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교수님
목영덕 선생의 증언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봅니다.
1. 김유정 선생의 출생일과 사망일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1908년 2월 12일, 1937년 3월 29일입니다. 김유정선생이 생존했다면 올해 만 109, 보통 한국 나이로 110세입니다.
목영덕 선생의 올해 만 나이로 93 혹은 94세라면 이분은 출생연도가 1923년 혹은 1924출생입니다. ( 안교수의 원고에서는 김유정, 목영덕 나이차가 13세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선생은 1921년 생입니다.)
*1쪽: 그 분은 2017년 현재 연세가 93세(주민등록상의 나이. 실제로는 94세라고 함) ?
⇒ 김유정보다 13세 아래라면 목씨의 현재 나이는 97세가 되어야 함.
2. 김유정선생이 춘천에서 야학하던 때는 대개 1930~31년 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1년에서 1년 반 정도 야학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야학에 다니던 목영덕 선생의 나이는? 8~10세 (93~94세로 보았을 때)로 계산이 나옵니다.
우리들의 경우 8~10세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을까요?
3. 야학운동 하던 1930년대 초기, 김유정집안의 경제적인 문제
*그 당시 사랑채가 거의 다 쓰러져 가는 집의 사랑채에서 어렵게 살았다. 그는 밥을 해 먹는 대신 혼자서 종종 막걸리 한 되를 받아먹곤 그것으로 버티기도 했다.
⇒1) 당시 마을 사람과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유정의 집안은 서울에서보다는 가난했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식의 살림. 형님은 술에 취해 옹기장사에게 옹기값을 물어주고 옹기그릇을 깨뜨려 대는 흥청거림을 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밥이 없어서 막걸리로 버티는 살림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김유정은 야학이 파하면 금병의숙과 문학촌 사이에 있는 주막에서 코다리 안주에 막걸리를 즐겼다고 합니다.
2)야학하면서 김유정이 자기 돈으로 춘천까지 가서 종이를 사와서 이것을 노트로 만들어 아동들에게 나누어주고 공부를 시켰다고 합니다.
3)김유정의 바로 손위 누님(경기도 광주로 시집간)의 따님, 그녀의 춘천 외갓집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의 춘천 집이 궁궐 부럽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 있고 잘 정돈된 집으로 증언합니다.
4. 「봄·봄」의 실제 현장
『봄봄』에서 나오는 점순이는 신남초교를 지나면서 나타나는 비교적 큰 벌판인 ‘한들’에서 삼포 가는 쪽 냇가 건너 근처에서 살았는데, 다섯째 딸이라고 한다.
소설의 현장인 점순네 집은 문학촌과 금병의숙 가운데 있습니다(안내표지판 설치되어 있음.) 당시 김종필(욕필이 봉필영감)과 사위(최순일), 점순( 씨만)의 실화를 소설화했으면 작품에서는 딸만 셋이지만 실은 딸 셋에 아들 둘이 있었다고 하고, 점순의 두 남동생에 대해서 당시 제자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5. 김유정과 한자 습득
* 김유정이 한문에 박학한 것은 그가 7살 즈음에서부터 양구에 산다는 잘 알려진 한학자인 지선생(일명 지박사)라는 분으로부터 한문을 배웠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그로부터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을 이미 깨우쳐 그 당시 마을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똑똑한 아이였다. 약 10여년간 배웠다고 한다.
김유정은 『용감한 청년』이라는 의치왕자(?)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다가 일제의 감시망에 걸려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그 당시 유행했던 폐병에 걸려 수감되는 변은 면했다.
⇒ 김유정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춘천의 실레마을, 서울 종로구 운니동, 두 가지 설이 있음. 유인순 본인은 김유정이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나 1~2살 무렵 서울로 간 것으로 추정, 서울에서 서당에 다녔다고 합니다. 김유정 작품, 감시망, 옥살이 운운은 목영덕 선생의 상상력에서 나온 듯합니다.
6. 삼포(三浦)
* 삼포는 예전에 인삼을 재배하여 나라에 진상하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고 했다. 그러니 춘천이나 홍천지역도 예전부터 인삼을 재배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특히 인근 홍천지역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인삼재배지의 하나이다.
⇒ 삼포는 우리나라 지명에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로 보입니다. 영화 <삼포가는 길>도 있지요. 물줄기와 관계되어 있는 듯(새술막쪽 계곡물과 덕만이 고개쪽 계곡에서 내려오던 물이 삼포 다리 아래에서 합해져 팔미천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합니다.
춘천지역에서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0년 안팎. 지구온난화가 발생하면서 인삼만 재배되는 것이 아니라, 감나무에 감이 열리고, 능소화도 피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지난 10년 안팎의 일입니다.
(우리들의 초등교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에 있던 물그릇의 물이 탱탱하게 얼어 있을 정도로 추웠고, 학교에 가다보면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갈듯이 시리고 아플 정도로 추웠습니다.)
7. 솔문
8쪽 :한 · 일합방 때인지 3 · 1운동 무렵인지 분명하진 않으나 그 근처는 4거리 였고, 일본군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광판은 구한말에는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3 · 1운동 때는 광판초교 솔문문터에서 만세운동도 있었기에 당국의 감시가 예사롭지 않았다. 만세를 부를 때는 솔문부터 먼저 세우고 불렀다. 이처럼 큰일을 할 때는 솔문부터 세우는 것이 그 당시 풍습이란다.
국어사전 : 솔문: 경축하거나 환영하는 뜻으로 나무나 대로 기둥을 세우고 푸른 솔잎으로 싸서 만든 문
김유정이 금병의숙 건물을 완공하던 날, 솔가지들을 꺾어와 기둥에 솔가지들을 꽂거나 감쌌다고 하는 증언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시리아의 어느 수녀원에 갔더니 그곳에 솔가지로 아치를 만들어 놓아서 제가 한국과 중동지역에도 같은 정서가 흐르고 있다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목영덕 선생의 경우 1921~23년 출생임을 감안하면 한일병합(1910), 삼일운동(1919)때 솔문세우고 만세를 불렀다는 것에는......솔문 세우고 만세 부르면, 그것은 곧 ‘나 잡아 가세요’표시가 될 터이니까........
8. 소양강 처녀, 부사와 애첩, 비각 거리 이야기
전설이 현대화 되면서 심각한 변화와 왜곡이 나타난 듯합니다.
춘천 명기 ‘계심’의 이야기에 충청도의 ‘아랑 전설’이 합해진 듯한데요.....계심은 실존 인물로 임란 무렵의 인물이고 그 비석은 지금 소양 1교 봉의산 자락 ‘소양정’ 옆에, 제가 3-4년 전에 확인한 바 있습니다. 비석거리는 현재, 소양1교에서 번개시장 사이에 있습니다.
* 각주 12 .........지금은 춘천출신 가수인 노사연이 부른 ‘소양강처녀’
⇒‘소양강 처녀’의 가수는 김태희.
9. 유홍석과 윤희순
*목영덕 어르신의 말에 따르면 유홍석이 의병활동이나 항일운동을 한 것처럼 그의 아들과 경주 김씨인 며느리도 그랬다. 유홍석과 그의 아들은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성으로 의병활동을 한 유희순도 그의 인척이다.
⇒ 유홍석의 장남은 유제원, 유제원의 아내는 윤희순. 곧 여성의병 윤희순은 유홍석의 며누리. 여성 의병 윤희순은 다음 홈피 참조바람 http://mpva.tistory.com/1820
10. 윤동주와의 관계
* 17쪽 : 신남의 김유정에게 보내는 편지를 목영덕 어르신의 큰아버지나 인편을 통해 보낼 때는, 그 당시 어린 목영덕이 그 편지들을 받아 김유정선생에게 전하곤 했다. 편지를 전하면 그 이튿날 아침 김유정이 목영덕 어린이의 집에 목영덕의 큰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한다. 목영덕 어린이가 보기에는 김유정집안과 윤동주집안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여겨졌다. 김유정과 윤동주가 문인이기에 또는 둘 다 연희전문에 다닌 적이 있기에 서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간도의 광명중을 졸업한 것이 1938년 2월, 연희전문에 입학한 것이 1938년 4월입니다. 윤동주의 첫 시작품이 발표된 것이 1939년 <소년>지를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동시(童詩)였습니다. 윤동주가 애국시인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48년 정음사에서 간행된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후.
김유정은 1937년 3월 29일에 사망했습니다.
김유정은 1930년 연희전문 입학 2달 뒤에 출석수 미달로 제적당했습니다.
김유정과 윤동주가 같은 연희전문 동문 운운하여 서로 연락할 기회는 처음부터 가능성이 희박해 보입니다.
김유정은 1935년에 공식적으로 문단에 등단(조선일보 <소낙비>, 조선중앙일보< 노다지> 했습니다. 1930~1년 무렵 윤동주는 용정의 광명중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김유정이 1930년 경 춘천으로 온 것은 명창 박녹주에 대한 짝사랑의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김유정의 나이 22세 무렵, 그는 춘천에 와서도 들병이(술병을 들고 다니며 몸을 파는 여성)와 한 달 정도 동거생활을 하며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조카 김영수, 김영수의 친구 조명희 등과 함께 실레마을에 야학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금병의숙 건립 전후에 서울로 가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철저한 야학운동가는 아니었다는 거지요)
**목영덕씨 관련 신문기사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721651 2015,2.28
죽어서도 버림받은 ‘항일 의병’
정부·국민 무관심 속 목형신 선생묘 방치
김정삼·최천유 선생묘 없거나 관리 안돼
노학수 2015년 02월 28일 토요일
(사 진)
▲ 27일 오전 춘천 남산면 광판리 한 야산에 위치한 의병 목형신의 묘를 조카 목영덕씨가 바라보고 있다.
3·1절 96주년이 하루앞으로 다가왔으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항일운동을 벌인 애국지사들이 정부와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외면당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특히 도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의형제 ‘3총사’로 알려졌던 목형신·김정삼·최천유 선생의 경우 묘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27일 춘천 남산면 광판리 야산.
의병 목형신씨의 묘는 흙이 흘러내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해 묘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공적을 담은 비석도 당연히 없었다.
목 씨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노해 1895년 을미의병에 가세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군대해산령이 떨어지자 춘천으로 돌아와 항일 투쟁을 벌였다. ‘춘천노래’, ‘조국노래’,‘독산도노래’ 등 당시의 시대 상황과 심정을 담은 노래를 작곡해 부르기도 했다.
원주에서 장병들을 모아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항일활동을 한 김정삼씨의 경우 묘가 북산면 청평리 야산에 있다고 알려지고 있을뿐 정확한 묘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화천, 양구, 인제 등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대와 전투를 벌인 최천유 의병장의의 묘는 소양강댐 건설로 수몰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정삼과 최천유 선생은 건국훈장 애국장과 독립장에 추서되는 등 국가유공자에 이름을 올렸지만 직계후손이 없어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목형신 선생의 묘도 조카인 목영덕씨가 관리하고 있지만 목씨가 고령이어서 사실상 방치돼 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묘의 위치를 알 수 없어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 애국지사들이 전국적으로 무려 4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춘천보훈지청 관계자는 “독립유공자들이 자손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묘의 위치나 행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종호 광복회 도지부장은 “애국선열들이 역사 속에 잊히는 것이 씁쓸하다”며 “정부와 자치단체 등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노학수 pressno@kad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