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삼장사의 기록과 의암 부인의 기록 입니다.
글쓴이 : 대종회 청년국장 번호 : 13조회수 : 12007.03.31 20:13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한성의 왜군이 중로로 철수함에 따라 부산-한성간 중요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왜군들도 함께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가토·구로다·고니시·나베시마 군은 4월 29일에 경상도에 이르러 상주·선산·인동·대구 등지에 분산하여 주둔하였습니다.
한편, 왜군이 한성에서 철수한 이후로 10여일이 지나 경상도에 도착할 때까지 두 왕자를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명는 이여송에게 추격을 명령하자 이에 명군은 5월 초에 한강을 건너 중로로 남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상주·선산·인동·대구 등지의 왜군은 5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다시 철수하여 밀양 이남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이 왜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자 충청·전라·경상 하삼도에 선전관을 급파하여 왜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도 "왜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적의 해상 탈출을 철저히 봉쇄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게 하였습니다.
왜는 조선에 상륙한 직후인 임진년 7월부터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동해안의 울산 남쪽 육십 리에 있는 서생포에서부터 남해안의 거제도에 이르는 해안 및 도서지역 십여 곳에 열두 개의 본성과 여섯 개의 지성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한성의 왜군이 철수하였을 때에는 이 축성공사가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습니다.
무사히 한성에서 철수한 왜군은 경상도 해안 지역에 축조한 왜성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경상도 지역으로 집결한 왜군은 이 무렵 경상우도의 요지이며, 전라도로 진입하는 육상의 관문이기도 한 진주성을 공략하여 1592년 10월의 제 1차 전투에 있어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당초 전라도로 진입하기 위하여 진주성을 공격하다가 김시민이 지휘하는 진주성 군·민의 저항으로 실패한 이래, 진주성 패전을 그들의 침략 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한 치욕적인 전투로 인식하고 설욕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한성 철수가 완료될 무렵인 5월 20일에 도요토미는 다시 진주성 공격을 위한 다음과 같은 방략을 지시하였습니다.
첫째, 공격부대는 총 병력 93,000명으로 하되, 제1대는 가토, 제2대는 고니시, 제3대는 우키타, 제 4대는 모리(毛利秀元), 제5대는 고바야카와 군으로 구분한다.
둘째, 수성 부대는 총 병력 23,000명으로 하되, 부산에 모리(毛利輝元), 김해에 모리(毛利重政), 기장에 가메이, 거제 증봉에 하치스가, 거제 왜성에 조오소가베 군을 잔류시키고, 필요시에는 부산성의 병력으로 지원한다.
셋째, 수군 부대는 가덕도에 위치하되, 제 1대 구키군과 제2대 도도 군으로 편성하고, 거제 장문포에 있는 시코쿠 지방의 군수와 협력하여 조선 수군에 대비한다.
이와 같은 도요토미의 진주성 공격 명령이 6월 상순에 조선 주둔 왜군 진영에 하달되자, 공격부대들은 창원·김해 부근에 집결하여 진주성 공격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도요토미의 진주성 공격 명령을 받은 고니시는 "조선군이 진주성에서 저항하지 말고 성을 비워 인명을 구하도록 하라"고 심유경에게 통고하였고,
이에, 명군측에서도 경략 송응창과 부총병 유정 등이 왜군 진영에 서신을 보내어 진주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으나 실효가 없었습니다.
왜군의 진주성 공격 계획이 알려지자, 진주 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은 명군을 접대하기 위하여 상주에 머물고 있다가 급거 진주성으로 복귀하였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 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이계련, 민여윤, 강희보, 이잠 등이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으며, 인근 고을의 부사·현령·현감 등 수명의 지방관들도 합류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진주성에는 3500여 명의 군사와 60,000여 명의 주민들이 입성하여,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도절제사로 추대하고 충청병사 황진을 순성장으로 삼아,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의하였습니다.
왜군은 6월 16일에 함안을 점령하고 함안에서 병력을 양분하여 1대는 18일에 정암진의 곽재우 군을 격파한 뒤 의령으로 진출하고, 다른 1대는 반성을 경유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이에 22일 오전, 제 1대의 가토 군은 성의 북쪽을, 제2대의 고니시 군은 서쪽을, 제 3대의 우키타 군은 동쪽을 각각 담당하여, 예비대를 제외한 70,000여명이 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왜군의 첫날 공격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야간 공격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아침부터 왜군이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다시 공격 기세를 올리자,
그 세력에 놀란 명군은 거창·남원 등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진주성의 위기를 외면한 채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며,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전라순찰사 권율(權慄)등도 의령에 도착하였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게 됩니다.
또 남원에 주둔 중이던 낙상지,송대빈군도 진주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례까지만 진출한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주성이 완전히 포위당하고 외부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군은 25일부터 동문밖에 토산을 쌓아 망루에서 내려다보면서 성안으로 조총사격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성안에서도 황진의 지휘로 현자포로 응사하여 왜군의 망루를 격파하여 적의 화공을 무력화시킵니다.
26일 적은 목궤(木櫃)에다 생피(生皮)를 두르고 이로써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자성을 헐기 시작하자, 성위에서는 큰 돌을 굴려내리고 화살을 내리퍼부었습니다.
이에, 27일 적은 다시 철갑을 두르고 철추(鐵椎)를 사용하여 성을 헐기 시작하였습니다.
적은 성의 밑뿌리를 파서 성을 무너뜨릴 심산이었고 성안에서는 이를 막는 데 사력을 다하였습니다.
적의 시체는 성밖에 삼대와 같이 깔려 있었지만 적은 단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군은 27일부터는 귀갑차라는 새로운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귀갑차는 진주성 군,민들의 화공을 받아 소각되고 맙니다.
성균관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옥구, 장수현감, 영해부사, 영암군수, 담양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높은 인덕은 부임지마다 선정을 베푸니 주민들이 선정비와 생사당(초상화를 모신 집)을 지어 기념할 정도였다 합니다.
그가 1590년 모친 평택임씨의 임종을 당하여 화순에서 있을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습니다.
이에 큰형 경운, 둘째형 경장과 더불어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조카 홍재로 하여금 5백여명의 의병을 인솔케 하여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서 싸우게 하고 자신도 금산전투와 무주대첩에서 혁혁한 전승을 거두웠습니다.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후 첫번째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하였으나 두번째 전투에서는 물밀듯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맙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최경회 장군의 구국정신을 높이사 진주 창렬사에 향사하고 한천면 모산리에 포충사를 세워 그 정신을 기리게 하였습니다.
조정의 특명으로 한천면 금전리에 사당이 세워졌으며 능주 삼충각(최경회, 문홍헌, 조현)을 건립하여 그 얼을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4년 그에 대한 추모사업이 진행되어 동면 백용리 신원동에 충의사를 건립하였습니다.
[논개]
1750년(영조 26년) 조정에서 영부사 김재로가 최경회의 포상을 건의하자 당시 좌참찬이었던 권적이 1751년 최경회의 현손 최급의 청으로 지은 <호남절의록>의 근거가 되는 <최공시장>은 그 동안 최경회 집안인 해주최씨 문중에서 간행한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 실려 널리 알려져 왔으나, 권적의 개인 문집이나 국가공식 문건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어 신빙성여부에 논란거리를 왔었습니다.
<일휴당실기>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 논개관련 부분에서 "또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且其副室 公死之日 盛服婆娑於 江中巖石 誘賊長因而俱墜死 至今人稱義巖)" 라고 하여 논개를 최경회 장군의 副室로 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상시장록>(太常諡狀錄)에 실린 권적의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慶尙右兵使贈左贊成崔公諡狀)" 에는 副室이 아닌 賤妾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전북 장수군에서는 1982년에 발행한 <삼절의 고장>에서부터 1990년과 1997년에 발행한 <장수군지>에 이르기까지 "논개는 장수사람, 선조 24년(1591) 봄에 장수현감 최경회의 측실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조 23년(1799)에 편찬한 <호남절의록>의 최경회 조를 보면 그 말미에 "기생 논개는 장수사람이다. 공이 좋아했다. 논개는 양손으로 왜장 두 명을 안고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논개가 왜장을 두 명이나 안고 죽었다는 것도 웃을 일이지만, 오늘날 장수군에서 논개가 장수사람이라는 주장은 여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조 24년(1591) 때의 최경회는 장수현감이 아니었으며, 담양부사로 재임 중 선조 23년(1590) 12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부사직을 사임하고 화순의 본가에 있었습니다.
더욱이 최경회에게는 나주김씨와 여흥민씨 등 배위가 두 분이나 있었으므로 그는 측실을 취할 수 없었으며, 그가 만약 축첩을 하였다면 현감 또는 부사직에서 파직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최경회가 장수현감으로 있은 시기는 선조 10∼2년(1577∼9)이었고, 이 때의 논개는 겨우 4∼6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논개의 연령은 진주에서나 장수에서 선조 7년(1574)생으로 보고 있는데서 산출된 것이므로 그런 어린아이를 두고 45∼7세의 최경회가 좋아했다고 해서야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영조 26년(1750)에 최경회의 시호를 청원하기 위해 작성된 최공청시행장에, 논개라는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그의 천첩은 공이 죽던 날 몸단장을 곱게 하고 강중의 암석에 왜장을 유인하여 함께 죽었다고 하여, 논개가 마치 최경회의 천첩인 것처럼 주장하여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최경회의 청시(請諡)에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논개가 껴안고 죽은 왜장은 과연 누구인가?
진주성전투에 참가했던 왜장들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모리 히데모또(毛利秀元), 키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이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 남강에서 승전잔치를 벌일 때 진주의 관기였던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는 기록은 조선중기의 설화문학가 유몽인(1559∼1623)이 쓴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논개와 관련하여 그동안 이름이 거론된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마고베에(孫兵偉)·키다무네 하루(貴田統治)·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宋茂)·석종로(石宗老)·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苦多秀家) 등이지만, 논개가 껴안고 죽었다는 왜장은 거의 게야무라 로쿠스께(毛俗村六助)로 굳어져 있습니다.
고니시 유끼나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순신 장군의 포위망 때문에 순천성에서 꼼짝 못하다가 노량해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참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우키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정무를 본 적도 있고 섬에 유배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너무 정확하기 때문에 논개와는 연관 지을 수 없습니다.
전북 장수군의 논개 관련 비석에 적혀 있는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정유재란 때 남해에 나타났던 장수이고 살아 돌아가 야나가와(柳川) 성주가 되었으니 논개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임진록에 일본군 총사령관으로 기록된 석종로는 게야무라 로쿠스케 또는 우키데히데이에 로 추정해 볼 수 밖에 없어 논개가 껴안고 죽은 왜장은 기록이 발견되기까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 앞서 한 여성의 죽음을 두고 400년이 넘도록 충(忠) 절(節) 의(義)의 교훈을 구하는 것은 논개를 통해 거룩한 죽음을 귀감으로 삼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은 <일휴당실기>에 실린 논개의 이력입니다.
논개의 조부인 현(縣)은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에서 전라도 장수현 주촌 마을로 이사와서 학당을 차리고 훈장을 지냈으며, 아버지 주달문도 부친을 이어 훈장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밀양박씨 가문의 규수에게 장가들고 남아를 출산하여 대룡(大龍)이라 이름지어 귀하게 길렀으나 나이 15세에 괴질에 걸려 요절하고 맙니다.
후자가 없는 주달문 부부는 장안산(長安山)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대를 이어갈 자손을 점지해 줄 것을 천지신명에게 빌어 박씨부인의 나이 40(甲戌年9월 3일)에 여아를 낳았으나 기이하게도 갑술(甲戌)년, 갑술(甲戌)월, 갑수(甲戌)일, 갑술(甲戌)시에 태어나 사갑술(四甲戌)이라는 특이한 사주를 타고 태어나게됩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사갑술(개해, 개달, 개날, 개시)의 뜻을 개를 낳는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경상도 방언(方言)으로 "개를낳다"라는 뜻이 담긴 논개(論介)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자라면서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이해하는 비범한 지혜가 있었고, 나이 10여세가 되니 천성이 아름다움과 고상한 기풍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겨우내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하자, 주색잡기와 행패를 일삼고 다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가 당시 지방의 토호 김풍헌(金風憲)을 찾아가 유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체하며 논개를 백치불구인 김풍헌 자식의 민며느리로 삼을 것을 계획하게 됩니다.
김풍헌이 길일을 택하여 혼례일을 정하여 박씨부인에게 전달하자 박씨부인과 논개는 혼비백산하여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피하기 위하여 박씨부인의 친정인 경상도 안의현 서하면 봉정마을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자 김풍헌은 노발대발하여 소장을 만들어 장수현감에게 제출하고 엄벌해줄 것을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현감 최경회(崔慶會)는 조사를 통하여 박씨부인과 논개를 무죄방면의 영을 내렸고, 현감부인 나주김씨 는 그 억울한 사정을 듣고 의지할 곳도 없는 모녀를 병약하여 자리에만 누워있는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여 내아에 머물면서 병시중을 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숙질로 고생하던 박씨부인은 서하의 친정에서 사망하고 논개의 정성어린 간호의 보람도 없이 현감부인 나주 김씨마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선조 24년 논개는 최현감의 부실이 되어 비로소 부부의 정으로 맺어지는 운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자 최경회 현감은 전라감사 이광 이 영도하는 전라도 구원군에 편성되어 장수, 진안, 무주등지에서 약 5000명의 장정을 초모하여 군대를 조련하였고,
선조 26년 6월에는 병마 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로 부임하였으며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책임을 통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논개는 칠석날 왜적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회를 베풀고자 기생들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군 연회석에 참석하고 왜장 게다니무라 (毛谷村六助)를 진주 남강변 현재의 의암이라 불리는 바위로 유인하여 함께 투신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진주에서 살아남은 장수의병들이 최경회와 주논개의 시신을 거두어 신안주씨(新安朱氏)선조들이 묻혀 있는 주씨의 집성촌인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마을 당산 뒤쪽 골짜기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수읍 남산기슭에 위치한 논개사당은 지방 문화재 46호로 지정하여 주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는 뜻에서 의암사라 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