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포기와 한반도 군비축소의 함수
이태호 |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분단 한반도에서 군축(軍縮)은 이상적인 주장처럼 여겨져왔다. 더구나 북이 핵실험을 강행한 마당에 군축하자는 주장은 '한가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북의 핵실험이야말로 한반도에서 군축이 절실한 이유다. 현실적으로도 군축에 대한 고려 없이 6자회담의 성공이나 북의 핵포기를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한반도 주변에 차고 넘치는 무기와 군대, 그리고 군사훈련에 대해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최근 2·13 6자합의와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결정은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래 급격히 고조되었던 한반도 주변의 긴장과 갈등은 불완전하게나마 수습국면을 맞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6자회담 당사자들은 지난 2월 13일 2005년 9·19성명을 이행할 수 있는 초기조치에 합의했다. 하지만 합의된 것은 초기조치일 뿐이고 아직 많은 쟁점들이 남아 있다. 각국이 취할 '행동'의 의미와 수준도 향후 논의에 따라 달라질 터이다.
북핵포기를 위해 우리가 보장해야 할 것들
모처럼 마련된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북에 핵을 포기시키려 할 때, 우리가 보장해야 할 것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에너지 지원과 소극적 안전보장(불가침), 종전선언, 관계정상화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북이 줄기차게 요구해왔지만 간과되거나 무시되는 사항이 있다. 바로 '군사훈련 중단'이다. 1993~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단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이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얻은 후에야 제네바 합의에 도장을 찍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북한은 미국과의 베를린 접촉에서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고 2·13조치 합의과정에서도 이를 명문화하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매년 미국이 서태평양에서 진행하는 한미전시증원연습(RSOI) 및 한미기동훈련(Foal Eagle, 일명 독수리훈련)과 6자회담 실무그룹 협의 일정이 3월 중순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군사훈련 문제가 초기단계 논의에 복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훈련이 △북한군 격멸 △북한정권 제거 △한반도 통일여건 조성을 목표로 하는 작전계획 5027과 연관돼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미 양국군은 북의 공격을 대비한 방어적 훈련이라고 주장하지만 미국이 공공연히 견지하는 '예방적 (핵)선제공격 독트린'만 살펴보더라도 '방어적 임무'와 '공격 임무'가 얼마나 애매한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실제로 2001년말 미의회가 채택한 핵태세보고서(NPR)는 북한 등 7개국을 핵선제공격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 2001년을 계기로 구체화된 미국의 새로운 핵전략이 냉전시대와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는 비핵보유국에 대해서도 핵사용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국제 핵확산금지조약(NPT)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핵보유국의 비핵국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이라는 국제규범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다. 북한이나 이란이 아닌 미국이 국제핵확산의 주범으로 비판받는 이유다.
북의 불안 부추기는 한미의 군사전략
내친 김에 한국과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이른바 '대북 절대억지' 개념에 대해서도 점검해보자. '절대억지'란 야구식으로 표현하면 '완봉승'을 거두겠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타 하나도 치지 못하고 완패를 당하는 꼴이다. 야구경기라면 1:0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는 완봉패도 있지만, 전선이 따로없는 현대전에서는 전후방이 초토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절대억지란 더이상 방어적인 억제가 아니라 지극히 공격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한미연합군이 보유하고 있는 첨단 재래식 전력과 핵전력의 압도적 대북 우위, 그리고 이를 활용한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작전계획과 군사훈련은 북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군사적 불안감을 고취시켜 북의 군부로 하여금 '값싸고 파괴력있는 무기' 즉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집착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일으켜왔다. 북의 핵위협 축소와 한미동맹의 핵위협 및 재래식 전력위협의 축소는 사실 하나의 의제인 셈이다. 이것이 한반도 핵위기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제 '북핵해결을 위한 논의'는 한반도 군축 논의와 연결되어야 한다.
북핵위기, 한반도 군축과 연계해서 풀어야
한국과 미국은 6자회담에서 북한의 핵폐기 일정이 구체화되는 것에 조응하여 군비통제와 축소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6자회담 의제의 하나로 '평화체제 문제'가 다루어질 예정이지만, 논의가 피상적인 문서상의 작업에 그친다면 실질적 진전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북은 6자회담 진행과정에서 어떤 보상의 약속보다도 앞서 대북적대정책의 철회를 주장해왔고, 평화체제 논의에서도 형식적·제도적 논의보다는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서 2·13합의에 따른 초기조치의 성공적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북을 자극할 수 있는 군사훈련의 잠정 중단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초기단계 이행조치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북한 핵폐기가 본격화되는 2, 3단계로 진입할 경우, 한국과 미국은 한미동맹의 핵우산정책과 공격적인 재래식 군사작전교리를 전면 재검토하는 등의 실질적 상응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정전선언이나 불가침 약속이 진지한 제안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핵 해결 전후로 남한의 과도한 군비지출은 또다른 쟁점이 될 것이다. 남한은 이미 압도적인 경제우위를 바탕으로 매년 북의 10배 가까운 군비를 쏟아붓고 있다. 현재처럼 주한미군을 제외하고도 남북간 재래식 군사력 균형이 이미 깨어진 조건에서 남북관계는 남한의 능동적인 군사적 긴장 해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절대억지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며 군비는 '합리적 충분 전력' 수준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작통권 환수와 한미동맹 민주화
아울러 한반도 군축논의는 한미동맹의 민주화와 연결되어야 한다. 동맹의 민주화는 특히 '대테러전쟁'을 선포한 뒤 지구촌 곳곳에서 무장갈등의 축이 되고 있는 미국의 군사주의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 점에서 지난 24일 한미국방장관 회담에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일정이 확정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2009년에 반환하겠다던 미국을 설득해 굳이 2012년 4월로 합의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군은 독자적인 작전수행 경험이 없고 군비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지만 이러한 논리는 남한 단독으로도 여전히 '완봉승' 전력을 유지하겠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환수일정이 늦춰지면서 6자회담에서 본격화될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남한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제약될까 걱정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을 사실상 주한미군에게 위임하고 있던 남한은 북한과의 평화체제 논의나 군축논의에서 발언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북한도 군사문제에 관해서는 남한과의 직접대화를 기피해왔던 것이다.
물론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그 자체로 서열적 관계였던 한미동맹의 민주화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뿐더러 한반도 평화체제에 직접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전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되어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더라도 미 태평양사령부가 지휘하는 작전계획 5027 등 한반도 전쟁계획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한미간 서열적 관계는 그대로 온존될 것이다. 또한 한국군이 환수한 전시작전통제권을 실제로 독립적으로 행사하여 작전교리나 적정군비, 작전계획 등을 평화군축의 지향에 맞게 재정의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반환되는 전시작전통제권은 오히려 남북간의 군사적 불신과 갈등의 골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반도는 군사동맹과 군비확장이 또다른 군사적 대응을 부르는 군비경쟁의 딜레마, 안보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우리 스스로 군비경쟁의 당사자이며 상대방에 대한 위협의 장본인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설계할 수 없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 못지않게 남한이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위협'에 대한 우리 안의 이중기준을 바로잡아야 하며, 평화군축이라는 좁지만 유일한 길을 향해 지금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2007.02.27 ⓒ 이태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