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교리는 한때 장흥군 회령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당리, 명교리, 벽동리, 다남리, 이문리, 신리, 장변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벽동과 이곳에 있는 운교의 이름을 따서 벽교리라 하여 회천면에 편입되었다.
명교마을은 인천이(李)씨 武가 능주에서 살다가 임진왜란으로 8세대 가족을 잃고 이 마을로 피난하여 강씨(姜)의 재(材)에서 살다가 진주강(姜)씨의 딸을 맞이하여 정착한 후 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구전에 의하면 강릉유(劉)씨 촌이었다고도 하나 문헌에는 없다.
마을의 이름은 인천이(李)씨 족보등을 보면 武 材이래 명교(鳴橋)로 불리어 온듯하며 명교(明敎)로 개칭된 것은 조선 철종때 이한고(李漢考), 손봉구(孫奉九)씨등의 제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득량도(得浪島)를 큰 바위로 물형(勿形)을 잡고 그 바위가 거북이 사는곳(명교마을)을 감춘형국이어서 옛부터 피난의 적지라고 전해져 왔으며 6.25동란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왔으나 인명피해가 전혀 없어 안전한 마을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백사정(白沙亭) : 마을 앞 해변에 있었다고 하며 이충무공(李忠武公)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보면, 정유(丁酉)년 팔월(八月) 십칠(十七)일에 보성(당시는 장흥땅)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군영구미(軍營龜尾)에 이르니, 이곳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왜적과 싸워 전승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다.
매년 정월 보름부터 시작하는 농악은 이월(二月) 하드렛날까지 이어졌고, 득량도민과도 농악놀이를 교류하였으며 명교의 벅구놀음은 면내의 자랑이 되어왔다.
명교마을의 특정비명은 다음과 같다.
장구배미 : 갓골 북쪽에 있는 논, 장구처럼 가운데가
잘록 하게 생겼다.
하마정 : 명교 동쪽에 있는 골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