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 낮달

백록담 낮달                                                           유기섭      백록담 위에 높이 떠있는 낮달을 본다. 몸 한 가운데가 허물어진 하얀 반쪽. 가파른 영실 코스를 오르면 오백나한의 기암괴석 너머로 끝없는 바다가 펼쳐지고. 통나무 계단을 오르니 숨이 차다. 고산의 드넓은 선작지왓 평원을 내달려 노루샘 약수로 목을 축인 뒤, 윗세오름에서 뭉쳐진 근육을 다독이며 땀을 씻는다. 다른 산들과 달리 정상 부분에 이렇게 너른 평원이 생겨나다니 지구생성의 신비에 할 말을 잊는다. 오늘만은 세상이 모두 내 안에 들어온 것 같다. 해발 1700미터 고지, 어디서 시작된 물줄기가 여기까지 그 흐름을 쉼 없이 이어오고 있는지. 이런 자연의 모습을 대하면 마음이 절로 허허롭다. 오랜 옛날 선남선녀가 살던 곳인가. 평원을 뒤덮은 철쭉이 꽃망울을 감추고 바람에 흩날린다.  시리도록 맑은 하늘에 수줍게 모습을 들어낸 하얀 달. 간밤에 내린 비로 초록빛이 더욱 싱그러운 산 정상에서 낮달을 본다. 망망대해 너른 우주에 둥실 떠있는 저 달이 텅 빈 가슴을 친다. 지금까지 보아온 달의 모습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달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빈 가슴을 채우려고 얼마나 많은 헛발질을 하며 살고있는가. 채워지지 않은 모습이 부끄러워서인지. 밤에는 차마 얼굴을 내보일 수 없어 이렇게 대낮에 살짝 얼굴을 보이는 것일까. 그렇지만 부족한 듯한 그 모습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가련한 듯 엷은 모습에서 우주의 신비를 몸소 체험한 여유와 미소를 본다. 비록 낮 시간 태양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몸을 숨기고 있지만 설워하지 않는다. 곧 사람들이 떠나고 찬란한 밤이 오면 밤하늘의 별 밭을 밝게 수놓을 꿈에 젖어있다. 그때 황홀한 꿈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낮달은 조금씩 얼굴을 다듬어간다. 너의 그 고고한 자태가 한라산 평원의 철쭉보다도 더 진하구나. 억겁의 비밀을 풀어헤치지 못하고 그 날이 오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인고의 화신이여, 목이 탄다. 오늘 이 시간을 오래도록 붙잡아 둘 수는 없을까.  산 정상부근 윗세오름에 모여든 건장한 고교생들의 함성이 산정을 가득 메운다. 수학여행으로 모처럼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껏 기지개를 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하늘 높이 충천하는 그들의 푸른 기개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낸다. 한라산을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백록담의 신비를 은밀히 알려주려 함일까. 오늘 우리 가족도 제주도의 인위적으로 조성되지 않은 곳을 보기 위해 이곳 한라산에 올랐다. 오래 전, 슬쩍 지나쳐 본 한라산이 아쉬워 다시 배낭만 메고 찾아왔다. 백록담 위 낮달은 그런 우리의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반가이 맞는다. 수만 년의 신화를 담고 있을 백록담의 비밀을 알고있을 저 달. 오랜 세월이 지나 베일이 벗겨지는 그날은 언제일는지.  어렸을 때 새벽달을 따라 집을 나섰던 기억이 떠오른다. 객지로 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서 첫 번째 닭 울음을 신호로 하여 가파른 재를 넘어갔다. 서녘 하늘에 걸쳐있는 달이 유일한 길잡이였다. 그가 비추는 길을 따라 집을 떠났던 그때나 지금이나 달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설레임을 용솟음치게 한다. 일렁이는 가슴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백록담에 떠있는 저 달의 얼굴이 다시 채워질 때 고요한 한라산 정상의 푸르름은 더 깊어질 것이다. 하산하려고 접어든 어리목 코스 너른 평원에 노루 한 마리가 힘차게 뛰어다니며 반가운 비명을 지른다. 전날 내린 비로 한라산 관리소 측에서 어리목 코스의 등반은 통제하여 그 길목에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가족을 본 노루가 경계심보다는 기쁨의 표출인 듯하다. 그 길이 아침에 통제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하산 도중 관리요원으로부터 처음 알았다. 오늘, 하산만 허용된 내리막길은 완만한 나무계단을 지나자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지면서 길었다.  백록담이 눈에서 사라지자 낮달도 멀어짐에 마음이 서늘해질 때, 시야에 들어오는 산아래 바다에는 운해의 하얀 물결이 평화롭다. 구름 위의 세상에서 내려다본 우주는 신비 그 자체다. 사람의 힘으로는 흉내내지 못할 한편의 우주쇼를 보는 것 같다. 인적이 끊긴 산행에서 느끼는 오싹함을 거두어 가는 행복한 풍경은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함에 아름다운 한라산의 비경을 눈에 더 담지 못하고 하산하였다.  사라져간 낮달을 가슴속에 품고 어리목 휴게소에 다다랐을 때 또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났다. 혹시 영실 입구에서 길벗을 자청하며 따라오던 덩치 큰 까마귀가 아닐까. 크기와 모습이 산 입구 영실에서 만난 그 까마귀를 꼭 닮았다.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을 빙빙 맴돈다. 멀리서 온 사람임을 용케도 알아보고 환영하는 자태다. 가까이 가도 달아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한 것처럼 호젓한 산길의 동행자로 나선 그가 가슴 한 구석을 고마움으로 채운다.  어둠이 깔리 울 무렵 그는 낮달과 미처 나누지 못한 사연을 대신 전하려는 듯 바싹 곁으로 다가왔다가 휙 앞서 나른다. 저 달이 안겨준 소중한 만남이다. 겸손과 양보의 미덕을 보여준 낮달의 모습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기를. 오늘 아쉽게 이곳을 떠나가지만 백록담 낮달과의 아쉬운 만남은 한라산의 푸르름으로 다시 채워질 것이다.    백록담 낮달 - 계간 e문학 2006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