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에서 자랐다
집을 나서면 어디에나 길이 있었다. 마당에 잇닿은 골목은 신작로로 이어지고, 신작로에서는 논둑길이나 밭둑길이 펼쳐졌다. 그 길은 다시 오솔길과 산길로 새끼를 치며 혹은 끊어지고 혹은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길을 오가며 자랐다. 나를 키운 것의 8할은, 바람이 아니라 길이었다.
‘가마굴’은 들이 넓으면서 산 또한 적당히 솟아서 논도 많고 밭도 많은 마을이었다. 그 논과 밭들은 곧으면 곧은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둑 하나씩을 두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 그리고 우리가 늘상 밟고 다니는 그 둑은 따로 길을 내지 않아도 풀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킨 길을 등 위에 새기고 있었다. 생명의 젖줄 밭둑길과 논둑길 산자락에 올라앉은 ‘땅골’의 밭둑길은 경운기나 리어카가 다니지 못했다. 보리타작을 할 때도, 고구마를 캘 때도, 거름을 낼 때도, 운반 도구는 오로지 지게였고 아니면 그냥 머리에 이어 나를 수밖에 없었다. 보리뭇을 한지게 진 아버지가 소경이 지팡이로 길을 가늠하듯 작대기로 밭둑을 짚으며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내려올 때면 장딴지에 시퍼런 핏줄이 섰다. 고구마 멱둥구미를 머리에 인 엄마에게는 밭둑길이 작두날처럼 조심스러웠다.
‘당메’에 있는 밭도 ‘땅골’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땅골’보다 훨씬 멀어서 안산 너머 논둑길과 밭둑길을 번갈아 한참을 가야 나오는 ‘당메’ 밭은, 젖먹이 동생이 배고파 보챌 때 엄마에게 젖 먹이러 수도 없이 다닌 곳이었다. 그래서 ‘당메’ 밭으로 가는 길은, 어디쯤에 물꼬가 잘라져 있고 어디쯤에 삘기가 많은지, 눈을 감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오 리는 됨직한 길을 길어서 동생을 업어가면, 엄마는 밭둑에 앉아 가슴을 열고 동생의 배를 불리곤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엔 삘기가 돋은 밭둑길에 동생을 뉘어놓고 삘기를 뽑거나 띠 뿌리를 캐 먹으면서 나도 입을 달랬다. ‘질마금’이나 ‘신정골’에는 논이 있었는데, 논둑길도 고행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리어카나 경운기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나락뭇을 지게로 져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벼가 익어갈 무렵이면 참새를 쫓기 위해 논둑길을 수백 번도 더 내닫고, 깡통을 두드리거나 목이 쉬도록 “훠이! 훠이!” 소리를 질러야 했다. 밭둑길이나 논둑길을 떠올리면 어깨를 으깰 듯 짓누르던 노동의 기억이 먼저 솟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길로 먹을거리를 운반했고 동생의 젖을 먹이러 다녔으니 논둑길과 밭둑길은 생명의 젖줄이었다. 나 또한 그 길로 운반해낸 쌀과 보리로 지은 밥을 먹으면서 자랐고, 기억나지는 않지만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그 길로 젖을 먹으러 다녔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으로 만들어진 신작로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마을에 몇 개의 새 길이 만들어졌고 좁은 길은 넓어졌다. 새벽 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주민들은 울력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린 학생들도 일요일이면 으레 삽을 들쳐메고 나가 힘을 보탰다. 그 결과 ‘땅골’이나 ‘당메’까지는 아니었어도, ‘새테’에서 ‘들독거리’와 ‘앞시암’을 거치고 ‘시루비땅’을 지나 ‘웃골’까지는 경운기는 물론 차도 다닐 수 있는 신작로가 생겼다. 면 소재지에서 ‘질팽이모퉁아리’를 돌고 ‘개골잔등’을 넘어 ‘개초랭이’로 뻗어가는 신작로로는 하루 두 번 먼지보다 더 많은 매연을 뿜으면서 버스들이 다니기 시작했다. 볏가마를 위태롭게 실은 삼륜차들도 드나들었다. 밭이 많은 ‘웃골’까지 신작로가 뚫리면서 사람들의 어깨가 많이 가벼워졌다. 지게를 내려놓고 리어카나 경운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보리타작은 보리뭇을 져 나를 것도 없이 밭에서 경운기로 바로 할 수 있었다. 타작한 보릿가마는 철제 리어카로 실어 날랐는데, 그 리어카에는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라는 패가 자동차 번호판처럼 부착되어 있었다. 아이들도 리어카나 경운기를 타고 ‘웃골’로 다니면서 “1하시는 대통령 2나라의 지도자 3일 정신 받들어 4랑하는 겨레 위해 5일육 이룩하니 6대 주에 빛나고 7십년대 번영은 8도 강산에 뻗쳤네 9국의 새 역사는 10월 유신 정신으로” 하는 가사의 노래로 대통령 각하의 은덕을 소리 높여 노래했다.
중학생들은 학교가 있는 면 소재지까지 왕복 40리 길을 자전거로 통학하거나 걸어서 다녔다. 신작로 덕분에 버스가 다니기는 했어도 이 버스라는 것이 고장 난 날이 반이요 비 때문에 ‘개초랭이’ 길이 토사에 덮이거나 눈 때문에 ‘개골잔등’ 언덕을 오를 수 없어서 다니지 않는 날이 반이라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신작로는 한 달에 한 번쯤이나 버스를 타고 장에 가는 엄마를 편하게 해주기도 했지만 정든 사람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는 이별의 길이 되기도 했다. 삼촌이 신작로를 걸어 서울로 향했고, 동네 형들과 누나들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대처로 나가 공장에서 용접을 하거나 시내버스 차장으로 일했다. 그들은 명절이면 분칠을 한 듯 새하얘진 얼굴로 돌아와 “어쨌니? 저쨌니?” 하며 서울말을 자랑하곤 했다. 혼자여도 무섭지 않았던 고갯길, 산길, 오솔길 ‘질마금’ 논에 가려면 ‘개초랭이’ 쪽으로 난 신작로를 돌아갈 수도 있지만 ‘마골재’나 ‘유산잔등’ 길을 넘을 수도 있었다. ‘마골재’와 ‘유산잔등’을 넘는 길은 나락을 지게로 져 나르던 지름길이었다. ‘마골재’ 길에는 돌을 던져놓으면 힘든지를 모르게 된다는 말 무덤이 돌탑처럼 쌓여 있어서, 사람들은 여기를 지날 때는 누구나 돌 하나씩을 주워 말 무덤에 던졌다. ‘유산잔등’은 지게를 진 사람들이 서로 비켜가기도 힘들 정도로 좁고 험한 산길이었다. 덕분에 봄에는 술을 담그기 위해 참꽃을 따거나 고사리를 꺾었고, 가을에는 개암과 정금 열매가 많아서 무던히도 오르내렸다.
큰댁이 있는 동네인 ‘놋정굴’로 가려면 뒷산으로 난 ‘가능굴재’ 길을 넘었고, 동네에서 가장 높은 산인 ‘은적산’에서 나무를 하려면 ‘큰골’이나 ‘바람재’ 길로 다녔다. 이 고갯길들은 사람도 다녔지만, 때로는 토끼가 때로는 노루가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 길에서 나락짐이나 ‘억다리(억새)’, ‘자장개비(말라죽은 소나무 가지)’, ‘물거리(땔나무 잡목)’ 따위의 나뭇짐을 잠시 내려놓고 마을을 내려다볼 때 바람은 더없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마을에는 이밖에도 ‘서당골’, ‘성줏골’, ‘가리봉’ 등으로 이어지는 산길과 고갯길이 있었다. 이 길들은 또한 호젓한 오솔길이기도 했는데, 혼자여도 혼자가 아닌 듯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만인의 휴게소이며 놀이터인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놓인 좁다란 골목길은 집과 가까운 까닭에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었다. 어른들은 무더운 여름철 골목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팽나무 아래서 장기와 고누를 두거나 막걸리 잔을 기울였고, 아이들은 또래끼리 무리를 지어 그들의 놀이를 즐겼다. 가끔은 소가 지나가면서 골목길에 시커먼 전을 부쳐놓기도 했는데(소가 싸놓은 똥을 가리켜 ‘전 부쳤다’고 하고, 염소가 싸놓은 똥은 ‘콩 볶았다’고 했다), 그것은 사나흘만 지나면 말라서 저절로 없어지기도 했고 누군가가 불쏘시개로 쓰려고 집어가기도 했다.
‘양짓말’ 아이들은 ‘들독거리’부터 ‘점방앞’까지 200미터 쯤 되는 골목길을, ‘응짓말’ 아이들은 ‘대성동’의 여러 갈래 골목길들을 놀이터로 삼았다. ‘양짓말’ 골목길이 여름철 놀이터였다면 ‘응짓말’ 골목길은 겨울철 놀이터였다. ‘양짓말’ 골목길을 두른 담에는 담쟁이넝쿨이 있고 골목길에서 이어지는 신작로 길섶에는 질경이가 지천이어서 그 잎으로 언제든 제기를 만들어 찰 수 있었다. 겨울에는 ‘응짓말’에 눈이 오래도록 녹지 않아서 비료 포대로 미끄럼을 타고 놀았는데, 솜씨 좋은 아이는 대나무를 쪼개 만든 스키로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골목길에서는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집으로 가다 말고 가방을 내려놓고는 나이먹기·집지키기·오징어땅콩·말타기·땅따먹기·깡통차기·자치기·핀치기·고무줄놀이들에 넋을 파느라 항상 시끄러웠고, 가끔은 이런저런 싸움이 벌어져 울음소리도 드높았다.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소달구지 덜컹대던 길/시냇물이 흘러내리던/시골길은 마음의 고향/눈이 오나 바람 불어도/포근하게 나를 감싸는/나 어릴 때 친구 손잡고/노래하며 걷던 시골길(후략) 요즘도 텔레비전에서 활동하는 방송인 임성훈 씨가 32년 전인 1976년 발표한 노래 ‘시골길’ 가사의 앞부분이다. 요즘 말로 치자면 ‘대박’이 난 노래였다. 이 무렵 길을 다닐 때면 나도 모르게 이 노래와 함께 박인희의 ‘끝이 없는 길’을 흥얼거렸고,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읊조렸다. 그렇게 몸이 자라고 정신이 살을 찌웠다. 하지만 ‘시골길’을 부를 때는 몰랐다. 그 노래가 과거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듯 나 또한 시골길을 추억의 대상으로 삼게 되리라는 것을.
여름 휴가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향 ‘가마굴’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이제는 포장도로가 된 신작로로 달구지 대신 자가용을 타고 휴가를 즐기기 위해 고향을 찾을 것이다. 마을에는 잠시 활기가 넘치겠지만, 그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서둘러 귀경 길을 나설 것이다. 그들도 자신들이 뛰놀고 일하고 싸우면서 자랐던 고향 ‘가마굴’의 골목길과 논둑길과 산길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혹시 골목길의 담들이 허물어지고 산길과 오솔길이 풀과 나무에 묻혀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것처럼, 길과 함께 했던 어린 날의 추억도 함께 세파에 덮여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까. 사진 제공 : 최수연(월간 ‘전원생활’ 기자) /몽당연필/ |
출처: 졸필난필 잡문신문 원문보기 글쓴이: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