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동네 형들은 모두 알리였다. 동네 형들이 원시적인 불안과 불만을 표적 삼아 건들건들 옆으로 돌다가 쉬쉿 하면서 잽을 날리는 시늉은 돌이킬 수 없는 아득한 시절의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 알리가 환갑을 맞았다. 잠깐 놀랐다. 언제 적 알리인데 이제 겨우 환갑이더냐 하는 기이한 무상감, 파킨슨씨병으로 온몸이 후들거리는 불치병 환자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세월의 은혜….
도전과 응전의 나날
사실 알리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과장과 왜곡이 전부다. 우선 그의 경기를 ‘리얼’하게 본 기억이 거의 없다. 61전56승5패37KO승으로 공식 기록된 그의 ‘선수’로서의 이력 가운데 우리가 제대로 구경한 시합은 거의 없다. 다행이랄까, 이 있었다. 70, 80년대만 해도 역시 대부분의 스포츠 프로그램을 속달우편으로 배달받아 방영했는데 대략 열흘 정도 지난 다음에야 방송이 가능했다. 예외가 있다면 그 시절 은 1년에 7편의 빅 경기를 주한 미군 시청자들에게 생중계했는데 슈퍼볼, 월드 시리즈, NBA 결승, 그리고 복싱 챔피언전이 그것이었다.
이를 한국방송이 제휴받아서 생중계했는데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우악스럽던 철권의 시절에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등의 이름을 잠시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의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와 치른 15라운드 경기가 생중계된 바 있으나 전성기를 넘긴 알리가 은퇴 뒤 치른 이벤트(물론 실전이었다)에 불과했고 그나마 드러누운 채 알리의 종아리를 걷어차던 이노키의 일방적인 페이스라서 알리의 철권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서 있는 사람을 때려눕히는 게 알리의 방식인데 이미 드러누워버린 레슬러의 완강한 공격을 알리는 경기 내내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 경기 막판에 아주 잠깐 이노키가 일어났는데 둘은 일합을 겨루기보다 뒤엉켜 몸무림을 치다 곧 흩어졌다. 끌어안고 싸워야 하는 레슬러와 일정 거리를 두고 주먹을 날려야 하는 복서의 시합은 기묘하면서도 지루한 변태적 이벤트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던 알리가 우리에게 말의 진실한 측면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역시 애틀랜타올림픽 개막식이다. 알리가 그곳에 간신히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최고의 볼거리가 되었다. 그곳은 끊임없이 화제와 소문을 몰고다닌 알리의 전력에 딱 들어맞는 장소였으며 미국식(이를테면 스필버그식) 휴머니즘의 비린내가 완전히 소거된 장면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 당사자가 알리라는 점, 그것도 파킨슨씨병의 증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그의 육체는 스포츠가 말해줄 수 있는 최소한 메시지, 그러니까 ‘도전과 응전의 순수한 정신’만큼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생애는 도전과 응전의 나날이었다. 1964년 챔피언 소니 리스튼을 KO시킨 뒤로 조지 포먼, 스핑크스 등을 물리치며(그 밖에 패터슨, 지미 영, 프레이저, 켄 노튼 등까지) 세 차례나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그는 탁월한 풋워크와 쇼맨십,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승부 근성으로 일단 권투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는 몇회에 KO시킬 것인가를 예고하였고 패했을 때에도 기고만장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알리는, <벌거벗은 자와 죽은자>로 유명한 소설가 노먼 메일러의 기록 <더 파이터>에 따르면, 떠들썩하고 방자한 말싸움과 달리 실제 시합은 아주 ‘신사적’으로 치렀다고 한다.
메일러는, 인정사정 없이 패는 포먼과 달리 알리는 언제나 상대 선수를 필요 이상으로 때리지 않았으며 그 점에서 알리의 도덕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썼다.
그 도덕성은 링 밖에서 오히려 실감났다. 그는 링 밖에서 더 힘들고 더 중요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말콤 엑스에 심취해 기독교를 버리고 블랙 무슬림으로 개종한 그에 대해 같은 흑인들조차 거부감을 가졌으며 그가 온건한 백인 가톨릭교도인 패터슨을 KO시켰을 때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그를 박멸해야 할 벌레로 보았다.
맞으면서 성장하는 복서의 속성이 그렇듯이 알리는 백인들의 박해가 오히려 약이 되었다. 그는 백인 중심의 미국식 가치관과 체계를 부정하였으며 징병을 거부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물결에 도화선이 되었다.
그 일로 뉴욕주 체육위원회가 선수 자격을 박탈함에 따라 그는 그 밖의 다른 모든 주에서까지 선수생활을 하지 못했으나 결코 좌절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일어섰고 다시 승리했다. 1980년, 그는 자신의 스파링 파트너였던 래리 홈즈에게 패하고 은퇴했지만 그 이후, 끊이지 않는 소문을 통해 알고 있듯이 그는 완전히 은퇴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이슬람의 중재자로
그는 현재 파킨슨씨병과 싸우고 있다. 이기지는 않았지만 아직 경기는 계속 되고 있다. 그는 가난과도 싸우고 있다. 아프리카 극빈국 채무 탕감을 위한 ‘주빌리2000’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북한, 러시아, 이라크를 방문해 평화와 화해운동을 벌이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치명적인 관계가 된 기독교―이슬람 사이의 화해 중재자로 활동하기도 한다. 물론 한가로운 모금 캠페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복싱 전문기자 마크 크램은 그를 비판한 책 <마닐라의 유령>에서 “알리는 위대한 선수지만 훌륭한 인물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겁많고 혼란에 가득한 이슬람의 선전원”이라고 썼다.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알리의 평화운동은 하나의 ‘여가 활동’처럼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파킨슨씨병을 앓는 억만장자가 여가로 할 수 있는 활동은 결코 아니다. 한 가지 코멘트만 믿어야 한다면 나는 비판자의 것을 버리고 75년 <플레이보이>와 가진 알리의 인터뷰를 택하겠다. “사람들이 나를 챔피언을 지낸,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머있는 흑인으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많은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결국 자유와 정의와 평등을 위해 싸운 인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