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랄에서 로와리 패스를 넘어 밍고라에 도착하여 부카라 1, 3사원까지 답사한 부분입니다.
18일차 (8월 3일 화요일) 간다라의 본향 스왓 밸리로 나가다.
04: 20 기상
오늘은 치트랄 → 디르 → 티마르가하 → 밍고라로 이동해야한다. 버스를 도합3번 갈아타고 가야한다. 칼라쉬에서 만났던 오토바이 족들이 로와리 패스에 대해 상당히 겁을 준다. 그러나 나는 산두르가 더 겁날거라고 한 술 더 떴다. 그 친구들 말이 로와리 패스 넘어가는데만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근데 다른 사람은 2시간이라고 한다. 어쨌든 가봐야 알 일이다.
도로나 차량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앞의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외치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05: 00 숙소 출발
옥상에서 자고 있는 종업원을 깨워서 체크 아웃을 하였다.
날이 어느정도 밝았지만 거리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서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돌돌이 끌고 알타릭 다리를 건너 아윤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05 : 11 정류장 도착
정류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유소인데 거기서 봉고가 출발한다고 하였다.
또 북쪽 다리 부근에서 출발한 차량들도 어차피 이곳을 들르는 모양이다.
주유소에 도착해서 담배 한대를 채 피우기도 전에 봉고가 한대 와서 멈춘다.
Dir가느냐니까 타란다.
마침 자리에 손님도 별로 없어서 앞뒤로 창가에 앉아서 갔다.
05 : 47 아윤 통과
06: 37 Drosh 정차
드로쉬는 조금 번잡한 마을이다.
시장도 있고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
그러나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다.
06 : 40 출발
미니 봉고를 타면 잴 자증나는게 승객이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타고 출발하는게 아니라 먼저 손을 흔들어 차를 세운다.
그리고 나서 조수가 나가서 흥정을 한다.
흥정이 끝나면 이젠 차 지붕위에 짐을 싣는다.
그것도 아주 느긋하게....
우리 기준으로 보면 그 손님이라는 작자들이 진짜 꼴보기 싫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차비 흥정하는 시간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가다가 기사가 아는 사람 만나면 차를 세우고 악수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점도 화가 난다.
도대체 내가 왜 그들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바꿔타야할 차를 놓치면 그들이 책임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차라리 도로가 유실되었다든가, 타이어가 펑크나서 기다리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그건 성질낼 문제가 아니다.
차를 타는게 무슨 큰 행사라도 되는 듯이 중간에 차를 세워 흥정하고 올라 탄 놈이 거기서 끝나면 좋은데 이번에는 전송나온 사람들하고 일일이 악수하고 포옹하고 그런 후에 타니 진짜 열 받는다.
그것도 한두번도 아니고 중간에 타는 인간들 상당수가 그러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07 : 00 로와리 패스 초입에 도착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왔다는 것이다.(공사 구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곳의 가옥들은 흙을 중심으로 기둥은 나무를 이용해서 만드는 흙담집이다.
길가에는 버려진 폐가가 반쯤, 혹은 그 이상 무너져 내리고 있다.
파키스탄에도 도시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런 집들이 몰려 있는 곳은 마치 고대 유적을 보는 느낌이다.
07 : 20 본격적으로 고개를 올라간다.
이제까지 따라온 치트랄 강과는 작별하고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강가 언덕에 세워진 Al ~?~? 성을 깃점으로 강을 버리고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부터는 사실상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한참을 들어가니 체크 포인트가 나온다.
여권을 꺼낼려고 보조 가방을 열어보니 여권이 보이질 않는다.
속으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움직였다.
당황하면 이상하게 생각해서 더 복잡해질 것 같기 때문이다.
다행히 경찰이 차창 밖에서 장부를 들이밀기에 일단은 대충 썻다.
08 : 00 휴게소 도착
휴게소에서 보조 가방을 샅샅이 뒤지고 주머니도 다 뒤졌지만 여권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확실한 것은 알 파룩 호텔 들어가서 숙소달라고 사무실 들어갔을때 여권을 꺼냈었던 기억은 난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새벽에 방을 나올때도 뒤돌아 보았을 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알 파룩 호텔에서 잃어버린 것은 확실한데 어디인지를 모르겠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사무실에서 여권을 꺼냈다가 디카 이야기하면서 그냥 카운터에 놔두었던지, 아니면 침대의 벽쪽 틈새로 여권을 흘려서 둘러보았을 때는 않보였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카운터에 놔두고 갔다면 주인이나 종업원이 가져다 주었을텐데 그러지 않을걸 보면 방에 놔두고 온게 더 무게가 실린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든지, 이슬라마바드의 한국대사관까지 가든지 결정을 해야한다.
신 선생은 잃어버릴리 없으니 돌돌이 가방에 있을거라고 가서 찾아보면 되니까 그냥 가자고 한다.
아무래도 찝찝하다. 이 고개를 넘으면 다시 돌아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으나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동안 식사 시간이 끝났는지 차가 출발한다고 한다.
08 : 20 휴게소 출발
휴게소를 출발하여 막 굽이를 도니 체크 포인트가 나온다.
그런데 차단기가 올라가 있어서 기사가 그냥 통과하니 경찰이 허겁지겁 쫓아 나와 봉고를 부르는데 기사는 모른 척하고 고개를 올라가 버린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온통 머릿속은 여권 분실에 대한 대책뿐이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대사관에 연락을 해야하는데 대사관 전화번호도 모르겠고 인터넷으로 알아보기에는 인터넷이 될만한 곳이 이 부근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일단은 이슬라마바드의 서울 클럽의 사모님에게 연락을 취해서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 보는게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계획상으로도 페샤와르에서 이슬라마바드로 갈 때는 서울 클럽에 들를 생각이었기 때문에 마침 서울 클럽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기록해 온게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아마도 대사관에 대해서 그래도 젤 잘 알고 계실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니 빙하가 녹아내려 계곡을 덮고 있고 아침 안개가 구름으로 변신 중이다.
길은 옛날 속리산 법주사갈 때 지나갔던 말티재처럼 차곡차곡 쟁이듯이 굽이져 있다.
43번을 굽이를 돈다고 하더니 진짜 그 정도 돌아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사실 로와리 패스는 산두르 패스보다 높다.
정상 부분이 3,400m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길은 산두르 패스보다는 더 위험하고 편한 편이다.
중간에 한번은 빙하 위로 길이 나 있는 곳을 통과하였다. 빙하가 차량의 무게에 눌려 밑으로 쳐지면 다시 그 위 아래 쪽으로 길을 내서 다니는 식이다.
만약에 날씨가 더 더워져서 그나마 저 빙하가 녹으면 길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09 : 05 고개 정상 통과
산두르나 쿤자랩 패스처럼 정상부분이 분지가 아니라 여긴 말 그대로 고개였다.
정상을 넘으면 바로 내리막 길이다.
길은 전체적으로 남쪽 능선이 완만해서 북쪽보다 훨씬 멀리 구비가 돌아가는 대신 편하다.
마치 뱀이 스멀스멀 기어가는 모습이다. 반면 겨울에는 북쪽 길이 아무래도 다니기 힘들 듯하다.
굽이의 코너를 도는 부분이 완전히 180도로 꺽어지는데 높이가 있어서 눈이 쌓이거나 길이 질펀하면 헛바퀴가 돌게 뻔하다.
고개 정상을 내려가니 산중의 마을이 언덕에 열별하듯이 서있는데 여전히 흙담집인데 산 중이라서 그런지 나무를 많이 이용해서 지었다. 말하자면 나무집에 흙을 바른 모습이다.
09 : 38 잠시 휴식
계곡 물이 흘러 내리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한가지 tip으로 말하자면 파키스탄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앉아서 오줌을 눈다.
우리가 서서 누면 약간은 당황스러워 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휴게소의 화장실을 가면 우리야 당연히 서서 누는 소변기로 가는데 이 사람들은 대변기 쪽으로 많이 갔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랐는데 알고보니 이유가 그렇다.
심지어는 버스 터미널이나 유적지 같은 곳에 소변기 없는 화장실도 많다.
09 : 43 다시 출발
끝없이 내려가는데 오른쪽 계곡에 유목민들인지, 유랑민들인지 모르겠지만 이동식 텐트를 치고 100명 정도가 모여있다.
일부는 기도를 하고 일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암튼 원래부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론니에서 여름철에 이 부근에 집시들이 모인다는데 그 사람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도중에 도로에 밀려 내려온 큰 바위를 폭파하기 위해서 잠시 정차하기도 하였다.
고개를 다 내려오면 바로 Dir다.
10: 50 Dir 도착
봉고는 디르가 종점인 모양이다.
차비는 200루피/1인였다.
디르는 도시가 번잡하기는 하지만 뭔가 어질러진 형태의 무질서의 도시같았다.
좁은 길과 꽉찬 사람들이 이 도시를 그다지 사랑스럽게 만들지는 않는다.
버스 터미널에 마침 PCO가 있어서 서울클럽(0092 - 51-282-0205)으로 전화를 하였다.
다행히 사모님이 직접 받으셔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신다. 일단은 대사관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보라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셨다. 가서 뵙기로 하고 대사관의 이신배씨(0300-8355-2762 (3?)에게 전화를 하였다.
내 신분을 밝히고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후 여권, 비자, 비행기 표 복사본은 있다고 하였더니 언제 귀국하느냐고 묻기에 11일 라호르 출발이라고 하니까 그럼 큰 문제는 없다면서 월요일에 대사관에 오면 임시 여행 증명서 발급이 당일로 가능하다고 한다.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월요일까지는 여권없이 여행해야 하므로 처신에 신경을 많이 써야할 듯 싶다.
11 : 15 티마르가하로 출발
터미널에서 밍고라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대형버스는 대개 페샤와르나 라호르로 가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스왓밸리의 노선상으로 왼쪽으로 올라가는 버스는 없고 전부 오른쪽으로만 가는 버스들이다.
그래서 일단 티마르카하로 가서 거기서 밍고라가는 걸 바꿔 타기로 하였다.
봉고를 타니 버스비는 50루피/1인였다.
11: 57 어떤 읍내 통과
디르에서 티마르가하로 가는 이 구간은 도로 공사중인 인 곳이 많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평범한 포장도로로서 계곡과 강을 따라 도로가 이어졌다.
강에서 사람들이 모여 수영하는 걸 처음본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간다.
12: 47 3번째 읍내 통과
13: 25 티마르가하 도착
티마르가하의 버스 터미널은 디르보다도 컸다.
그러나 사방이 아우성같은 소란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날은 또 왜그렇게 더운지 땀이 자동으로 흘러내린다.
터미널 주변에서는 외국인이 낯선지 사람들이 계속 찝적거리고 몰려와 쳐다본다.
적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런 파키스탄이 싫다. 그냥 좀 놔두면 않되나?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일단은 요기를 해야겠기에 부근의 식당을 찾아 나섰다.
소고기인지, 양고기인지 암튼 볶은 것에 짜파티, 짜이를 조금 먹다가 입에 맞지 않아 포기했다.
이 곳이 시골이긴 시골인 모양이다. 전혀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워터”도 못 알아듣는다.
눈치껏 찾는 수밖에 없다. 식당 안에서 나오니 본격적으로 땀이 홍수를 이룬다.
진짜 아무 생각도 없고 빨리 떠나고만 싶다.
터미널로 와서 “밍고라”를 외치니 사람들이 손짓으로 가르쳐준다.
봉고차에 올라 수첩에 글을 쓰는데도 창안으로 대가리를 들이밀고 쳐다본다.
밍고라까지는 2시간을 더 가야한다고 한다.
결국 오늘도 차타는 시간만 10시간이다.
허리가 점점 더 아파온다. 참는 것의 한계에 거의 다다른 듯 싶다.
진통제가 처음에는 그런대로 듣더니 지금은 약발이 50% 밖에 않 통하나보다.
14: 10 티마르가하 출발
봉고에 사람이 거의 찼는지 출발한다.
특별한 풍경은 없다.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린다.
15: 00 차크다라 통과
통과 후 3거리(밍고라 ↔ 페샤와르)에서 5분간 휴식하였다.
15: 40 바리 콧 통과
밍고라 방면은 차량의 통행량이 부쩍 증가하였다.
그러다 보니 속도를 잘 못내는 경우도 많았고 게다가 도로를 확장하는지 포장공사 중이다.
서서히 밍고라에 다가갈 수록 산세가 탁실라와 비슷한 풍경이다.
바리 콧에서 손님을 내려주고 바로 출발하였다. 바리 콧은 유적지를 찾아 다니려면 중요한 깃점이 되는 곳이다.
어차피 내일 와야한다.
16 : 00 밍고라 도착
※ 스왓 밸리에 대한 보충 해설 * SWAT VALLEY
스왓은 목가적이고 전원풍인 계곡이다.
스왓벨리는 고대 힌두 서사시에서 "우댜나(Udyana, 정원)"으로 묘사되고 있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5대 강유역의 평원을 건너기 전의 몇몇 주요 전투에서 승리한 곳이기도 하다. 스왓은 한때 1400개의 이상의 사원이 있던, 번영을 누렸던 불교의 발상지였다. 그리고 전통 불교에 그리스-로마 스타일을 접목시킨 간다라 조각 교육의 주축이기도 했다.
스왓 밸리는 10,350 평방 킬로미터 이상의 면적을 차지한다.
여름철 평균 기온은 7℃~22℃이다. 1년 365일이 여행시즌이다. 강 유역의 중심 도시는 고대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한 박물관이 있는 사이두 샤리프(Saidu Sharif)다.
웬 주유소가 봉고 종점이다. (알고보니 그 건너편이 밍고라 버스 터미널이다.) 내려서 럭샤를 타기로 하였다. 한동안 못보던 럭샤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 swat view hotel” 호텔을 아느냐고 물으니 영어를 모르는 이 럭샤꾼이 옆 사람의 설명을 듣더니 안다고 한다. 그래서 탔는데 완전히 속았다. 샤리두 샤리프(신 시가지)로 가더니 스왓 컨티넨탈 호텔로 데려간다. 여기가 아니라 스왓 뷰라고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도 해주고 수첩에 이름도 써 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더 안쪽의 “스왓 세레나 호텔”로 데려간다. 모두 5성급 고급호텔이다. 그래서 다시 스왓 뷰 호텔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또 다시 데려간 곳은 PTDC 모텔이었다. 엄청 열 받았다.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 할 것이지 30분을 엉뚱한 곳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사기 수준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오늘 해 지기 전에 부카라 유적을 둘러봐야하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만 다니다 해가 저물면 내일의 우리 일정이 엄청 빡세진다. PTDC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영어하는 사람을 찾아 론니의 지도를 보여주니 이번엔 제대로 가르쳐 준다. 막상 스왓 뷰 앞에 도착하니 드디어 열이 임계치를 넘어 폭발하였다. 왜냐하면 스왓 뷰는 우리가 버스 내린 곳에서 200m 쩡도 떨어져 왼쪽으로 꺽어진 도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한테 차비를 50루피를 달라는 것이다. 안되는 영어로 네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설명하는데는 물론 한계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의미는 분명히 전달했다. 목소리가 커지니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걔중에는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도 좀 있었다. 그 사람들 중 한, 두명이 오더니 나를 잡고 그냥 참고 들어가라는 식으로 밀었다. 군중들의 표정도 내게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바로 옆에 있는 숙소를 옆의 신시가지까지 빙 돌아 시간 뺏고 바가지 씌우면서 전혀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는 그 놈의 면상을 박살을 내주고 싶었다. 신 선생이 사람이 모이니까 불안했는지 그냥 50루피를 준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었지만 돈 받고 잽싸게 튀는 바람에 멍하니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달란다고 다 주는건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많은 불편함을 준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한다. 그래야 한국인들 데리고 장난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을 부르던지, 처음에 말한 20루피만 주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게 옳다. (그 후에 이 동네에서 탄 어느 럭샤도 정확하게 호텔에 데려다 주었으니 그 자식이 얼마나 미웠던지....)
호텔은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다. 호텔에 A/C 룸이 있는데 론니의 설명과는 달리 2,000루피/1일란다. 그래서 론니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800루피/1일로 알고 왔는데 너무 비싸다. 2일 잘테니까 하루에 1,000루피에 하자고 흥정을 해서 타협하였다. 방에 들어가니 A/C가 있긴 한데 약간 성능이 떨어진다. 일단 해지기 전에 부카라 승원(僧院)을 봐야 하기에 샤워하는 것도 생략하고 밖으로 나섰다. 나와서 호
텔 옆의 PCO에서 내일 중국으로 여행떠나는 안해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고 한다.
17: 15 호텔 출발
럭샤를 20루피에 타고 출발( 밍고라에서는 럭샤는 대개 거리에 상관없이 20루피를 부르고 있다)
17 : 20 부카라Ⅰ 도착
박물관 옆 골목으로 쭉 들어가니 동네가 나오고 부카라 Ⅰ,Ⅲ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내려 왼쪽의 논을 지나 숲을 목표로 걸어갔다. 근데 부카라는 현지에서는 Gulkada라고 부른다. 입장료는 200루피인데 스왓 밸리에서는 공통 입장료라고 한다.(근데 검사하는 곳은 오직 여기뿐이다.) 부카라는 현재 남아있는 유적지는 별로 넓지는 않지만 과거 스왓 밸리에서 탁트 히 바흐 승원과 더불어 가장 번성했던 승려 교육기관이었다. 유적이 서로 밀접해있어서 두러보기는 편하다. 별거 없네? 하면서 둘러보고 있는데 관리인이 우릴 지켜 보고 있다가 답답했는지 다가와서 따라오라고 한다. 우리는 또 가이드 비 달라고 할까봐서 필요없다고 하니까 조금 의아해 하다가 상관없으니 다라오라면서 어느 스투파의 기단부 밑에 쪼그리고 앉아 오라는 손짓을 한다. 가서보니 마치 미니어쳐 같은 훌륭한 조각이 거기에 있었다.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우리가 보고 탄성을 지르면서 좋아하니까 관리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따라오라고 한다. 관리인을 따라서 여기저기 작은 조각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훌륭하고 큰 조각품들은 전부 스왓 박물관에 있지만 앙증맞게 작고 예쁜 불상이나 생활상을 조각한 테라코타는 그런대로 입장료가 아깝지 않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모르고 간 사람들은 거의 찾지 못할 정도이니 주의 깊게 스투파나 건물의 기단부를 살펴보길 바란다. 마치 보물 찾기하는 심정으로 즐겁게 돌아다녔다. 구경을 마치고 나가니 관리인이 녹색 유리나 푸른 돌로 만든 세공품을 사라고 한다. 아마도 그걸 팔려고 우릴 안내한 모양이다. 웃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2,000루피를 부르더니 500루피까지 순식간에 떨어진다. 그래도 우린 가난한 여행자라서 그걸 살 돈이 없다. 다음에 오마하면서 작별하고 나갔다.
18 : 48 부카라 Ⅰ 출발
해는 거의 서산에 드러누웠다.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일단 부카라 Ⅰ을 나와서 다시 동네로 나서니 동네 청년들과 아이들이 매우 귀챦게 따라 붙는다. 그들에게 부카라 Ⅲ 유적지를 물으니 안내해 준다고 앞장선다. 가면서 이것 저것 귀챦게 물어보는데 특히 한 녀석이 영어를 잘하는 모양이다. 그 녀석이 자기는 한국에 가고 싶다. 그러니 도와달라고 한다. 내가 우린 그런 방법을 모른다고 하여도 줄기차게 한국에 가야한다고 한다. 귀챦아서 나중에는 영어를 못한다고만 대답했다. 부카라 Ⅲ는 동네에서 왼쪽길, 그러니까 동네 안쪽으로 4, 500m쯤 가다가 오른쪽 골목 비스무리한 곳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언덕 밑에 있다. 별다른 이정표가 없어서 찾기가 쉽지 않으니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봐야한다.
부카라 Ⅲ는 부카라 Ⅰ에 비해서 규모가 훨씬 작다. 주로 감실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각 감실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캡슐같이 생긴 스투파가 안치되어 있다. 왼쪽 측면에 3 ~ 5개의 감실이 잇는데 그 중에서 3개의 감실에 스투파가 안치되어 있다. 정면에는 감실이 2개 남아 잇으나 하나는 거의 허물어졌고 그나마 하나만 비교적 그 형태를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었다. 작은 마당에는 제단인지, 건물의 기단부인지 알 수 없는 네모난 형태로 쌓아 올린 벽돌이 여러개 잇었다.
18: 30
부카라 Ⅲ를 나와 동네 청년들과 헤어져 아까 럭샤 내린 곳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럭샤가 잘 않온다. 해는 이제 서산 뒤로 넘어갔으나 다행히 잔영이 아직 조금 남아있다. 오늘은 샤이두 샤리프 스투파까지는 볼려고 한다.
18 : 48 샤이두 스투파 보러 출발
영어 할 줄 아는 럭샤꾼에게 20루피를 주고 샤이두 스투파를 보러갔다. 스왓 박물관을 조금 지나 큰길에서 왼쪽의 주택가 언덕으로 이리저리 올라간다. 길 찾기가 쉽지 않으니 럭샤를 이용하는게 좋을 듯 싶다.
가보니 원형의 스투파는 거의 허물어져 있고 아마도 기단부 혹은 제단이었을 사각형의 쌓아올린 형태가 앞, 옆면에 길게 배열되어 있다. 탑의 위치가 럭샤가 들어올만한 곳도 아니고 큰 길로 나가려면 한참 나가야해서 럭샤꾼 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사진찍고 둘러본 후 다시 럭샤를 타고 호텔 근처로 와서 먹음음직스러운 황도 복숭아(50루피에 큰걸 10개도 더 준다.)와 사과(50루피)를 샀다. 그리고 옆 슈퍼에서 물을 사는데 에세가 보이기에 얼른 5갑을 샀다.(22루피/1갑)
호텔에 들어오니 에어컨은 아무래도 거짓말인 듯 더워 죽겠다. 몸살이 도지는지 온몸이 덜덜거리고 욱신거린다. 저녁은 황도 복숭아 2개와 생수로 때웠다. 몸이 너무 아파서 드러누워버렸다.
잠깐 잠이 들었는지 신선생이 들어와 깨운다. 혼자서라도 요기를 해야겠기에 바깥에 나갔는데 근처의 쥬스가게 주인이 한국말을 하면서 반갑게 대해줘서 잠시 이야기하다 왔는데 동료가 있다고 하니까 부득불 데리고 오라고해서 왔다고 한다. 몸은 천근이 나가는 듯 했지만 그래도 얼굴이나 보자고 나갔다. 음료수와 망고, 바나나 쥬스를 파는 가게인데 들어오라고 하더니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준다. 자신은 03년에 돌아왔는데 5년정도 한국에서 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김해의 박스 공장에서 2년, 그 다음에는 수원, 광주 부근의 건설 현장에서 방수처리 담당이었다고 하면서 무척 반가워한다. 우리 나이를 묻더니 형님 형님한다. 내가 볼 때는 자기가 내 큰 형님뻘 되는 얼굴인데.... 암튼 고생은 했지만 고향에 돌아와 그 덕에 기반은 잡았다고 한다. 벌어온 돈으로 늘린 자기 가족들(형제, 조카 포함) 가게가 8군데나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궂은 일, 험한 꼴 많이 당했을텐데 대신 미안하다고 하였더니 아니란다. 그런 일도 조금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서 한국은 참 좋은 나라란다. 아마도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겠지만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휴일도 없이 일했다고 한다. 그 덕에 한달에 230 ~240만원 받았다고 한다. 굉장히 많이 받았다고 하니까 그 일이 조금 전문적이라고 한다. 정말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칭찬 해주고 돌아와 약 먹고 9시쯤 잠이 들었다. |
첫댓글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