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라 하면 일종의 버릇이나 길들여지는 것을 생각 할 수 있다.
내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에 이어 자연스럽게 계승을 받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열심히 교회에 다니시며 교역자님을 극진히 섬기시던 것을 보고 자라나면서 나에게 보이는 목회자 이미지는 고생하시는 분, 가난한 분, 화가 나도 참아야 하는 분, 할 말이 많아도 항상 말을 아끼고 자유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반면에 항상 목회자를 존경의 대상으로 받들어 섬기시는 어머니는 기쁨과 평화가 넘쳐나는 행복한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설령 결혼을 한다면 평신도로 봉사하며 살다가 남편은 장로 되고 나는 권사가 되어 목회자를 섬기며 평화롭게 살아야지! 목회자는 절대 안 되리라 마음먹고 자라났다. 그러는 나에게 신학생 중매가 들어왔다. 내가 자라온 과정에서도 보았고 또 언니가 고생하는 목회자 생활을 보면서 한 마디로 ‘싫다’고 잘라 말했다.
신학생
구호물자 콤비 양복에
나까오리 덮어쓴 저 신사
키는 키다리처럼 크다
어깨는 굽어 지고
먹고픈 것 못다 먹어
수수깡처럼 말라붙은 저 신학생
그는 키다리 박 서방 이였어
어울릴 리 없는
구호물자 콤비 양복
가을 들판에
허수아비처럼 덮어쓴 저 모자
오른손에 잡아든 허름한 검정 책가방
걸어가는 뒷모습 너무도 기가 막혀
주의 종 되는 길이
십자가의 험한 길이
박 서방 의 길
언니의 길이기에
걸어가는 뒷모습이
너무도 비참했어
나는 신학생 배우자
택하지 않으리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전기 불이 없었기 때문에 램프 불을 사용했다. 투명한 유리로 얇게 만들어진 호야에 석유 그을림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자주 닦아야만 했다. 그런데 어른들은 손이 안 들어가 닦으려면 애를 먹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어른들 없는 틈을 타서 쏙 들어가는 내 작은 손으로 깨끗이 닦아놓고 칭찬 좀 들어야지 한 것이 닦다가 그만 호야는 안타깝게도 내 정성을 아랑곳없이 깨져 버렸다. 나는 너무 겁이 났다.
그것을 사려면 돈도 문제지만 십리 길 되는 보은읍에 걸어가야만 샀다. 그런데 저녁에 예배를 드리는데 호야도 없는 램프 불은 그을림만 나고 초조해 하는 나를 더욱 괴롭혔다. 이때 말씀을 전하시던 최영수님은 광고 시간이 되었는지
“월순 이가 호야를 깨서…….”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얼마나 겁이 나고 걱정이 됐는지 지금까지 잊히지를 않는다.
그 후 최영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보은 읍 교회에서 김대천 씨 부부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전도 인으로 와 우리 집 마당 빨랫줄에 등을 걸어놓고 멍석을 깔고 교회학교를 시작했다. 그때 학생은 전도사님 딸과 나, 언니, 기태 네 명이 맨 앞줄에 앉았고 그 다음엔 어른들-어머니와, 어머니 친구(기태 엄마), 사모님(명자 엄마)이 앉아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못 말리는 나의 습관이 되어 교회학교만 가면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여름밤 예배시간에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면 옆자리에 친구가 또 일어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이 친구는 전도사님 딸인데 초저녁잠이 많아 벌써 단잠이 들었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 기겁을 하고 일어났다. 어른이 된 후에도 교회에 가면 나는 맨 앞자리에만 앉았다. 앞자리에서도 가장중앙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는 이에 얼굴을 마주보며 예배를 드렸다. 이 습관은 지금도 못 말리는 나의 습관이 되어 뒷자리는 앉지를 못한다. 평신도를 벗어나 사모가 된 후에도 앞자리만 앉았다. 진천 중앙교회에 와서도 중앙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랬더니 몇 개월 지나자 예측했던 대로 잡음이 들려왔다. ‘사모님은 뒷자리 앉는 것인데 왜 앞자리에만 앉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뒷자리에 앉아 보았더니 여학생 둘이서 붙어 앉아 어떻게나 소곤대는지! 또 문을 열고 드나드는 사람, 지금은 방음장치가 된 자모 실이 있지만 그때는 자모 실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들 보채는 소리, 나는 도저히 예배자의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내 영이 살아야 사모의 사명도 감당하지! 내가 은혜 받지 못하고 갈급한데 어떻게 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다시 내 앞자리를 찾아갔다.
헌금위원은 앞자리에 앉으라는 광고가 나온 후 나는 셋 째 줄 첫 자리에 앉아서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예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벽기도 시간에도 역시 교육관 가운데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은 집에서도 목사님과 항상 같이 있을 텐데 새벽 기도시간에도 그렇게 턱을 치켜들고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유치한 말은 더 더욱 싫어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모 권사님에게 내어주고 우측으로 한자리 비켜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실감나리만큼 나는 오랫동안 길들여진 앞자리는 영원한 내 자리인양 이 자리에 앉아야만 기도도 잘되고 말씀도 잘 들어오고 평안히 깃드는 안정된 내 자리다.
언제인가 부흥 강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앞자리는 황금자리, 그 다음은 은 자리, 그 다음은 동 자리, 잘못 발음하면 똥 자리.’ 기왕이면 황금자리가 좋지 않을까......!?
우리 집 빨랫줄에 등불 걸어놓고 마당에 멍석피고 앉아 예배드리던 명자 친구는 괴산 중부교회목사 사모가 되고, 나는 진천 중앙교회 목사 사모, 언니는 증평 제일교회 목사 사모, 기태는 군목으로 월남전도 갔다 오고 군종감으로 있다가 만기 제대 후 서울 대치동에 의림교회를 개척하고 지금은 용인에 옮겨 아담한 전원교회를 건축하고 성실히 목회를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의 신앙생활은 황금자리인 앞자리에서 성장했고 그것이 못 말리는 나의 습관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앉아 그곳에서 쏟아지는 축복을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