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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강해1(선택과 예정문제)
말라기강해1
야곱과 에서(선택과 예정문제)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다. 물론 이것은 70인역의 분류기준에
의한
것이고 대부분의 번역성경이 이 분류법에 의해 구약의 마지막에 이 책을 위치
하고 있다. 70인역은 알렉산더대왕의 영토정복에 이어 정신문화를 정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유대인들의 경전인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역본
이다. BC 2~3세기 경의 일이다. BC 331이후 헬라 왕국이 중심세력이 되어 그
당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시기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을 남겨놓지 않
고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의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데는 제한점이
많다.
번역의 동기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 중에 이러한 부정적인 동기를 엿볼 수 있
는 것도 사실이지만 ─ 사상적으로 헬라문화를 심기위한 가장 좋은 방편으로
정신문화의 원류인 히브리경전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것 만큼 사실 효과적인
방법도 없을 터이니까. ─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70인역이 신약성경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 볼 때 결코 번역성경이라는 사실만 갖고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헬라문화의 팽창을 힘입어 복음의 세계화에 빠르게 적응해 갈 수 있
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고찰을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러한 섭리적인 역사를 간과할 수 만은 없는 것이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정착되어 경전으로 보전되어오고 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짐작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이 재건되고 난 후(B.C 516 말3:1참조) 느헤미야
시대에 보내진 최후 선지자인 것을 보면 구약의 마지막 책으로 편집되는 것
이 합리적이다.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의 역사는 4차에 걸쳐서 이루어지며
세번째 포로로 잡혀갈 당시인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의 성전이 함락된다(왕
하25:6~12,렘25:9~11). 이 성전은 다윗이 건축하려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솔로
몬이 즉위한지 4년째 되는 봄에(약966BC,왕상6:1) 시작하여 7년에 걸쳐 완성
한 것이다. 이 성전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수난과 함께 성전이 무너지
는 비극을 겪고 고토를 회복한 이후 느헤미야 시대 성전 재건이후의 선지자
말라기의 활동인 것을 볼 수 있다.
어떻든 말라기로서 구약의 시대는 끝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말라기서의 위
치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루살렘 성전의 신
앙이 있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는 예언대로 예루
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육신적 종교생활)의 종말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3일만에 세우시겠다고 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새 예루살
렘)의 건축으로 인한 재건된 신앙생활을 하는 때가 분명히 있으니 새 예루살
렘 신앙이다(계 21 참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말라기서를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책으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수건을 벗고 보는 말라기서의 위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1장 2절을
보면 야곱과 에서로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
계보를 따라서 본다면 신앙의 제 3세대 현황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계
속 나타나고 다루어질 것이지만 제사장에 대한 강력한 책망의 내용들은 결국
에서에 대한 책망이다.
1절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말라기의 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이다.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향한 주의 말씀의 경고
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Rhm(The Emphasized Bible:A New Translation,J.B.Roth
erham)역은 The oracle of the word of Yahweh unto Israel,-by the hand of
Malachi- 로 대부분의 번역성경에서 번역이 안된 dy푕?베야드,손 안에)를 살
려서 번역해 주고 있다.
또한 우리말 성경의 ‘말씀하신 경고라’라고 하는 번역은 말씀의 경고라는
것의 의역인데 사실은 말씀 자신이 말씀 안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는 충분히
경고가 된다고 볼 때, 말씀으로 경고를 하셨다는 의미보다는 말씀의 경고라고
하는 것이 비슷해 보이나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말씀이 말씀으로 드러나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경고가 되며 나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경고라는 의미가 보다 원문의 문장으로도 그러
하고 의미에서도 합당하다. 작은 부분인 듯 하지만 실제로 주의 깊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말씀하신 경고라고 하면 경고가 주체요 말씀은 경고를 형용
해주는 보조 형용어로 밖에는 번역이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경고는 어디까지나 말씀이 주체요 경고는 말씀의 보족어로 말씀의 경고적 역
할을 말해주는 것이라는의미이다. 말씀 그 자체는 경고와 사랑과 심판이 모
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살펴볼 것은 말라기(ykia;l]m' , 말라키)라는 말은 선지자 말라기
라고 하는 고유명사의 이름이기도 하려니와 그 의미는 ‘나의 천사’ 혹은 ‘
나의 사자, my messenger’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70인역은 이것을 말라기
라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번역하지 않고 그 의미대로 ajggevlou aujtou'(앙겔
루 아우투, 그의 천사)로 번역해서 그의 천사라고 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
하다.
이 개념은 구약의 여러곳에서 쓰인다.
말라기의 어원은 ?;l?'(말락)인데 사용사례를 몇가지 형태로 분류를 해보면
①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자
창32:4 신2:26 삿 6:35 왕상14:1,19:2,16 왕하18:12, 35:21 느헤미야6:3
욥1:14 잠13:17,17:11 사14:32,18:2
② 선지자
사42:19,44:26 왕하36:15,16
③ 제사장
말2:7 전5:6
④ 의를 선포하고 해석하는 자
욥33:23
⑤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천사
창19:1,15,28:12,32:2
⑥ 그를 찬양하는 천사
시103:20,148:2 욥4:18 시 91:11
기타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데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관련된 천사들을 일컫는
곳이 많다.
1절의 70인역의 번역을 보자.
1? Lh'mma lovgou kurivou ejpi; to;n Israhl ejn ceiri; ajggevlou aujtou'
: qevsqe dh; ejpi; ta;" kardiva" uJmw'n.
여기서 다음 부분은 히브리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본문이고 여타의 번역성경
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문장이다.
qevsqe dh; ejpi; ta;" kardiva" uJmw'n.(데스데 데 에피 타스 카르디아스 휴
몬)
의미는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마음에 두라’ ㅐ?‘새기라’고 하는 의미
이다. 여기서 qevsqe 의 목적어는 앞의 문장 전체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천사의 손에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주의 말씀의 경고를 너희 마음에
두라 ”고 해 볼 수 있겠다.이것은 말라기서 4:6절의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
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라는 말씀과도 동
일하다.
이러한 부분은 마소라학자들에 의해 AD 8세기 경에 새로이 편집된 맛소라 본
문 히브리 성경과 그 보다 1000여년 이전의 번역성경에 나타나는 차이라고 볼
수 있다. 70인역 성경을 살펴볼 때 이렇게 불일치되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
야 하는가는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과제이다.
70인역의 모본(母本)이 없는 가운데 추론을 할 수 밖에는 없다고 하겠다. 그
리고 고고학 자료들의 새로운 발견들에 기대를 해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성경을 갖고
우리는 말씀을 살펴 볼 수 밖에 없는 까닭에 어느것 하나 소홀히 취급할 수는
없는 형편이라 하겠다.
2~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
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것처럼 가장 강력한 경고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처럼 가장 강한 심판의 말
씀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처럼 가장 강한 사랑의 메시지가 또한 어디 있겠는
가. 모든 성경이 그러하듯 이것이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다’는 완료형을 쓰고 있다. 그것은 앞
으로 사랑할 것이라든지 하는 미완료 시상이 아니다. ‘내가 사랑했다’는 것
이다.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항상 문제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인간적 시각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하나
님은 항상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반면 인간은 ‘언제 어떻게 우리
를 사랑하셨습니까’고 서로 비껴가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
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무엇인가 여겨지면 하나님이 사랑하셨다고 말하고 아니면 교
리에 강화되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엮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는 시
도 밖에는 없다. 자신이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받으려 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이 소위 종교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주위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아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오
해하면서 사는 것에 불과하다. 속든지 중독되었든지 다만 즐거우면 된다는 생
각이 빚어내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적당히 감상적인
차원일 수 없다. 그리고 상황적인 것이 아니다. 영원적인 것이요 상황적인 것
에 좌우되거나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하시는 유명한
말씀은 다음과 같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
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이다. 성경 어느곳을 보던지 이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큰 흐름으로 물줄기 처럼 흘러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구별하는 것인가. 누구
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편협한 사랑의 차원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당신의 사랑의 개념으로 가늠
하려는 데서 빚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무슨 선호도에 따른 구별이 아니
다. 원리적인 나누임일 뿐이다. 기분이거나 상황적인 구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 사랑의 공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사랑이라거나 미워한다거나 하는 표현들은 상대적인 용어들이다. 이 표
현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여져야 한다. 따지고 보면 에서를 미워한
다는 표현도 상대적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적인 차원의 인간에게 전
달하기 위한 표현수단일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
랑이 에서에게 있어서는 미움이요 저주요 황폐화로 나타날 뿐인 것이다. 그래
서 에서를 미워했다고 하는 표현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이러한 모습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항변하고, 항변하려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곧 공의요 공의는 곧 사랑
이다. 그것은 상호 충돌을 일으키거나 모순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개념의 서로
다른 인간편에서의 이해이다.
예컨데,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은 대지에 생명수를 공급하고 산천초목은 그를
흡수하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를 초목의 입장에서는 사랑이요 은혜라고 말한
다. 그런데 대지에 생명을 공급하는 시냇물이 그 흐름을 방해하는 장애물(뚝
과 같은 것들)을 만날 때에는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홍수도 나고
산사태도 일어난다. 그러나 물은 다만 자신의 흐름과 삶(사랑)만을산다.
이 때 그 흐름을 막던 장애물들은 물을 공의라고도 말하고 미움이라고도 말하
고 저주라고도 말하지만 도무지 물은 달라진 것도 변한 것도 없다. 다만 사랑
이요 공의로 충만할 뿐이다. 인간 스스로 그러한 하나님의 원리를 모순이라느
니 또는 이러쿵 저러쿵 하며 억지로 이해를 해보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에서를 미워했다는 말은 다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시는 중에 부딪
혀 사랑이 수용되지 못한 상태를 일컫는 말일 뿐이다. 반석이 달라지거나 어
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이들은 거치는 것이될 뿐이며 어떤이들에게
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다만 반석은 어느 경우에도 반석으
로 있다. 각자의 상태가 문제일 따름이다.
이 사랑의 원칙을 바울은 선택과 예정의 원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로
마서 9장은 바로 말라기 1장 2,3절의 일부를 어순만 약간 바꾸어 그대로(70인
역) 인용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kai; hjgavphsa to;n Iakwb, 1? to;n de; Hsau ejmivshsa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이다.
왜 야곱은 사랑하시는데 에서는 미워할 수 밖에 없으신가?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선택과 예정의 원칙은 사랑의 원칙이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바울은 여기서 출애굽기 33장 19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모세에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33:19)
그것은 우리의 원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원함
이나 혹은 거절함의 차원 이상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만하면 긍
휼을 베푸시는 것 뿐이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 또한 변개하
실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이다.
바울은 분명히 언급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
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유업을 얻을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대단한 오해일 뿐이다. “오
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
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또한 이 원리는 계속하여 야곱과 에서의 상황에서도 면면히 흐르
고 있는 원칙이된다.
바울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9~
13).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은 이 사랑의 원칙이다. 하나님은 결
코 지금도 야곱은 사랑하시지만 에서는 미워하실 수 밖에 없다. 무엇을 말하
는가. 이것은 사랑의 대 원칙임을 확실히 알게하기 위해 그의 자식들이 아직
나기도 전에 말씀하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원칙이요 고정불변하시
는 하나님의 속성이심을 말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일컬어 예정이라고 하고 택하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이라는 사람을 지정해서 사랑하고 에서라는 특정 인물을
만세전에 택하여 미워했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매우 곤란해진다. 이것은 그러
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는 것이
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는 말이 아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
고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많으실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시라. 하
나님은 약속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실 수 밖에 없으시고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자녀는 미워하실 수 밖에 없다는 사랑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
기서 야곱은 약속의 자녀요 에서는 육신의 자녀일 뿐이다. 그러한 양태가 이
미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세워져 있는 하나님의 원칙이라는 것을 말
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원하는 자나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아
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원하는 것이나
달음질하려는 것 모두가 이미 에서에게는 육신적인 몸짓밖에는 아무것도 아니
기 때문이요 그것을 보고서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
어 더욱 강퍅해질 따름이다. 더욱 단단하고 굳은 땅이 될 뿐이며 그러한 열심
이(원함이나 달음질)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막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
다. 그래서 에서의 땅은 황폐화될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지니게 된다.
이삭도 이스마엘도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엘
이 유업을 받을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요 선택이다. 야곱과
에서는 동일하게 이삭에게서 태어났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가 아브라함
이라고 하는 동일한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사라와 하갈로 서로 다른
태(胎)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한 배에서 태어난 쌍태아(雙胎兒
)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신다는 것이
사랑의 대 원칙이요 에서에게는 결코 유업을 주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선
택이요 예정이다.
여기서 또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한 아버지에게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
의 자녀가 태어나는 가하면(갈라디아4장 참조)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에게서
동시에 야곱과 에서의 두 민족이 태어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두 자녀도 씨름과 갈등이 계속되는 과정이 있고, 마침내 약속의 자녀가 유업
을 받게 되고 육신의 자녀는 내어쫓김을 받는 일이 진행되듯이 두 민족 또한
계속되는 갈등과 씨름이 있지만 여전히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을 유업으로 받게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어떻게 에서에게 유업을 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에서에게는 유업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에서가 유업을 물려 받
을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혼돈이요 뒤죽박죽이 되는 것
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러실 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가 스스로 장자권을 주장하고 장자인 줄 알고 오해하고 있
다는 데에 있다. 이미 장자권을 상실한지가 오래 전의 일이었다. 오늘날 기복
종교와 기타의 형태들이 그러하듯이 팟죽 한그릇 때문에 장자권이 이미 넘어
간지가 오래전이었다.
이것이 종교가 빚어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든 에서
들이 자칭 야곱의 유업을 이을 자로 알고 있기에 하나님은 난감해 하신다. 그
리고 여전히 에서이면서 택함받은 자요 만세 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자인 줄
열심히 오해하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선이나 악
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할 수 있다. 죽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
는다’는 말씀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와 등치된다고 할 수
있다. 야곱과 에서의 태어나기전 예정은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양태로 나타나
고 있고 그들의 삶은 곧 다시 행위와 믿음의 관련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기
에 그러하다.
바울이 그렇게 택하심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야
곱을 긍휼히 여기실 수 밖에 없고 에서는 강퍅케 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곧
에서는 스스로의 길을 걸은 것 뿐이다. 그것을 다만 성경은 하나님이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케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부모에게서 두 자녀와 두 민족이 태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
는가. 그리고 여기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어떻게 무엇으로 섬긴다는 말
인가. 내어쫓아야 할 원수가 아닌가. 죽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미움으로 내
쫓겨야 할 대상이 어떻게 섬길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이다.
분명히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두 자녀 두 민족이다. 그런데 큰 자가 있고 어
린 자가 있다. 먼저된 자가 있고 나중된 자가 있다. 먼저된 자는 누구이며 나
중된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먼저된 자가 어떻게 나중된 자를 섬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섬긴다는 말인가.
에서가 누구인가. 에서는 야곱의 갈등이다. 피하고 싶은 존재요. 두려운 존재
였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며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
이기에 형극의 길을 걷게된다. 그것이 해결되는 계기는 얍복강의 씨름이 있고
난 후였다. 사실 오늘의 야곱은 에서로 말미암아서이다. 에서가 없이 어찌 오
늘의 야곱이 가능할수 있겠는가.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방법이시다.
(사42:24절참조)
신약성경에도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
가. 첫 사람 아담이 먼저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야 말로 살리는 영이다.
그것은 우주의 생성원리이기도 하다. 생명의 원리이다. 먼저된 것은 반드시
나중되게 되어 있다. 먼저된 것이 먼저로 여전히 남아 있으면 그것은 이미 죽
은 것이다.
먼저가 지금이라면 나중이 지금이 되기 위해서 먼저는 죽어야 되는 것이 생명
의 원리이다. 먼저인 오늘의 세포는 나중의 새로 생성되는 세포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건강한 생명의 활동과 순환이 계속된다.
이것이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요 살아있는 자는 그
러하다. 어제의 나는 결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어제의 내가 죽어야 오늘의
내가 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10:7~8)
물론 이 말씀을 함부로 아무 곳에나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
나 어떤 원리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한 것이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 먼저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우리를 강도질하는가. 우리의 육신의 생
각이 먼저와서 우리를 지배하고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부하고 환호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나중에 오시는
분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시는 분으로 오신다. 육신의
생각이 먼저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그 자신이 죽어줌으로 영의 자녀를
섬겨준다. 내어쫓겨 나감으로 섬겨준다.
한 알의 밀은 씨눈과 배젖으로 그 내용물이 구성되어 있다. 배젖이 자신을 보
호하고 있는 동안은 씨눈은 발아되지 않는다. 씨눈은 새 생명의 가능성을 갖
고 있지만 배젖이 죽어주면서 일정기간 동안 영양분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땅
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신비를 보라. 육신의 생각이 원수요 내어쫓김을 받
아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스마엘이 이삭을 앞서서 태어난다고 하
는 사실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다. 약속의 자녀가 뿌리를 내
려 온전히 세움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가.
이것은 신앙의 제3세대라 할 수 있는 야곱과 에서의 상황에서도 양태를 달리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흐름의 원칙이 적용된다. 역시 바울이 야곱과 에
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행위와 믿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더욱 교묘하고 정교화되어 있는 한개인의 내적 사람의 두 민족적 성격
을 보게되는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과
는 전혀 다른 양태이다.
이것이 확대되어 야곱과 한 몸이 된 민족을 볼 수도 있을 터이고 에서와 한
몸이된 민족을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에서와 야곱이 철저히 섞여있는 혼돈의
무리들도 있을 것이다.에서와 철저히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는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라고 하신다. 그들이야 말로
에서이다.
이렇게 야곱과 한 몸이 된 야곱의 삶과 에서와 한 몸이 된 에서의 삶을 논하
는 것이 말라기서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제사장적 삶이 야곱으로 살
아지고 있느냐 아니면 에서로 살아지고 있느냐를 언급하고 있는 책이다. 그것
은 이삭의 두 자녀가 자란 이후에 나타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역시 바울이 예를 들고
있는 대로 바로의 경우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의 전역사는 거
의 그와같이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그리고 모세와 바로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떠한 흐름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
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는 역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이 성장하면서도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나가 해결
된 이후에 또 다시 부딪히는 돌이될 수도 있고 아니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
니하는 반석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