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같은 세월이라더니 시간의 흐름이란 야속할 정도로 빠르다. 벌써 한 학기가 다 지나 가고 여름 방학을 맞이했다. 그리 많지 않은 학교의 식구들이라 평소에도 크게 분답지는 않았지만, 방학이 되고 나니 교정에 남은 것은 오직 매미소리 뿐이다. 나무들도 더위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학교 숲엔 무심한 적막만이 두꺼운 켜를 이루었다. 학교 뒤뜰을 차지한 사택에도 한여름 고적(孤寂)이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그러나, 사택에 내려앉으려던 고적은 이내 뒷걸음쳐야 했다. 방학 들머리부터 손님들이 찾아 들었다. 경치 좋고 인심 좋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산다고, 내 삶의 터 마성을 와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이러저러한 일로 서로들 시간 마련이 여의치 않다가 조금은 여유로울 수 있는 방학을 맞아 마성을 찾아오려는 것이다.
첫 손님은 포항 사는 박 선생 부부였다. 박 선생 부부와는 울릉도에서 섬 살이를 함께 한 적이 있다. 한 해를 함께 살았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달랑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울릉도. 바다도 산도 신비롭도록 아름다운 곳이지만, 그곳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뭍을 향한 그리움을 안고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사는 사람들끼리 정을 모으지 않으면 더욱 외로웠다. 그 때 섬 살이를 함께 하던 사람들은 모두들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냈다. 그 중에서도 박 선생네와는 연배도 비슷하고 의기도 맞아 남달리 친하게 지냈다. 돌이켜보면 함께 만들었던 추억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박 선생이 앞서 섬을 떠났다. 뭍으로 간 박 선생은 포항에 정착했다. 섬을 떠나온 지 사 년이 흘렀다. 박 선생네와 그 시절을 그리며 연락을 주고받으며 언제 한 번 만나자고 하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다. 포항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장장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려서 해거름에야 이곳에 이르렀다. 잡은 손을 몇 번이나 흔들며 해후의 반가움을 나누었다.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앉아 지난 섬 살이를 추억하는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흐드러졌다. 밤이 깊어 갔다. 이튿날 문경 일원을 드라이브로 살펴보고,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포항서 다시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어제 만날 때처럼 잡은 손을 몇 번이나 흔들고 헤어졌다.
많은 손님이 한꺼번에 왔다. 방학의 첫 주말이었다. 대구와 고령에 사는 남매들이 하솔을 모두 데리고 온 것이다. 무려 열여덟 명이나 왔다. 한 마당이 꽉 찼다. 적적한 사택 생활이 방학을 맞아 오히려 활기로 넘쳐 나는 듯했다. 객지에서 만나는 혈육들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었다. 아이들은 운동장이 참 넓다며 달음박질쳐 나갔다. 지난 봄엔 울산 사는 질서(姪壻)의 별장에서 다 모였었다. 형님의 생일 무렵이었다. 질녀 내외가 저들의 부모님과 함께 아버지의 남매 식구들을 다 부른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산 속의 별장에서 생일을 축하하며 혈육들간의 정을 다졌다. 이렇게 모여서 서로들 얼굴 마주하고 정담을 나누니 사람 사는 것 같다며 다음에 또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기회를 갖자는 얘기가 나왔다. 모두들 그게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차례는 어디가 좋을까를 궁리하다가, '마법의 성'처럼 느껴지는 마성이 어떻겠느냐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하여 이 '마법의 성'에 둘러앉게 된 것이다. 부엌일에 분주한 아내를 도와 질부들도 부산하다. 텃밭에서 뜯은 푸성귀며 이곳 특유의 맛을 지닌 막걸리로 상을 차렸다. 마당에 식탁을 차려 의자에도 앉고 평상에도 앉아 타오르는 모닥불과 함께 웃음꽃을 피워냈다. 오늘의 이 자리를 어머니, 아버지가 보시면 얼마나 즐거워하시랴 하며, 저 하늘의 별 어디에서 다 보고 계실 거라고도 하며 이야기꽃도 피워내고 있었다. 마음과 뜻을 모아 더욱 정답게 살아 가자고도 했다. 마당 앞에 커다랗게 서 있는 교사(校舍)를 보며, 학생 수는 그리 많지 않은데 학교는 참 넓고 크다며 감탄도 하고, 농촌이 잘 살게 되어 좀더 많은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걱정도 해 주었다. 밤은 피어나는 웃음꽃 속으로 시나브로 깊어 갔다. 이튿날은 모두 문경새재 관문 길을 함께 걸었다. 참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숲도 시원하고 물도 참 맑다고 감탄했다. 석탄박물관도 관람하고 고모산성에도 올랐다. 저녁을 함께 먹고, 다음에는 매제가 사는 고령에서 만나기로 하고 떠나가는 차들이 모습을 거둘 때까지 우리 부부는 손을 흔들었다.
지난날의 동료들이 찾아왔다. '문장골 한마음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함께 사람들이 마성을 찾아온 것이다. 이십여 년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로 '문장골'은 학교가 위치한 동네 이름이다. 당시 우리가 근무했던 학교는 전국 최초로 영재교육을 실행하고 있었다. 영재교육의 담당자라는 자부심과 함께 남다른 동지애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은 전근으로 인하여 뿔뿔이 헤어지고 난 다음 같은 전공을 인연의 고리로 하여 다시 모였다. 한 해에 서너 차례 만남을 이어오는 사이에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한 분을 이승을 뜨기도 하고 네 분은 정년을 맞아 일선에서 물러났다. 나도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마성에까지 이르렀다. 그러한 세월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만남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래서 '한마음회'인지도 모른다. 회원들은 해거름 무렵에 학교에 도착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산다는 덕담으로 만남의 첫인사를 나누었다. 학교 사무실로 안내하여 학교를 소개했다. 학교가 참 깨끗하군요. 아이들이 더 깨끗해요, 한 학기가 지났지만 결석 한 명 없는 걸요. 사람들이 감탄했다. 사택의 평상에 앉았다. 날은 저물어도 매미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오랜만에 이런 소리 듣겠네요. 예 저는 이 소리 들으며 아침잠을 깨곤 한답니다. 사모님이 많이 그으셨군요. 날만 세면 이 텃밭에 산답니다. 이 선생, 사모님 너무 고생시키시는 것 아니오? 아내가 거든다.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일인 걸요. 하루하루 다른 모습이 참 신기해요. 마당 가장자리 텃밭의 상추며 케일이며 고추를 가리킨다. 참 감동적입니다. 견(甄) 회장님의 말씀이다. 모닥불에 구워지는 삽겹살을 안주 삼아 막걸리 병들을 비워내고 있었다. 삼겹살에 막걸리는 사택 손님맞이의 고정 메뉴다. 박 선생 부부가 왔을 때도, 남매들이 왔을 때도 그랬다. 마당 가장자리에 장작을 지펴 모닥불을 피운다. 젊은 시절 어디에서 캠프파이어로 여름밤을 보냈던 추억에 젖는다.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의 꽃불이 진 뒤에 남은 잉걸에 석쇠를 얹어 고기를 굽는다. 고기의 기름이 불잉걸로 떨어지며 다시 한번 꽃불을 피운다. 고기의 기름기는 불이 되어 태워진다. 막걸리 한 잔 들이키고 알맞추 구워진 고기를 상추로 싸서 입 한 가득 넣는다. 모두들 별미라고 했다. 이리 마당 넓은 시골집이 아니면 이런 맛을 볼 수 있겠느냐며 찬사해 주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앉은 사람들은 고기는 맛있다 하면서도 술잔은 쉽게 비우지 않았다. 세월이 주력(酒力)을 쇠잔하게 만든 탓일까. 회갑을 벌써 지나 고희를 바라보는 연세거나, 젊었다 해도 이순을 눈앞에 둔 나이들이라 예전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좁다란 사택에 잠자리를 마련할 수 없어 읍내의 모텔을 빌렸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사택으로 와서 아침상을 함께 했다. 차린 것이 모두 나물이다. 보리쌀 적당히 섞은 밥, 된장국, 호박잎 찐 것, 가지무침, 비름나물무침, 채소 절임……. 거의 모두가 텃밭의 생산품들이다. 이날의 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 식단도 그러하고, 어느 손님의 상이라도 그러했다. 소찬(蔬饌)에 소찬(素饌)일 뿐인 것을, 손님들은 진미, 별미라 하며 맛있게 들었다. 그 때마다 아내는 얼굴을 붉힌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문경을 볼 차례다. 석탄박물관 안내에 이어 이번에는 특별히 '견훤(甄萱) 유적지'에 가보기로 했다. 견(甄) 회장님을 생각해서다. 가은읍 갈전리의 금하굴(金霞窟)로 갔다. 후백제 시조 견훤의 탄생 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다. 견(甄) 회장님은 감회에 젖으며 '견훤'을 '진훤'이라 부르는 까닭을 설명하기도 했다. 진남교반으로 나와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가을에 다시 만나자며 석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달려 떠났다. 칠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손님 다 왔다 간 거예요? 아내는 조금은 허전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이 빠져나간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배우의 심정쯤이라도 된 걸까?
사택은 다시 매미소리가 요란스럽다. 팔월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사택으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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