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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 허백련(毅齎 許百鍊 1891-1977)
1891년(고종 28)∼1977년.
시조로부터 35세손이고 충정공 허종(許琮)의 17세손이다. 자는 행민(行敏)이고 호는 의재(毅齋),
당호는 춘설헌(春雪軒)이며 전라남도 진도출생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후, 신학문에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畿湖學校)에 입학하였다가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정학을 전공하려다가 그림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으며 고향에서 종친 되는 19세기의 대화가, 소치 허련(許鍊)의 아들인 미산 허형(許瀅)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혔던 것이 전문적인 그림수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동경에 약 6년간 머무르며 당시 일본의 대표적 남종화가(南宗畵家)였던
고무로(小室翠雲)의 영향을 받아 정통 남종산수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1918년 고향으로 일단 돌아갔다가, 1922년 서울에 올라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통적인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27년까지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그뒤 전라남도 광주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필생활과 문하생 지도에 전념하였다.
그는 같은 세대의 신예들이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적 작풍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오로지 옛 법
(古法)에 충실한 화격(畵格)을 자신의 세계로 심화시키는 방향을 고수하였다. 그의 산수화와 문인화는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의 철저한 계승이었다.
1938년에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회관까지 마련하고, 호남지역의 서화 전통을 더욱 떨치게 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였다. 문인화가 이범재(李範載)와 구철우(具哲祐)는 그때의 제자이다. 그뒤에도 문하에서 김옥진(金玉振)을 비롯한 많은 전통적 산수화가가 배출되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무등산다원(無等山茶園)을 인수하여 축산농장을 경영하면서 화필생활을 병행하였고, 1947년에는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집안의 청소년들에게 농사기술을 익히며 학업도 닦게 하는 등 사회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가 시작되자 추천작가·초대작가로 추대되고,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62년 문화훈장 문화포장(文化褒章)을 받았다.
또 1966년에는 예술원상 미술부문을 수상하였다. 한시(漢詩)와 고전화론(古典畵論)에 통달하고 서법(書法)도 독특한 경지를 보인 시·서·화 겸전의 전형적 남종화가로서 호남서화계의 상징적 거봉으로 추앙되었다. 1973년에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에서 동아일보사에 의하여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