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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에
26년만의 만남이었던 것 같다. 금년 2월에 정년 퇴임을 하셨다는 은사님을 뵈온지가.... 살아오면서 가르침을 받은 은사가 수없이 많지만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신 분은 고교시절의 국어선생님으로 재직하셨던 성창훈 선생님과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이셨던 강연호 선생님 두분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때의 담임이셨던 강연호 선생님은 초등학교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인 충청도로 가셨기에 지금은 찾을 길이 막연하다. 5학년 때의 담임이셨던 그분이 어느 날 하교시간에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현재야, 너는 머리가 괜찮은데 그렇게 싸움질만 하다가 장래 어쩔 셈이냐’며 준엄하게 꾸짖은 후 조용히 책을 한권 내어놓으시는데 보니까 누른 표지의 「중학입시」라는 책이었다. 46배판으로 큼지막하게 인쇄된 중고 책이었지만 그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나에게는 귀중한 책이었다. 그 후 마음을 다잡아 공부를 하여 중학교 입학 때에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는 매년 우등상은 받아왔던 터였다. 그 당시 집안이 어려워 사춘기에 막 접어들어 방황하던 시기에 내 마음을 다 잡아준 그 분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 찾을 길이 막연하다.
그 다음에 내 마음에 자리잡으신 분은 성창훈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고향은 주상 원동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우리 학교에 부임하셨던 것이다. 가장 인상깊은 것은 매 시간이면 밤새도록 등사판으로 밀은 인쇄물을 수없이 나누어 주시면서 꾸밈없이 조용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가슴에 와 닿았다. 많은 학생들이 좋아했고, 나 역시 소탈하신 그 가르침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는 시간인 26년 만에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선생님의 모습은 예전의 그 스타일 그대로 이셨지만 - 서릿발이 한결 허옇게 내려앉았고 머리칼도 많이 빠지신 것 같았다. 하지만 꾸밈없고 소탈하신 그 모습은 옛날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제가 5월 15일-스승의 날이자 석가탄신일이었다. 약 1달 전부터 초임지 W초등학교에서 두 번째 담임을 맡은 제자들이 무주에서 첫 모임을 갖는다며 꼭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응낙을 한 터였다. 하지만 얼마 전 서울에 있는 J동창의 제의를 받고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금년 2월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하셨는데 퇴임식 때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말라고 하셔서 제자들이 한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번이 퇴임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스승의 날인데 한번 찾아가 뵙는 게 제자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제의를 듣는 순간 ‘꼭 찾아가 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자신이 교직을 몸을 담고 있는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 때문에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6년전 40대의 나이로 처음 나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셨던 것이었다. 처음에 내가 청탁을 드렸을 때 한마디로 주례를 서기에 나이가 적다면서 한사코 거절하셨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끈질기게 청을 드려 끝내 선생님의 승낙을 얻었던 것이다. 한복을 차려입고 처음 맡은 주례이기에 오히려 신랑신부보다 더 긴장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결혼식을 올릴 즈음은 초등학교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때였다. 남녀 제자들이 나와서 불러 주었던 축가가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하는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랑신부가 행진을 할 때 제자들이 접어 만든 수많은 종이 비행기가 식장 가득 날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신혼여행지는 진주의 진양호였는데 그 당시 하객으로 온 선후배와 친구들이 별도로 차량을 한 대를 더 내어 신혼여행지 까지 와서 호텔을 잡아주고 밤늦도록 같이 지냈었다.
선생님 댁은 내가 살던 본가와도 가까운 곳(개봉)에 있었으며, 마당이 꽤 넓어 뜰에는 사과나무도 몇 그루 있었으니 2백평 가량은 되지 않았는가 싶다. 나도 언젠가 형편이 되면 이렇게 마당에 사과나무도 심고 푸성귀도 가꾸며 살고 싶노라고 몇 번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일본을 떠난 몇 개월 후 집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었다. 편지 내용 끝에 어느 날 선생님께서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나의 본가를 수소문하여 찾아오셨다고 했다.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거창을 떠나 이사를 가야할 형편인데 전세금만 조금 마련해주면 당신께서 사시던 그 집을 나에게 양도하고 싶다’고 의향을 밝히시더라는 것이었다. 나머지 잔금은 내가 살아가면서 갚으면 될 거라고 하시면서....나는 그 이야기를 일본에서 듣고 정말 가슴이 뭉클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조카들이 그 집을 사고 싶어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고교시절의 제자에게 당신께서 머무시던 집을 맡기고 싶어하신 것이었다.
그 후 귀국을 하고서 이따금 비 내리는 날에는 선생님과 함께 지내던 일들이 생각나곤 했었지만 어디로 이사를 가셨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생활에 쫓겨 거의 선생님을 잊고 지금까지 왔던 것이다. 십여년 전쯤 경기도 안성에 계시다는 풍편으로 소식을 들었지만, 이제야 찾아뵙게 된 것이었다.
아침 7시40분 서울행 버스에 단신으로 몸을 실었다. 나 말고도 고향에 제자들이 여럿이 있지만 모두가 바쁜 생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선뜻 나서는 친구가 없어 혼자라도 상경하기로 하였다. 부산에서는 시교육청에 사무관으로 근무하는 D군과 금년 동창회 때 익살스런 농담으로 모두를 즐겁게 했던 S군. 그리고 P양이 온다는 것이었다. 울산에서는 나와 함께 敎大에 들어가서 진주에서 같이 하숙했던 L군도 참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그는 작년에 승진하여 중학교 교감으로 재임 중인데 갑자기 학교에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참석하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그도 선생님과는 각별하게 지냈기에 꼭 참석하고 싶어했는데 여건이 허락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창에서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간 C군이 보고싶어 연락을 했더니만 흔쾌히 참석의사를 밝혀 왔다. 역시 C군이구나 싶었다. 심성이 고운 그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격을 지녔으며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고 절친하게 지냈다. 군복무 시절 그가 보고싶어 면회를 가기도 했었다.
가는 길은 5월의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었다. 시원스레 뚫린 대진고속도로를 지나 경부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아카시아와 함께 조팝나무 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카시아는 외래종이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토착화에 성공하여 우리의 산하 곳곳에 퍼져있다. 화목용이나 사방공사용으로 들여왔으며 가시가 있고 잘라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끈질긴 생명력은 다른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목질이 연약해 목재로는 부적합하지만 그 향기는 얼마나 좋은가? 아카시아 꿀은 저장성이 좋고 품질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여왕벌을 키우는 로얄제리도 아카시아 꿀로 보관을 해야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서울까지는 약 3시간 반이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가는 도중에 W사의 프리렌스로 근무하던 K의 전화를 받고 잠이 깨였다. 인천에서 강의가 끝났는데 도착예정 시간을 묻는 전화였다. 출발할 때 근무처의 간호사가 지어준 콧물 감기 약을 먹었기 때문인지 1시간 남짓 졸았던 모양이다. 대진고속도로가 뚫리고 나서 서울의 거리는 1시간 가량 단축되어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것 같았다.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니 K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무척 보고픈 얼굴이었기에...
은사님이 계신 곳이 과천이라니까 자기 사는 곳과 가깝다며 나중에 데려다 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차를 타고 또 다른 제자인 D양과 전화로 연락하여 백운 호숫가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상향길에 신탄진 휴게소에서 햄버거 1개와 커피한잔을 마셨기에 시장한 줄 몰랐으나 K는 무척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항상 총기가 서린 그의 눈매엔 피로함이 역력하였다.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작은 체구지만 다부진 성격의 그는 회계사에 오래 근무하여 그 방면에는 베테랑이라고 하였다. 셋이서 호반근처의 옛날 초가집으로 꾸민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동기생들에게는 6시까지 약속장소로 알아서 가겠노라고 해 두고서...
차(茶)라도 한잔 사고 싶었는데 끝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 모였노라고 재촉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들과 좀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더 지체할 수 없어 가는 길에 꽃가게에 들러 꽃다발을 하나 사서 서둘러 가니 입구에서 기다리고들 있었다.
S군은 부산에서 전문 주례를 자주 선다고 했다. 사은회는 그가 걸쭉한 목소리로 진행을 하였는데 자칭 IQ 150의 두뇌로 상행길에 즉석으로 지었다는 자작시도 낭독하고 나름대로 사회 맡을 준비를 단단히 해 온 것 같았다.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지만 거리낌없는 오십대 중반의 세속적이고도 너무도 세속적인 그의 입담에 모두들 배꼽을 쥐고 웃었다. 은사님께는 행운의 열쇠 1냥과 꽃다발을 준비하였다. 가져간 디카로 여러 컷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를 태워다 준 K를 떠나 보내었다. 아쉬운 별리를 정한을 남긴 채....
이 후 술자리는 장소를 옮겨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모두들 반쯤 풀린 게츰스레한 눈으로 흘러간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늦은 밤까지 흥겨운 시간들을 보내었다. 늦은 시각에 은사님부부를 배웅하고 고교 서울지부 회장인 J군의 안내로 찜질방으로 갔는데 음주상태라며 문전 추방을 당하고 2차로 잠실 수양 찜질방이란 곳에 여장을 풀었다. 시각은 2시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침에 눈을 떠니 머릿속은 눅눅한 안개가 자욱히 끼어 있었다. 연이은 폭음으로 피곤이 엄습했으나 샤워를 하고 10시 가까이 되어 찜질방을 나와 복국집으로 옮겼다. 국세청에 근무하는 C군과 연락이 닿아 나온다고 했다. 그는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과장으로 재직 중이라고 했는데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그 곳에서 또 해장 술판이 벌어졌는데 금새 소주 너댓병과 맥주 서너병을 비웠다. 모두들 알키하게 해장술이 도를 넘자 ‘한강 유람선이나 한번 타고 가라’는 C군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부산 팀들은 결국 예매해 놓은 고속열차의 승차를 미룬 채 한강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유람선 위에서 캔맥주로 이어진 술자리는 내려야 할 곳에 내리지 못하고 결국은 뚝섬까지 이어졌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즈음- 아쉬움을 접고서 모두들 동으로 서로 흩어져 나도 남부 터미널 하행길에 몸을 실었다.
산다는 건-끊임없는 만남과 헤어짐이 연속이 아니던가?
쉰을 넘긴 나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떠오르는 얼굴!! |
첫댓글 다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는데 이연구사 께서는 옛 은사님을 생각하는 정리가 그렇게 각별하시니 정말 감동적이네 후회없는 한양행을 택한 것 같네. 눈에 선하게 장면 장면을 실감있게 표현한 글을 읽고 가슴 한구석이 찡한 이유는...
멋진 글 잘 봤습니다.사람의 인연이란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끔하게 되지요
잘 읽고 갑니다.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은사님의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