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p.4
서론……………………………………………………………………p.6
1.헤겔의 출발 – 종교에 대한 감격과 실망……………………..p.13
1–1. 종교를 통한 정치이념의 구현……………………………….p.13
1-2. 헤겔과 셸링의 대결 및 셸링의 초기사상: 스피노자적 피히테주의
………………………………………………………………………….p.23
1-3. 예수의 생애 ……………………………………………………p.32
1-4. 민중종교 개념의 포기와 기독교 비판, 헤겔의 계몽주의 시대
…………………………………………………………………………..p.33
2. 헤겔의 친구들의 발전
셸링, 휄덜린, 싱클레어, 쯔빌링…………………………………….p.56
2-1. 초기 관념론 형성사
셸링, 휄덜린 그리고 헤겔……………………………………………p.52
2-2. 셸링의 자아원리 ……………………………………………….p.60
2-3. 휄덜린의 발전: 존재에서 미(美)로……………………………p.66
2-3-1. 휄덜린의 단편 판단과 존재 분석………………………….p.66
2-3-2. 존재와 통일 – 야코비의 스피노자 해석………………….p.74
2-3-3. 판단과 존재 이후 휄덜린의 발전 ….……………………..p.75
2-3-3-1. 실러에게 보내는 편지……………………………………..p.75
2-3-3-2. 소설 휘페리온을 위한 마지막 준비판의 서론………...p.78
2-3-3-3. 1796년 3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미학적 플라톤주의 구상…………………………………….p.80
2-3-3-4. 아테네인의 담론
휄덜린의 사변적 미학의 체계………………………………p.82
3. 프랑크푸르트에서 헤겔의 새출발…………………………………..p.92
3-1. 종교에 관한 헤겔의 새로운 출발………………………………..p.92
3-2. 유대인의 정신: 아브라함………………………………………….p.97
3-3. 반성 개념의 발전…………………………………………………..p.100
3-3-1. 피히테의 반성 개념…………………………………………….p.102
3-3-2. 셸링의 저서: 독단주의와 비판주의에 대한 철학적 서한들과
셸링의 반성 개념…………………………………………………p.105
3-3-3. 헤겔의 문서: 하나의 실증적 믿음과 베른 시절 헤겔의
반성 개념…………………………………………………………p.107
3-3-4. 칼데아에서 태어난 아브라함 문서
프랑크푸르트 시절 초기의 반성 개념………………………..p.109
3-4. 헤겔의 문서: 도덕, 사랑, 종교
피히테의 주관성이론에 의거한 실증성 개념 분석………………p.115
3-4-1. 헤겔의 문서: 도덕, 사랑, 종교의 구성 문제
피히테주의와 휄덜린주의의 병치…………………………………p.115
3-4-2. 유대교의 정신과 칸트의 선험적 통각………………………….p.117
3-4-3. 표상, 대상, 개념
칸트와 셸링………………………………………………………p.122
3-4-4. 표상, 대상, 개념
셸링과 헤겔………………………………………………………p.127
3-4-5. 직관과 구상력
피히테(표상의 연역)와 헤겔………………………………………..p.132
3-4-6. 피히테의 삼중의 자아이론
이론적 자아, 실천적 자아, 절대적 자아……………………………p.143
3-4-7. 실증적 신앙과 실천적 신앙…………………………………………p.146
인용문헌 ………………………………………………………………………p.148
서문: 독일, 한국 그리고 통일
지금으로부터 약 1년전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6.15 남북 공동 선언이 체결되었다. 그 간 국내외적 사정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고 앞으로도 또 그러하겠지만 암담했던 이 땅에 통일과 교류의 여명이 서서히 발아 오고 있다. 이런 시기를 즈음하여 필자의 헤겔 철학 연구서 청년 헤겔 – 통일의 철학(上)이 발간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놀랍고도 즐거운 일이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난 50년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우리는 참고 견디어야 했다. 분단에서 오는 온갖 굴욕과 수모 그리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절망과 공포, 긴장과 불안의 세월들, 왜곡과 탄압의 시간들, 남몰래 울어야 했던 슬픔의 순간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여 우리가 그런 상실과 체념의 감정에 오래 빠져들 시간도 주지 않는다. 눈물과 한탄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금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얼어붙은 땅을 디디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한민족의 여정; 이는 추상적인 집단으로서의 민족과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어머니의 운명이요 또한 나의 운명이다.
블교에서는 인생을 백팔번뇌로 이해한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도 삶은 분명 고통이고 모순이다. 이모든 불합리고 더러운 속세의 것을 훌훌 틀어버리고 진여의 세계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파도친다.
그러나 다시금 새날이 오고, 그 때 다시금 앞으로!(Vorwärts!)하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모순이 발생하고 또 그것이 해소된다. 그러나 때로 해결되는 문제들 보다 새로 생기는 문제들이 더 많을 때 우리는 또다시 절망한다. 필자가 헤겔을 좋아하는 하나의 이유는 그의 모순(Widerspruch) 개념 때문이다. 이는 무슨 학술적인 이유가 아니라 나의 현실이, 나의 삶이 모순 이외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순은 기쁨 뿐만 아니라 슬픔이 있다는 것, 억울한 고통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범죄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가정을 파괴하려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 더러운 사바세계의 진실; 이런 것이 모순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도 없으며 오직 절망할 수 밖에는 없는 눈 앞의 모순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것 그것이 초월의 지평이고 신앙의 지평이다. 인간의 절망이 신의 희망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6.25 전쟁의 폐허와 남북분단 그리고 독재의 모순 속에서도 우리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아니하고,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바람 보다 빨리 눕고 바람 보다 빨리 일어 났다. IMF의 경제파탄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 달린다. 그런 역사의 모순적인 행로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서고 껴 앉고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만남의 기쁨에서 구체적인 현안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 방안들이 필요하다. 통일문제는 실천 지향적이다.
이 번의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독일의 역사가 많이 매스콤에 회자되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정상회담을 시작했고 또 그런 만큼 벌써 통일이 되었다(1989). 우리는 독일이 통일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우리의 통일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통일의 비용문제, 내부적인 (민족) 동화의 문제, SOC 및 환경 개선의 문제, 재산권 보상, 교육, 법과 제도 등등. 이를 위해 엄청난 준비와 자원이 필요하다.
독일은 그 전에 또 한번 재통일을 성취한 역사가 있다: 1871년 프로이센 제국의 성립. 헤겔은 1871의 통일 이전에, 즉 군주국으로 분열된 시대의 독일에 살았다. 청년 헤겔의 관심은 당연히 민족의 통일과 진보였다. 이런 내용을 여기서 통일의 철학으로 간주하고 그 과정을 파헤친다. 그런데 청년헤겔의 사상 발전을 연구하려면 헤겔 외에 5명 이상의 당시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섯 이상의 사상들이 거의 항상 서로 연관되기 때문에 진술의 방식도 거기 상응하여 복잡아 진다. 따라서 청년 헤겔의 사상발전을 파악하는 작업은 대단히 복잡하다. 청년 헤겔 - 통일의 철학은 다른 철학 연구서의 다섯 배 이상의 지식용량(Intelligence Capacity)이 요구된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이 책의 출판에 상당한 불안을 가졌다. 왜냐하면 요즘 세태 풍조가 어렵고 무거운 책을 잘 보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풍조가 독자 편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 내지 인문학이 제대로 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은 철학적인 소양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컴퓨터의 용량 증가에 비례해 지식의 깊이와 용량도 증가한다. 해야 하면 할 수 있다, 하는 심정으로 나는 이 책의 집필에 임했다. 통일 문제를 비롯한 현안 문제들, 예를 들면 경제 개혁 문제 그리고 벤쳐 사업 등은 우리에게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복잡한 생각을 요구한다. 조국은 천재를 필요로 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유와 결정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통일의 철학, 실천의 철학을 철학 지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고 훈련의 교재로 간주한다. 생각에 생각을 지식에 지식을 더해야 한다.
서론
헤겔 철학 2000년!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필자는 1999년 전반기 독일에서 자신의 학위 논문을 마무리 했다. 그간 독일 및 구라파에서 헤겔에 관해 연구되어 온 각종의 학설들을 종합 정리하고 필자에 의해 새로 발견된 사실에 근거하여 헤겔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이 이천년대의 헤겔 연구가 될 것이다. 이 일의 핵심을 필자는 ‘통일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헤겔이 아직 전문적인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이전, 그의 청년 시절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그런 생각에 도달했다. 젊은 헤겔은 그의 선배 –실러- 그리고 친구들 –휄덜린, 셸링- 과 정신적으로 교류하면서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라는 신념에 도달했다. 헤겔은 그의 프랑크푸르트 시절(1797-1800) 이런 통일 개념을 사랑 및 존재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이런 통일의 철학은먼저 그의 절친한 친구 휄덜린의 단편 판단과 존재 (1795.4)에 명료하게 표출되었었다.
헤겔의 후기의 변증법적 사상들, 예를 들면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에 나오는 주제들은 젊은 시절 헤겔의 심정에서 체험된 주-객의 동일성 또는 통일성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철학의 자기비판이 요구되고 있다. 자기비판은 내부적으로는 자기존재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고 외부적으로는 총체적인 삶으로서의 현실에 대해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은 또한 철학과 관련된 인문학 내지 정신과학에도 해당될 것이다.
철학의 자기 반성 내지는 홀로 서기의 계기는 그러나 고통스럽고 이상하게 주어 졌다. 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거기 맞물려 있었던 체제 논쟁은 맑스 철학과 (유물론적) 변증법의 만발을 가져왔고 또한 헤겔 철학에 대한 관심도 증대 시켰다. 이는 또한 그 외의 철학들에 대한 흥미도 많이 유발 시켰었다. 80년대는 따라서 철학 및 사회과학 그리고 문학의 전성기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전 근대적인 군사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그 동안 거품이 들어 있던 인문학 내지 철학의 주가는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부실 기업으로 전락하는 운명으로 변했다. 학생들의 사회 변혁에 대한 실천적 열정도 식고 점점 개인주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가치관이 대학과 지식인들의 풍조가 되어 왔다. 현금의 포스트 모더니즘 경향도 이런 개혁적 열정의 후퇴와 신자유주의적 풍조와 내면적 관련성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이런 전반적인 풍조 외에 1997년 후반에 이 나라에 휘몰아 친 경제 및 재정의 한파는 교육 정책과 교육 현실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지금까지 제도권에 의해 보호 육성되어 온 철학, 인문, 정신 등의 소위 현금 가치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는 학문들은 한데로 내 몰리는 상황이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적 대학교육의 모방인 학부제, 대학교 자율화, 대학원 중심제 등이 정부에 의해 각 대학들에 강요되었을 때 신입생들은 철학과 내지는 돈 안 되는 학과들에 잘 들어 오지 않는다. 그리고 교양 철학 등도 인기를 잃고 있다. 따라서 어떤 교수는 말했다: “이제 학부에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가르치기는 어렵다”. 이래 저래 해서 철학 교수와 강사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관념론 철학에서 “존재 = 주관 + 객관” 이라고 공식화 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 = 수요 + 공급”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수요 상실은 곧 그 존재의 상실로 이어 진다. 물론 항간에는 인기 있는 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강의나 저서들을 잘 살펴 보면 그들이 독창적인 어떤 해석이나 사유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모방 그리고 전달에 재능이 있음이 드러난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전도사와 학자를 구분한다. 크게 외치고 요란한 의상으로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철학은 약 장사 내지는 영화배우의 철학이다. 이런 철학은 철학 전체가 평가 절하되는 마당에 그나마 철학의 명목 가치의 향상에 기여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대중 문화의 철학적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요즘 한창 유행인 영화에서 철학 찾기가 그런 하나의 예이다. 철학적 영화 평론은 그러나 크게 예술철학 그리고 미학의 영역으로 흡수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근래 한국 문화의 정체성 문제와 더불어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배타적 고유성이나 신토불이적 동질성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한마디 하고 지나 가야 할 것 같다. 무비판적인 외래 문화 선호가 해로운 것처럼 국수주의적 자기 집착도 해롭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인의 문화적 우수성을 재료적, 질료적 우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적, 형성적 우수성에서 찾는다.
조상들의 훌륭한 문화적 유산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면 허준의 동의보감. 이는 주로 당시의 각종 중국 의서 230 종 – 물론 그 중에 한국 의서도 몇 권 있었다 – 을 분석 종합하고 그런 바탕 위에 허준의 독창성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는 필자가 말하는 한국인의 형식적, 형성적 우수성의 발로이다.
다시 말하면 허준은 외국의 문화적, 학문적 자료들을 철저히 수집하고 이들을 분석, 비교, 종합하는 가운데서 도리어 외국인들도 보지 못했던 + α 를 발견 내지 창조하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국 정신의 우수성 = 보편성, 세계성 이다. 한국 정신의 우수성은 따라서 한국의 천연자원의 우수성, 예를 들면 진돗개, 인삼, 과는 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필자는 한국의 문화, 정신, 철학 등을 컴퓨터,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국제적 경쟁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특히 철학의 경우 한국적, 동양적 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그것이 관대하고 우호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설령 지금 까지는 그것이 한국 고유의 문화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거의 모두가 외국에 알려지고 있다. 머지 않아 한국 고유의 문물, 문화에 대해서도 –예를 들면 김치, 막걸리 등- 외국에서 한국인 보다 더 훌륭한 연구자, 전문가가 나올 것이다. 바야흐로 인터넷의 시대이다. 인간 정신의 보편성은 그 지역적 특수성, 제한성을 한낱 옛날 이야기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런 인간 정신의 세계성, 이성의 보편성과는 달리 살아 있는 인간, 지역적으로 시간적으로 활동하는 인간의 구체적 문제는 항상 특수적이다. 우리들이 처한 역사적 시대적 상황은 남들과 너무나 다르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특히 19 세기 말 이후에- 발자취를 추적하는 일은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불가능하다: 민족의 수난과 항쟁, 굴욕과 영광, 민족의 분단과 내전, 반공과 독재, 지역 감정과 레드 콤플렉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민중들의 고난과 희생, 국민(정치적)주권의 회복, IMF 위기와 경제 주권의 상실, 그 이후의 사회의 양극화 및 사회 각 집단의 자기 권리를 위한 극심한 투쟁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중요한 한국적 현실의 제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도움이 되는 철학이나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일 것이다. 물론 헤겔의 철학만을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당면한 현실 문제가 조금이라도 변화할 리는 없다. 그러나 헤겔적, 변증법적 사고방식이 한국처럼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의 세계에서 그 해결을 위한 중요한 사유의 동기들을 제공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변증법의 본질은 바로 (극한적인) 대립자들의 화해 및 통일에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 이 책에서 상세히 서술되겠지만, 그의 초기에 헤겔의 진정한 관심은 철학이나 학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조국의 통일과 인간의 해방이었다. 따라서 좌파적 헤겔 연구자 루카치(G. Lukacs)의 지적처럼 정치적 변혁 내지 사회적 실천이야말로 청년 헤겔의 근본적 방향성이다. 그런데 루카치의 한 문제는 청년 헤겔의 종교적, 신학적 관심을 재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파적 헤겔 연구자 딜타이(W. Dilthey)는 헤겔의 종교적 서술들을 범신론적 신비주의로 해석했다. 그는 헤겔의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사랑의 철학, 통일의 철학을 그렇게 이해했다. 필자는 이에 대해 헨리히(D. Henrich)가 헤겔 해석에 처음 사용한 개념인 “통일의 철학”을 수용하여 그 것으로써 딜타이의 신비주의적, 비합리주의적 헤겔 해석을 대체 했다. 필자는 독일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를 밝혔고 필자의 지도 교수인 부퍼탈 대학교의 바움(M. Baum) 교수에 의해 이것이 인정되어 졌다.
청년 헤겔의 종교문제는 그의 “민중종교” 개념과 “민중교육” 개념으로 표현된다. 이 것의 올 바른 해석은 청년 헤겔의 철학에 대한 루카치와 딜타이의 대립을 화해 시킨다: 왜냐하면 헤겔에 있어서 민중종교는 종교를 통한 정치 개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민중종교란 다시 말하면 어떤 정치적 목적 –예를 들면 민족의 해방과 통일- 을 위해 민중의 종교적 표상과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당시의 독일의 민중들은 대개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자들 이었으며 그런 만큼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발전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헤겔은 이들 민중을 각성 시키고 이들의 힘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당시의 보편적 종교였던 기독교를 민중종교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초기 헤겔의 종교 사상의 발전은 민중종교 → 실증종교 비판 → 사랑의 종교(통일철학적 종교) 의 순서로 바뀐다. 딜타이가 범신론적 신비주의라고 못박은 ‘사랑의 종교’ 역시 민중종교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져야 한다. 사랑의 종교는 통일철학에 다름 아니다. 헤겔은 민중종교 또는 종교 일반의 근거 찾기를 위해 (휄덜린의) 통일철학에 의지했다. 이런 과정에서 통일철학과 변증법의 고유한 사상들이 발전되었다: 그의 사랑이란 단편에서 헤겔은 “감정의 통일과 반성의 분열”, “생명”, “대립을 통한 발전” 등 후기의 변증법적 철학의 핵심이 될 사상적 단서들을 전개한다. 또한 믿음과 존재 라는 단편에서는 이율배반과 모순이라는 헤겔 변증법의 방법론적 문제들이 표면에 등장한다. 이율배반과 모순의 해결은 헤겔이 필생 해결해야 할 난제이다. 예나 시대(1801-1807) 이후 헤겔의 집요한 노력은 결국 이러한 문제를 상식과 형식논리학의 극복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통일의 철학”이고 그 방법론이 변증법이다. 따라서 필자는 헤겔의 철학을 그 근원에 있어서
통일의 철학(Vereinigungsphilosophie)으로 규정한다. 변증법 이전에 (주관-객관의) 통일이 먼저 있었다.
더 나아가서 헤겔 뿐 아니라 피히테, 실러 그리고 셸링의 철학도 역시 통일의 철학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독일 관념론 전체가 실은 통일의 철학으로 돌려 생각된다.
위의 설명으로부터 청년 헤겔의 해석 방향에 대한 루카치와 딜타이의 대립이 많이 해소되었다고 믿는다: 젊은 헤겔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변혁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변혁이 당시의 독일에서는 영국에서와 같은 의회주의, 혹은 프랑스에서와 같은 혁명을 통해 일어 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헤겔은 종교의 개혁 또는 종교의 비판을 통해 이를 달성하려고 꿈꾼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기초로서 신적 존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따라서 신 개념 및 신 존재의 증명 문제가 등장하며 이는 다시 헤겔이 종교에서 철학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든다. 여기서 결집되는 사상이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사랑의 철학 내지 통일의 철학이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철학의 개념이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어떤 지식인들의 관념적인 유희이거나 지적 만족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철학은 기본적 생활 뒤에 오는 취미나 기호의 문제로 전락하곤 했다. 거기다 동양의 철학은 점치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제도권 철학 내지 강단 철학의 경우 독일 철학을 많이 강의 했으나 그런 철학이 태동하게 된 문화적, 역사적, 경제적 여건들은 거의 간과되어 졌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문자에 집착하여 각 철학 사이에서 그 드러난 차이점에만 주목하고 드러나지 않은 공통의 기반은 무시되었다.
칸트에서 헤겔 그리고 맑스까지의 독일의 철학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제목은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의 사상이다.
이것의 뿌리를 캐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간단히 이야기한다면 이렇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의 실천적 의미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칸트는 플라톤의 공화국을 덕(德)의 이념(Idee der Tugend)과 연결시키고 있다 (KdrV B. 370 이하).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칸트 철학과 프랑스 혁명의 관련성을 고려할 수 있다; 왜냐하면 ‘덕의 공화국’ 개념은 알다시피 프랑스 혁명가 로비에스피에르의 구호였다.
공화국의 이념(Idee der Republik)은 헤겔의 실증종교비판의 시기를 결정하는 요소이다. 루카치가 말하는 헤겔의 사회적 실천은 바로 고대 공화주의를 지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와 조국을 위한 희생의 개념이다. 그뿐 아니라 공동체 지향적인 실천의 개념은 헤겔의 전 철학의 근본 요소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렇게 인정되어온 바와는 달리, 칸트와 헤겔의 사상 사이에 차이성 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이 더 많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는 다시 말해 ‘존재에 대한 당위의 우위’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생각이야말로 플라톤에서 맑스에까지 이르는 관념론 이상주의 철학의 본령이다.고대 플라톤적 이상주의는 도외시하고 18-19 세기 독일에서의 사상 발전의 사회 정치적인 여건을 살펴보자. 여기서도 현재 한국의 그것과 많은 유사성을 인식할 수 있다.
18세기 독일은 사회 정치적으로 주변의 나라들 –영국, 프랑스- 보다 적어도 백년 이상의 후진성을 가지고 있었다. 전근대적, 봉건적 상황 하에서 국민들은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었다. 특히 당시 독일은 수십 개의 군주국가(영방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라서 분열된 나라의 운명이 항상 그렇듯이 영방국들은 서로 싸우고, 힘센 나라들은 약소국들을 약탈, 유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다가 더욱 나쁜 것은 영국, 프랑스 등의 주위의 강대국들은 독일의 분열을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챙기고 또 독일을 그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끊임 없이 군사. 외교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1799년 자신이 쓴 독일 헌법에 대한 단편 에서 헤겔은 이런 사실을 냉철하게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정치 후진국에서 보편적인 언론과 출판의 통제가 그 당시 독일에서도 심했다. 따라서 헤겔이 최초로 집필한 책(번역서)은 익명으로 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칸트마저도 현실 정치의 뜨거운 맛을 봐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의 대학 안에는 지하 감옥이 있어 삐딱한 학생들을 징계했다고 한다.
헤겔, 휄덜린, 셸링 등의 대학 시절은 이웃 나라 프랑스의 혁명 시기와 일치한다. 당시 독일의 인민들의 상황은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과 정반대로 부자유, 불평등 그리고 분열이었다. 이런 억압적인 체제 아래에서 헤겔과 그의 친구들은 관헌의 사찰과 검열을 피해 혁명을 찬양하고 자유와 통일을 부르짖었다.
만년의 헤겔은 제도권 철학자로 바뀌어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을 대변했다. 그러나 청년 헤겔은 단연코 혁명적 공화주의자 내지 자코뱅주의자 였다. 다시 말해 그는 당시의 운동권이었다.
운동권에서 제도권으로의 변신, 이것 역시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리라.
위의 서술에서 도출될 수 있는 바: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 혹은 존재(Sein)에 대한 당위(Sollen)의 우위 사상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의 인식에서 나오는 하나의 가치관이다. 헤겔이 칸트 및 피히테의 철학을 극복, 지양한다고 하지만 이런 이상주의적 관념론적 인간관,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벗어 나지는 않는다. 이상주의 그것은 존재보다는 당위, 있는 것 보다는 있어야 할 것을 더 중시하는 철학이다.
이런 사상은 또한 우리의 당면한 현실과도 부합한다. 우리에게는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 최고의 당위성이 있다. 환언하면 분단된 조국이라는 현실에 만족하기 보다는 재통일 이라는 이상에 비추어 주어진 –만들어진- 현실을 비판하고 그 이상을 현실화 하기위한 구체적인 방법의 추구가 우리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치우치지 않는 역사 인식에 근거한 통일의 원리 및 정책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남한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의 당면 문제들이 해소되어야 한다. 독일의 통일에서 보는 것처럼 통일 자체 보다 그 이후가 더 어렵다.
헤겔의 기독교 이해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당시의 많은 사상가들이 그런 것처럼 헤겔 역시 정통적인 성경 이해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헤겔은 기독교를 신과 인간의 살아 있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주로 무한자와 유한자의 논리적-존재론적 관계로서 사변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의 초기 신학적 저술에서 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를 칸트식으로 이성종교로 규정하거나 이것의 한 변형인 민중종교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초기 헤겔의 민중종교 구상은 실러의 모세 파송이라는 구약 성경 해석에 근거한다: 이에 따르면 시내 산에서 모세를 중개자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계약 체결의 에피소드는 민중종교의 원형을 제시한다(출애급기).
통일 철학도 민중종교 내지 종교 일반의 정당화로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사랑 개념에서 헤겔은 통일 철학의 증거를 찾았다. 그리고 또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은 통일철학의 핵심 문제인 통일(사랑)과 반성(분리)의 변증법적 관련성을 선취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 근거하여 헤겔은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종교 해석학적 역작 기독교의 정신과 그의 운명을 집필했다.
칸트의 실천철학, 종교철학에서 성경의 해석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처럼 헤겔의 사상 발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헤겔의 기독교 이해는 성경의 자유로운 해석에 근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