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절대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는.
행복의 얼굴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눈 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불 완 전
더욱 분명을 듣기 위하여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하고,
더욱 또렷이 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숨을 죽인다
밤을 위하여
낮은 저 바다에서 설탕과 같이 밀물에 녹고,
아침을 맞기 위하여
밤은 그 아름다운 보석들을
아낌없이 바다에 던진다
죽은 사자의 가슴에다
사막의 벌떼는 단 꿈을 치고,
가장 약한 해골은
승리의 허리춤에서 패자의 이름을 빛낸다
모든 빛과 어둠은
모든 사랑과 미움은
그리고 친척과 원수까지도,
조각과 조각들은 서로이 부딪치며
커다란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우리의 불완전을 오히려 아름답게
노래하여 준다.
창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견고한 고독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파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광주 호남신학대학 '가을의 기도' 詩碑>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호남신학대학 음악관 근처에 세워진 시비는 주 조형물과 부 조형물 등 3기로 구성돼 있다.
주 조형물은 3m 높이로 펜촉과 횃불을 상징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고, 책 모양의 부 조형물에는
'가을의 기도'가 새겨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조형물은 유난히도 차를 좋아했던 시인이 차를 마시늠
모습과 함께 연보와 문학세계, 제자및 문인 명단등이 담긴 '평설비'로 꾸며져 있다.

시비앞에서 내려다 보면, 저멀리 교회가 보이는데, 이교회는 시인이 평소에 다니던 양림교회이고,
조금 옆으로 비켜보면 시인이 근무했던 조선대와 생전에 거주했던 양림동이 보인다.

<무등산 도립공원 김현승 '눈물' 詩碑>
눈물
김현승
더러는/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이 시의 주제에 대하여, 시인은 "인간이 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서 오직 썩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김현승 '굽이쳐가는 물굽이와 같이' p236) 고 말하고 있다. 이 시를 통하여, 신 앞에 선 한 인간, 그리고
신과 인간과의 관계 형성의 매개물이 눈물임을 확일할 수 있는데, 그 눈물은 자기의 전체이며,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마지막 지닌 것이며, 웃음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절대자요, 초월자인 신 앞에 섰을 때, 눈물은 인간이
신에게 드릴 모든 것의 마지막 것이라면, 한계에서 느끼는 회환(悔恨)의 눈물
이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덕수/김현승시연구/숭실대학교출판부/84~85p)
茶兄 김현승(1913-1975)이 태어난 곳은 광주가 아니고, 1913년 2월 평양에서 태어나 1936년 본적지인 광주로
내려와 교원생활을 시작하면서 시작(詩作)생활보다는 가족을 부양한는 문제와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면서
창작활동을 포기하다시피 하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시혼(詩魂)에 눈을 뜨게 된다.
시인은 '대표작 자선자평(自選自評'에서
-이러한 중에 8.15를 맞았다. 해방은 생존에 허덕이던 나를 다시 정신(精神)의 세계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깊은 생존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가던 나의 불쌍한 시혼(詩魂)에 한 가닥 빛을 던져 주고 꺼져가던
생명의 등잔에 기름을 부어 주었다.- 라고 그 당시의 상태를 술회한바 있다.
광주에서 숭일학교 초대교감으로 취임하였으며, 1951년에는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0년에
숭실대학 교수, 1972년 숭전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임명되었다.
시인이 광주에 머물렀던 시기는 1936년~1960년 24년간 머물렀으나, 광주에는 커피를 즐겼던 시인이 자주
다녔던 양림동의 그 많던 다방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시어에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도 거의 자취를
감춘 양림동엔 양림교회만이 시인이 다녔던 때보다 몇배 크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광주에서는 더 이상 김현승 시인의 자취를 찾을수가 없어, 고향이 광주는 아니지만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어 잠들어 있는 김남주 시인의 묘소를 찾아가보기로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시인의 영혼 여기 잠들다.'>
해남이 고향인 김남주 시인(1946-1994)은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한뒤 1994년 2월 13일 타계하였다.
9년 몇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에 나와 5년여를 살다가 타계한 김남주시인에게는 9년여의 세월동안 옥바라지로 청춘을 보낸 여인 박광숙과 4살짜리 토일이 있었다.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세상 모든 여자들 중에서/첫 키스의 추억도 없이/
한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름을 '토일'이라고 지은 것이 아빠처럼 고단하게 살지말고 '금토일'처럼 평안한 휴일을 만끽하는 좋은 세상을 만나라는 아빠의 염원은 아니였을까라고 시인의 후배들은 이야기 하며 췌장암으로 타계한 시인을 기억하며 가슴아파 하고 있다.
"오 여보게 친구 우리 아기 좀 보게/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호미를 쥐어줘야겠네/
봄이면 들에 나가 나물이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가을이면 산에 올라 칡뿌리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콩나물 한 그릇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서울이 무서워서 그러네/
별 하나 아름답게 키우지 못한 서울 하늘이 저주스러워서 그러네'''"

김남주 시인의 묘소가 있는 망월동 묘역은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17년동안 묻혀있던
곳으로 97년 새 묘역이 완성됨에 따라 이곳에 묻혀있던 영령들이 새 묘역으로 이장되고, 현재는 고김남주시인,
고 박종철, 이한열...강경대...등 5.18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37명과 신묘역으로 이장하지 못한 2명의
5.18희생자가 안장되어 있으며, 옮긴 이들은 가묘상태로 남아 있다.
해가 지는 저녁나절에 망월동 묘역을 둘러보고, 신묘역에 들어서니, 창문을 열고 다닐만큼 날이 좋았던
이른 봄날에 몸도 마음도 서늘해진다.....
김현승 金顯承 (1913. 2. 28 - 1975. 4. 11]
호 남풍(南風)·다형(茶兄).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생. 목사인 부친의 전근을 따라 평양(平壤)에 이주, 그 곳에서
숭실(崇實)중학과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교지에 투고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가 양주동(梁柱東)의 인정을 받아 《동아일보》에 발표(1934)됨으로써 시단에 데뷔하여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침》 《황혼》 《새벽교실》 등을 계속 발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나타내어 주목을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8·15광복 후 1949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 《내일》 《동면(冬眠)》
등 지적이고 건강한 시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51년부터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흡(朴洽)·
장용건(張龍健) 등과 함께 《신문학(新文學)》(계간)을 6집까지 발행,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7년에 처녀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간행하고, 1963년에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1968년에 제3시집 《견고한 고독》, 1970년에 제4시집 《절대고독》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의 예찬을 통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띠었으나, 8·15광복 후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보여 주었고, 말기에는 사랑과 고독 등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1973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김현승 시선집》을 출간했다.
저서로 《한국 현대시 해설》(1972), 《세계문예사조사》(197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