 선(禪)이고 있고 경전이 있으며 염불이 있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법으로 이를 심법(心法)이라고도 하고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중생을 깨우쳐주기 위한 가르침이며
염불은 염하는 부처님을 무조건 믿고 의지하여 기도 염함으로
염불하는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기 위해 또는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단순히 염불하는 것만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염불을 좀더 깊게 들어가면 염불에는 염불선이고 염불수행이 있다.
단순히 염불하는 것이 아니고 일심 일념으로 염불 수행을 하면
염불선에 들게 되고 염불선에 들면 염불 삼매에 빠지게 된다.
염불함으로 염불하는 부처님을 부르는 염을 통하여 가피력을 받고 위력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럼에도 다른 것은 염불을 함으로 염불하는 부처님을 자기 자신 안에서 맞이하고
맞이하는 부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화현(化現)하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밖으로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은 단순히 염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을 통하여 염하는 부처님을 맞이하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처님을 화현시키는 화현법(化現法)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염불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염불하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여 염불을 한다
사실 이런 기복이 없다면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함으로 믿는 구석이 생기고
믿는 구석이 생김으로 믿는 이로 하여금 나아갈 수 있는가하면
또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니 되더라는 이루어지더라는 기복이 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기도하게 되고 간절하면 간절함만큼
간절하게 기도함으로 집중 몰입 선정 삼매에 듦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되고
그럼으로 더욱 더 깊게 빠져들고 더욱 더 빠져들어서는
어떻게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싶고 관찰하고 싶어져서
관찰하며 관하다가 그러한 현상이 마음법 심법에서 생기는 지를 알고
자기 자신이 했던 하고 있는 것에서 심법 공부를 하게됨으로
해왔던 것으로 통하여 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선(禪)을 하게된다.
선을 하게 되어서는 더욱 더 깊어짐으로 전체를 통하게 된다.
이렇듯 어느 것으로 통하든 하나만 제대로 통하면 전체로 통할 수 있다.
이러하기에 알려주는 입장에서 보면 근기 따라 근기에 맞게 알려주게 되니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무조건 믿고 따르기만 하라
그러면 부처님께서 아들을 돌봐주듯 다 돌봐 줄 것이며
배고픈 아이가 어머니에게 젖 달라고 애원하듯 간절히 해라
그러면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주듯 들어줄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을 찾기만 해도 부처님께서 들어줄 것이며
기도만 하라 그러면 부처님께서 들어줄 것이다
염불만 하라. 그러면 염불하는 부처님으로부터 위신력을 받고 가피력을 받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루어지면 다행인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물으면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간절함이 부족하고
내 업이 그러하고 내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하니
마음을 바르고 하게 더욱 더 믿고 의지하여 간절하게 하여
부르는 이름과 부처님과 통하게 하라고 한다.
통해서 그렇지 않고 하며 통한다니 무엇이 통하는 것인가?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마음이 통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부처님 마음과 기도하거나 염불하는 자기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가?
그것은 청정심에서 통하는 것이다.
맑디 맑은 순수의 순백의 백지 위에서 통하여
순백의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뜻과 의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그대는 밖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안팎 없이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밖이 탁하다면 안에서 통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며
안이 탁하다면 밖에서 통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듯 안팎에서 이루어져서 전체로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이
뜻과 의지를 가지고 기도 염불한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을 받는 것과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심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심법은 자기 자신이 인식하고 의식한 마음 안에서 이루어져서 밖으로 현현하여 나타나니
일체법이 모두 다 심법인지를 아는 사람에 있어서
일체의 생멸법이 마음 안에서 생멸하는 지를 아는 사람에 있어서
부처님의 가피력이 심법이고 심법이 부처님의 가피력이려니
부르는 이름의 부처님에서 보면 부처님의 가피력이고 위신력이지만
부르는 이름이 마음이고 마음인 심법에서 보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 심법의 작용으로 인하여
일체의 생멸법이 도래하고 도래한 일체의 생멸법 안에서 작용함으로
작용한 심법은 부처님의 가피력 위신력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 안에 누구나 있는 부처님 마음인 심법의 작용이라 하겠으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불러서 염하는 부처님의 가피력이고 위신력이며
돌보아 주시는 신(神)들의 보살핌이라 한다.
2006. 05. 06 13:50
깨달음의 공덕과 진리를 전하는 공덕 / 칠통 조규일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굳이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공덕이 된다 하여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수행이 있고,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공덕이 있을 텐데
이를 자세하게 확연히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깨달은 자가 지구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지구의 의식이 높아지고
깨달은 자가 지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각자가 하는 말과 전해지는 말이나 글로
지구의식이 상승하고 지구가 정화된다고 ....
언젠가 다른 글에서 말했던 것 기억이 나네요.
깨달은 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공덕이 된다 하여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수행이 있고,
지장보살이
"지옥에 있는 중생을 다 구하기 전에는 난 성불하지 않겠다."하였다 하나
앞뒤가 맞지 않지요.
보살이 지옥에 있다 하나
보살이 있는 지옥은 지옥이 아닐 것이며
"성불하지 않겠다." 하나
성불하지 못 하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고
성불했다면 중도의 행만이 있으니
천당과 지옥이 있고 없고 떠나 있다 하겠지요.
아이러니 하지만 경전에 있기에...
또한 서원이 그러하다 하니...
지장보살이란 이름으로 보여지기 위한 상징적 의미라 하겠지요.
세상은 나로 생멸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내가 있고
"나"를 떠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다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부터 끝나는 것이지요.
이 세상 역시도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내가 인식하고 의식하는 만큼
이 세상은 의식되어지고 인식되어질 것입니다.
의식되어지고 인식되어지는 만큼 세상은 존재하고
존재하는 세상은 의식되어진 만큼 인식되어진 만큼
그 범주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나"
즉 내가 의식하고 인식하고 있는 만큼
세상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과 같이
님의 의식만큼 수행의 경지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수행이 이루어진 만큼 이루어진 경지 안에 세상은 있고
경지 안에 있는 세상은 그 어느 곳(것) 보다 더 청정할 것입니다.
즉 님이 이루어진 수행만큼 의식이 깨어 있는 만큼
경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님의 범주 안에 있게 되고
님의 범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님의 범주 안에서 님의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게 되는 님의 범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님의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은 그들에게는 득실을 떠나 덕이 되고
그들에게 덕이 되는 만큼 님에게 있어서는 공덕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님이 있는 것만으로도 님의 범주 안에 있는 것들에게는 공덕이 있는 것과 같이
깨달은 자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공덕이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깨달은 자가 깨닫고 아무런 드러남이 없이 침묵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드러남 없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각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보고 듣고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행을 합니다.
그는 침묵하되 지구를 바라보고
지구 밖으로부터 지구 안으로 기운을 끌어올 것이며
국가 사회 주변...을 바라보고 살피며 청정하게 하지요.
이렇게 그가 있는 곳(것)만큼은
그가 바라보는 곳(것)만큼은 청정하게 할 것이며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보이지 않는 영혼들을 천도할 수 있는 한 천도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괴로워하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운을 보내고 서원을 보내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는 깨달은 자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의 의식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런 만큼 깨달은 자가 있는 세상은
그가 존재해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는 이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공덕이 있다 하겠으나
이는 영향을 받는 이들로부터의 생각이고 공덕이지
진정 깨달은 자에게는 공덕이랄 것이 없이
여여함 속 보고 듣고 부딪치는 가운데 중도의 행에서 이루어진다 하겠습니다.
마치 신통처럼 수행의 법력만큼 이루어지고 행해진다 하겠습니다.
법력이라 하나 기운이고 기운이라 하나
"나"를 이루고 있는 체기권(體氣圈)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겠습니다.
체기권이라 하나 모든 이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자성경계의 일원상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힘만큼 기운만큼 법력만큼 행해지고 이루어진다 할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무엇보다 우선하여 "나" 스스로를 구해야 하며
"나"를 구한 만큼 "내" 범주 안에 있는 것들과 함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면 행복한 마음에 허공을 다 집어넣어도 다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지만
내가 불행하고 화나 있으면 화나 있는 마음에 바늘 들어갈 구멍이 없듯
내가 알지 못하고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한다면
이는 봉사가 길을 안내하는 것과 같고
종교란 금은보화의 창고에 갇힌 노예와 다름이 없고
도와 진리란 금강석을 손발에 묶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으며
자기 자신을 포장하여 아름답게 꾸민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살아가는데 종교가 필요하나 종교에 빠져서는 아니 되고
도와 진리가 살아가는데 편안하게 해 주고 좋으나
도와 진리에 빠져서는 아니 되지요.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서 아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개인의 나의 깨달음이 우선 되어야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길에서 있어서 이루어진 만큼
종교, 도의 진리를 전하고 포교 포덕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
종교의 노예가 되어 종교에 갇혀서 도나 진리에 묶여서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겠습니다.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깨달음보다는 종교의 존속을 위한 입장이 강하다 하겠습니다.
아무리 종교가 좋아도
종교의 노예가 되거나 종교란 감옥에 갇혀서는 아니 될 것이며
종교를 일으킨 교주의 말씀이 아무리 좋고 보배고 보석이라 할지라도
종교 교주가 말씀하신 말이나 글 가르침에 빠지고 갇혀서
스스로 일어설 수 없다면
이는 믿는 종교가 종교 교주의 말씀들이 진리도 보배도 보석도 아닌
자기 자신을 가두는 감옥에 불과할 것입니다.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자신의 수행을 게을리 할 경우
자칫 종교란 수렁과 교주가 말씀하신 도의 진리란 수렁에 빠져
종교로 인한 꿀맛과 종교 교주가 말씀하신 도의 진리란 꿀맛에 취하여
가야할 길을 잊고 달콤함을 탐닉하는 꼴이다 할 것입니다.
이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현재 가르침을 주는 분(스승)에게나 알려주는 분에게도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벗하여 의지하고 더불어 가되 빠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믿고 의지한다고 하여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믿고 의지하는 분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할 경우
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님이 스승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스승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라 하여
님의 수행은 뒤로하고 스승의 도의 진리를 전하라 하면 어찌하겠습니까?
믿음이 강하여 전하라는 말을 그대로 듣고
스승의 도의 진리를 전하는 포교를 했을 때
님에게는 어떤 공덕이 있겠지는지요.?
종교란 이름과 스승이란 이름으로 달리했을 뿐
같은 상황은 아니겠는지요?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써
종교, 도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포교, 포덕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종교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
즉 종교의 입장에서 종교가 있기 위한 존재하기 위한 수단이고 방편이지
종교가 가진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A란 종교가 있다고 합시다.
이 A란 종교의 교주의 제자로부터 종교는 생겨났으며
교주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A란 종교의 교주로부터 생겨난 종교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며
A란 종교가 생겨난 이후에는 종교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많이 있어야 하고
신도가 있다 할지라도 종교에 대한 교주에 대한 믿음이 강해야 하고
교주에 대한 믿음이 없다거나 신도가 없다면
A란 종교는 얼마지 않아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믿음을 전재로 하고 믿음으로 시작해서
교주의 말씀에 복종해야합니다.
믿음이 전재가 되어야 만이 하나의 종교가 되고
복종해야만이 종교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종교는 있을 수 없고
믿음 없이는 복종도 없고 복종없이는 종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성립에서 보면
가르치는 미명 아래 스승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가르치는 범주에서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리겠다는
스승의 생각으로 제자들에게 전파하게 하고
또는 제자들 생각에 스승의 가르침을 많이 알기 위한 전파하려하고
이는 순수한 의미에서도 시작될 수 있고
또는 다른 의미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가르치는 스승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고
배우는 제자들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스승이면 스승 제자면 제자 스스로들로부터
"나 아니면" "내가 최고.."" 전하고 싶어서..."
"난 이런 스승의 제자다..." "스승의 가르침이 너무 좋아서..."라는 등으로부터
시작된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종교의 입장에서
종교가 되게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가 생겨난 당시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믿음으로 종교가 생겨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가 생겨난 이후에는 계속적으로
종교가 전파되고 포교되는 것도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교주가 살아 있고 교주의 가르침이 살아 있게 되고
제자인 그들 또한 더불어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종교를 전파하고 포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가 전파 포교되어야지 만이 생겨난 종교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이며
종교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교주가 말한
경전이나 코난 성경...이 신성시되어야 하고
그것들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의 교주가 말한 것이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지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요?
개인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깨달음보다는 수행의 방편으로
종교를 전하고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고
종교를 전하고 전파하는 공덕이 없다하면
그 누가 종교를 전하고 전파하겠습니까?
사경의 공덕이 없다면 누가 사경하겠습니까?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경이 아주 중요했겠지요.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한 지금은 사경도 중요하지만
그 말의 뜻과 의미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말의 뜻과 의미를 아는 것보다 더 그것을 의식 인식하며 깨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종교가 전해지고 전파되어져서
이를 전해 듣고 깨어나는 이로부터 전파한 나에게로 공덕이 돌아오는 것과
내가 수행의 경지만큼 아니 깨달음을 얻어서
"나" 안의 범주 안에 있는 것들에게 전하여 주는 것과의 공덕의 차이는
지금 님께서 묻고 있는 질문의 요지라 할 것입니다.
님은 종교를 전파하고 포교해 주신 분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님에게 종교를 포교해 주신 분에 대해서는
님의 변화만큼 포교해 주신 분에 대하여 감사할 것입니다만
포교 전파되어 먼 미래에 종교를 접하는 이들도 그러할까요?만
윤회해서 그 인연으로 또다시 그 종교에 믿음을 가지고
수행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역시도 개인의 수행보다 포교 전파의 공덕을 생각해
수행하지 않고 포교 전파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개인의 깨달음을 구하며 구한 만큼
포교 전파하며 수행을 한다면 이생에 구하지 못할지라도
전파 포교한 인연으로 또다시 그 종교의 만남으로 수행해 가서는
어느 생에서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만
수행의 방편으로 포교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은 내가 있어 나로 있는 것이지요.
내가 없는 세상에게 누가 있습니까?
육도 윤회한다 하나 누가 육도 윤회하는 것이지요?
육도 윤회는 내가 육도 윤회에 있을 때 육도 윤회하는 것이지
육도 윤회를 벗어나 있으면 육도 윤회는 있다 없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육도 윤회하는 입장에서 보면 육도 윤회가 있으며
육도 윤회를 벗어나 있는 입장에서 보면 육도 윤회는 없다 할 것입니다.
우주는 그 테두리의 이름이 우주이고
우주 전체는 우주의 영향을 주고
우주 전체는 우주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우주는 우주의식을 벗어나 있지 않고 우주 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님이 수행하여 올라선 경지만큼의 의식은
그 의식의 경지만큼 그 안에 있는 것들에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포교하는 것은 포교한 분에게로부터 공덕이 돌아오니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가 되어야 한다 하겠습니다.
2005. 3. 1. 09:32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