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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의 특징
- 몽고인종이며 알타이어족이다. 북방계와 관련이 있다.
- 한국어, 터키어, 몽고어, 만주어, 일본어 등이 알타이어족이며, 북방계 즉 중국의 영향이 아닌 북방민족의 영향이 컸다('알타이'라는 어원은 몽골의 서남지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알타이 산맥에서 유래한 것이며, 알타이어족을 사용하는 민족들은 아시아 대륙의 최동북 지역으로부터 중국의 북부 및 북서지방, 몽골, 중앙 아시아, 시베리아 남부, 볼가 강 유역, 터키, 중동 및 발칸 반도의 여러 지방,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 등 널리 분포되어 있고, 현재 사용자 수는 1억을 넘는다).
*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기준
- 구분기준은 문자의 사용여부이다.
* 신석기 시대의 모습
조개더미는 신석기 시대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조개를 잡아먹기 편리한 물가에 있다. 조개더미 아래에 주거지 유적이 있거나, 때로는 사람의 뼈나 버려진 석기, 토기, 동물 뼈 등이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등 전국에서 발견되고 있다.
* 신석기 혁명 - 농경과 목축의 시작
- 농경(벼농사는 아님. 잡곡류 경작)과 목축의 시작 : 정착생활. 토기 사용.
- 유물 : 간석기, 뼈도구(낚시, 바늘), 빗살무늬토기. 토기(겉면에 빗 같은 무늬 새기개를 이용해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넣은 토기이다. 둥근 바닥, 납작바닥의 2가지가 기본형이다. 그릇의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갈색이다. 제주도 고산리,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도 등 큰 강유역이나 해안가에 분포하고 있다).
* 강가의 움집은 신석기, 내륙의 움집은 청동기.
* 청동기 시대의 생활도구
- 대부분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다. 청동기는 만들기도 어려웠고, 대량으로 만들만큼 재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지배계급의 무기나 장식품으로 이용되었다.
- 민무늬 토기 사용 : 800℃-900℃의 높은 온도로 구웠기 때문에 빗살무늬토기보다 단단하다.
-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청동기시대이다. 청동기 시대의 농기구로서 반달돌칼은 랴오허강 유역에서 한반도 남단에 이르기까지 전역에 분포한다. 한복판이나 등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보통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 사이에 끈을 꿰고 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용하였다.
* 8조법 중 살인자나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엄히 징벌하였던 이유
생명 존중 외에 당시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고, 농경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 청동기 시대에 계급과 사유재산제가 발생하였다. 청동검과 청동거울은 제정일치사회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청동제 무기로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견되는 비파형동검과 주로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세형동검이 있다.
* 계급 발생단계 : 생산력 증가 → 사유재산증가 → 빈부의 차 발생 → 지배 및 피지배층으로 나뉨.
*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야기 수록
- 삼국유사(고려), 제왕운기(고려), 응제시주(조선), 세종실록지리지(조선), 동국여지승람(조선) 단군의 건국이야기가 최초로 기록된 책은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이다.
*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알려주는 유물 - 비파형 동검과 북방식 고인돌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물인 청동검은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동검(청동기 후기-초기 철기시대)으로 발전하였다. 비파형 동검은 만주의 요령성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주로 분포하며, 세형동검은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 단군신화 분석
- 제정일치 사회 : 단군왕검 → 단군(제사장) + 왕검(정치적 군장)
- 농경사회/애니미즘 : 비, 구름, 바람(우사, 운사, 풍백)
- 토템사회/모계사회 흔적 : 웅녀
- 선민사상(천신사상 : 계급분화의 선민사상) : 환인의 아들
- 족외혼 : 천지양신족설(天地兩神族說)
- 홍익인간의 건국이념 : 민본사상
* 우리나라 건국 신화
우리나라 건국 신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조상 또는 집단의 지도자가 높은 곳이나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天孫)신화이고(단군), 다른 하나는 알이나 상자 같은 것의 속에서 나왔다는 난생(卵生)신화이다(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고주몽, 김수로)
* 철제 농기구 사용과 농업 생산력
철제 농기구는 간석기에 비해 단단하고 날카로워 땅을 깊게 갈 수 있었다. 땅을 깊이 갈게 되면 잡초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고,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더 넓은 땅을 효과적으로 개간할 수 있다.
* 독자적 청동기 문화 유적 :
- 주로 한반도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에서 독자적 유물. 예) 세형동검, 잔무늬 거울, 거푸집
* 철기의 사용
- 철제 농기구 : 삽, 괭이, 낫(목기, 석기와 함께 사용)(전의 목기나 석기와 함께 철제 농기구들이 사용되었다. 농기구의 발달과 더불어 토기의 생산기술도 발달하여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토기가 제작되었다 철제도구는 청동제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수량도 풍부하며, 가격도 저렴하였다. 따라서, 서민출신의 병사들도 철제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철제공구는 삼림의 대규모 벌채를 가능하게 하였고, 철제농기구는 일정시간에 보다 넓은 경작지를 보다 깊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다.).
- 철제 무기 : 칼, 창, 화살촉
- 철제 공구 : 끌, 톱, 도끼, 자귀 등(도끼는 싸움, 사냥, 절단용에 사용된 반면 자귀는 목재를 다듬는데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 소도 : 군장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특별 신성지역을 말한다.
* 솟대 : 신성구역(소도)의 표시이다. 제정분리 사회의 표시이다. 삼한에서 제사장 천군이 다스리던 지역에 있었다.
* 삼한 중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의 왕으로 행세하였다.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철기시대의 유물 중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출토
명도전은 중국 전국시대의 연/제/조나라 등에서 사용하였으며 반량전은 진나라, 오수전은 한나라에서 사용하였던 화폐이다. 이들 중국화폐가 우리나라 철기시대의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가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중국의 진/한 교체기에 위만이 유이민 집단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온 뒤에 나타난 고조선의 변화.
고조선은 진/한 교체기에 들어온 유 이민 세력 중 위만에 의해 위만 조선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발전하였던 위만조선은 한과 대립하다가 결국 한 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라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위만 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주장의 근거.
위만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었고 조선옷을 입었다는 점,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고, 그 정권에 토착민 출신 고관이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므로 그가 왕위에 오른 위만 조선의 경우 식민정권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가들은 위만 정권이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점을 중시하여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 세력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 동북공정이 단군을 배제하고 기자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군조선의 존재가 인정되면 동북공정의 모든 논리는 근본부터 무너지기 때문이다.
* 초기 국가 : 연맹왕국
-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마한, 변한, 진한)
(옥저, 동예는 왕이 없었지만 그 시대를 연맹체 또는 연맹국가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옥저의 민며느리제와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서옥제)는 고대 세계에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 동예 : 각 부족의 산천 중시, 다른 부족의 출입금지, 읍락끼리는 상호 침입 금지 → 침입시, 소나 말 등으로 갚음(책화). 같은 씨족끼리 결혼하지 않음(족외혼), 무천(10월)
- 옥저와 동예는 언어와 풍습이 고구려와 유사하였음.
*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건국이야기의 비교
- 건국이야기는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국가의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건국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으로 신성화시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주몽의 설화와 백제이 온조설화는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 세력이 토착민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이룩한 사실을 보여준다.
- 신라와 가야의 건국이야기에서는 6촌의 촌장과 9간이 각각 박혁거세와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를 통해 두 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이 지역은 부족을 통솔하던 군장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의 건국이야기는 건국자의 출생 사실을 태양 숭배사상과 알에서 출생했다는 난생설화로 꾸몄다. 여기에서 건국 이약기가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자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측면이 나타난다.
* 김부식은 신라의 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성골과 진골이라는 혈족개념을 적용하였다. 신라의 상대에는 성골중심의 중심의 왕위계승이 이루어졌으며, 신라 중대와 하대는 진골중심의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
* 고구려의 5부족
-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순노부, 관노부.
* 삼국의 귀족대표자회의 :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 삼국의 지방통치
삼국은 외형상 중국의 군현제도와 유사한 지방조직을 설치했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이 수가 많지 않아서 주요 거점만을 지배하는 데 그쳤고, 나머지 지역은 자치를 허용하여 간접적으로 주민을 지배하였다.
*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낙랑공주는 낙랑군의 태수 최리(崔理)의 딸로서 고구려 호동 왕자와의 사랑으로 자명고를 찢어 고구려가 낙랑군을 치는 것을 도왔다. 뒤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A.D.32년).
* 가 야
- 연맹왕국 단계에서 머뭄.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지리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고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 전기가야 연맹은 금관가야가, 후기가야연맹은 대가야가 주도함.(전성기의 가야연맹은 매우 강하여 신라를 위협할 정도였으며, 일본에도 진출하여 일본의 5세기경 고분에서 발견되는 대표적 토기인 스에키 토기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가야는 일찍부터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가야가 신라(고구려와 연합관계에 있었음)로부터 끊임없이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이후 가야지역을 공격하여 보상받으려 했고, 신라도 이에 적극 개입하였다. 대가야는 5세기 후반에 가야의 재통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그러나 540년 이후로는 통합의 기운을 상실하고 신라와 백제사이에서 외교적 타협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이 신라에게 대패한 뒤 신라는 백제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본격적으로 가야 정벌을 재개하였다).
- 전기가야연맹 : 낙동강 하류의 변한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어 점진적인 사회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집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일대에 걸쳐 있었다.
* 광개토 대왕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의 힘을 빌려 왜의 침입을 물리친 것으로 보아, 신라가 고구려에 많이 의지하는 관계였다.
* 광개토대왕릉비와 연호
-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주몽의 고구려건국, 광개토대왕 재위시 영토확장 등이 서술되어 있다.
- 광개토대왕이 최초의 연호인 ‘영락’을 사용하였다. 연호란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를 사용하는 아시아 군주국가에서 임금의 재위 연대에 붙이는 호칭이다.
- 고대 중국에서는 연도를 표기할 때 황제가 즉위한 해를 기준으로 새로 연대를 시작하였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이 연호였다. 본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호를 제정한다는 것은 중국과 대등하며, 왕권이 강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소수림왕 : 율령반포, 태학설립, 불교수용, 중앙집권체제 강화. 귀족자제는 태학에서, 평민은 경당에서 교육하였으며 불교수용은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 광개토 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 → 영양왕 → 영류왕 → 보장왕
- 온달 장수는 영양왕 때(6C말-7C초) 사람이다. 그 당시 신라는 처음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섭하였으나, 한강유역 점령 이후(6세기 후반)에는 당항성을 쌓고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 신라가 한반도에서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당과 동맹을 맺은 것은 7C일이다.
*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중원(충주) 고구려비 건립의 의미.
-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게 되었다. 중원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비석이다. 고구려의 왕이 신라의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고구려가 당시 한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위상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군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으로, 1100역 개의 화강암을 7층으로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이다.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 신라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으며 고구려는 신라를 조공을 바치는 복속국으로 인식하였다.
*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유 - 확장된 국토의 체계적 관리, 왕권강화, 남진정책 추진.
- 평양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또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고조선 이래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도 무시할 수 없고, 무엇보다 남진정책을 위해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북방의 대륙세력과 대립에 대한 근심을 덜고 삼국을 통합하려는 목적과 아울러 국내성을 기반으로 했던 귀족세력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 한강유역 지배의 의미
- 한강유역은 평야가 넓어 농경에 적합하고, 육상/수상 교통이 편리하여 중국이나 주변국과 교류하기가 유리하며, 인구가 많아 국력 증강에 크게 유리했다. 따라서 한강유역을 어느 나라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삼국의 주도권이 변하였다.
* 4세기 백제가 해외로 진출한 지역.
4세기 백제는 5호 16국의 분열을 이용하여 요서, 산둥, 규수 지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 백제의 담로 : 백제의 특별행정구역. 백제가 방, 군, 성의 지방제도를 마련하기 이전에 설치한 제도로, 왕자나 왕족을 지방의 요지로 보내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킨 제도이다.
*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로 진출하여 왜를 격퇴하였다는 증거
신라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에 ‘광개토지호태왕’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신라와 백제의 동맹
고구려의 평양천도 후 433년 신라의 눌지 마립간과 백제의 비유왕은 고구려의 남침을 공동으로 막아내기 위해 군사동맹을(공수동맹) 체결하였다. 신라의 소지왕과 백제의 동성왕은 493년 결혼동맹을 맺어 나제동맹을 강화하였다.(5세기말-6세기 초 고구려는 내부적 위기에 처하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수상 대대로가 실권을 잡으면서 정권이 흔들리고 부패와 타락으로 사회가 동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남진정책은 주춤하였고, 이는 백제/신라에게 호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 고구려, 백제, 신라에 있었던 귀족회의의 역할.
-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왕권을 견제하였다(귀족회의의 힘은 점차 약하여 갔으나 여전히 왕권을 견제하여, 삼국의 정치를 국왕중심의 귀족정치라고도 한다)
- 삼국의 귀족대표자회의 :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 화백회의
- 귀족의 대표가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만장일치로 처리하던 회의로, 한 사람의 반대자가 있어도 안건을 처리할 수 없었다. 이 회의는 국론을 통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각 집단의 부정을 막으며, 단결을 강화하는 역할 및 귀족세력과 왕권사이의 권력을 조절하였다. 회의장소로는 4영지가 있다(경주 부근)
* 신라의 지배자 칭호
-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거서간(군장) → 차차웅(무당) → 이사금(연장자) → 마립간(대군장) → 왕의 순서로 변화하였다.
- 마립간은 중앙집권적 국가 성립시기에 신라에서 사용한 왕의 명칭으로 ‘마립’은 ‘높다. 크다’ 라는 뜻이고 ‘간’은 ‘족장(군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호칭은 왕의 권한 한 단계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 우리나라의 고대 시대 귀족들이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녹읍을 통하여 농민들에게 수취한 것 : 조세와 공물의 징수, 노동력의 징발.
* 신라의 ‘설계두(6두품출신)’ 의 골품제에 대한 불만
6두품은 능력이 뛰어난 경우에도 5등급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가질 수 없었으며, 자색의 공복을 입을 수 없었다.
* 옛 무덤의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내용
고분구조의 유사성을 통해 문화의 교류, 민족의 이동 등을 알 수 있으며, 껴묻거리(부장품) 고분벽화의 내용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다.
* 백제의 건국세력이 고구려 계통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
고구려의 장군총과 백제의 석촌동 초기 고분 형태는 돌무지무덤으로 형태가 유사하다(백제를 세운 건국세력이 고구려 계통이라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다)
* 불교가 수용되었던 배경
부족사회에서는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 부족 단위의 원시신앙이 발달하였으나, 중앙집권 국가가가 성립되면서 초부족적 사회가 성립되자 부족과 부족을 통합하기 위해 고등 종교인 불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삼국의 불교 수용시기와 왕권과의 관계 →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던 시기는 4세기경이었다. 이 시기는 삼국의 왕들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과 지방 세력을 억압하면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삼국의 불교 수용은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 불교가 삼국사회에 미친 영향.
불교는 왕실과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적극 이용되었으며, 귀족들의 특권을 옹호하여 신분질서를 강화하였다. 또 국민사상의 통일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불교가 고대 문화와 사상에 끼친 영향 → 불교는 당시 문화 선진국이였던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불교는 단순히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뿐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 고대 문화를 발달시켰다. 또한, 사상적으로는 각 부족별로 자신들의 독자적인 신앙과 토템을 지니고 있었는데, 불교의 수용으로 인해 부처를 중심으로 사상을 통일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크기가 차이가 나는 이유
신분적 차이를 벽화에서는 사람의 크기의 차이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 백제 고분벽화의 귀족층의 복장에서 나타나는 특징
백제는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선진 문화를 수용하여 세련된 문화적 특징을 보이는데 의복에서 이러한 세련되고 깔끔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백제의 유적
서산마애 삼존불 : ‘백제의 미소’라고 불릴만큼 표정처리가 부드러우며,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음.
백제 금동대향로 : 백제 나성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논에서 출토된 향로로 도교와 불교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 고구려가 5세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
소수림왕은 불교 공인, 율령 반포, 태학 설립 등을 통해 4세기 중반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체제를 개혁하여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는 발전할 수 있었다.
* 지증왕의 업적
- 국호 변경(신라) 및 왕호를 변경(마립간 → 왕)하였다. (‘신라’라는 뜻은 업적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왕호변경(마립간에서 왕으로)은 중국식 정치제도를 수용하여 지배체제를 정비하려는 노력이었다).
* 진흥왕
- 진흥왕은 관산성 전투 이후 더욱 활발한 영토확장을 추진하여 562년에는 가야의 전 지역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 중국 남북조의 분열상태가 수에 의해 통일된 이후의 동북아시아의 정세
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신라의 위협을 받던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연결하고 남으로는 백제/왜와 연결하는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대응하였다.
* 살수 대첩(612)
-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나라가 국경부근에서 무력시위를 전개하자 요서를 선제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수문제가 침공(598)하였으나 격퇴하였다.
- 이후 수양제는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우중문 등 30만 별동대를 투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을지문덕에게 패배하였다(살수대첩). 을지문덕은 수군의 절대 다수가 전투경험이 없는 점, 지휘체계의 통일성과 기동성이 떨어지는 점, 보급로가 멀고 험한 점을 이용하여 속전 속결보다는 장기 방어전략으로 대응하였다.
* 안시성 싸움(645)
- 당 건국 초기에는 전쟁포로를 교환하는 등 화친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당 태종 즉위 후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주변 국가 및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여 당과 고구려의 관계가 멀어졌다.
- 이에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랴오허 강 주위에 천리장성을 쌓았고 연개소문은 정변으로 영류왕을 제거하고 대막리지가 되어 신라와 당에 강경한 대외정책 추진하였다.
-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당태종이 침입하여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켰지만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가 승리, (당 태종은 새로 개발한 무기를 가지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쉽게 승리하는 듯 하였으나, 안시성 싸움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때 안시성의 성주는 양만춘이었다).
*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대한 백제와 신라의 대응책
5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였다. 이후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고,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해 나갔다.
* 삼국시대의 불교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된 이유.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는 신도라는 신념은 국왕을 받드는 같은 신민이라는 생각과 함께 중앙집권화에 공헌하였다. 즉 불교의 업설(인과응보설)은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이론으로, 왕과 귀족은 전생에 공덕을 쌓아 현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여, 왕과 귀족 등 지배층의 지위를 정당화하였다.
* 신라의 삼국통일을 자주적이라고 할 때 그 근거
나/당 전쟁을 거쳐 당의 세력을 몰아냈기 때문에(신라의 삼국통일연대를 고구려가 망한 668년이 아니라 당의 세력을 몰아낸 676년으로 보는 것도 나/당 전쟁의 의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 시중과 상대등 비교.
시중은 왕의 명에 따라 기밀 사무를 관장하고 중대에는 정무를 총괄하였다. 상대등은 화백회의 의장으로 귀족 세력을 대표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는데, 상대와 하대에 정무를 총괄하였다.
* 골품이 신라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에 미친 영향
신라인들의 모든 사회 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는 골품에 따라 달랐다. 골품에 따라 정치/사회활동은 물론 거주하는 가옥과 그릇/복색/수레까지 제한(엄격히 구별)되었으며, 관리의 복색은 관등에 따라 달라졌다.(골품제는 6세기에 법제화되었으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성골이 절손될 경우 왕위에 올라도 좋을 만큼의 세력을 갖춘 대군장 출신은 진골, 대족장 세력은 6두품, 각 지방에서 족장으로 있던 사람은 4, 5두품으로 편입되었다)
* 신라의 상대에는 성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출현은 성골남자가 없어서 나타난 현상이며, 귀족 가운데 최상위층인 6두품은 왕족인 진골에 눌려 정치활동의 범위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골품제는 지방의 부족장들을 서울인 경주로 불러 모아 부족의 크기에 따라 두품을 부여한 것으로 경주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지방민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 고구려의 사신도 벽화와 도교 사상
사신도의 네 동물(청룡, 백호, 주작, 현무)은 도교에서 네 방위를 지키는 신이다.
* 삼국 통일 전의 신라의 고분에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
신라 초기 고분양식은 대부분 돌무지무덤 형태인데, 돌무지무덤은 내부의 널방이 나무로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붕괴되기 때문에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
* ‘백제 가람’, ‘한인의 연못’ 의 의미.
백제 가람은 백제의 사찰 건축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을 나타내며, 한인의 연못은 신라의 제방 쌓는 기술이 일본에 보급되었음을 의미한다.
*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에 반영되어 있는 사상(유/불/도)
- 충과 효의 유교사상, 자비를 강조한 불교사상이 반영되어 있다.(세속오계 :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
- 사군이충 /사친이효/교우이신 : 유교
- 임전무퇴 : 전통사상 + 도교
- 살생유택 : 불교
* 원광법사의 세속오계가 화랑도 조직에 끼친 영향
청소년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으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세속5계는 화랑도의 신조다 되어 화랑도가 크게 발전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신라의 화랑도가 당시 사회에 공헌한 역할
화랑도는 국가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많은 장군과 재상들을 배출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계급 간의 대립이나 갈등을 해소, 완화하기도 하였다.
* 신라가 통일 후에 5소경을 설치한 이유
- 5소경을 설치한 이유는 수도 금성이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지방세력의 성장을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일부 중앙귀족과 옛 고구려/백제의 귀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 녹읍과 관료전, 그리고 정전
- 녹읍은 귀족들이 받는 녹봉의 일종으로 조세만이 아니라 특산물과 주민의 노동력을 수취하였다. 이를 통해 귀족들은 농민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 통일 신라 때 관료전은 관리들이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받는 토지로, 관등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지급하였다. 즉 수조권(조세징수권)만 지급한 토지로 귀족의 경제기반을 약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왕권의 전제화에 기여하였으며, 민생안정에도 도움을 주었다.
- 정전은 성년 남자에게 지급한 토지로, 국가가 직접 농민을 지배하는 형식을 취한 제도이며, 일반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것은 정전이 유일하다. 정전은 국가에서 직접 농민의 토지관리를 통해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의미가 있다.
* 당나라에 유학간 학생 = 숙위학생
* 통일 신라에 3층 석탑이 출현하게 된 배경.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3국 통일을 높이 생각하였고, 이러한 자신감이 석탑에 그대로 드러나 3층 석탑으로 나타났다.
* 통일 신라 정부가 촌주로 하여금 민정 문서를 만들게 한 목적
노동력과 생산자원의 보다 철저한 편재와 관리(조세징수, 노동력 동원)를 위하여
* 신라의 통일감과 안정감(혹은 조화와 균형미)가 보이는 예술작품
감은사 터 3층 석탑,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 신라 말기 호족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
진골 귀족들이 왕위 쟁탈전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악화되자 지방 세력이 성장하여 호족화 되었다.
* 지방의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호족의 활동.
호족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고 지방문화의 발달을 주도하였다.
* 통일 신라 이후 역사에서 고구려의 진대법과 비슷한 목적을 지닌 정책.
진대법의 실시 목적은 단순히 빈민을 구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민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국가의 주된 생산계층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통일 신라 이후,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구휼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주로 구휼기관인 의창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상평/환곡제도로 그 범위가 확대, 정비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 통일신라에서 세금의 징수와 민정 문서의 작성에서 촌주의 역할
통일 신라는 조세, 공물 등을 거두기 위해 촌주에게 몇 개의 촌락을 책임지게 하였습니다. 촌주들은 촌락마다 그 지역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특산물 등을 파악하는 민정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어 국가에 바쳤습니다. 촌주는 매년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민정문서를 다시 작성하였다.
* 고대의 일반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이유
고대의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는데, 이들이 경작하는 토지는 대체로 척박하였습니다. 퇴비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 동안 토지를 묵혀 두어야 했다. 국가는 농업을 장려하여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지만, 지나친 수취는 농민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다. 농민들은 국가와 귀족에게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과도하게 곡물, 삼베, 과실 등을 바쳐야 했고, 성이나 저수지를 쌓은 일 ,삼밭을 경작하고 뽕나무를 기르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농민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스스로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 신라 말기 승탑(부도)이 유행하게 된 원인
승탑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으로, 신라 말기 지방호족들의 후원으로 선종이 유행하면서 스승을 기리기 위한 방편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선종은 수행과정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돈독해지는데, 이러한 관계로 인해 스승을 기리기 위해 승탑을 제작하게 되었다.
* 교종과 선종의 차이점(소승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교종과 선종을 구분한다)
교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론 불교이다. 이에 비하여 선종은 방편에 지나지 않은 문자를 넘어서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실천불교이다. 다시 말하여 교종은 불교 경전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깨달음을 강조하는 반면에 선종은 참선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특징으로 교종이 불경과 불상과 같은 권위적인 교리나 의식을 강조한 반면에 선종은 교리나 의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선종은 통일 전후에 신라에 수용되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다. 784년에 도의가 본격적으로 남종선을 배우고자 당나라에 간 이래 혜소/혜철/무염 등이 뒤를 이었고, 이들 선사들은 820년대 초에 처음 귀국한 도의를 뒤따라 차례로 귀국하였다. 신라사회의 변화로 선종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으나 도의 자신은 교종의 반발로 서울인 경주에서 교화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설악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대신 도의보다 조금 늦게 귀국한 흥척은 흥덕왕과 같은 왕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선문 9산의 대부분은 왕실이나 중앙귀족이 아니라 이 시기에 새롭게 부상한 지방세력, 곧 호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9산 선문의 선승들은 호족 출신이나 중앙귀족 출신으로 지방에 낙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 선승을 후원하여 산문을 개창하게 한 지원 세력도 지방 호족이었다. 그래서 선종 사원은 산문을 후원하는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았다. 성주산문은 보령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서 개창되었고, 사굴산문은 강릉지방의 호족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 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 선종이 처음 수용되었을 때 환영받지 못한 이유
선종이 처음 수용되었을 때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였고, 이 시기에는 교종의 세력이 중앙귀족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 권위주의적이고 반 중앙집권적인 성향의 선종은 당연히 왕실과 귀족들이 환영을 받지 못했다.
* 선종사원(절)과 호족의 활동범위의 상관 관계
- 선종사원과 호족의 활동범위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선종 스님의 상당수가
호족 출신이었으며 9산의 사원이 호족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지원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선종은 이러한 호족들의 지원 속에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 선종과 성리학
선종 :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개인적인 정신세계를 찾는 경향이 강하였다. 선종은 조형미술의 쇠퇴를 가져왔다.
성리학 :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새로운 사상으로 현실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사상으로 수용되었다.
- 선종은 신라 말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려던 호족들의 취향에 맞았고, 성리학은 고려 말 권문세족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추진하였던 신진 사대부에 적극 수용되어 각각 중세와 근세문화 발달에 기여하였다.
- 선종불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전래되었다
- 성리학을 수용한 훈구파는 중앙집권, 사림파는 향촌자치를 내세웠다.
- 원효와 의상은 선종보다는 교종불교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 신라 말 농민봉기를 조직하고 지도한 세력은 지방 세력가인 호족세력이었다.
* 신문왕이 국학을 설치한 목적 - 정치적 측면에서
유교정치이념을 강화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 신라의 삼국통일
- 의의 : 1민족 3국가 → 1민족 1국가(민족 문화발전의 토대마련)
- 한계 : 불완전한 영토통일(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통일에 불과)
* 최근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과 그 대응.
- 중국의 의도는 고조선, 부여, 백제, 발해(간도 포함),
고려역사까지 왜곡 침탈하자는 것임.
* 통일 신라의 왕권 강화
- 녹읍폐지, 관료전 지급, 정전지급. 시중 권한강화.
(왕권강화 : 정방폐지(공민왕). 경복궁중건(흥선대원군). 노비안검법/과거제 실시(광종). 국학설립(신문왕). 사병폐지(태종) 등).
* 발해 역사를 둘러싼 중국과 우리의 논쟁
- 발해의 고구려적 요소 : 온돌장치, 와당의 연화문(강건한 기풍의 고구려 와당의 영향), 굴식 돌방무덤(정혜공주의 묘, 모줄임 천장구조), 불상양식, 석등, 석자사등. 직선적이고 패기가 있는 고구려 미술 계승(→ 부드러워지면서 웅장한 발해기풍)
-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발해를 고구려(고려)로 칭하였다. 외교문서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라고 하였다.
* 당의 6부와 발해의 6부
- 당은 이, 호, 예, 병, 형, 공부. 발해는 충, 인, 의, 지, 예, 신부. 즉 발해는 유교적 명칭을 사용함.
* 발해의 성립이 우리나라 역사 전개 과정에서 가지는 의미.
고구려 멸망 후 그 땅에 고구려 유민에 의해 발해가 건국되어,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 발해가 우리 민족의 국가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비롯한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계통이고, 발해가 일본에 보낸 문서를 보면 발해왕이 스스로를 고려(고구려)왕으로 자처하고 있고, 고구려 문화의 요소(온돌장치 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 통일신라 하대의 혼란기
- 진골귀족의 왕위쟁탈, 농민반란(본래 신라의 대외무역은 공무역중심이었으나 말기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해상세력은 무역을 통하여 쌓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보고는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여 중앙의 정치무대까지 진출하였다. 그는 왕위다툼에 개입하면서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문성왕 때 암살당하였다).
- 6두품과 호족, 풍수지리설, 선종(선종은 정신수양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 종파로, 개인의 심성도야를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녀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지지를 받아 신라 말에 크게 번성하였다. 승려의 사리를 넣은 탑인 승탑 즉 부도가 유행하였다. 승탑의 모양은 팔각 원당형이었다 호족들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화를 주도하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금동제 용머리 당간은 통일 신라 말기의 것으로, 경북 영주에서 출토되었으며 지방세력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다). 선종은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깨달음을 강조하였다. 선종은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여 호족과 백성의 환영을 받았다. 풍수지리설은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요, 곡령(송악)은 푸른 솔’ 이라며 왕건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즉 풍수지리설은수도 금성(경주)의 지덕이 쇠하여 새로운 도읍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유학자들은 선종과 풍수지리설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실력위주의 유교정치 이상 실현을 주장하였다.. 도선은 신라 말 승려로 당에 유학한 후 돌아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금성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의 운명이 다했음을 주장하였다).
구분 |
발전시기 |
주안점 |
후원세력 |
종파 |
교 종 |
통일 전후(안정기) |
경전과 교리 |
왕실과 귀족 |
5교 |
선 종 |
신라 말(혼란기) |
참선을 통한 해탈 |
지방 호족 |
9산 |
* 김헌창의 반란(9세기 전반)
- 웅주(공주) 도독 김헌창은 무열왕의 후손으로서 내물왕의 후손인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김주원의 아들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6두품의 새로운 사회 건설 추구
- 새로운 사회란 과거제에 의한 능력본위의 인재등용과 유교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열망이다. 골품제사회에서 6두품은 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정계진출을 포기하고 종교나 학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 신라 말과 고려 말의 공통점 - 나말과 여말의 공통점
- 귀족 연합정권(왕권약화)
- 새로운 세력 및 새로운 사상 대두
- 소수 특권층에 의한 농장 확대와 불교사원 폐단 극심
- 개인주의 성향의 선종유행과 대륙정세 혼란기 이용
* 통일신라 신문왕과 고려의 광종 - 왕권강화
- 신문왕 :
귀족세력 숙청(김흠돌 모역사건). 관료전 지급(→ 녹읍폐지), 유교정치이념 확립(유학사상 강조),국학 설립(유학 교육).
- 광종 :
노비안검법 :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해방.
과거제도 시행 : 신구세력 교체 도모.
백관의 공복제정 : 지배층의 위계질서 확립.
공신과 호족세력 제거, 황제칭호, 독자적 연호 사용(광덕/준풍)
첫댓글 좋은 자료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당^^ 용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