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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本) ◇죽염과 이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소금요정♠
<인산가가 걸어온 길> [“신약(神藥)”이 세상에 나오다] 인산 김일훈 선생의 불멸의 대저술인 “신약”이 출간(1986,6,15)되었다. 이미 “우주와 신약”, “구세신방” 등의 저서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사상, 암을 비롯한 난치병의 새로운 치료방법 등을 제시한 바 있는 인산 선생은 이 책에서 인산의학을 집대성 하였다. 이 책은 1년여 동안 김윤우(단국대 동양학연구소), 김윤세(인산가 대표) 형제가 선친인 인산 선생의 구술을 받아 집필하고, 다시 인산 선생의 감수를 받아 출판되었다. 이 책을 통해 인산 의학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산 선생의 의학과 사상, 대반향 일으키다] “신약”이 출간되자 각 일간신문, 잡지 등에서는 인산 선생의 행적과 의학을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인산 선생이 당시 기거하던 경남 함양의 초막에은 “난치병 환자들의 종착역”으로, 인산 선생은 “불세출의 신의”, “가난한 민초들의 의황” 등으로 표현되었다. 당시 언론은 독립운동이후 정계의 권유를 피해 산중에 은거하며 병자를 치유하고 암 치료법 등을 연구한 인산 선생의 챙적을 소개하는 한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의론과 의술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려낸 인산 선생의 구료 기적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인산 김일훈 선생 전국 순회강연회 열다] “신약”의 출간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인산 선생을 찾는 난치병 환자들의 몰려들고, 각종 의학상담이 쇄도하자 인산 선생은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이 터득한 의학의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하기로 결심하여 전국 순회강연회를 시작했다. 1986년 6월 20일, 한국일보사 12층 대강당에서 “신약” 출간을 기념하는 강연회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92년 타계하시기 직전까지 전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총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대중강연회를 열었다. 강연장에는 난치병 환자들이 줄을 이었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인산의학을 배우기 위해 인산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수행하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강연장에서는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갖가지 병 치료법, 의학의 새로운 방법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총 33차례의 강연회 내용은 오디오와 비디오로 모두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긴 “신약본초”가 1992년에 출간되었다. [인산죽염의 생산을 시작하다] 인산 선생은 자신이 소량씩 실험용으로 제조한 죽염을 환자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으나 찾아오는 환자의 수가 너무 많아 언제나 양이 부족하기만 했다. 신약 책을 읽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인산 선생에게 간곡히 죽염 생산을 요청하였고, 이에 인산 선생의 차남인 김윤세(인산가 대표)씨가 인산식품을 설립하여 죽염의 대량생산을 추진하였다. 1987년 8월 27일 인산식품을 설립하고 경남 함양군 유림면 옥매리 1095-16번지에서 죽염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죽염 제조의 시초이다. 또한 인산식품의 설립 직전인 1987년 5월 23일 인산 선생의 사상과 의학을 펼치기 위한 “민속신약연구회”가 설립되었으며, 8월 10일에는 인산의학 전문잡지 “민속신약”을 발간하였다. 그 뒤 인산가는 몇차례 제호를 바뀌어가며 14년 동안 건강전문잡지를 발행하였다. [전국에 “죽염 열풍”이 일다] 인산 선생의 강연과 인산의학 관련 보도의 영향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서는 죽염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백화점, 약국 등지에서 죽염은 폭발적으로 판매되었고, 무려 100여개 이상의 죽염 생산업체가 난립하였다. 수많은 건강식품업체들이 죽염사업에 너도 나도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품질, 가격, 판매방식 등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인산 선생 타계] 1992년 3월 3일 인산 선생은 가족들과 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주제의 유언을 녹음한다. 이때 선생은 자신의 사후에 30여 차례의 강연녹음과 수초원고를 취합하여 “신약본초”를 간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해 5월 19일 인산 선생은 세수 84세를 일기로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김윤세 인산가 대표의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인산 선생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한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고, 인산 선생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식이 열렸으며, 선생의 유해는 생전 인산 선생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인산농장에 안장되었다. 인산 선생의 49제일은 경남 함양과 가까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실상사에서 봉행되었으며, 인산 선생의 유가족과 후학들, 환자와 그 가족들 등 2천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이 자리에 인산 선생의 생생한 육성이 기록된 “신약본초”가 출간되어 인산 선생 영전에 헌정되었다. [중국 중의연구원의 인산죽염 학술보고회] 중국의 권위있는 의학연구기관인 중의연구원 왕기 박사팀은 1993년 7월 31일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한국 인산죽염의 임상 및 기초실험 학술보고회”를 가졌다. 총 8인의 학자가 참여한 이 연구에서 왕기 교수는 “인산죽염은 소화기 계통 질환의 치료(유효율 91.95%)와 예방에 탁월한 효능을 보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보고회에는 인산가 김윤세 대표, 중국 위생부 전신충 부장(장관)등이 참석하였다. [방송의 왜곡보도로 죽염산업 위기를 맞다] 죽염 애용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993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각계의 견제가 잇따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9월 12일 당시 인기 시사프로그램이었던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죽염은 건강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죽염을 복용하고 병이 악화되어 유명을 달리한 경우도 있다는 내용과 함께 죽염이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라는 요지의 방송을 방영하였다. 이 보도가 나간 직후 죽염시장은 직격탄을 맞아 거의 대부분의 업체들이 도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1주일 후 같은 프로그램의 방송 전에 죽염 복용후 병이 악화되어 유명을 달리한 환자는 죽염이 아니라 생소금을 복용하여 보도내용을 정정한다는 작은 자막을 내보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어서 죽염에 대한 불신은 소비자의 머리에 깊이 각인된 이후였다. 물론 이와 같은 사태 뒤에는 상당수의 후발 죽염업체들이 탈법적인 사업, 품질 저하 등 제대로 된 죽염은 뒤로하고 그저 흉내만 내어 마구잡이로 유통시킨 것도 그 배경에 속하였다. 인산가 역시 일반 유통시장에서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수출 또한 중단되는 등의 도산 직전의 사태가 일어났으나 인산 선생을 믿는 회원들의 지지와 후원 등으로 무난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인산죽염 제2공장 설립] 인산가는 기존 죽염공장(현재의 인산 농장)외에 경남 함양군 수동면 농공단지 내에 인산죽염 제2공장을 1994년에 설립하였다. 이 제2공장에는 인산가의 본사가 입주하여 현재 인산죽염을 전량 생산하고 있으며, 물류 센터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하버드 의대 암연구센터 인산죽염 연구] 인산가는 세계적인 암연구 기관인 미국 하버드 의대 부설 “데이너 파버(dana faber) 암연구 센터에 인산죽염의 안전성 실험을 의뢰하였다. 1995년 7월 1일 데이너 피버 센터는 “인산죽염은 일시에 다량 섭취해도 안전할 뿐만 아니라 항종양 효과까지 보인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인산재단 설립 추진] 통신 판매, 대리점 위탁 판매 등을 통해 회원기업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진 인산가는 IMF 기간에도 성장을 거듭, 경영이 안정된 회사로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인산가는 벤처기업 지정, 투자유치 등을 통해 기업의 규모와 사업분야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공익사업 추진을 위한 인산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인산본초고등학교, 인산의과대학 등을 설립하기 위한 부지를 경남 함양에 마련하였으며, 재단설립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번체사업본부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연구 개발에 착수하는 한편 일반 시장 및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인산 선생이 각종 저서에서 제시한 약성 물질들의 과학적인 연구와 상품화를 위해 “인산 생명과학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경남 함양의 인산농장에는 건강과 레저 문화 등의 다양한 기능을 갖춘 대형 휴양시설을 건립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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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本) ◇죽염과 이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소금요정♠
첫댓글 선생님의 유지를 잘받들어 대대솟손 개승 발전 있기를 희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