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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을 자신의 이러한 강도적 차이 개념과 직접 연결시킨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문헌적 정당화는 다음의 사실과 관련된다. 베르그손은 『시론』의 1장에서 강도 개념을 비판한 바 있다. 페히너로 대표되는 일군의 정신물리학자들이 감각과 관련하여 도입한 강도 개념에 대해, 베르그손은 감각은 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결코 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론을 제기한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감각과 정조적 감정들, 그리고 보다 상위의 주관적 감정들 모두는 매 순간 달라지는 어떤 유기적 총체성들이다. 따라서 이것들을 서로 비교하고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달라지는, 매 순간마다의 고유한 질들을 환원하여 양화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이것들의 본성을 제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바늘에 찔렸을 때의 아픔과 망치로 맞았을 때의 아픔은 보통 바늘과 망치의 크기에 비례하여 측정되어 어느 쪽의 고통이 더 크다고, 따라서 강도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서로 비교불가능한 고유의 질들을 갖는 아픔들이다. 또 사랑의 감정도 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점점 깊어지고 점점 강렬해지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매 순간 순간이 다른 순간들과 비교되고 하나의 기준으로 측정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심리적 체험들은 그 각각이 다른 것들과 통약불가능한 독특성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저작인 『물질과 기억』에서 이원론의 해소와 관련하여 강도 개념이 재도입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구절에서 말이다. “무기 물질과 반성의 단계에 가장 높이 도달한 정신 사이에는 기억의 모든 가능한 강도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유의 모든 단계들[degrées, 정도들]이 있다.”(『물질과 기억』, 370/250. 이하 MM으로 약칭하고, 베르그손의 저작들은 국역본과 원본의 쪽수를 순서대로 병기함.) 그래서 들뢰즈는 “이제 베르그손은 그가 무너뜨렸던 모든 것을 복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베르그손은 강도 개념을 재도입하며 이 때의 강도 개념은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 차원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강도 개념은 본성상의 차이들과 정도상의 차이들 사이의 차이, “모든 차이의 정도들”, 또는 “모든 차이의 본성”을 가리킨다(『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지성사, 129쪽. 이하 B로 약칭). 우리가 살펴본 들뢰즈의 강도 개념은 바로 이런 차이의 본성, 모든 차이의 정도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는 이제 차이 자체의 정도들로서의 강도 개념을 통해 하나로 통일된다. “정도상의 차이들은 ‘차이’의 가장 낮은 정도이다. 그리고 본성상의 차이들은 ‘차이’의 가장 높은 본성이다.”(Ibid.)
이런 해석은 베르그손 철학이 가진 두 경향성인 이원론과 일원론을 모순 없이 통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베르그손 철학을 차이의 철학으로 현대화한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한 전범적 해석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베르그손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바와 얼마나 부합하는가는 검토의 대상이다. 일단, 들뢰즈 자신도 얘기하듯이 『시론』 1장의 강도 비판은 “꽤나 애매하다. 그 비판은 강도량이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심적 상태들의 강도라는 관념에만 반대하고 있는가?”(B, 127) 분명 베르그손은 강도를 비판하고 있지만 우리가 텍스트를 보다 섬세하게 읽어나간다면 이내 그 비판이 강도 개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강도 개념을 새로이 정의하는 데, 즉 강도 개념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르그손은 1장의 핵심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강도의 관념은 따라서 두 흐름의 접합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외연적 크기의 관념을 가져오며, 다른 하나는 의식의 심연에서 내적인 다수성의 상을 찾으러 가서 표면으로 가지고 나오게 한다.”(『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94/54. 이하 DI로 약칭) 강도는 어떤 허구적 관념이 아니라 내적 지속의 질과 외적 연장의 양이 만나는 지점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즉 강도 개념은 어떤 실체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이다. 정신 물리학의 강도 개념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은 강도 개념이 관계 개념이라는 점을 모르고 전적으로 양화시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실체처럼 다룬다는 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강도 개념에 대한 비판을 보다 섬세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는 들뢰즈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타당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다음의 물음을 이끌어내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만일 강도가 순수 경험 속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라면, 우리의 경험을 만드는 모든 질은 강도가 제공하는 것 아닐까?” 베르그손의 말에 따르면 순수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 순수 경험을 발생시키는 것이 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질과 양, 내적 지속과 외적 연장이 만나는 우리의 경험 자체가 바로 강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 경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험은 혼합물이며 불순물이다. 그래서 경험은 해석을 통해 어떤 순수함(직접 주어진 것)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시론』에서 나는 심리학에서의 강도 개념을 오류로서가 아니라 해석되기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비판했다. 아무도 심리적 상태가 강도를 갖는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Mélange, PUF, 1972, 491)
이런 이의 제기의 연장선상에서 들뢰즈가 제시하는 베르그손 철학의 연대기적 구성을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베르그손 철학이 다음의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1)순수한 이원론, 2) 완화된 이원론, 3) 일원론. 들뢰즈는 이 세 단계에 시기들을 할당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단계들은 느슨하게 각각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및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시기에 해당할 것이다(물론 이미 『시론』에서부터 일원론을 향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기에 사실 베르그손의 4대 주저들은 각기 강조점을 달리 하면서 표현되는 단일한 하나의 사유 사태와 관련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베르그손 자신 또한 『사유와 운동』에서 철학자는 오로지 하나의 직관만을 갖고 평생 이를 표현하고자 애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다면 베르그손의 사유가 시간 속에서 진행해나간 궤적들은 결국 유일한 직관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런 해석 속에서 우리는 예기치 않게도 시간은 영원의 그림자라는 플라톤의 시간관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이러한 문제는 베르그손의 시간론과 그의 직관론에 대한 보다 면밀한 독해를 요구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고리는 『물질과 기억』인데, 우리가 앞서 인용했던 구절에서 예시되듯이, 이 저작은 강도 개념을 재도입하면서 실질적으로 일원론의 계기를 단순히 예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완성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기는 사실 베르그손의 변증법을 구성한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전통적 구분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이는, 『시론』의 질과 양의 이분법(이 이분법은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시간과 공간 등의 대립 쌍들을 거느린다)은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라는 베르그손의 개념에 기초해 있다. 질과 양 사이에는 정도상의 차이가 아니라 본성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물질과 기억』에서 이런 차이들의 위치는 미묘하게 변화한다. 왜냐하면 “두 방향들 중 하나가 모든 본성상의 차이들을 떠맡고 있으며, 모든 정도상의 차이들은 다른 방향, 다른 경향으로 속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모든 질적인 차이들을 포함하는 것은 지속인데, 그래서 지속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변화로 정의된다. 정도상의 차이만을 나타내는 것은 공간인데, 그래서 공간은 무한한 가분성의 구도인 것처럼 보인다.”(B, 128) 따라서 『물질과 기억』의 테제는 지속과 공간 사이에는 정도상 차이가 아니라 본성상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지속은 본성상 차이이며 공간은 정도상 차이라는 것, 이것이 테제인 것이다.(DR, 511)
결국 문제는 지속은 본성상 차이로 해석될 수 있는가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이 처음부터 지속을 “본성상의 변화 없이는 결코 분할되지 않는 분할 가능성”(DR, 511)으로 정의한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각각 『시론』과 『물질과 기억』에서 뽑은 두 개의 텍스트를 제시하고 있다. 앞의 것은 심리적 지속으로서의 복합적 감정을 다루고 있으며 뒤의 것은 보다 직접적으로 지속의 분할 자체를 다루고 있다. 먼저 『시론』의 구절부터 살펴보자. “복합적 감정은 상당히 큰 수의 더 단순한 요소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이 완벽한 명료함을 가지고 드러나지 않는 한, 그것들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의식이 그것에 대한 분명한 지각을 가지자마자, 그들의 종합으로부터 결과되는 심적 상태는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변화된다.”(DI, 107~108/62, 이 구절이 들뢰즈의 해석에 있어 갖는 중요성과 함축에 대해서는 B, 55~58 참조.) 복합적 감정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감정이다. 들뢰즈가 들고 있는 대로 애증의 감정이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애증은 사랑과 증오(“더 단순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것인데, 하지만 애증을 느끼는 한에서 사랑과 증오는 명료하게, 분리되어 느껴지지 않고 뒤섞인 채 느껴질 것이다. 애증을 구성하는 사랑과 증오가 전면에 뚜렷하게 드러난다면 그 때 나의 심적 상태는 애증의 감정이 갖는 복잡미묘함을 잃고 말 것이다. 즉 이제 사랑은 그 속에 얼마간 스며들어 있는 증오의 어두움을 잃게 될 것이며 반대로 증오는 거기에 비쳐들고 있는 사랑의 빛깔을 잃게 될 것이다. 이렇게 분리된 사랑과 증오는 서로 뒤섞여 애증의 감정을 이루고 있을 때의 그 사랑-증오와는 상이한 것, 들뢰즈의 표현대로라면 본성상 차이나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상 차이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분명 애증의 감정과 사랑-증오의 감정 사이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본성상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전자를 후자로 환원코자 하는 시각에서 접근했을 때뿐이다. 애증의 감정을 의식을 통해 명료화하고 분석하고 분할하고자 했을 때, 그 결과로 내가 얻게 되는 사랑-증오의 감정은 애증의 감정과 본성상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베르그손의 텍스트는 바로 그런 환원의 의식적 노력이 변화의 원인, 차이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의식의 명료한 지각이라는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 심적 상태는 변화된다.”(Ibid.) 따라서 여기에서 본성상 차이를 낳는 것은 지속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관점이며 이런 관점 하에서만 본성상 차이가 드러나므로, 본성상 차이는 관점의존적인 개념이다. 관점의존적인 한에서, 본성상 차이는 지속의 절대 규정, 본성적 규정이 되기 어렵다. 또 이 텍스트가 심적 지속과 물질 대상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맥락에 위치해 있음에도 주의하자. 이 문맥이 주 비교대상으로 삼고 있는 쌍은 내적 의식의 상태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주관적인 것(심적 지속)과 객관적인 것(물질 대상)의 차이이며, 전자는 분할되지 않고 변화하며 후자는 변화하지 않으며 분할된다는 점에서 본성상 차이가 난다. 따라서 본성상 차이와 지속의 내적인 질적 변화는 구분되어야 할 것들이다. 본성상 차이는 불연속적인 환원불가능성을 가리킨다. 베르그손은 『시론』에서는 지속과 공간 사이에서, 『물질과 기억』에서는 지각과 기억 사이에서 본성상 차이를 발견하는데, 이 두 가지 쌍들은 상호 환원불가능하며 실재의 선을 따라 나누어져 있는 것들이다.(이 두 쌍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 쌍이랄 수 있는 양과 질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양은 연속적 동질성을 가리키는 반면 질은 계기적 이질성을 가리킨다.) 이제 들뢰즈가 제시한 두 번째 텍스트를 살펴 보자.
들뢰즈가 베르그손적 지속은 본성을 바꾸면서만 분할된다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특별히 강조하면서 제시하는 『물질과 기억』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우리 지속의 부분들은 그것을 분할하는 행위의 잇따르는 순간들과 일치한다. (...) 그리고 만일 우리의 의식이 하나의 간격 속에서 단지 특정한 수의 요소적인 행위들만을 분별할 수 있다면, 만일 우리의 의식이 어디선가 분할을 멈춘다면, 바로 거기서 또한 분할가능성도 멈추게 된다.”(MM, 345/232) 왜 베르그손은 여기에서 분할을 이야기하는가? 바로 공간과 지속의 비교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공간이 문제되는 한, 사람들은 분할을 원하는 만큼 멀리 밀고 나갈 수 있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분할되는 것의 본성에는 아무 것도 변화하는 것이 없다.”(MM, 344/231) 공간은 무한분할가능한 반면 지속은 그렇지 않다. 앞서의 이야기를 되풀이하자면, 지속은 분할 자체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분할 행위 자체가 우리의 지속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첫 번째 인용문에서 하나의 문장을 생략했는데 사실 이 문장이 사태를 보다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거기에 순간들을 고정시키는 만큼의 부분들을 지속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인용문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분할되는 것의 본성에는 아무 것도 변화하는 것이 없다”는 표현이다. 공간이 이러하다면, 반대로 지속은 분할을 통해 본성이 변화하는 것 아닌가? 들뢰즈가 지적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분할 행위 자체가 우리의 지속을 구성하는 부분이 되기에, 지속은 분할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분할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할되는 것의 본성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사람들이 분할을 원하는 만큼 멀리 밀고 나”갔을 때이다. 만약 지속을 원하는 만큼 분할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무한 분할은 불가능하다. “(...) 우리의 상상력이 최종적인 부분들을 분할하려고(...) 노력해보아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 지속의 분할을 더욱 멀리 밀고가려 하는 그 같은 노력은 [단지] 이 지속을 그만큼 더 늘여놓을 것이다.”(MM, 345/232) 우리의 지속은 어떤 한계 내에 있어서 그 한계 안에서는 분할도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실상 그 때에도 지속은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리듬을 가진 지속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베르그손이 인용한 대로,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이 2/1000 초라면(MM, 434/231), 우리가 삶에 기울이는 주의 집중에 따라 우리의 지속은 한 시간에서 2/1000초까지의 간격을 갖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이 2/1000초를 더 잘게 쪼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이 2/1000초를 더 쪼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가장 짧은 이 2/1000초에 이 시간을 더 쪼개려고 의식이 집중하는 시간(이 역시 최소 2/1000초)를 덧붙일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끝점을 다시 두 개로 나누려고 생각할 경우 우리 눈과 만나는 것은 처음 끝점과 유사한 다른 끝점이다.”(「헤로도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v. 1, 40쪽) 만약 우리가 상상을 통해 우리 지속을 실제 한계 이하로 분할하려 할 경우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은 우리의 지속이 아니라 어떤 다른 지속이다. 바로 이 때가 “분할을 원하는 만큼 멀리 밀고 나”갔을 때이며, 바로 이 때가 “분할되는 것의 본성에”서 어떤 것이 변화하는 때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많은 상이한 리듬들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더 느리거나 더 빠름에 따라 의식들의 긴장이나 이완의 정도를 잴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존재들의 계열에서 그것들의 각각의 위치를 정할 것이다.”(MM, 346/232) 우리는 상상 속에서 분할을 통해 이 상이한 지속들 사이를 넘나들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 지속들은 제각각 질적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실재들이다. 한 지속의 분할불가능성은 다수 지속의 “실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번째 예와 첫 번째 예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첫 번째 예에서의 지속과 공간 사이의 본성상 차이가 두 번째 예에서는 다수의 지속들 간의 차이로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두 번째 예에서 공간과 지속의 차이가 다수 지속들 사이의 차이로 전환되는 일이 일어난다. 공간은 무한히 분할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공간으로서 남아 있지만, 지속에는 분할의 한계가 존재하며 그런 한계를 넘어설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다른 지속인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이 두 개의 예를 통해 입증하고자 했던 지속의 규정과는 다른 어떤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우선 기본적으로 본성상 차이는 지속 내의 변화들에 적용되는 용어라기보다는 두 실재 간의 환원불가능성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그 다음으로, 설사 하나의 지속이 갖는 변화들, 차이들을 우리가 본성상 차이들로 본다 하더라도, 그러한 본성상 차이들은 어떤 한계를 가지며, 바로 이 때문에 그러한 차이들은 본성상 차이난다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공유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지속이 감내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차이가 있으며 이런 절대적 차이는 우리를 다수 지속들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르그손의 지속에서 세 가지 차이들을 구별해야 한다. 1)지속 내의 끊임없는 변화들, 2)다수의 지속들, 그리고 3)지속과 공간 사이의 본성상 차이.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라는 용어쌍만으로는 이 세 가지 차이들을 모두 포괄할 수 없으며, 이는 이 용어쌍이 이 세 가지 차이들 각각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앞서 지적했듯이 본성상 차이는 관점의존적이다). 공간의 정도상 차이와 비교할 때 지속 내의 끊임없는 변화는 본성상 차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공간과 지속 사이의 본성상 차이가 이제 지속 내의 차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전히 공간과 지속은 본성상 차이나는 것들이며, 지속의 본성상 차이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내 심리적 지속의 매 순간이 이전 상태와 본성상 차이난다 하더라도 이 차이가 내 심리적 지속을 어떤 다른 존재의 지속으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차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의 지속 내의 차이들은 다수 지속들 간의 본성상 차이와 비교하여 정도상 차이들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수의 지속들 사이의 차이도 지속과 공간의 차이에 비교할 때 정도상 차이로 파악될 수 있다.5)
『시론』에서 『물질과 기억』으로 어떤 결정적 이행이 일어났다면, 그 이행은 지속과 공간 사이의 본성상 차이가 해체되면서 지속에 본성상 차이가 배당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태는 그보다 복합적이다. 지속은 그 안에 두 가지 차이들을 끌어들이게 된다. 다수 지속들 간의 차이와, 생명-기억과 물질 간의 차이가 그것들이다. 그리고 이 두 차이들은 모두 지속의 차이들로서 공간적 차이와 대립한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우리는 네 가지 차이들을 구분해야 한다. 1) 하나의 지속 내의 차이들, 2) 다수 지속들 간의 차이들, 3) 생명-기억과 물질 간의 차이, 4) 지속과 공간 간의 차이.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재도입했다고 할 수 있는 강도 개념은 바로 이런 차이들과 관계한다. 쿠바는 이렇게 말한다. “베르그손은 언제나 생명의 강도라는 자신의 개념을 심화시키고자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시간적” 측면과 같이 “공간적” 측면도 고려해야만 했다. [시간과 공간] 이것들 어느 것도 자신만의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두 실재들 간의 관계일 수 없다. 반면, 실재가 이 둘의 상호 관계를 거쳐 세워지고 유지될 뿐이다. 모든 실재는 이 복잡한 “중간 지대”에서 태어나고 새로워진다.”6) 강도는 이런 “중간 지대”, 베르그손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접합점”인 것이다. 결국 들뢰즈의 강도 개념이 경험을 낳는 발생적 근원라면,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은 반대로 경험적 차원에 위치하는 결과물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쿠바의 인용문에서 암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문제, 즉 진정한 시간인 지속(들), 그리고 물질과 공간이 갖는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네 가지 차이들의 관계 속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베르그손의 존재론을 그려보는 일, 이 네 가지 차이들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이다. 들뢰즈의 강도 개념과의 대조를 통해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이 오롯이 드러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차이들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들뢰즈의 강도 개념이 갖는 존재론적 함축과의 대조 속에서 시도될 것이다.
*후주
5) 또 『창조적 진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두뇌는 그것이 설치할 수 있는 운동기제들의 수(...)가 무한하다는 점에서 다른 두뇌들과 다르다. 그런데 제한된 것과 무젷나의 것 사이에는 닫힌 것과 열린 것 사이에 존재하는 만큼의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정도차가 아니라 본성의 차이이다.”(『창조적 진화』, 황수영 옮김, 아카넷 392/264. 이하 EC로 약칭) 다수 지속들 사이에도 본성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베르그손은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를 매우 유연하게, 상당히 느슨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들에 대한 베르그손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적 강제를 위한 습관과 여타의 습관들 사이의 차이를 본성상 차이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어떤 크기가 다른 것에 비해 너무나 커서 이 다른 것은 그에 비하자면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일 때, 수학자들은 이 크기는 어떤 다른 질서 수준에 속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강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압력은 다른 습관들이 갖는 압력에 비해볼 때, 정도상 차이가 본성상 차이에 해당할 정도로 크다.”(MR, 2/982) 정도상 차이가 너무 클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이를 정도상 차이라고 부르지 않고 본성상 차이라고 부르는데, 이 “너무 큼”의 기준은 일의적이지 않고 관점에 따라 상이해진다.
6) Pavel Kouba, “Le mouvement entre temps et espace(bergson aux prises avec sa découverte)”, in Annales bergsoniennes Ⅱ, 2005 PUF, 225쪽. 우리가 3), 4)의 차이들, 즉 생명-기억과 물질 간의 차이와 지속과 공간 간의 차이를 구분했던 것과 달리 쿠바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공간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물질에는 어떤 실재적 위치를 주고자 했던 베르그손의 경향을 하나의 실패로 보고 있다. 베르그손은 지속의 일원론 때문에 공간, 고정성, 상태 등이 갖는 실정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이원론의 두 대립항 계열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사심한 주석가가 한계를 보는 곳에서 애정 어린 독자는 가능성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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