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ecumenian.com 에서 제기된 서경석 목사의 '북한 교회는 가짜다'라는 발언과 관련된 논의로서 북한인권법, 12/10일 보수집회와 관련된 내용이기에 회원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서경석 목사님께 드리는 몇 가지 질문
조 하 무 목사 (현저교회 목사/건강한 교회를 위한 목회자 협의회 정책기획실장)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작년인가요? 예장(통합)측 총회에서 '국보법 폐지 반대선언'에서 선배님이 활약하신 것과 관련해서 {신학춘추}(장신대 학보)에서 단 한번의 토론을 한 이후로 1년만이군요. 그런데, 목사님을 선배님이라 부르기도 좀 쑥스럽군요. 왜냐하면 1년에 한번, 그것도 얼굴을 맞대보지도 못한 관계에서 목사님을 제가 '선배'라고 감히 호칭할 수 있을까 하는 쑥스러움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한편 우리사회에서 주로 학맥이나 지연에 의한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전근대적 언어인 '선배'라는 말로 개혁과 인권을 표방해 왔던 분을 호칭한다는 게 오히려 목사님께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한때 기독교운동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이제는 생각도 실천의 방향도 다른 분을 선배로 호칭할 때 생기는 내적인 괴리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일까요? 보수 우파(아무런 개념정의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명칭을 붙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의 시위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 과격한 퍼포먼스를 자행하는 '북핵저지 시민연대'의 가두예술가(?) 박찬성씨(허락된다면 이분에게는 '직업(職業)상 극우'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네요)도 영락교회 청년회 출신이고 한때 기독교운동을 했다고 자신의 아우라를 그리고 있으니(이런 점에서 기독교운동도 그 지향점과 관련하여 일정한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도 나이만 많으면 '선배' 칭호를 붙여야 할까 하는 당혹감이지요. 물론 선배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목사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게다가 목사님이 아프게 찌르셨듯 진보적 운동 진영의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또한 그런 성찰을 뼈아프게 해야 했던 우리의 자기반성으로 본다면, 앞으로는 '운동권'이라는 아우라를 벗어버리는 일이 오히려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운동권이라는(혹은 이었다는) 아우라'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미 일정한 프리미엄을 얻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며, 한편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신학적 담론/이론의 사용과 관련하여
1.1. 우선 개방성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서 목사님이라면 '복음주의'라는 말을 홀로 전취(全取) 혹은 전유(全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진보적 기독교사상/운동'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곧 자신(혹은 그가 속한 집단)외에는 복음이 없다는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용어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인 가운데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Social Gospel을 기억하시지요? 60-70년대 미국에서 강력한 (진보적) 사회참여를 주장했던 분들의 명칭도 원래 '사회 복음주의'였던 것 말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봤을 때 그들은 스스로에게 거짓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그 신학도 역시 복음주의에 입각한 내용이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독교운동은 나름대로의 신학과 신앙을 기반으로 해서 하는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 점은 의심하지 말고 논의를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진실을 의심하는 것은 가장 심한 모욕이 될 것이니까요.
1.2. 목사님은 "나는 열렬한 민중신학 지지자였고 동시에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하셨지요? 물론 자신의 신앙고백을 그 누가 가타부타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런데 정작 문제는 민중신학의 영향을 일부 받은 '민중신학 관찰자'와 민중신학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에 의해 풍부하게 하는 '민중신학 지지자'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은 70년대 말로부터 80년대 초까지로 고정/완료된 신학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한국사회에서 소위 (변혁적/개혁적) 기독교운동을 하던 모든 사람들은 민중신학의 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니 적어도 민중신학은 그런 활동/운동에서 출발된 것이기에 현장의 목소리와 동시에 변화를 위한 운동적 사고를 담고 있었고, 이는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운동을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민중신학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에 기독교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 민중신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식이 허점을 가지고 있듯이, 민중신학에 대한 70년대식 상식이 민중신학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아니지요. 더구나 80년대 중반 이후에 이르러 민중신학은 그 질적 변화를 거듭했고,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변화를 하고 있는 진행 중인 신학입니다. 그런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목사님께서는 그런 흐름 변화에 그리 민감하게 적응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께서 민중신학적 근거로 사용하신 것들 대부분이 70년대 말의 민중신학의 담론들이기 때문이며 그나마도 온전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회 현실을 신학적으로 인식할 때에는 1차적 자료인 '민중의 소리'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에 대한 사회구성체적 인식까지 추상시키고 다시 구체화하지 않으면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70년대 민중신학에서도 '사회경제사적 이해'라는 말로 제시되었고, 80년대 중반 이후의 민중신학에서 '정치경제학(Political-economy)적 이해'라는 말로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 민중신학에서의 현실인식은 사회구성체적인 거시적 인식틀 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종합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나마 민중신학에 끼친 영향이라면 바로 이런 것일텐데요, 그런데 목사님은 이런 민중신학의 현실인식에서의 총체적 인식방법을 도외시하시는 경향을 보이시더군요. 민중신학의 논의를 그것도 초기의 것에 국한하여 부분적으로 인용하거나 활용하는 것을 '열렬한 지지자'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성실성 혹은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1.3. 또한 목사님께서는 스스로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고 하셨는데, 어떤 종류의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군요. 물론 목사님께서 미국으로 가시기 전, 그러니까 기독교 민주화운동에서 활동하실 때에도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죠셉 까르댕이나 마코비치) 그런데 돌이켜 보면 당시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그 구체적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특히 사회주의에 대한) 정말 미미한 수준의 관념적 조합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그 극복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이루어졌으니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는 고백은 목사님이 'CfS'(남미의 Christians for Socialism) 같은 단체의 회원이었다는 말일까요? 만일 그 정도의 논의와 실천도 담보하지 않은 채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진정한 기독교사회주의자로 자처했던 분들(이런 것이 국내에 존재했었다면)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며, 동시에 그것을 왼쪽으로 극복하거나 혹은 오른쪽으로 비껴간 기독교운동권 전체에 대한 마타도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 과거에 대한 신화를 만듭니다. 그 속에서 기억은 신화가 됩니다. 그 쉬운 예가 바로 남성들의 군대이야기 아닙니까? 대한민국 남성들의 군대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군대라는 것이 재미있는 단체생활이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군대의 모든 규칙들은 화자(話者)에 의해 해체되고 왜곡되며 신화 속에서 기억되지요. 하지만 군대생활에 대한 모든 기억은 과연 진실일까요? 자기 기억에 대한 자기 속임은 없는 것일까요? 목사님께 묻습니다. 정말 당신은 민중신학 지지자였고, 기독교사회주의자였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민중신학은 어떤 것이었고, 기독교 사회주의는 무엇이었습니까?
1.4. 목사님께서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님의 안식일 논쟁 설교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안병무 박사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구절을 본문으로 택해 설교를 하시면서 어떤 체제나 이념도, 안식일법 조차도 인간을 억압할 때에는 이에 결연히 저항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젊은이들은 안병무 박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유신체제와 싸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임을 굳게 확신했었다." '해석학'이란 것을 아시지요? 초기 민중신학은 분명 가다머의 해석학을 은연중 사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서남동 교수님의 유명한 논문 '두 이야기의 합류'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민중신학의 발전과 더불어 극복된 내용입니다. 민중신학의 해석학은 문화해석학에서 사회학적 해석학을 거쳐 유물론적 해석학에 이릅니다. 그러니 자연히 1차원적 유비, 혹은 알레고리를 사용하지 않게 된 거죠. 물론 안 박사님께서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을 말씀하시면서 억압적인 체제에의 저항을 말씀하신 것은 올바른 해석이며, 그것을 유신체제와 싸워야 한다는 것으로 읽은 목사님의 반응도 올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을 설교하신 안 박사님의 의도와 그것을 들은 서 목사님의 의도가 일치할 수는 있으되, 안 박사님이 사용하신 해석학과 서 목사님이 들으며 사용한 해석학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서본문(Text)과 그 본문을 배태한 상황(성서적 Context)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셨던 안 박사님은 분명 당시의 삶의 자리를 중요한 요소로 부각시키셨을 것입니다. 안 박사님의 설교에서 사용한 해석학은 당연히 1차원적인 유비나 알레고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안 박사님은 알레고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설교를 들으신 서 목사님은 1차원적 유비 혹은 알레고리를 통해 이해하신 듯 하군요. 이러한 추측은 목사님의 그 다음 문장에서 확인됩니다. "만일 지금 안병무 박사가 살아 계시다면 우리에게 무슨 설교를 하실까? 나는 굳게 믿는다. 박정희 정권보다 백배는 더 독재인 김정일 수령독재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고 설교하셨을 거다. 극악한 김정일 체제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기독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습니다. 안 박사님은 분명 북한의 김일성 독재를 몹시도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안 박사님이 살아 계신다면 물론 김정일 독재체제에 맞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서 목사님과 같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1차원적 사고를 하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분은 Text와 성서적 Context(이것도 사실 Text에 속하는 것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한 구분일 뿐임을 양해해 주십시오)의 관계를 중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추출된 합리적 핵심이 복음이 선포되는 이 땅의 상황(Context)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나에도 신중한 관심을 가지셨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한의 물리력 행사로부터 안전한 남한 땅에서(체 게바라를 20세기의 성자로 부르는 것은 자기 조국 쿠바도 아닌 볼리비아의 오지에서 삶을 마감한 혁명가로서의 풍모 때문이 아닐런지요), 그것도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려는 사악한 의도를 인권이라는 전혀 탈 상황적인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고 있는 미국과 같은 궤도로, 무책임한 운동을 펼치려 하는 서 목사님을 안 박사님이 지지할 것이라는 추측은 단지 목사님만의 소망이거나 착각인 셈입니다. 안 박사님은 이 땅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의도를 너무나 잘 꿰뚫고 계셨으니까요. 더구나 인권은 떠들어야만 개선되는 것이 아니고 싸워야 얻어지는 것(쟁취)임을 잘 체험으로 알고 계신 분이었으니까요.
1.5. 신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에큐메니칼 신학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론적 특권이라고도 말하고 한때는 이를 민중신학으로 설명하기도 했다"고 단언하시는데, 우선 에큐메니칼 신학의 본류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본류는 공동의 고백을 통한 신앙의 하나됨(신앙과 직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봉사,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로 알고 있는데, 이게 언제 바뀌었나요? 목사님께서 지적한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이라든가, "인식론적 특권"이란 말은 어디서 본 듯 합니다. 아! 해방신학! 목사님께서는 혹시 에큐메니칼 신학과 해방신학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마도 목사님께서는 '에큐메니칼 신학'이 아니라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의 신학'(일부)을 지칭하고자 하는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option to the poor'나 '인식론적 특권'은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의 신학적 이해의 근저를 일부 형성하기는 하지만, 이미 최근 에큐메니칼 신학을 대표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언어의 의미는 수많은 논의와 더불어 그 함의를 밝혀냈던 바, 목사님의 문맥에서 사용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총체적 사회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김용복 박사님의 초기 민중신학적 논의였던 '민중의 사회전기', 혹은 C.S. Song의 '이야기 신학'은 (운동)실천을 위한 총체적 인식론으로 극복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회경제사적 인식이나 사회구성체적 인식이라는 거대담론만으로 현실을 재단한다면 그것은 곧 현실에 대한 관념론이 될 것이며, 이야기만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세계에 대한 미시적 이해만으로 현실을 속단한다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패치워크에 불과할 것입니다.
2. 사회현실의 인식과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2.1. 목사님께서는 진보진영의 쇠퇴와 보수진영의 약진에 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 정강길 님과의 토론을 보며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은 오히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될 듯 싶습니다. 다만 언뜻 떠오르는 코미디가 하나 있어 적어봅니다.
<길 떠나는 홍길동> 길동 : "대감마님, 소자 길동이, 오늘 집을 떠나려 합니다." 아버지 : "그래 무슨 연유로 집을 나가려 하는고?" 길동 :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 : "그래? 그럼 이제부터 호부호형(呼父呼兄)하거라. 그래도 떠나겠느냐?" 길동 : "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마당에...." 아버지 : "어허, 이제부터 호부호형(呼父呼兄)하래도!" 길동 : "그래도 떠나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마당에...."
하지만 여기 한 가지는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진보(운동)진영, 혹은 기독교운동 진영을 너무 단일한 색깔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둔, 그러나 그 속에서 많은 갈등과 분열을 노정한 우리나라의 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지금 되돌아보면, '민주화'라는 공통의 담론을 공유하긴 했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사상적 스펙트럼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우파 권위주의자, 우파 엘리트주의자, 우파 자유주의자(이들은 지금 상당한 성공을 누리고 있다)로부터 온건 사회주의자, 좌파적 자유주의자, 무턱대고 좌파, 좌파 엘리트주의자, 강단좌파, 까페 좌파, 극좌파(이런 소아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까지.... 게다가 지금은 스스로 아나키스트로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있는 형편이랍니다(사실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 생각해 보면 여기서도 얻을 것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현실에서 벌이는 운동은 다양한 지점에서 서로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이들은 예전에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모였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이런 것이 있기나 하면 좋겠습니다!) 이후, 이들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기에, 이젠 다양한 활동들로 분화하여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자리 찾기'의 모습이 혹시 목사님의 눈에는 퇴조로 비춰진 것이 아닐는지요. 극우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우파 운동에도 다양한 차이들이 들어있듯이, 반대펀의 진보운동의 진영도 상당히 다양한 움직임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이비 NGO를 제외한 다면, 한국사회에서 NGO의 정당성은 실질적 민주화의 확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NGO의 특성이기도 하지요. 무지개가 그러하듯 붉은 색과 보라색 사이에 다양한 색깔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물론 운동을 하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에 진입했습니다. 그 덕에 기독교운동권은 수많은 이탈자, 심지어 배신자까지 양산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는 그 배신자들(이탈자가 아니라)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에서 비롯된 한계와 경계를 이제는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잘못을 "이젠 기득권을 가진 자" 운운하며 진보진영 전체, 혹은 진보적 기독교운동 진영의 잘못으로 비난하지는 마시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그 당사자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묻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 될 것 아닌가요? 쉬운 예로 스스로 운동권의 프리미엄을 전면에 내세운 이해찬 총리의 잘못을, "이젠 학생운동을 하지 말라"는 소리(이는 학생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소리였습니다)를 들은 학생들에게 묻는 것이나 혹은 운동권 출신의 정부요인의 행보를 막았다는 이유로 기소 당한 운동권 학생들에게 묻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가진 게 노동력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서 "집단이기주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이름 붙여 사회적으로 매도하려 했던 매체들의 집단이기주의는 곳곳에서 발견한답니다.
2.2. 목사님께서는 스스로를 중도 내지 중도 우파라고 은연중에 규정하고 계시는데, 우리 사회에서 좌우를 나누는 기준이 애매하기에 묻습니다. 목사님이 말하는 중도 혹은 중도우파의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피사의 탑을 본적이 있습니다. 오른 쪽으로 기울어져 있더군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반대방향에서 보니 그게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그것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기 싫어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언제나 '중도'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중용을 처세의 으뜸으로 강조하는 동양적 미덕이 그렇게 말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한국지성계의 교묘하고도 무책임한 풍토를 흉내낸 것이라면 인정할 수 없는 일이 되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이점은 아시겠지요. 목사님의 판단에서 중도는 나의 오른쪽이고 그것도 오른 쪽 중간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목사님이 스스로를 중도라고 일컫는 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위치를 나름대로 평가하는 것은 역시 나의 자유입니다. 이런 막연한 담론으로 혼동을 야기시키는 것은 비생산적인 것 같습니다. 상대에 대한 '딱지 붙이기'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이런 규정은 서로 하지 않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3. 북한교회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3.1. 북핵문제와 북한인권문제의 연관성이나 선후에 관한 전술적 고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있어왔기에 가일필(加一筆)한다는 게 불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북한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입장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가지 자료의 수집에 관해서만 의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북한 교인들의 말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까? 예를 들어 "어머니의 무릎에서 예수 믿었다"라는 말에 대해 의심을 했었는데, 만일 목사님께 "당신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나"에 대해 묻는다면 목사님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모태로부터? 그게 과학적 현실로서 가능한 것입니까? 하지만 "모태신앙"이란 말이 신앙 고백적 차원의 말임을 이해하고 있는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하물며 북한에서와 같이 달리 신앙을 포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그 말의 신앙 고백적 차원을 인정해 줄 수도 있는 말이 아닐까요? 또 "우리는 매주 일요일 여기에 출근합네다"라는 말이 "우리는 매 주일 예배드리러 교회에 출석합니다"의 북한식 표현일 수는 없었을까요? 목사님께서는 북한에서 예배드렸던 경험을 "예배 본다"고 표현했는데, 누군가가 이를 "예배는 드리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목사님의 신앙을 의심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단지 '예배드린다'의 남한식 표현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시급한 것은 '북한교회 부정하기'가 아니라 '북한어법 바로 알기'가 아닐까요? 또한 "성경을 소지하거나 기독교인임이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진위여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83년인가로 기억되는데, 미국 NCC에서 일하셨던 이승만 목사를 통해 북한에서 발간된 성경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 훝어본 경험에 의하면(누가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두음법칙을 지키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거의 공동번역과 동일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물론 북한 성경책과 남한 성경책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 것은 아니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일단 실용이든 홍보용이든 북한에서 인쇄된 성경책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또 거기에는 하나님 대신 김일성 어쩌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소지하거나?"라... 북한 자체에서 인쇄한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고(혹 문제가 된다면 절도범?) 다른 판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외국과 밀거래를 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니 밀수범? 그런데 그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간 증거는 확실히 있는 것입니까? 또 신천 역사박물관에 기독교 관련 게시물은 서경조 목사님과 원한경 박사님을 찍은 사진 단 1점뿐이었습니까? 물론 잘못된 설명은 바로 잡는 것이 올바른 것이며 아주 훌륭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기독교 게시물에 대해서는 어떠했던가요?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한말 기독교로부터 일제시대의 기독교,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한국기독교 역사가 그리 자랑스러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한에서 순교자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 가운데는 사실 한국전쟁 당시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죽고 죽인 경우도 버젓이 포함되어 있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남한의 순교자 명단에서 그들이 그렇게 죽은 것이니 순교자의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요청할 과제를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앞으로 이점에 대해서도 신경 좀 써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목사님의 인식전환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지점은 김형식 교수의 증언인데, 그 증언의 후속조치를 풀어나가는 순서가 좀 이상합니다. 그 증언의 사실 여부를 자체조사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아니면 사실여부가 불분명한 것을 조그련에서 따지는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3.2. 신학교에서 배운 성서비평방법론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방법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문헌비평의 방법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헌이나 정보는 무엇인가 덧칠되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문헌/정보 자체에, 전달자의 입장이 가미되었을 것이고, 문헌/정보를 받는 사람들의 집단에 의해(의식해서) 역으로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편집하여 글로 꾸며낸 이의 의도도 일정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양파껍질 벗기듯 벗겨내는 작업은 오직 성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Text 분석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지요. 더구나 '증언' 혹은 '간증'이라 할 때, 화자의 입장을 벗겨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증언자의 아비투스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타인에 의해 검열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체검열을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해야 환영받을지, 어떤 행동을 해야 권력을 가지게 되는지, 무엇을 해야 지원을 받게 되는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부터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잔인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증언만을 기초로 대북관계의 기본골격을 확립하면 오류와 실패를 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늘 자신의 증언 뒤에 이런 말을 붙입니다. "이대로 가면 5년 안에 망하게 되어 있습네다."
4. 목사님, 주리고 목마르십니까?
어떤 군대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군 지휘관이 격양된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한다. "고지가 바로 저기다. 저기를 점령하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 돌격! 돌격! 돌격 앞으로!"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정상에 오른다. 그런데 정상에 오른 지휘관, 한참을 갸우뚱하더니 하는 말, "여기가 아닌가비여, 워째 이상하다 혔지 내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심한 세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은 단지 육신적 배고픔과 목마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 배고픔이요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배고픔은 채워져야 하고 목마름은 해갈되어야 하지만, 지식인의 물질에의 배고픔과 권력에의 목마름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지식인의 권력에의 목마름은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촘스키가 지식인의 책무를 엄중하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에 추가하여 지식인의 나쁜 목마름으로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쓸데없는 공해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실천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글줄이나 읽었다고 '글 공해'를 일으키는 것은 인정욕구에 의한 심각한 범죄행위일 거라는 생각이 저로 하여금 글 쓰기에 소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글도 혹시 다 아는 이야기를 재론해 괜한 공해를 유발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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