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7.01 02:58 / 수정 : 2008.07.01 06:50
사진은‘성장률 7.12%’ ‘식량 자급’등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를 보도한 1961년 11월 26일자(조간) 조선일보 지면.
"지금 성장률 7.1%라고 했습니까?" 미국 국무부 해외개발처장 해밀턴은 깜짝 놀랐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朴正熙)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경제기획원 부원장 송정범(宋正範)이 경제개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그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해밀턴은 "그렇게 높은 성장 목표는 선진국에서도 없는 일"이라며 혀를 찼다.
그때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 하나였다. 1960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고, 무역적자는 GNP(국민총생산)의 16%인 3억 달러에 달했다. 국가적 가난의 원인이 사대주의와 게으름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삼기로 결심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1961년 7월 22일에 경제기획원이 설립됐다. 경제발전의 방향과 개발 정책 수립은 물론 정부 예산 편성과 각 부처 통제라는 실로 막강한 권한이 이곳에 집중됐다.
1962년,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이 그 목표였다. 자금은 확보되지 않았고, 무리한 화폐개혁도 실패했다. 그런데 1963년부터 선진국에서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사양화되면서 한국 공업제품의 수출이 크게 늘었고, 경제개발의 기본 전략은 수출주도형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자본도 자원도 없이 맨손뿐인 한국에는 오직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만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1966년까지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7.8%였다. 이후 4차 5개년 계획 기간이던 1979년까지 한국은 '개발 연대(年代)'라 불린 수출주도 산업화 시대를 겪게 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시작된 1962년 2월 울산 공업센터의 기공식 모습. 1968년까지 석유화학 관련 공장 13개가 이곳에 들어섰다. /조선일보 DB
그러나 '군(軍)에 복귀하겠다'는 박정희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1963년 8월 30일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군복을 벗고 전역해 스스로 민간인이 됐고, 10월 직선제인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힘겹게 당선됐던 것이다. 어쨌든 '민주주의적 절차'를 갖춘 제3공화국의 출범이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비롯, '혁명정부'의 사업을 담은 영상물. 1997년 제작된 '아! 대한민국'의 일부분.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