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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리의 3층 석탑, 서상리의 3층 석탑을 답사하기 위하여 버스에 올랐다. 월송리의 3층 석탑, 월송 1리까지 들어갔으나 그 위치를 찾지 못하고 되짚어 나왔다. 춘천 살면서 월송리에는 처음 들어가 보았다. 3층 석탑을 보지 못해 섭섭해 하며 걸어나오는데 길가에 도라지 밭이 있었다. 동요 가운데 '보라색 감자꽃은 파보나마나 보라색 감자/ 흰 감자꽃은 파보나마다 흰 감자' 라는 노래가 있는데 보라색 도라지꽃과 흰 도라지꽃, 그 각각의 도라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월송리 들판에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쑥부쟁이 꽃들이 한창이었다. 서상리 3층 석탑은 길가에 있어서 금방 눈에 들어왔다. 밭 가운데 서 있는 3층 석탑, 주변에서 나온 기와 파편에서 양화사라는 문자가 있어서, 아마도 이곳에 양화사라는 절이 있었으리라는 추정.
서상리 3층 석탑은 보수공사중이었다. 이 지범 선생이 공사장 발판을 딛고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는 중이다.
이지범 선생이 장애물을 피해서 마침내 삼층석탑 전체를 찍었다. 전에는 이 탑에 대해서 고려시대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안내판을 보니 신라시대의 탑 양식을 계승한 것 같다고 되어 있다. 최연 교장 선생은 고구려 탑까지 그 상한선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탑에서 안전감과 상승감이 동시에 느껴진다고도 했다. 신매리에 있는 고구려 석실고분을 찾아가기로 했다. 방동리에 2기, 그리고 신매리에도 고구려 고분이 있다고 한다. 서면 신매리 배추밭이 바다처럼 보였다.
신매리의 고구려 석실고분, 안내판만 있고 고분은 보호차원에서 매립되어 있었다. 이 고분 안에서 유체 2 기를 발굴했다고 한다. 천전리 지석묘군으로 향했다. 소양 5교에서 소양댐으로 가는 지방도로 우측, 채소밭 뒤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가보니 비닐 하우스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그 뒤에 너무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있어서 오히려 무슨 연극 소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의 20년 쯤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지석묘가 상당히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의 착각이었을까. 그때 지석묘 위에 난 구멍들이 별자리를 의미하는 성혈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래 사진에서 바위 표면에 우묵 우묵하게 파인 것은 선사시대인들이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파놓은 것으로 기원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많이 걸은 것은 아닌데 오후 1시 15분, 배가 고팠다. 천전리 지석묘군까지 소양강 서쪽 지대의 유적들은 대강 살펴보았다. 일단 시내로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이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했다. 점심식사 장소는 대룡산 아래 곰골- 고은리, 곰실공소로 가는 입구였다. 전에는 커다란 무슨 공장 같은 것이 있었던 자리인데 근래에 큼직한 식당이 들어섰다. 오늘 청평사에서 춘여고출신 6인이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었었다. 그 가운데 4인이 춘여고 40기라고 했는데 이 식당 주인도 춘여고 40기 출신이라고 했다. 오늘의 메뉴는 닭갈비. 춘천 닭갈비는 업소에 따라 그 맛들이 각기 다르다. 이 집은 젊은이들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이른바 퓨전 닭갈비였다.
신입회원, 혹은 오랫만에 나온 회원들이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오후 탐사 활동이 시작되었다. 봉의산 중턱, 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소양정을 찾아 갔다. 비석군을 왼쪽에 끼고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먼저 춘천 절기 전계심의 비석이 나온다. 전에는 봉의사 가는 쪽에 있던 것을 언젠가 소양정 경내로 옮겨 놓았다.
춘천 절기 '전계심'의 이름을 들은 것은 60년대 말 70년대 초, .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명기 열전>을 신문에 연재했다. 그 글을 통해 전계심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안내판에서는 기생이었지만 좋은 남자 만나서 임신까지 했는데 그 남자가 서울로 가면서 계심을 다시 기방에 팔아버렸다. 평소 계심을 좋아하던 불량배가 계심을 유린하자 계심은 아기를 유산하고 정절까지 훼손당하자 자결한 것으로, 그리고 춘천부사의 꿈에 나타나 신세한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1796년 춘천의 선비들이 모여서 전계심을 위로하고 그녀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탑을 세워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전계심의 이야기는 다르다. 양가집 딸로 태어나 가세가 어려워지자 가족을 위해서 스스로 기방에 뛰어든다. 아름답고 영특하고 재주 많기로 사랑받는 명기였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남자는 후일을 약속하고 서울로 가고 계심은 태중의 아기에게 정성을 쏟으며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린다. 평소 계심을 엿보던 일군의 사내들이 계심을 유린한다. 계심은 사내들의 더러운 손이 닿았던 자신의 신체, 손을 발을 가슴을 도려내고 사망한다. 한편 서울에서 계심을 데려가려고 준비에 분주하던 남편의 꿈의 피투성이가 된 계심이 나타난다. 급히 춘천으로 달려온 남편은 계심의 주검 앞에 통곡하며 계심을 장례 지내 준다. 정비석 선생의 글을 읽은 이후, 춘천 절기 전계심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전계심의 비석을 찾으려고 알아보았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 당시 여고교사였던 나는 어떤 일이 있었던지 후평동 과수원과 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봉의산 뒤쪽을 걷고 있었다. 봉의산 산기슭에, 암자로 오르는 길 표시가 있기에 따라 올라갔다. 우연히 갈대 사이, 무연고 무덤 부근에서 돌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바로 전계심의 비석이었다. 암자에 스님이 있기는 했지만 암자의 주인은 강신무( 降神巫) 였다. 그에게 전계심 비석 이야기를 했더니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전계심의 사연을 전하고 비석과 그 부근을 잘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소양정의 역사는 사뭇 오래되었다. 엄황이 편찬한 『 춘주지』에 의하면, 소양정은 삼한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니 적어도 1,500여년 간을 존재해 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라고 한다. 기록에 있는 것만으로도 1605년(선조 38)에 홍수로 유실, 그로부터 5년뒤 (광해군2)부사 유희담이 건축, 1647년 부사 엄황이 중수, 1777년 (정조 1) 홍수로 유실했지만 1780년 부사 이동형이 재건, 1925년 을축년 홍수에 유실, 다시 복원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불에 탔고 1966년 옛터에서 위로 올려 현재의 봉의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소양정의 본래 이름은 이요루(二樂樓) 였으나 순종때 윤왕국이 소양정이라 개칭했다.
소양정을 찾아온 유명인으로는 김시습과 허균, 김상헌, 김창협, 김창흡, 이민구, 이현석, 이재, 조재호, 정약용 같은 이들을 들 수 있다. 특히 정약용은 강진에서 20년 가까운 유배생활을 마치고 1820년, 1823년 두 번에 걸쳐 양수리에서 배를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춘천을 다녀갔다. 1823년 4월, 정약용은 춘천을 방문 소양정 아래에서 묵으며, 김시습의 시를 보고 감탄, 그 내용을 베껴서 후일 그의 전집에 수록했다.
새 나는 저 밖에 하늘은 다하려 하고 시 읊은 끝에도 한은 그치지 않아라 산들은 북쪽에서 꺾어들고 강물은 저절로 서쪽으로 흐르는데 기러기 내려앉는 모래톱은 아득하고 배 돌아가는 옛 기슭은 그윽도 하다. 어느 때에야 세상 그물 벗어던지고 태평세월 틈타서 여기에 거듭 놀까 (김시습) - 등소양정의 제 1수 다시 찾은 소양강 누대에 오르네 누대에는 봄빛 가득 풍류가 넘치네 구름 안개 꽃과 달 속에서 읊조리노니 나그네 가슴 속 얽힌 설움 풀어보려네
소양정에 현판되어 있는 시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차운을 낳은 작품은 청음 김상헌 (金尙憲)의 것이었다. 춘삼월 소양강 누대에 오르니 누대 앞 경승은 노닐기에 좋구나 땅 돌고 하늘 높기는 등왕각 같고 물가 맑고 사장 희어 기주 같아라 살구꽃 이미 지고 복사꽃도 시들한데 왕손이 돌아오지 않아 방초만 시름겹다 술 깨어 기둥에 기대 휘파람 길게 부니 서산에 지는 해가 우두벌을 비추누나 - 김상헌- 청음 김상헌의 손자가 김수항이고, 김수항의 세 아들(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가운데 막내가 삼연 김창흡이다. 소양강에 높은 누대 있어서 조부님 와보시고 유람할 만하다 하셨지 이런 금대 요지는 한강 이남에 없겠고 풍류는 패서주(평양)를 압도할 만 하다. 주럼, 기둥 물에 비쳐 흔들리매 노는 고기 즐겁고 아득한 백사앙에 지나가는 기러기 서글프다. 북망산 아득하여 먼 운치를 낳고 푸른 산안개 경운산 머리에 부옇구나 - 삼연 김창흡-
다산 정약용은 1820년 3월 24일, 큰 형님(정약현)의 아들이 춘천 천전리에 사는 처녀에게 장가들게 되어 조카의 배행으로 춘천을 다녀가게 된다. 다산은 이때의 견문한 감회를 칠언시 25수로 쓰고 또 <두보시에 화답한 12수>를 써서 이들을 <<천우기행권 穿牛紀行卷>> 으로 묶었다. 아래 시는 <두보시에 화답한 12수> 가운데12번째 '우수주'에 포함된 시다. '우수주'는 춘천의 옛 이름이다.
어부가 수원(水源) 찾아 계곡에 들어서니 붉은 누각이 만정봉 앞에 솟아 있다. 궁준 유무는 할거 자취 없어지고 진한 맥국 싸우던 일 가련키만 하구나 우수주 옛밭에는 봄풀이 아득하고 인제에서 흐르는 물에 낙화가 어여쁘다 깁등롱에 하늘대는 소매가 무슨 보탬 있는가 모래톱 버들에 석양 비칠 때 홀로 배를 푸노라 조위 정시 연간에 낙랑태수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바다를 건너 다스 려, 북으로 고구려를 먹고 남으로 진한을 공격하여 여덟 나라를 취하였다. 이때 낙랑이 근거로 삼은 곳이 실은 춘천이었다. - 다산 정약용- 심경호 저, [다산과 춘천] , 강원대 출판부. 1995. 306쪽
* 다산은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 我邦疆域考>에서 춘천 맥국설을 거부하고 춘천이 낙랑남부도위와 초리 낙랑의 지역으로 주장했다. 구한말 의병장 의암 유인석 장군도 소양정에 올라 회포를 읊었다. 반가운 이름을 보았다. 1966년 소양정을 현재의 자리에 재건하면서 당시의 인물로 성운경씨가 쓰신 소양정 재건낙성 기념 시 한편이 걸려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그 분을 '성운경씨'라고, 꼭 '씨'를 붙여서 불렀다. 자그마한 체수에 얌전한 선비, 내 친한 친구의 아버지셨다. 친구의 아버지라 길에서 만나 반갑다고 꿉벅 인사하면, 무표정한 눈길로, 인사를 받으시기는 했다. 그러나 무안했다. 내 친구는 그 어른의 11남매의 막내딸이었다. 막내딸이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 반갑다고 인사해도 꼭 그런 표정이셨다고 한다. 그분의 둘째 아드님은 내 대학시절 은사님이셨다. 그런저런 인연이 있었던 터에 소양정 이층 누대에서 친구 아버님의 한시를 보니 경탄이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글로 쓰여진 또 한 편의 시, 시인 이름을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이, 나의 학부모이신 듯 했다.
(누각의 계단 내려가는 구멍에서 떨어지는 순간 찍힌 사진이라 초점이 흔들렸다. 기념으로 여기에 게시한다.) 놀랍고 반가워서, 휴대폰 들고 그 시작품을 찍으려고 초점 거리 맞추며 나아가는데 “조심하세요 ” 소리까지는 들었는데, "~ 세요" 소리와 함께 나는 수직 낙하! 이층 누각에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정신이 아득했다. 모두들 달려와서 들여다보며 걱정을 했다. 나는 나무 계단의 맨 아래 계단에 주저 앉아 있었다. 회원 가운데 의사선생이 오시더니 얼굴에 상처는 나지 않았는지, 얼굴은 괜찮은 것 같았다. 두 손을 앞으로 그리고 위로 들어보라고 했다. 그렇게 했다. 이상 없음. 이번에는 천천히 걸어보라고 했다. 여기 저기 쑤시기는 했지만 조심스레 걸었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양 팔에 긁힌 자국, 양 종아리도 긁힌 자국, 밴드를 꺼내서 양쪽 다리 종아리에 붙였다. 뒤늦게 누군가 난간 계단으로 내려오려다가 꽈당, 그러나 그분은 가볍게 중심을 잡으셨다. 휴대폰은 액정화면에 금이 갔을 뿐 괜찮았다. 모두들 걱정을 하기에 더 아픈 표정을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올랐다. 천문학자 한 사람이 밤길에 하늘을 바라보고 가다가 우물에 빠져 버렸다. 지나던 사람이 천문학자를 구해주고 말했다. “ 먼 하늘의 별을 바라보시면서 어째서 발 아래 우물은 보지 못하십니까.” 통증이 심한 데 웃음이 나왔다.
소양정 정자도 좋고 시문도 좋고 역사이야기도 좋지만, 소양정 누대로 오르내리는 난간 없는 계단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신소설작가 이해조는 신소설 <소양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1911.9.30~12.16까지) 소양정의 옛모습을 보여주는 관련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우편엽서에 나온 소양정 조선총독부 도서관인이 찍혀있다. 사진의 구도상 같은 무렵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 우편엽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1915년 무렵의 소양정 사진이다.( 1910년 9월 30일 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관제가 공포되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의 기능이 가동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 말, 우표엽서에 나온 소양정의 모습이라고 한다. 아직 소양 2교가 건설되기 전의 사진이다. 오른 쪽 상단 강물 위에 떠 있는 것은 나룻배이다. 이 사진은 전 강원대 교수 박민일 교수의 소장품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의 소양 1교가 사진 상단을 지나고 있고 오른 쪽 하단에 소양정이 보인다. 춘천에 소양 1교가 놓인 것이 1933년이다.
일본인이 찍은 사진으로 당시 소양정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18 세기에 김윤겸이 그린 소양정이다. 김윤겸은 화가 김창업의 서자라고 한다. 당시는 소양정이 물가 가까이 있었다. 위의 소양정 관련 자료 사진 가운데 박민일 교수 소장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 춘천역사문화연구회 홈피의 것을 인용했다. 춘천역사 문화연구회에 감사드린다. http://cafe.daum.net/history.cc 춘천 향교로 이동했다. 고을학교에서는 늘 찾아가는 향교이지만 이번에는 기대가 컸다. 춘천 향교는 예전 춘천여중고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춘천 여중고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6년간 춘천여중고를 다니면서, 향교 앞을 지나는 다녔어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흰 두르마기 입으시고 갓을 쓰신 노인들이 오가시는 곳 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춘천 향교는 내게 등잔 밑이었다. 장수루
명륜당
장수루 내삼문 대성전 대성전 내부
수령 150년이 넘는 은행나무. 중고생 시절 우리가 지나다니며 본 은행나무, 우리를 지켜보았을 은행나무, 아마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날보다도 더 오래 이곳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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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