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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과 세계도덕성의 문제
김 진(울산대 철학과 교수)
1. 왜 세계도덕이 필요한가?
현시대는 각각의 서로 다른 종교, 이념, 전통, 문화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과 장소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이른바 다문화적 컨텍스트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세계나 사회에서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원격성이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원격성이 극복됨으로써 다문화적 복합성에 은폐된 충돌 가능성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실체적 위기현상들로 인하여 인류는 지금 전례 없이 새로운 도덕의 정초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계는 지금 군사비용으로 매분 당 1,800만 달러씩 지출하고 있다. 기아와 질병으로 매 시간당 500여명의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매일 한 종 이상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매주 체포와 고문과 살해가 증가하고 있다. 제3세계 사람들은 1,500억달러 이상의 외채에 시달리고 있으며, 매월 75억달러가 증가하고 있다. 매년 한국의 넓이 3/4에 해당되는 원시림이 사라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환경, 정치, 경제영역에서 갈수록 고조되는 위험요소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해결에 대한 단초가 쉽게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교문화적 갈등요인 역시 세계평화를 실제적 또는 잠재적으로 위협하고 있다.1) 따라서 "전체인류를 위한 도덕의 필연성"(Notwendigkeit eines Ethos für die Gesamtmenschheit)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1) 한스 큉의 과제
1928년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 신학자이고 현재는 튀빙겐 대학의 에큐메니칼 신학 정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는 한스 큉(Hans Küng)은 최근에 지금까지 그가 집중적으로 수행하여 왔던 조직신학 및 철학에 대한 작업2)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종교적 실천 및 세계도덕성의 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3)
이 새로운 과제는 그가 1989년 2월 파리에서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심포지움에서 "종교평화 없이는 세계평화도 없다"라는 주제를 발표하고, 1990년 2월 다보스(Davos)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에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왜 전지구적 윤리 기준이 필요한가?"라는 주제강연을 하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스 요나스 및 칼-오토 아펠과의 공개적인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만하다(PW, 15). 현대철학의 영역에서 보편적인 규범윤리학의 정초요구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상적 노선은 한스 큉의 세계도덕 정초요구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그는 로베르트-보쉬(Robert-Bosch) 재단의 지원 아래 "종교평화 없이는 세계평화도 없다"는 주제 연구에 천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 시대의 도덕적, 종교적 갈등의 해소를 위한 대화노력을 통하여 세계평화를 추구한다는 그의 기본구상이 마련된 셈이다.4)
그는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 세계도덕과 세계평화를 언급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1990년 2월에 그는 교회 안의 문제해결을 위한 구상을 담아서 『희망의 보존: 교회개혁론』5)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교회 밖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세계윤리구상』을 새롭게 내놓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한스 큉은 개별적인 종교들과 윤리전문가들이 원천에 대한 공동연구, 역사적 분석, 체계적 평가, 정치적 사회적 진단을 통하여 전지구적 윤리를 위한 의식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세계윤리는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구상된 것이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도덕이 없는 생존은 없다. 종교평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종교대화가 없는 종교평화는 없다"(PW, 13).6) 결국 추구되어야 할 세계도덕은 서로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로부터 비로소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근대와 탈근대의 전환점에 서서
한스 큉에게 1918년은 19세기와 20세기의 분수령이자, 근대와 탈근대의 전환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이미 17세기 중엽부터 근대철학, 자연과학, 형식적인 법치국가 및 정치이해와 더불어 몰락하기 시작한 근대세계는 포스트모던적 세계질서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잘못된 발전모델로 인하여 새로운 파국을 향하여 치달았다. 한스 큉이 제시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 군국주의(Militarismus), 공산주의(Kommunismus)의 출현이었다(PW, 23). 첫째로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근대를 출발시키고 조직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동적이고 국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악령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에서의 파시즘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 일으켜서 600만명의 유태인 학살을 포함한 5,500만명의 인명손실을 초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1,0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독일제국과 400년 동안 지속되었던 프로테스탄트의 국가 교회 및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둘째로 일본의 군국주의는 한국, 만주, 중국본토, 미얀마, 싱가포르, 뉴기니아까지를 유린하였으나, 1945년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 침몰하게 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오늘날까지도 도덕성이 결핍된 몰지각성의 전형으로 각인되어 있다. 셋째로 동구와 소련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구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반동적인 운동에 그치고 말았다. 1917년 3월 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민주주의 운동은 레닌의 귀국과 함께 좌절되었다. 그 당시 투표자의 24%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던 레닌의 공산주의는 붉은 군대의 폭력적인 의회해산으로 집권에 성공하였다. 폭력정치, 탈법정치, 집단테러, 강제수용소 등을 통하여 근대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계획경제와 일당독재, 그리고 국가기구에 의한 계급투쟁 등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표방하는 구호들은 미래를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하였다.
한스 큉은 여기에다가 사회주의국가(Staatssozialismus), 신자본주의(Neokapitalismus), 그리고 일본주의(Japanismus)를 미래 없는 질주의 유형으로 첨가하였다(PW, 25). 첫째로 레닌-스탈린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공산주의는 1953년의 베를린, 1956년의 부다페스트, 1968년의 프라하, 1970년의 그단스크에서 일어났던 민중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1989년의 중국 사태와 1990년 소련 공산당의 이른바 권력독점 포기선언으로 차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18년 이후에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기회는 결국 미국과 소련의 적대주의에 의하여 사라지고 만 것이다.
둘째로 신자본주의의 출현을 들 수 있다(PW, 26). 미국이 주도한 민주주의 정신과 자유의 이상은 어떤 유형의 독재주의보다 더 강력하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미국 월스트리트의 신자본주의는 새로운 암초였다. 그들은 "부자가 되어라, 빚내고 허비하고 즐겨라"(Get rich, borrow, spend and enjoy)라는 슬로건으로 1980년대의 탐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레이건의 집권은 미국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하게 하였고, 주식불황은 수많은 회사와 은행을 파산에 이르게 하고 심각한 고용불안을 야기하였다. 폴 케네디가 지적한 것처럼 상승과 절정의 다음에는 고갈과 허탈이 뒤따른다는 세계권력에 대한 역사적 체험을 확인해 주었다.7) 한스 큉은 서구강대국들이 직면한 위기는 세계 전체의 윤리적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것은 전통의 파괴, 포괄적인 차원에서 삶의 의미의 파괴, 절대적인 윤리척도의 파괴 및 새로운 목표의 결여 등 하드웨어적 위기와 수많은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 약물중독, 에이즈 확산 등 소프트웨어적 일탈구조로부터 첨예화되고 있다. 서구의 가치규범은 이제 진공상태에 처하여 있다. 서구가 동구에 대해서 승리했던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셋째로 일본은 전쟁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특유한 경쟁심을 바탕으로 세계경제의 3위권 국가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제 역시 무분별한 능률과 효율, 무원칙한 유연성, 무책임한 권위주의적 통제, 윤리적 전망을 배제한 정치와 경제, 호혜주의를 배제한 무역과 상거래, 죄의식을 배제한 전쟁책임 등의 문제로 자성을 요구받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윤리적 의식이 전적으로 결여된 일본주의의 속성은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정치사회적으로 불교와 유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인 입장을 강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조상숭배적 성격에 머물러있는 신도주의의 편협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근대성의 추락과 포스트모던적 실험
근대 이념들의 몰락은 서구적 가치와 업적들에 대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노정하였다(PW, 31). 근대인은 학문은 가지고 있었으나 과학적 연구의 남용을 규제할 지혜는 갖고 있지 않았다(Wissenschaft, aber keine Weisheit). 근대인은 고도의 기술이 야기하는 예측불가능한 위험을 통제하기 위한 기술은 가지고 있었으나 정신적 에너지는 갖고 있지 못했다(Technologie, aber keine geistige Energie). 예를 들면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대중의 비참을 외면하고 원자폭탄을 제조하였다. 또한 근대인들은 공업은 강조하였으나 생태학은 외면하고 말았다(Industrie, aber keine Ökologie). 지구의 허파였던 브라질의 열대림은 벌목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근대인들은 권력주의자들의 관심 속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으나 윤리를 추구하지는 않았다(Demokratie, aber keine Moral). 현대의 진보사회가 자기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바로 근대적 이성 이해의 위기 때문이었다(PW, 33).
근대를 특징지우는 공산주의(사회주의)와 자본주의(자유주의) 체제는 더 이상 희망을 보증해주지 못하는 낡은 이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PW, 34). 이와 같은 이념적 가치 속에서 실험적으로 도입된 창조 가능성에 대한 한계 체험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로 근대인은 원자력의 평화적 또는 군사적 이용을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자기파멸을 초래하게 되었다. 둘째로 전자정보학 시대의 통신기술로 인한 정보의 대량유출은 방향감각을 잃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셋째로 세계적 규모의 주식 및 금융시장의 형성은 온갖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세계의 통화 및 경제조직의 총체적인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다. 넷째로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의 유전인자를 조작하는 등 부작용이 예상된다. 다섯째로 의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증대시켰으나 생명 문제에 대한 논쟁점을 드러내고 있다. 여섯째로 우리는 지구의 남북분열은 빈곤의 문제를 한층 더 심화시키고 있다(PW, 35f).
그리하여 이와 같은 새로운 요구는 자연스럽게 후기산업사회로의 이행을 촉발하였다(PW, 37). 다니엘 벨에 의하면 후기산업사회는 농업이나 공업 등 생산경제보다는 무역, 수송, 보건, 교육, 연구 등 서비스경제가 우위성을 차지하며, 이론지식과 새로운 지적 기술 중심으로 새로운 기술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보지식사회인 것이다.8) 이로써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는 목표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어왔던 모든 낙관론적 기대의 상실과 서구의 몰락을 기다리는 비관주의적 이상주의의 인기상승, 그리고 대형 생태사고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류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개혁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군비경쟁 대신 민간부문에 대한 기술전환 및 인력지원(Rüstungskonversion), 폐기물의 재생과 환경보호자원의 처리를 위한 생태공학(Ökotechnik)의 출현, 에너지 저장기술(Energiespeicher- Technologie)과 태양열 이용 기술의 개발, 핵융합(Kernfusion) 기술 및 신소재의 발견(Erfindung nuer Werkstoffe)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9)
다른 한편, 군사지배와 동서의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막대한 예산이 민간부문으로 투입될 수 있게 되었다. 동구권의 국가들은 서구의 발전에 합류하여 민간복지의 향상을 꾀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농업경제와 사회정책, 주택건설과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통하여 국가의 재정적자를 만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동서의 긴장완화를 계기로 남북의 경제문제를 극복하는 동시에 전지구적 차원에서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의 종말"(Francis Fukuyama)이 아니라, 어떤 목표가 의미 있고, 어떤 가치가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어떤 확신이 확고한 기초 위에 근거하고 있는가가 물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개별적인 목표와 가치, 그리고 개별적 확신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도 아니고, "복지국가의 종말"(대처리즘)이나 "개인주의의 개선"과 같은 거대과제만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세계변화에 대한 현실적 평가 및 장기적 변화, 즉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세계의 총체적 위상과 관련된 근본적인 방향정위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PW, 39f).
후기 근대는 여전히 유럽 중심적이지만, 북미, 소련, 일본, 중국, 인도 등 다양한 세계지역의 다중심적 위상과 대치하고 있다. 후기 근대는 대외정책적으로 후기 식민주의적, 후기 제국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국제연합의 위상강화가 특징적이다. 또한 경제정책적으로 후기 자본주의적인 동시에 후기 사회주의적인 "생태-사회적 시장경제"(öko-soziale Marktwirtschaft)를 지향하며, 서비스산업과 통신산업이 주도하는 후기 산업사회이고, 가정과 공적 영역에서 남녀의 동반자적 관계가 강조되는 한편, 다원적이고도 총체적인 문화와 "다교파적 일치의 세계공동체"(multikonfessionelle ökumenische Weltgemeinschaft)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PW, 40f).
이처럼 새롭게 부각되는 포스트모던적 세계질서에서는 가치의 파괴 대신에 가치의 변화를 의도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을 배제하는 과학이 윤리적 책임을 인정하는 과학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지배가 인간의 인간성에 기여하는 기술공학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이 자연과 일치하는 인간의 관심사와 욕구를 증진하는 산업으로, 그리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자유와 정의를 통하여 화해하는 민주주의로의 가치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세계는 총체적 시각을 가지고 유럽-미국식 사고와 아시아적 사유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PW, 42). 루만, 가다머, 카프라 등의 의견일치가 가능한 다차원적 사회모형이 실험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 경우에 특정지역의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자기주장은 문화적 국수주의, 언어적 편협주의, 종교적 전통주의가 아닌 총체화와 일치화의 경향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리오타르나 웰쉬가 말하는 극단적인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PW, 43). 한스 큉은 포스트모던의 특징을 임의성, 다양성, 혼합, 사고방식의 부재, 방법론적 무정부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하면서, 슈패만의 보수주의적 비판을 인정한다.10) 또한 동시에 그는 총체성과 통합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전체성, 근대 이전의 교회 통합주의, 건축양식에서 후기 근대적 고전주의, 철학에서의 본질주의와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 등과 같이 세계를 획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포스트모던적 세계에서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삶의 설계, 행위규범, 언어놀이, 삶의 양식, 학문의 구상, 경제체제, 사회모델, 그리고 근본적으로 사회의 동의를 배제하지 않는 신앙공동체가 들어서게 된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에 대한 맹목적인 "반대"(Gegenmoderne)나 "초월"(Ultramoderne)이 아닌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지양"(aufheben)을 시도해야 된다. 그리하여 근대는 그 자체의 인간적인 내용이 긍정(affirmieren)되어야 하고, 그 비인간적인 한계는 부정(negieren)되어야 하며, 새로운 차원에서의 다원적이고 전체적인 종합으로 초월해(transzendieren) 나가야 한다. 한스 큉은 이러한 기본신념을 가지고 세계윤리를 정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PW, 45).
2. 세계도덕이 없는 생존은 없다
한스 큉은 세계도덕과 인류생존의 문제를 연결시킴으로써 전지구적으로 타당한 윤리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현재의 상황을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시대라고 진단한다(PW, 14).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세계는 파괴를 일삼는 비인간적 정책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주로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군사주의, 신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이었다. 그러나 평화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던적 세계질서(postmoderne Weltordnung)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도덕적 규범을 일탈한 자연과학의 성장과 환경을 파괴하는 첨단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윤리학의 합리적 정초 가능성 그 자체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종말론적 위기의식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상극적이고 모순적이며 또한 투쟁적인 상이한 도덕들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인류의 생존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지금 세계는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하나의 근본적 도덕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스 큉은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우리의 전지구적 책임은 지금처럼 이렇게 심각한 적이 없었다. […] 왜 우리가 전지구적 윤리를 필요로 하는가는 너무나 분명하게 되었다. 세계도덕이 없는 생존은 없기 때문이다(PW, 96).
그러나 우리가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통일된 종교나 통일된 이데올로기와 같은 전체주의적 통일성의 이념이 아니라, 상이한 세계종교들의 존재와 문화-전통적 다양성 위에서 기초될 수 있는 이른바 세계적 구속성을 가진 가치와 이상, 즉 "세계도덕"(Weltethos)인 것이다.
실제로 종교들은 전적으로 상이할 뿐만 아니라 상호간에 모순되기조차 한 이론적 실천적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세계종교들은 서로 다른 제도와 의식, 그리고 도덕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회교도들은 많은 부인을 가질 수 있으나 기독교인들은 한 부인만을 가져야 하며, 불교인들은 절대로 살생을 해서는 안 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구속받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처럼 상이한 교의체계 및 상징체계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도덕을 정초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는가?(PW, 80) ―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한스 큉은 바로 이러한 문제 상황 속에서 세계종교의 도덕적 측면에 대한 분석(PW, 81-86)을 시도함으로써 그 모든 종교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도덕성의 지반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리고 모든 참된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며 도덕적인 일반 규범과 이성적인 중용의 길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세계종교들은 도덕적 동기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종교들 속에 함축된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스 큉은 세계 속에서의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 조건으로서 교파일치적 세계질서(ökumenische Weltordnung)를 요청하고 있다.
1) 무엇을 위한 윤리인가?
20세기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태적 발전으로부터 비롯되는 재앙은 지구상에서의 인류생존을 위한 세계윤리를 요구하게 만들었다(PW, 46). 따라서 윤리는 이제 세계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대답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하고, 악을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 나의 동기유발 및 행위결정에 대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최소한의 도덕성 요구는 나의 존재가치에 대한 확인이다. 그러므로 근본합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PW, 48f). 민주주의는 자유와 인권을 존중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최고가치나 최종적인 규범도 규정해서는 안 된다. 엄격하고 통제적인 규정준수보다는 구성원들의 기본적 동의를 전제한 다양한 가치 및 문화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의 가치, 규범, 태도에 대한 "최소한의 근본동의"(minimale Grundkonsens)가 배제된 상태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되는 공존은 불가능하게 된다(PW, 49). 예를 들면 1919년에서 1933년 사이의 바이마르공화국의 독재와 혼돈 속에서 인권의 문제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근본동의, 즉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회의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의견의 일치, 경제와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의견의 일치,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고 역사적 변화 속에 서있는 제도에 대해서 최소한 침묵하고 언제나 새롭게 동의하는 의지는 언제나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윤리적 근본정위는 우리의 미래전략의 주요 개념을 "이 지구에 대한 인간의 책임", 즉 "지구적 책임"(planetarische Verantwortung)으로 상정하고 있다(PW, 51). 이를 위해서는 결과윤리나 심정윤리보다는 책임윤리가 강조되어야 한다. 결과윤리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신성시하고, 이익과 권력과 향락을 가져다 주는 것을 선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심정윤리는 정의, 사랑, 진리와 같은 고립된 이념을 지향하지만 역사성과 미래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특정한 상황과 처지를 무시하는 비정치적 측면이 있어서 때로는 심정적 근거에서 폭력사용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PW, 51f). 그러나 1918년 겨울에 막스 베버가 제안한 책임윤리는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실제적인 결과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부과된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윤리가 심정윤리와 대립된 개념은 아니다. 그리하여 한스 큉은 심정윤리와 책임윤리의 상호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심정윤리를 배제한 책임윤리는 결과를 위하여 모든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결과윤리로 전락할 것이고, 책임윤리를 배제한 심정윤리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내면성을 보살피는데 그칠 것이다"(PW, 52).
생태학적 시대를 맞이하여 책임윤리는 한스 요나스에 의하여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한스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우리 지구의 전체 생명, 암석, 물, 원자세계를 위한 총체적인 책임의식뿐만 아니라, 미래생존을 위한 인간의 자기통제를 요구함으로써, 자연을 경외하고 미래를 염려하는 "새로운 윤리"로 부각되었던 것이다(PW, 52). 2000년대의 화두는 단연 "미래를 위한 세계공동체의 책임"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공동세계(Mitwelt), 환경(Umwelt), 후대(Nachwelt)에 대한 책임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본조건 아래서 우리는 지구 위에서 인간으로서 생존할 수 있고, 우리의 개인적 또는 사회적 삶을 인간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가?(PW, 53)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은 지금보다 더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고, 보다 더 인간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가진 잠재적 능력을 가능한 한 인간적인 사회와 깨끗한 환경을 이룩하는데 활용해야 한다. 인간성을 활성화하는 인간의 가능성은 그의 현재 상태보다 더 크다. 이런 의미에서 실제적인 책임원리는 유토피아적인 희망원리와 공속적이다(에른스트 블로흐).
보다 더 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인간 그 자신이 윤리의 기본원리가 되어야 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말하듯이 인간은 언제나 목적이어야 하고 단순한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경제, 자본, 과학, 기술 등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다. 근대의 윤리적 관심은 개인에 치중하였으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인류의 생존과 복지에 관심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사회, 과학, 기술, 정책 등의 영역에서도 윤리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하였으며, 플라톤에서 아퀴나스를 거쳐서 아담 스미스에 이르는 윤리학자들이 정치와 경제를 윤리적인 전체 맥락 속에서 통찰할 것을 권고하였던 사실들에 대한 중요성이 오늘날에 이르러서 새롭게 인지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인 영역이나 경제 및 과학기술 등의 분야에서 윤리적인 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혼돈과 갈등과 무질서가 난무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스 큉은 "세계윤리가 없이는 세계질서도 없다"(Keine Weltordnung ohne Weltethos)는 테제를 확정하게 되었다(PW, 56).
인간은 언제나 법과 규정, 심리학과 사회학 등을 통하여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윤리적 토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탐닉하고 있는 약물 및 알코올 중독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북미나 유럽의 교육문제 역시 그렇다. 모든 국가가 경제질서와 법질서를 구비하고 있으나, 그것이 만일 윤리적 동의를 배제한 상태에서 작동할 경우에는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국제적인 국가공동체 역시 그와 같은 초국가적, 초문화적, 초종교적 법적 구조를 창출하였으나, 그것이 만일 인류 전체에게 구속성을 갖는 윤리, 즉 세계도덕성을 배제하고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계시장과 유전공학의 연구실, 그리고 막강한 세계종교로서의 교회의 기도실에서 전지구적으로 타당한 규범윤리학의 기초가 무시된다면 인류는 엄청난 혼란과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세계도덕성이 전제되지 않는 곳에서는 세계질서 역시 불가능한 것이다(PW, 57).
종교는 언제나 특정한 도덕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그것을 정당화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현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한가? 왜 종교가 없이는 윤리가 없는가? 원천적으로 종교는 선악을 인식하는 윤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종교는 인류의 윤리적, 정신적 진보를 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16세기와 19세기에 로마의 바티칸과 비슷한 지배권력체제로 드러나는 것은 확실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힌두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 역시 긍정적인 측면 이외에도 부정적인 추문에 휩싸였던 때가 많았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보면 인간은 종교 없이도 얼마든지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PW, 59). 심리학적으로 종교는 미신이나 아편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경험적으로 비종교인들이 도덕적으로 활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인간학적으로도 비종교인이 가치와 규범, 이상과 기준 등을 발전시켰던 것도 확실하다. 철학적으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신에 대한 신앙 없이도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종교를 찬성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권리로서 주장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무종교의 권리도 내포하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종교에 대항해서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인 또는 비신앙인의 윤리적인 상호존중의 공동책임을 요청하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타당한 새로운 규범윤리학의 정초를 위해서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제휴가 필요한 것이다(PW, 58).
의미, 가치, 규범 등의 부재현상은 신앙인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의 삶도 위협하고 있다. 방향정위의 위기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입법 이전의 동의가 없는 민주주의가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처럼, 윤리적인 근본동의가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되는 공존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윤리가 없으면 인간사회의 생존도 없다는 결과가 생겨난다. 구체적으로 의견일치가 없으면 내적 평화도 없고 사회적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일정한 질서와 법률을 준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경제질서와 법질서도 없으며, 특정한 질서와 법률을 준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경제질서와 법질서도 없으며, 당사자들의 최소한의 묵시적인 동의가 없으면 제도도 없다"(PW, 61f).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는 기본권 보장이 점진적으로 실현되고 있고, 1980년대와는 달리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지 않으며, 제3세계의 절대 빈곤층이 더 이상 확산되고 있지 않으며, 현재의 사회복지 수준은 생태학적 재난이나 국제적인 여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으며, 빈곤층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물질적 불평등의 조건을 평준화시키고, 전쟁이 없는 세계공동체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제휴가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
2) 윤리적 보편성 주장과 계몽의 변증법
자율성과 종교의 긴장 영역에 위치한 윤리는 가치기준의 근거를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PW, 63), 계몽주의의 변증법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윤리로부터 해방된 자연과학, 전능한 거대공학, 환경파괴적 산업, 순전히 형식적이고 법적인 민주주의로 특징지워지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힘의 지배가 차츰 지배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의 이성이 비이성으로 전락한 사실은 합리적 계몽주의에 의하여 밝혀진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도덕적 구속성을 되찾아야 하는가? 1980년대 이후 아펠,11) 하버마스,12) 부브너13) 등은 실천과 그 결과인 윤리의 합리적 근거제시를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 구속력을 갖고 있는 윤리에 대한 정초문제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매킨타이어, 로티, 푸코 등은 보편적인 규범에 대한 최후정초를 포기하고, 다양한 삶의 설계와 삶의 양식이라는 관습의 문제로 돌아섰다.
아펠과 하버마스의 담론윤리 역시 왜 폭력적인 대결 대신에 논증과 동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가, 논증은 윤리인가 아니면 전략인가, 이성은 규범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성은 이제 더 이상 칸트적인 정언명령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확증된 오늘날 어떻게 규범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근거를 정초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한스 큉은 담론윤리학자들이 이상적인 의사소통공동체에 근거하여 "선험적 최후구속성"(transzendentale Letztverbindlichkeit)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절대적으로 타당한 도덕적 구속성의 근거, 즉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담론윤리학적 근거설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PW, 65).14) 그렇다면 철학과 윤리가 보편적인 지침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 시대적 상황에서 과연 종교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큉의 물음이었다.
종교는 이 시대에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는가? 후기형이상학적 시대를 맞이하여 철학자들은 그 근대적 토대지평을 망각한 채로 종교 의미에 대한 평가절하를 시도하였다.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은 종교를 투사(Projektion), 소외(Entfremdung), 억압(Repression), 민중의 아편(Opium des Volkes), 퇴행(Regression) 또는 심리적 미성숙(psychische Unreife) 등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한스 큉은 종교적 차원을 배제하는 시대분석은 힘을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참된 종교의 가능성은 이성적인 신뢰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PW, 67).
현실적으로 "종교는 권위적이고, 독재적이고, 반동적일 수 있으며, 실제로 자주 그래 왔다. 종교는 불안, 공포, 편협, 불의, 좌절, 사회와의 단절을 야기할 수 있으며, 부도덕, 사회적 병폐, 한 민족 또는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의 전쟁을 정당화하거나 유인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해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박애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또한 그래 왔다. 종교는 신실한 삶, 관대, 관용, 연대, 창조성, 사회참여를 넓혀나갈 수 있으며, 정신적 쇄신, 사회 개혁, 세계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다"(PW, 69). 그렇다면 종교와 윤리는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종교는 "하늘로부터의 고정된 도덕적 해결"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PW, 71). 세계의 주요종교들이 제시하는 윤리적 규범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역동적인 사회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적 규범을 통하여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땅위에서는 서로 다른 해결책이 모색되었다. 종교와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피하면서도 인류가 도덕적으로 바로 설 수 있는 지침이 다양한 형태로 개발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류는 윤리적 갈등 속에서도 바람직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객관적 학문적 방법을 강구해 왔다. 그리고 윤리적 주장들 사이에서 충돌이 생길 경우에는 여러 가지 규범적 원리들에 근거하여 문제를 순차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종교의 고유한 기능을 바탕으로 종교는 "윤리의 가능한 토대"로서 이해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PW, 75).
한스 큉은 비종교인들도 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윤리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내재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배제하고서는 결코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조건성(Unbedingtheit)과 보편성(Universalität)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종교의 도덕적 기능을 강조하였다(PW, 75). 왜 도덕적 요구가 정언적이어야 하는가(Kant)에 대해서 종교만이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스 큉은 인간 현존의 유한한 조건으로부터는 하나의 절대적인 정언적 요구를 도출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한스 요나스가 제시한 "인류의 생존의무"(Überlebenspflicht der Menschheit) 역시 윤리적 요구의 근거를 합리적으로 정초하는 적절한 수단일 수 없다. 요나스는 핵공학과 유전공학이 초래할 묵시록적인 잠재력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윤리가 대결해보지 못했던 형이상학적 물음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유전적 유산을 존중해야 할 인류가 왜 존재하며, 생명 그 자체는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한다(PW, 76). 한스 큉에 의하면 무조건적인 것만이 무조건적으로 의무지워질 수 있다(PW, 77). 무조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윤리적 주장은 오직 절대적인 것 또는 무조건적인 것에 의해서만 그 근거가 제시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최고의 절대적 실재는 신이며, 신만이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종교의 기본적인 기능이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종교는 절대적인 권위로써 말한다. 종교는 우리의 현존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가고 있는지(Woher und Wohin unseres Daseins)에 대한 삶과 죽음의 최종적 의미를 분별할 수 있게 한다. 종교는 최고의 가치, 무조건적 규범, 깊은 동기, 높은 이상을 약속하며,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임을 갖는가(Warum und Wozu unserer Verantwortung)를 설명해 준다. 종교는 공동의 상징, 제의, 경험, 목표를 통하여 신뢰, 믿음, 확신을 갖게 하고 자아훈련, 안정, 희망을 창조할 수 있다. 그것은 정신적 공동체와 고향(geistige Gemeinschaft und Heimat)이다. 종교는 불의한 상황에 대하여 항거할 수 있고 저항할 수도 있다. "전적인 타자에 대한 동경"(Sehnsucht nach dem ?ganz Anderen?)이 부단하게 작동될 수 있는 것이다(PW, 78).
이처럼 하나의 절대자(신)에 연관되는 참된 종교는 "이성의 여신", "진보의 신", "자연과학", "하이테크", "자본" 등 모든 가능한 유사종교와 구분되어야 한다. 이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 신 개념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와 탈신화화, 탈이데올로기화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세계 상황에서 모든 신적 가치를 세계시장으로 대체시켜서는 안 되고, 오직 한 분뿐이신 참된 신에 대한 새로운 믿음으로 대체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한스 큉은 참된 종교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PW, 79).
3) 세계종교와 세계윤리
실제로 종교들은 전적으로 다르고 서로 모순되는 이론적 실천적 구상들을 갖고 있다. 교의와 경전, 제의와 제도, 윤리와 규율에서도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종교들이 어떻게 하나의 공통적인 윤리적 요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일까?(PW, 80f) 세계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적 조망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계의 주요 종교는 "인간의 복지"(Das Wohl des Menschen)에 정향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기본 방향이다. 둘째로 세계종교는 "기초적인 인간성의 격률"(Maximen elementarer Menschlichkeit; PW, 82)을 선포하고 있다. 모든 종교들이 타협 불가능한 척도로서 요구하는 윤리규범은 절대자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효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세계종교는 살인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사랑하라는 다섯 가지 계명을 의무화하고 있다. 셋째로 세계종교는 "중용의 합리적 길"(Vernünftiger Weg der Mitte; PW, 83)을 제시하여, 방임주의(Libertinismus)와 율법주의(Legalismus), 소유욕과 무소유,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감각주의와 초감각주의, 세계애착과 세계부정의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걷게 한다. 넷째로 세계종교들은 "황금률"(Goldene Regel)을 절대적 규범, 즉 정언명령으로 채택하고 있다.15)
이처럼 종교는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에 윤리적 동기를 부여해 왔다. 그리고 종교는 윤리적 실험이 실패하는 곳에서도 유대교의 "부활", 기독교의 "영생", 이슬람의 "낙원", 불교의 "열반", 도교의 "불멸성"과 같은 삶의 의미지평과 목표설정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만일에 종교가 이와 같이 특별한 형태로써 도덕에 참여하여 개별적인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지 않았다면, 한스 요나스와 같은 생태철학자가 제아무리 인류가 누리고 있는 향락을 자발적으로 제한할 것을 강조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지구적인 악덕(Globale Laster) 또는 세계악덕(Weltlaster)을 피하고, 전지구적으로 요구되는 세계덕목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계의 종교가 공동으로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1970년 일본의 교토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세계 종교회의"(Weltkonferenz der Religionen für den Frieden)에서는 세계사회에 기여하는 세계종교의 세계윤리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종교는 평화의 실현과 일치의 추구라는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16)
그리하여 한스 큉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도덕적 요구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PW, 93ff). 첫째로 자유뿐만 아니라 정의까지도 주어져서 모든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서 연대하는 "사회적 세계질서"(soziale Weltordnung)가 요구된다. 둘째로 평등뿐만 아니라 다원성까지도 주어져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전통이 화해할 수 있는 "다원적 세계질서"(plurale Weltprdnung)가 요구된다. 셋째로 형제애뿐만 아니라 자매애까지도 주어져서 남녀의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동반자적 세계질서"(partnerschaftliche Weltordnung)가 요구된다. 넷째로 공존뿐만 아니라 평화까지도 주어져서 군사주의와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평화증진의 세계질서"(friedenfördernde Weltordnung)가 요구된다. 다섯째로 생산성뿐만 아니라 환경과의 연대성까지도 주어져서 모든 세계창조물이 공존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세계질서"(naturfreundliche Weltordnung)가 요구된다. 여섯째로 관용뿐만 아니라 일치주의까지도 주어져서 부단한 용서와 쇄신을 바탕으로 자비와 찬양의 공동체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일치적 세계질서"(ökumenische Weltordnung)가 요구된다. 결국 이상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요구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우리의 전지구적인 책임이 지금보다 더 절실하게 의식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윤리를 격리시켜보는 것 자체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세계도덕 없이는 인류의 생존 역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전지구적으로 타당한 보편적인 규범윤리학의 정초를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 종교평화 없이는 세계평화도 없다
한스 큉은 진리광신과 진리망각 사이를 걷는 일치의 길, 즉 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종교평화의 모색을 시도함으로써 진정한 세계평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종교분쟁이 민족 간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만일에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신앙과 국가를 편드신다면 우리의 적들은 논리적으로 악마의 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모든 수단의 징벌이 정당화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차별 살상과 방화 및 파괴가 자행될 것이고, 이것은 신앙으로 미화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신앙에 대한 확신이 인간에 대한 적대행위를 부추겨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가 이러한 논리에 거부할 수는 없는가?
프랑스와 독일은 역사적으로 상당 기간 동안 적대국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 후에 드골과 아데나워 등의 정치지도자들은 유럽국가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프랑스 국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대성당에서 공동예배를 드린 후에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평화서명을 하였다. 이어서 독일은 그들이 2차세계대전 중에 동구권 국가에서 저질렀던 만행과 학살의 피해자들에게 엄숙히 사죄하고 새로운 평화적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일본인들보다는 너무나 대조적인 행보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과 1980년대 이후 기독교인들의 평화운동 역시 종교가 기득권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려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랑과 자비를 말하기도 하고 전쟁과 범죄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종교진리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 진리에 대한 상이한 입장 표명은 곧 세계평화에 대한 지대한 장애요인으로 부각된다. 종교들 가운데서 평화가 이룩되지 않고서 국가들간의 평화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평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어떤 특정한 종교가 이 세계 안에 있는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로 평가된다(Vgl. PW, 102).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는 마땅히 세계평화에 공동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종교평화와 가장 긴밀한 물음은 바로 진리의 물음이다.
1) 종교적 진리주장의 세 가지 유형
종교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종교적 진리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한스 큉은 여기에서 진리광신주의(Wahrheitsfanatismus)와 진리망각주의(Wahrheitsvergessenheit)와 같은 가능한 몇 가지 전략이 가지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종교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에큐메니칼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PW, 97). 맹목적인 진리광신주의는 모든 시대와 모든 교회에 있어서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질러 왔다. 그와 반대로 대책 없는 진리망각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도록 방향감각과 규범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제 특정한 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와 신앙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다른 종교의 진리를 용납할 수 있는 신학적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기 시작하였다.
한스 알버트가 제시한 뮌히하우젠-트릴렘마와 같이 한스 큉 역시 그것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다고 간주하였던 세 가지 유형의 종교적 진리 주장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해보자.
진리광신주의자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다른 모든 종교는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종교적 평화는 하나의 참된 (국가)종교에 의해서만 달성되고 보장된다. 따라서 이들은 실제로 과거 역사 속에서 마음의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교회(=하나님의 나라)는 신성하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 입장을 가졌으며, 오늘날 미국 개신교에서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us)와 독일의 경건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큉은 "보수전략"(Festungsstrategie; PW, 105f), "절대주의"(Absolutismus; PW, 107), 또는 "배타주의"(Exklusivismus; PW, 108)라고 불렀다.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에큐메니칼 선교정책을 선포함으로써 보수전략으로부터 선회하였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는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회일치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자신의 신앙과 자신이 믿는 신만이 옳다는 보수전략적 진리주장은 종교대화를 위한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못한다.
진리망각주의자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방향과 규범을 잃은 자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진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그 방식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평화는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차이와 모순을 무시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과학방법론에서 파이어아벤트(Feyerabend)가 "어떤 방식으로든 좋다"는, 이른바 방법론적 무정부주의를 주장한 것처럼, 진리망각주의자들은 어떤 종교든지 상관 없이 무차별적으로 모두가 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종교적, 신학적 무관심주의 혹은 무차별적 다원주의를 큉은 "무해전략"(Verharmlosungsstrategie; PW, 106) 또는 "상대주의"(Relativismus; PW, 107)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종교의 이념적 본질과 역사적 현상, 문화전통과 제의 등에 있어서 모든 종교가 특수성과 차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무차별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무해전략적 진리 주장은 종교대화를 위한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못한다.
진리통합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유일한 종교만이 참이지만,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모든 종교들 역시 이 유일한 종교적 진리에 참여하여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하면 종교적 평화는 다른 종교들과의 통합(Integration)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모든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경험적 종교들은 보편적인 진리가 다른 차원 또는 다른 단계로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각각의 종교들은 각각의 형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그 모든 종교들의 뿌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제시한 "존재의 근거" 또는 "존재지반"(Ground of Being)의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 칼 라너(Karl Rahner)가 제시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e Christen)의 개념 역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종교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한스 큉은 "포용전략"(Umarmungsstrategie; PW, 107) 또는 "통합주의"(Inklusivismus; PW, 108)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 역시 자신의 종교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고, 다른 종교적 진리주장들은 부분적으로만 참이라고 천시함으로써 결국에는 참된 종교간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대화전략은 종교의 평화를 이룩함에 있어서 어떤 해결의 단서도 제공하지 못한다. 첫째로 진리절대주의나 독단주의와 같은 광신적 입장을 가지게 될 경우에 종교사이의 대화는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나만이 옳고 다른 것들이 거짓이라면 대화 그 자체는 불가능하게 되고 오직 투쟁만이 있을 것이다. 둘째로 진리상대주의나 방법론적 무정부주의의 종교학적 적용, 그리고 종교적 통합주의는 종교의 차이성 및 고유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리주장은 처음부터 차이의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대화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2) 종교일치의 보편적 근거기준과 에큐메니칼 전략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적 일치의 전제조건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일까? 한스 큉에 의하면 그것은 종교의 자체비판에서 주어질 수 있다. 각각의 종교가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성찰할 경우에 비로소 진리의 빛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설득력 있는 명제가 바로 "모든 것은 동시에 선하고 참일 수 없다"(Nicht alles ist gleich gut und wahr; PW, 109)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선하고 참이지 못하고, 어떤 경우와 어떤 것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악일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의 절대적 신앙관 역시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악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중세의 종교재판과 이단자 숙청(마녀사냥)은 악이요 비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윤리를 내세우면서도 배타적이고 편협한 차별정책을 구사하였고, 구원과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간의 죄의식을 병적으로 과장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왜곡시켜 왔다(PW, 110). 그러나 종교적 신앙이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재물과 아내를 빼앗고, 다른 민족의 땅을 차지하고, 약물중독과 환경공해를 유발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참된 일치를 위한 진리기준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종교는 표준적인 경전이나 성인의 고유한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지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PW, 112). 다시 말하면 종교의 정체성과 진리의 내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비판"에 해당되는 희랍어 krisis는 교회가 세속과 비진리로부터의 격리(Scheidung), 구분(Unterscheidung), 결단(Entscheidung)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각각의 종교는 독특한 진리기준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을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요구할 경우에는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PW, 113)
그렇다면 종교간의 일치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은 무엇인가? 종교가 그 자체의 독특한 진리기준 이외에 다른 신앙인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진리기준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종교간의 대화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한스 큉은 그와 같은 보편적인 도덕성의 기준은 바로 진리와 비진리,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생각하였으며, 그것은 바로 도덕적 가치로서 "인간적인 것"(das Humanum)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은 근대의 자율성과 교회적 해방을 성취한 후에 기독교를 새롭게 단장한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윤리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이며 용서가 없고 공격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역사적으로 사랑과 평화의 윤리보다는 미움과 전쟁의 철학을 지지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인간적인 것을 무시하였던 시대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한스 큉은 종교의 이름으로 어떤 비도덕적 또는 비인간적인 일도 허용될 수 없다고17) 강조하면서, 도덕성과 인간성이야말로 세계종교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나 자기비판의 기준, 또는 "일치적 근거기준"(das Humanum als ökumenisches Grund- kriterium)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PW, 111, 118, 119).
그리하여 한스 큉은 이제 종교 사이의 대화 가능성을 저해하는 세 가지 유형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에큐메니칼 전략"(ökumenische Strategie; PW, 114)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세계종교 속에 공통적으로 함축된 일반적-도덕적 기준을 "인간적인 것"이라고 규정하였다.18) 참된 종교는 "신적인 것"(das Divinum) 속에 반드시 "인간적인 것"을 무조건적(unbedingt), 보편적으로(allgemein) 정초하고 있어야 한다. 참된 종교는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권리 보호, 여성해방, 사회정의 실현, 전쟁의 비도덕성(PW, 117)과 같은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해야 한다. 이로써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성, 또는 인간적인 것은 모든 참된 종교의 가장 보편적인 기준으로 정초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스 큉은 에큐메니칼 전략의 기초근거로서의 인간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PW, 121):
?? 참된 인간성은 참된 종교의 전제이다! 즉: 인간적인 것(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가치의 존중)은 모든 종교에 있어서 최소한의 요구이다. 적어도 인간성(최소기준)은 참된 종교성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곳에서는 주어져야 한다. 왜 하필이면 종교인가?19)
?? 참된 종교는 참된 인간성의 완성이다! 즉: 종교(포괄적 의미, 최고가치 및 무제약적 의무라는 의미로서)는 인간적인 것의 실현을 위한 최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무제약적이고 보편적 의무로서의 인간적인 것을 실현하고 구체화하기를 원하는 곳에서는 이미 종교(최대기준)가 주어져 있어야 한다.20)
그리하여 한스 큉은 인간적인 것이 세계종교의 공통적 규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각각의 종교들은 자기비판의 기준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보편적인 주장을 모순 없이 요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세계 종교들은 인간적인 것 또는 인간성을 각각의 고유한 전통 속에서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각각의 종교들이 전제하고 있는 있는 인간적인 것은 특수한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것인가? 또한 종교들간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어떤 특정한 종교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파괴할 위험은 없는가?21) 그같은 교회일치적 합의내용은 다시 어떤 특정한 종교인들에게 도덕적 규범으로 제시될 수 있고,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가?22)
이같은 물음 속에서 우리는 한스 큉이 제시한 에큐메니칼 신학적 대안 역시 칸트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으며, 종교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규제적 원칙"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한스 큉은 이것을 단순하게 규제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계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원칙, 즉 세계종교의 기초적 윤리규범으로서 인간성 및 "인간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매개하는 변증법적 이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종교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기준이 마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는 대화능력(Dialogfähigkeit)과 입장견지(Standfestigkeit) 사이의 대립일 것이다. 종교인이 어떤 입장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고집하는 것이 진리라면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고집하는 것이 언제나 진리라는 보장을 우리는 어디에서 확증할 수 있는가? 우리가 고집하는 것이 진리라면 마땅히 그것을 지켜낼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소중한 것이라고 여겨온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신앙의 입장은 대화를 차단하는가? 어떤 교의적 진리를 추구할 경우에 그와 같은 태도표명은 보편적 규범요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 만일 그것들이 양립될 수 있다면 교의적 주장은 어느 선까지 지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복잡한 문제상황 속에서 한스 큉은 어떤 특정한 종교가 고유한 진리주장 이외에도 보편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가능성 영역을 그려내고자 시도하였다. 우선 일반적인 윤리적 기준에 의하면 어떤 종교가 인간적인 색채를 띠는 한에서 참되고 선한 종교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적 기준에 의하면 어떤 종교가 그 고유한 원천과 경전에 충실한 경우에 참되고 선한 종교라는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기독교적 기준에 의하면 어떤 종교는 그 이론과 실천이 예수의 정신을 드러낼 경우에 참되고 선한 종교라는 것이다(PW, 127). 이와 같은 한스 큉의 접근방식은 각각의 종교가 개방적인 대화를 수행하기 위하여 저마다의 고유한 신앙영역을 포기하도록 강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PW, 130). 다시 말하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각 종교의 고유한 신앙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신앙을 가진, 즉 입장견지를 전제하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할 경우에는 그들에게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의 경우에 첫째로, 우리는 교의적으로 다른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이해 없이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의 길의 실망과 다른 길이 보여준 열광으로 인하여 다른 길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다른 종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단순하게 오래된 신앙에다 덧붙여서는 안 된다. 넷째로 우리는 참된 의미의 기독교적인 과제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종교로부터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길을 새롭게 변형시켜야 한다. 존 캅이 말한 것처럼 일치를 향한 "창조적인 변화의 길"(der Weg der schöpferischen Umwandlung)23)을 가야 한다(PW, 134). 이처럼 입장견지의 근본지평에서 대화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평화의 모색이 시작되는 것이다.
4. 결론: 종교대화 없이는 종교평화도 없다
테제: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이는 국가들의 평화도 없으며, 종교들 사이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도 없고, 신학적인 기초연구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도 없다"(PW, 135). 한스 큉은 이처럼 종교대화와 종교평화의 관계성을 밝히면서 종교적 시대상황 및 종교신학적 기초연구에 대한 분석과 구상을 보여주고 있다. 새 천년의 시대에 세계종교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세계종교의 기초연구로부터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종교대화의 기초가 되는 자료들은 종교학자들의 중립적인 학문적 판단, 즉 비판적인 학문성에 의하여 확보될 수 있기 때문에, 한스 큉이 제안한 연구과제, 즉 "종교평화 없이는 세계평화도 없다"는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종교적 위치에 대한 전지구적 분석과 전망"을 통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PW, 139). 그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심지어 불교에 대한 폭넓은 학문적 연구에 착수하여 이미 놀라운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24) 한 종교에 대한 전체적 조망, 즉 역사적 발전과정과 체계설명의 시도를 통하여 그 종교와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적확하게 기술함으로써, 대화상대자로서의 세계종교에 대한 성실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한스 큉은 자신의 종교연구가 지향하는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지배적이었던 세 가지 유형의 역사기술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첫째로 헤겔의 역사철학(PW, 42)은 다양한 세계종교들을 세계사의 변증법적 노정을 통하여 드러내기는 하지만 서구정신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절대종교로 파악함으로써 기독교 정신의 우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헤겔적 기술방식은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의 위상을 폄하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와 같은 연구 분위기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스펭글러의 문화형태학은 헤겔과는 반대로 민족적인 국가로부터 세계사를 접근하지 않고, 국가를 형성하는 문화로부터 세계사를 파악하려는 시도였다(PW, 145). 그는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여덟 개의 문화권을 상정하고, 그 순환과정을 관찰하려고 하였다. 서구의 몰락, 결정론, 비합리주의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스펭글러는 제국주의 출현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결정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출현 가능성, 즉 다중심주의적이고 초문화적이며 다양한 종교적 시대와 새로운 유럽공동체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문화의 몰락현상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대종교들이 스스로 문화를 산출하고 포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셋째로 토인비의 문화순환론은 사변적 요소를 떨쳐버린 헤겔의 진화사관과 결정주의적 비관주의를 배제한 스펭글러의 순환이론을 결합한 것으로서, 6천년간 존재하였던 26개의 문화공동체 개념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는 생성 소멸하는 문화의 진화과정에서 세계의 대종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며, 결국에는 세계의 대종교들이 인류의 단일사회에 봉사하는 유일한 단일종교로 결합될 수 없는가를 다루고자 하였다(PW, 149).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한스 큉이 제시한 종교대화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종교대화는 단일종교로의 통합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종교가 갖고 있는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한스 큉은 토인비가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소홀하게 다루는 것에 반대하여 각각의 종교를 전체로서 연구하여, 종교의 다양한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한스 큉이 주목하는 방법론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다. 종교체계의 패러다임 이론(Paradigmentheorie)은 각각의 종교가 문화의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세계종교의 현상들을 적확하게 기술하는데 매우 적절하였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스 큉은 현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세계의 주요 종교를 집중 분석하여 세 가지 유형의 초개인적, 국제적, 초문화적 종교의 흐름체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PW, 160). 먼저 셈족의 종교는 예언적 특성을 갖고 있으며,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부터 시작되고 대결적 신앙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인도의 종교는 신비적 특성을 갖고 있으며, 단일성과 내적 명상을 지향하고 있다. 중국의 종교는 지혜론적 특성이 강하고 근본적으로 조화를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평화를 위한 일치신학의 가능성 조건에 대해서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PW, 162).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보편종교, 또는 단일종교를 요구하는 것이 종교대화의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합적인 상태에 있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실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적이고 구체적인 평화의 신학, 즉 각각의 종교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사유체계를 일관되게 정리하되, 종교들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점을 드러내고 자아비판과 자아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신학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PW, 163). 가장 중요한 것은 일치를 위한 지평이 확보되어야 한다. 종교,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종교대화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뿐만 아니라 정치가, 실업가, 학자, 교회, 신학, 종교교육 등 모든 집단, 모든 영역에서의 종교대화를 요구해야 한다. 그것은 공식적, 비공식적, 학문적, 영성적, 일상적 대화를 모두 포괄하는 광범위한 실험이어야 한다.
이러한 종교대화의 실험을 통하여 우리는 국가간의 세계윤리를 배제하고서는 어떠한 인간의 공생과 공존도 불가능하고, 종교간의 평화를 배제하고는 국가간의 어떠한 평화도 불가능하며, 종교간의 대화를 배제하고서는 종교간의 어떠한 평화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PW, 171).
전지구적으로 타당한 세계도덕의 정초를 위하여 한스 큉이 제안한 에큐메니칼 전략은 1993년에 세계종교의회가 채택한 "세계도덕 선언"(Erklärung zum Weltethos)25)과 같이 선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정언명령으로서 부단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칸트적인 이념이나 또는 아펠이 설정하였던 이상적인 의사소통공동체의 실현요청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것인가의 문제는 한스 요나스나 에른스트 블로흐, 그리고 칼-오토 아펠의 철학적 논의로 돌아가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1) Küng, Hans: Projekt Weltethos. München 1990. S. 20; Abk.: PW, 안명옥 역, 『세계윤리구상』, 분도출판사 1992;
2) Küng, Hans: Menschwerdung des Gottes. Eine Einführung in Hegels theologisches Denken als Prolegomena zu einer künftigen Christologie. Freiburg 1970, München 1989; ― : Christ Sein. München 1974; ― : Existiert Gott? Antwort auf die Gottesfrage der Neuzeit. München 1978.
3) Küng, Hans: Christenheit als Minderheit. Die Kirche unter den Weltreligionen. Einsiedeln 1965; Die Kirche. Freiburg 1967, München 1977; Christentum und Weltreligionen. Hinhührung zum Dialog mit Islam, Hinduismus und Buddhismus, (mit J. van Ess. H. von Stietencron, H. Bechert), München 1984; Theologie im Aufbruch. Eine ökumenische Grundle- gung. München 1987; Christentum und Chinesische Religion, (mit J. Ching), München 1988.
4) Küng, Hans: Projekt Weltethos. München 1990; Weltfrieden durch Religionsfrieden. Antworten aus den Weltreligionen. München 1993; Erklärung zum Weltethos. Die Deklaration des Parlaments der Weltreligionen. München 1993; Ja zum Weltethos. Perspektiven für die Suche nach Orientierung. München 1995.
5) Küng, Hans: Die Hoffnung bewahren. Schriften zur Reform der Kirche. München 1994.
6) Kein Überleben ohne Weltethos. Kein Weltfriede ohne Religionsfriede. Kein Religionsfriede ohne Religionsdialog.
7) Kennedy, Paul: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New York 1987; dt.: Aufstieg und Fall der großen Mächte. Ökonomischer Wandel und militärischer Konflikt von 1500 bis 2000. Frankfurt 1989.
8) Bell, Daniel: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A Venture in Social Forecasting. New York 1973, pp. 29-56. 374-376.
9) Oertli-Cajacob, P.(Hrsg.): Innovation statt Resignation. 35 Perspektiven für eine neue Zeit. Bern 1989, S. 351-372.
10) Spaemann, R.: Ende der Modernität?, in: Moderne oder Poatmoderne? Zur Signatur des gegenwärtigen Zeitalters, hrsg. von P. Koslowski, R. Spaemann, R. Löw, Weinheim 1986, S. 19-40.
11) Apel, Karl-Otto: Diskurs und Verantwortung. Das Problem des Übergangs zur postkonventionellen Moral. Frankfurt 1988.
12) Habermas, Jürgen: Moralbewußtsein und kommunikatives Handeln. Frankfurt 1983;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Frankfurt 1985.
13) Bubner, Rüdiger: Handlung, Sprache und Vernunft. Grundbegriffe praktischer Philosophie. Frankfurt 1982; Geschichts- prozesse und Handlungnormen. Untersuchungen zur praktischen Philosophie. Frankfurt 1984.
14) 칼-오토 아펠이 제안한 선험화용론적 최후정초의 문제는 졸저, 『아펠과 철학의 변형』(철학과현실사 1998)을 참조하라.
15) 황금률은 거의 모든 세계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공자(Konfuzius; ca. 551-489 v. Chr.)는 "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말라"(Gespräche 15;23: Was du selbst nicht wünscht, das tue auch nicht anderen Menschen an.)고 하였으며, 유대교의 랍비 힐렐(Hillel, 60 v. Chr.-10 n. Chr.) 역시 "다른 사람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하지 않는 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Tue nicht anderen, was du nicht willst, das sie dir tun.)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기독교의 황금률에서도 발견된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해주기를 바라는 바 그대로 그들에게도 해주시오"(마태복음 7;12, 누가 6;31; Alles, was ihr wollt, das euch die Menschen tun, das tut auch ihr ihnen ebenso.). 칸트는 이것을 "네 의지의 행위원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타당하도록 행위하라"(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BA 66f, in: Werke, Bd. IV, S. 67: Handle so, daß die Maxime deines Willens jederzeit zugleich als Prinzip einer allgemeinen Gesetzgebung gelten könne.)는 정언명령의 형태로 세속화하였다.
16) 한스 큉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최소한 인류가족의 근본적 일치; 인간의 평등과 존엄에 대한 확신; 개인과 그 양심의 불가침에 대한 정서; 인간사회의 가치에 대한 정서; 권력은 동시에 권리가 아니고 인간의 권력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고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사실; 사랑, 동정, 무아, 그리고 정신과 내적 진리의 힘이 궁극적으로는 증오, 적개심, 이기심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 부자와 억압자에 저항하여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편에 가담해야 하는 의무감; 결국 선의가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확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그는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신적 창조물로서의 역할 미흡, 교회분리, 전쟁 책임, 권력과 부의 남용을 통한 정체경제 문제, 문화패권주의, 생명존재의 존엄성 등의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자체비판을 시도하였다(PW, 89f).
17) 그러나 이같은 한스 큉의 입장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그가 믿는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칸트나 한스 큉의 도덕신학적 논리는 전혀 설득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 신앙, 그리고 특히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도덕적 행위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 비도덕적인 사람이나 전통 속에서 용납 받지 못할 행위를 한 사람들도 기독교의 확장을 목적으로 필요로 할 경우에는 하느님의 은총에 동참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 광신주의나 진리절대주의 속에서는 도덕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이같은 사정은 사이비 종교 집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덕적인 것이 무엇인가는 여기서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18) 한스 큉에 의하면, 종교가 인간성에 기여하고, 그 교리와 윤리, 예식과 제의를 통하여 인간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신장시키며, 의미 깊고 풍요로운 실존을 가능하게 할 경우에 그 종교는 참 종교인 동시에 선한 종교이다. PW, 120.
19) Wahre Menschlichkeit ist die Voraussetzung wahrer Religion! Das heißt: Das Humanum(der Respekt vor menschlicher Würde und Grundwerten) ist eine Mindestforderung an jede Religion: Wenigstens Humanität(das ist ein Minimalkriterium) muß gegeben sein, wo man echte Religiösität realisieren will. Doch warum dann Religion? PW, 121.
20) Wahre Religion ist Vollendung wahrer Menschlichkeit! Das heißt: Religion (als Ausdruck umfassenden Sinnes, höchster Werte, unbedingter Verpflichtung) ist eine Optimalvoraussetzung für die Realisierung des Humanum: Gerade Religion (das ist ein Maximalkriterium) muß gegeben sein, wo man Humanität als wahrhaft unbedingte und universale Verpflichtung realisieren und konkretiseren will. PW, 121.
21) 1989년 파리에서 "세계종교와 인권"을 주제로 하여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한스 큉은 종교대화를 위한 보편적 근거기준으로서 "인간적인 것"의 정초 가능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인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적인 것은 절대자 안에 기초해야 하고, 종교 안에서 인간성과 평화의 능력을 함양하는 인간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각각의 고유한 종교전통에서 인간성의 고양을 위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PW, 121. 그러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가 말하는 인간적인 것의 토대가 동일한 것이고 호환성을 갖는 개념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치의 근거기준을 신에서 찾지 못해서 인간으로부터 찾으려고 한 것이라면 한스 큉의 주장은 확고한 것이 아닐 것이다.
22) 에큐메니칼 물음의 한계는 일치적 근거로서 제시된 보편적 기준이 특정 종파에게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여전히 특수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에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과로서 얻은 보편적 규범들이 한국의 보수주의 및 근본주의 교회에서 외면되는 것은 그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교의 통합적 대화모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증산교의 메타이념은 기존의 모든 세계종교들을 통합하는 통일신단의 체계를 구축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으나, 세계종교들이 그것을 인정할 것 같지는 않다.
23) Cobb, John: Beyond Dialogue. Toward a Mutu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ity and Buddhism. Philadelphia 1982.
24) Küng, Hans: Das Judentum. Die religiöse Situation der Zeit. München 1991; Das Christentum. Wesen und Geschichte. München 1994; Christentum und Weltreligionen. Buddhismus. München 1995; Islam. 1997; Chinesische Religion 1999; Hinduismus. 1999; Das Christentum. Die religiöse Situation der Zeit. München 1999.
25) Küng, Hans(Hg.): Ja zum Weltethos. Perspektiven für die Suche nach Orientierung. München 1995. S.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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