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 서사에는 형식에서 보면 두 축이 있다. 한 축은 화자가 맡고 있다.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는 것은 그의 임이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좀 다르다. 임의 활동이 이렇다 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활동 무대를 거의 독점하고 있는 이는 화자이다. 그가 서사의 수레를 홀로 끌어가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화자의 행동은 어김없이 그의 임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점에서 서사가 두 축을 중심으로 설정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화자는 임을 그리워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그와의 합일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그리움이 이 시의 기본 모티브이다. 거기서 출발한 시는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한 화자의 끈질긴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노력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한 행동의 모습이 이 시 서사의 내용을 이룬다. 화자의 그러한 행동은 동사로 표현되어 있다. 그 동사가 셋이다. 베어낸다가 하나이다. 넣는다가 둘이다. 편다가 셋이다.
세 동사가 모두 타동사이다. 타동사는 목적어를 가진다. 세 타동사가 가지는 목적어가 모두 동일하다. 세 동사는 타동사라는 점에서 그리고 동일한 목적어를 가진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셋은 시간상으로 서로 선후관계에 있다. 이 점에서는 세 동사가 서로 다르다. A를 베어내어 그것을 어디에 넣어 두었다가 훗날 어느 때에 맞추어 그것을 펴서 놓는다는 것이 동사의 특성과 역할을 보여주는 도식이다.
이런 도식에서 우리의 궁금증을 돋우어 주는 것은 세 동사가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목적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베어낸다가 세 동사 가운데 시간상 제일 먼저 오고 있다. 목적어는 그 동사에서 가장 가까이 있게 마련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 1 행이 중요하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가 그것이다. 목적어는 을/를의 토씨를 가진다. 그런 목적격 토씨를 가진 것이 둘이다. “기나긴 밤을“과 ”한 허리를“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기나긴 밤과 한 허리가 모두 베어낸다는 타동사의 목적어에 해당된다는 이야기다.
한 문장 안에서 한 동사에 두 개 이상의 목적어는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러 개의 목적어가 이어질 경우에는 서로 사이가 와/과/그리고 등 접속사로 이어지고 맨 나중의 목적어만이 을/를의 목적격 토씨를 가진다. 여럿이 동시에 하나의 타동사의 목적어가 될 수는 있지만 목적격 토씨는 최후의 것 하나에게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염두에 올리고 보면 위에서 목적격 토씨를 가진 둘 가운데 뒤의 것 즉 “한 허리”는 틀림없이 베어낸다의 목적어이다. 문제는 그 앞에 있으면서 목적격 토씨를 가진 “기나긴 밤”이다. 원칙에서는 그것이 잘못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원칙을 무시할 수도 있는 특권이 있다. 시인이 실제로 그런 특권을 행사한 것이 위의 시에서 보이는 바다.
기나긴 밤도 한 허리도 모두 목적격토씨를 써서 시인이 베어낸다는 타동사의 목적어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서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베어낸다의 목적어로서 첫번째 자리에 있는 것이 “한 허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위 서사의 앞뒤 맥락을 아무리 읽어도 정작 허리를 베어낸다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허리는 사람 몸의 한 부위이다. 사람의 허리를 베어내다니. 이것은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다는 말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서사의 뜻이 막혀 버린다. 이 문맥에서는 허리가 독자적으로 쓰일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허리는 어떤 주체가 따로 있어서 그의 소유여야 비로소 위의 말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럴 경우 허리의 의미상 주격은 위의 시에서 그 앞에 놓여 있는 기나긴 밤을 돌려 놓고는 찾아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허리는 기나긴 밤의 허리라는 뜻이다. 다만 여기서는 “기나긴 밤의”가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기나긴 밤의 허리를 자른다고 해야 이 부분은 비로소 명확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목적어 “기나긴 밤”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 말은 형식에서는 두 번째 위치에 있는 목적어이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 허리에 앞선다. 그것이 의미의 내용에 있어서는 “한 허리”를 포섭/포괄/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지에서는 형식상 두개의 목적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의 목적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럴 경우 대표 목적어는 한 허리가 아니고 기나긴 밤이 된다. 한 허리는 보좌 목적어가 되는 셈이다.
2. 성합의 미학
타동사와 목적어의 배치가 절묘하다. 형식상으로는 두 개의 독립된 목적어를 두었다 할 수 있다. 실제상으로 말하면 하나의 목적어를 배치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의 목적어이면서도 그 안에 다시 큰 것과 작은 것의 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큰 것이 대표 목적어라면 작은 것은 보좌 목적어이다. 둘이 각기 맡은 구실이 그렇게 차등이 두어져 있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지만 그러나 그 둘은 서로 조화와 화합을 통하여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 타동사와 목적어의 절묘한 배치를 통하여 미학을 일구어 내는 시인의 언어감각은 탁월하다.
화자와 임의 성합이 이 시 서사의 종착역이다. 그리고 이 서사는 기나긴 밤을 베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기나긴 밤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밤이 기나길다는 사실은 그 앞에 동짓날이라는 수식어가 있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동지가 일년 가운데 밤이 가장 길다는 것은 상식이다. 화자가 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나긴 밤이란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보면 무난하다. 그렇게 해석하고 보면 실제에 있어서 베어낸다든가 넣어둔다든가 편다든가 하는 동사의 목적어로서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리움을 베어낸다는 말이 시에서 이상할 리가 없다. 다만 그런 비유적 설명이 가지는 이미지상의 의미가 적절한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미지상의 의미를 따져 보면 이 말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이 말이 화자와 임의 합일로 이어지면서 의미를 던져주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임과 성합을 하는 것은 사람이어야 하므로 그리움이라는 추상적 말로써는 괴이한 말밖에 되지 않는다. 임과 성합을 가지는 상대는 화자 이외일 수가 없다. 그리움이 화자까지 비유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서의 서사에서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베어낸다는 끔찍한 뜻도 인정하여야 하는데 위의 시는 그런 해석과는 관계조차가 없다. 이러한 논리적 디렘마를 문학적으로 해결하여 주는 것이 보좌 목적어 “한 허리”이다.
한 허리는 위에서 그리움의 허리라고 해석되었으므로 베어낸다의 목적어는 어디까지나 그리움이다. 그것이 신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굳이 허리라는 말을 그 자리에 넣어 둠으로서 그리움이 사람이라는 뜻을 이미지상으로 완곡하게 암시하여 두는 효과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임과 화자의 종국적 합일이 무리없이 이루어질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 시를 비롯한 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탈문법적 언어소통의 비법이 있다. 물론 이것이 고수들이 아니고는 쉽사리 선보이기 어려운 고난도의 작법이기는 하지만.
한 허리를 목적어로 설정한 이유는 이러한 시인의 작법상 편의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인의 문학적 배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나긴 밤은 간절한 그리움의 비유적 상징이다. 그러나 허리라는 말을 그와 관련하여 사용함으로서 은밀하게나마 기나긴 밤이 화자까지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암시가 던져져 있다. 그렇다면 완곡하게나마 한 허리는 화자의 허리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시인이 여러 신체 부위 가운데 하필이면 허리를 언급한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그의 의도가 작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허리라는 말이 던져 주는 이미지를 검토하여야 마땅하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어느 어휘든지 그것이 가지는 이미지는 실로 많다. 그 많은 이미지에서 적절한 이미지를 골라서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미지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의미를 반드시 관련 서사의 맥락 속에서 찾아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의 서사는 두 연인의 성합이 그 요체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하면 위에서 말하는 허리는 무엇에 앞서서 성합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허리가 성감대인지 아닌지는 평자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거기가 성감대이건 말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의학자들이 따질 문제이다. 우리 문인들에게는 어느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중요하다. 허리가 성합운동의 중추이고 여체미학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해서 시인은 화자와 임 사이의 성합을 더욱 구체화/노골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고 있지 않다. 그는 더 구체적이고 좀 더 노골적인 성합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화자의 허리를 넣어두고 뒤에 펴 놓는 장소를 이와 관련하여 잠간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제 2 행에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제 3 행에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라고 하였다.
베어낸 화자의 허리를 접어서 넣어둔 곳이 춘풍이 이는 이불 아래이다. 그 뒤 임이 오는 날 밤에 맞추어서 역시 같은 장소에 그것을 펴겠다고 하였다. 이불 아래에 넣어두고 또 편다고 하였다는 것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여기서 같은 장소는 이불 아래이다. 이불 아래라는 말은 그것이 요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거기에 편다는 말은 화자가 성합을 위하여 요에 드러눕는다는 의미이다. 그 밖에 봄 바람이 이는 이불이라든가 임이 오는 날 밤이라든가 하는 말 따위도 모두 성의 이미지를 한껏 높혀 주는 형상화이다.
3. 주체의 인간, 주관의 여인
이 시 서사의 전개와 관련하여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세 개의 타동사이다. 그 서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목적어이다. 그 두 개의 목적어 가운데 타동사와 호흡을 맞추어 서사에 그만의 독특한 색채를 드리워주는 것이 “한 허리”이다. “한 허리”가 서사의 구석구석을 성합의 이미지로 물들이고 있다. 시인은 세 개의 타동사와 하나의 목적어를(형식상으로는 두 개) 동원하여 임과의 합일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런 과정에서 화자가 기우리는 노력은 인상적이다. 합일 가운데에서도 성합을 일구어내기 위한 그의 노력은 각별하다. 이러한 시의 구성은 시인의 일정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첫째 시인은 세 행의 말미에 나란히 하나씩의 타동사를 배치하고 있다. 각 행에서 서사가 그 동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서 세 개의 동사는 모두 같은 성격을 가진다. 시인은 더 나아가 동질의 이 세 동사를 시간의 변화 속에서 서로 이어지도록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 그리하여 그는 국면의 변화에 걸맞도록 각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나누어서 맡기고 있다. 동사의 역할은 이로써 극대화되어 있다. 이 시 서사의 수레는 이 세 동사에 의하여 굴러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이다.
동사중심의 서사가 이 시의 최대의 특징이다. 그런 유례를 쉽게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유별난 것이 위의 황진이 시이다. 동사 중심의 서사는 행동 중심의 사고를 말하여 준다. 행동 중심의 사고는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반영하여 준다.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 황진이의 그러한 면을 비추어주는 것이 위의 시인 것이다.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황진이의 초상이 우리의 머리를 맑게 하여 주고 있는 이유이다.
둘째 시인은 세 타동사가 하나의 목적어에 모두 수렴되도록 하였다. 형식상으로는 목적어가 둘이고 실제상으로는 그것이 하나라는 점은 위에서 누누이 말하여 둔 바 있다. 형식상으로는 타동사가 둘의 목적어를 동시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상으로는 둘이 별개가 아니므로 하나의 목적어에 귀결되고 만다. 이것은 하나의 주제를 그만큼 강조하자는 뜻에서 비롯된 시인의 문학적 배려를 반영한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가치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그만큼 지대하다는 말이다. 시인의 지대한 관심의 산물이 그러한 서사 구도이다.
어느 특정한 가치에 대한 시인의 지대한 관심은 그에 대한 그의 주관적 인식의 강도와 행동의 적극성을 말하여 주는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특정한 가치는 사랑이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남녀사랑에 있어서 남녀 사이의 차별이 심하였고 여성의 행동은 지극히 억압되어 있었다. 특히 육체적인 사랑에 있어서 여성이 주관적인 입장을 표출하거나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일 따위는 거의 타부에 가까웠다. 이런 점을 고려하고 보면 특히 화자가 성합을 이루기 위하여 보여준 열성과 노력과 행동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주관적 여성으로서의 황진이가 보여준 행동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이유이다.
셋째 시인은 두 개의 목적어를 배치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에 다른 하나를 포섭시키고 있다. 하나를 대표로 삼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서 보좌하는 지위에 두었다. 전자가 “기나긴 밤”이고 후자가 “한 허리”이다. 전자는 그리움으로 상징되는 정신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 후자는 허리로 상징되는 육체적 사랑을 말한다. 서사의 내용을 대부분 채우고 있는 것은 후자이다. 육체적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차 있는 것이 위 시의 서사이다. 그렇다면 위의 시는 성합이 주제가 되는 시라는 말인가. 또한 그렇다면 위의 시는 포르노그래피에 해당이 된다는 이야기인가.
성을 문학이나 예술에서 다룰 때 예술과 외설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으로 흔히 그 묘사/기술이 노골적이냐 아니냐를 들곤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기준은 성에 관한 묘사/기술이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인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위의 두 개의 기준을 가지고 황진이의 위 시를 보자. 노골성 여부의 기준은 위의 시와 애당초 관련이 없다. 위 시에는 성에 대한 묘사/기술이 고도의 형상화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목적 여부를 가지고 말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 위의 시에서는 정신적 사랑이 사랑의 대표자이다. 그것이 사랑의 총괄자이고 주재자이다. 위 시 서사가 “한 허리‘로 표현된 성합에 대한 이야기로 뒤덮혀 있기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나긴 밤”으로 표현된 그리움, 그리움으로 비유된 정신적 사랑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것은 아니다. 예술가로서의 황진이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고 있는 까닭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