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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금북정맥 제 7 구간 산행
(행치고개 ←→ 승주고개 ∼ 430봉)
1. 산행일자 : 2006년 7월 2일 (일요일)
2. 산 행 지 : 충북 음성의 『큰산(509.2m), 보현산(484m)』
3. 날 씨 : 짙은 안개, 개임(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 습도가 많았음)
4. 참 가 자 : 강동규, 김명자, 노승애,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7 명)
5. 산행 계획
[1] 산행구간 및 소요시간
(1) 총 산행 거리 : 약 20.5km,
(2) 산행 시간 : 10시간 정도
(3) 경유지 및 구간 거리
■ 행치고개(195m, 36번 국도)← [1.1km]→큰산(509.9m)←[2.6km]→삼실고개←[1.6km→돌고개(290m)←[3.5km]→보현산(484m)←[1.0km]→승주고개(340m)←[0.2km]→375.6봉←[3.1km]→346.3봉←[3.9km]→소속리산(431.6m)←[3.5km]→21번 국도
(4) 구간별 소요시간
■ 수원(04:00) ---> 영동, 중부고속 ---> 음성TG ---> 82번 도로 ---> 금왕(05:10/아침식사/05:40) ---> 37번 국도 ---> 36번 국도 ---> 행치고개(06:10)
■ 행치휴게소(06:30) → 큰산(07:20) → 517봉(07:50) → 삼실고개(08:35) → 351.7봉(09:05) → 돌고개(09:20) → 뱀거리고개(10:05) → 보현산/산불초소(11:10) → 승주고개(11:40/점심/12:10) → 346.3봉(13:20) → 시멘트임도(14:00) → 소속리산(14:50) → 345.8봉(15:40) → 21번국도(16:10)
■ 21번 국도(16:30) ---> 금왕(16:50/저녁식사/18:00) ---> 장호원 ---> 용인 ---> 수원(20:30)
※ 탈출로 : 돌고개, 승주고개,
※ 아침 식사 장소 : 진미해장국(043-878-2486)
[2]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제공 자료)
■ 수원(04:20) ∼ 영동, 중부고속도로 ∼ 음성TG ∼ 82번 도로 ∼
■ 금왕(05:20/아침식사, 차량이동/06:05) ∼ 37번 국도 ∼ 36번 국도 ∼ 행치고개(06:30)
■ 행치휴게소(06:45) → 큰산(07:23/07:38) → 517봉(07:58) → 삼실고개(08:45/09:00) →
351.7봉(09:50/10:05) → 돌고개(10:27/10:40) → 보현산 약수터(11:50/점심식사/12:35) →
보현산(12:50) → 산불초소(13:00/13:13) → 승주고개(13:23) → 430봉(13:35) →
■ 무명봉 삼거리(13:54) -- 이후 무극저수지 방향 242.5봉으로 알바하여 결국 무극저수지와
용계저수지 사이 능선을 따라 금왕으로 하산함
■ 금왕(16:50/저녁식사/18:00) ∼ 음성TG ∼ 중부, 영동 고속도로 ∼수원(20:30)
6. 산 행 기(山行記)
[1] 산 행 전
지난 6월 18일 임시 총회를 열고 많은 회원들이 산행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한남금북정맥 산행은 인기가 없는지 산행일(7월2일) 2, 3일 앞두고 다음 카페를 방문해 봐도 평소 참여 수준을 넘지 않는다. 일과가 바쁘거나 장거리 산행은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번에도 20.5km, 10시간 정도를 산행해야 한다고 하는데 산행 당일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예상된다고 한다. 산행 준비도 부족한데 비까지 동반하고 걸을 일을 생각하니 지레 겁부터 난다. 중간 탈출을 할 때 하더라도 일단 참가 신청을 했다.
기상 예보대로 산행 전일(7월 1일)에 비가 내렸고 산행일 오전까지는 비가 온다고 하여 비옷이며 스펫치 등 우중 산행을 대비하여 배낭을 꾸리고 평소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밤 10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03 : 00시 起床. 산행 채비
04 : 05분 송죽파출소 도착. 윤사장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산행 출발지 동수원 물류센터에 도착(04 : 15분경)하니 강동규사장, 김명자부장, 안상경교감선생님 나와 있고 곧이어 산악대장과 노승애부장도 연이어 도착했다.
비가 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출발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05를 좀 넘겨 음성 TG를 빠져 나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하여 금왕읍 大橋邊에 있는 『진미해장국』을 찾았다. 언제 이런 곳을 찾아 우리 대원들을 안내하는 산악대장의 배려가 고맙다. 선지와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행치고개로 이동을 했다.
[2] 행치고개
06 : 35분. 행치고개에 도착했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금방이라도 한바탕 비를 토해 낼 것 같다. 오늘 산행의出發地點인 행치(杏峙)는 오대산(吾垈山, 400m)에서 보덕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있는데 杏峙의 東쪽은 한강수계이고, 西쪽은 금강수계의 발원지라고 한다. 즉 漢江과 錦江의 分水嶺이 되는 곳이다.
[3] 큰산(甫德山) 오르는 길
신발 끈도 단단히 졸라매고 우중 산행을 대비하여 스팻치도 차고 우의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배낭을 제 정비를 하여 산행 준비를 하여 산행 표시기가 달려 있는 斜面으로 올라붙은 것이 06 : 40분.
곧이어 평지로 이어지고 논밭도 보이고 소 울음, 닭 울음소리도 들려 온다.
평지 길도 잠시. 산의 傾斜角이 점점 심해지면 금새 얼굴에는 땀으로 범벅을 이루며 숨소리도 거칠어진다. 평소 산행 준비를 충분히 해 두지 않았기 때문인지 발걸음도 쉬 떨어지지를 않는다.
07 : 05분. 첫 봉.
안개로 휩싸인 산봉을 자꾸만 올려다보지만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쉬며 오르기를 서너 번. 힘들게 큰산의 정상에 도착(07 : 30분)했다. 팽개치듯 배낭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고르며 물 한 모금을 마시니 그제야 시야가 툭 터지며 사방이 조망되고 산 정상의 시설물(기지국 안테나)도 한 눈에 들어온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너무 시원하고 부드럽다. 힘들게 땀을 흘리며 정상에 오른 보상을 바람으로 받는 모양이다. 두 팔을 쫙 벌리고 산 아래로 뛰어내리면 날개가 돋아나 山峰을 한없이 旋回 할 것만 같다.
괴산군 사이면(沙梨面) 보광산(普光山)에서 북주(北走)한 산맥은 주봉리(住鳳里) 백마산에서 멈추고, 한 갈래는 동쪽으로 뻗어 오대산(吾垈山, 400m)를 이루며 또 다른 한줄기는 북주(北走)하여 오성산(烏城山, 484m)을 이루었다. 백마산에서 동주(東走)한 산맥은 오대산에서 한가지를 형성하여 북주(北走)하였는데, 보룡리(普龍里) 뒤에서 보덕산(普德山, 큰산, 509m)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산이 바로 우리가 오른 『큰산(삼신산, 보덕산, 509.9m)』이다.
이 산의 정기가 워낙 교묘하게 뭉치고 뻗어 있는 데다 온산 주변이 온통 살구나무로 뒤덮여 있어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삼신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三神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몇 번의 난리 통에도 본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치거나 희생자가 없었기 때문에 클보 큰덕자를 따서 『보덕산(甫德山)』이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주민들은 삼신산의 고마운 뜻으로 수십 가지의 예를 지켜가면서 3년마다 山神祭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봉화 불을 피워 서로의 연락을 취했던 곳이라 하여 『봉화뚝』 이라고도 하며 산이 본래 크다 하여 『큰산』이라고도 부른다.
그 언젠가는 三神의 精氣가 발동하여 이곳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커다란 벼슬을 할 사람과 커다란 부자, 커다란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傳說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 산을 중신으로 明堂자리가 많아 이 곳에 묻히면 마을과 자손이 太平聖代하리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자료출처> 충북 음성군 원남면상당1리의 마을비문 중에서
[4] 심봤다!!!(삼실고개 가는 길)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잠시 휴식을 갖고 큰산을 내려오니 비포장 길이 나온다. 통신 시설물을 관리하기 위한 길인 것 같다. 5분 여를 통신시설물 관리 길을 따라 내려가니 林道가 나오고 음성군에서 위험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林道를 횡단하여 다시 완만한 능선 오름 길로 접어든다. 습도가 높은 탓인지 얕은 경사면을 오르는데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다. 땀을 훔친 목 장갑을 물 속에 넣었다가 꺼낸 것처럼 땀이 흠뻑 젖어 땀을 닦아내는지 닦아낸 땀을 도로 묻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길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517봉 도착(08 : 00시), 잠시 휴식을 가진 다음 표시기가 많이 달린 급경사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10여분을 내려오니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진행방향 좌측으로 樹種改良을 위함인지 벌목지대가 나타나고 길게 뻗은 도로와 마을이 뚜렷이 보인다. 진행 거리로 보아 草川里인 듯 싶다.
草川里는 본래 음성군 근서면 지역으로 냇가에 풀이 많아 「풋내」 또는 「草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벌목지역이라 햇볕을 잘 받아서인지 떡갈나무, 산초나무, 싸리, 산딸기나무와 갈대가 무성히 자라 완전히 길을 덮어 앞서가는 대원을 바짝 따라 붙지 않으면 길을 잃을 것 같다.
08 : 40분,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작은 봉에 올랐다 다시 급하게 내려섰다. 앞서 가던 윤사장, 山蔘 發見(심봤다!!!). 지팡이로 낙엽을 헤치니 실 뿌리가 송송 달린 새끼손가락 굵기의 삼 뿌리가 나온다. 너무 감격적이고 흥분되는 순간이다. 같이 가는 대원들, 산삼을 처음 대하는지라, 잡풀이라, 山蔘이라 한동안 甲論乙駁을 하며 내려 선 곳이 삼실고개(08 : 45분경).
산삼을 손에 쥔 윤사장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지난밤에 인삼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꿈을 꾸었다나. 한배 산악회가 그 많은 산을 산행하고도 산삼을 캔 일이 없는 稀代의 일이므로 증거를 남기기 위해 빨리 기념 촬영을 하라고 산악대장을 조른다. 그사이 안교감, 도로 건너 삼밭에 들려 산삼인지를 확인하고 --- 오늘 산행은 윤사장의 날이자 한배산악회의 보람이다. 산행의 話頭는 당연히 山蔘이 되겠다.
삼실고개는 원남면 하당리에 있는 고개로 최근에 2차선 포장을 한 것 같다. 차량 소통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고개다. 도로변에 앉아 준비해온 떡과 참외 등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며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인삼밭 가로 난 포장된 농로를 따라 돌고개로 향했다.
[5] 雜木 樹林을 헤치고
농로를 벗어나 上段 2基, 아랫단 3基의 묘가 있는 옆을 지나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길도 희미하고 표시기도 보이지 않는다. 좀더 진행하니 표시기가 보이고 길도 뚜렷이 나타난다.
09 : 25분, 시멘트도로(풋내고개?)가 가로지르는 안부 도착. 음성읍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무성한 잡목의 잎에 가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산악대장은 도로 경사면을 치고 올라 잡목 사이로 길을 찾아 나가고 나머지 대원들을 시멘트 포장길을 따르다 林道로 접어들었다. 풀이 무성하여 길인지 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간간이 산딸기가 빨갛게 여물어 유혹을 한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딸기 한 줌을 따 입에 넣었더니 어릴 때 먹어보았던 맛이 아이다. 달고 상큼한 맛이어야 하는데 물컹하고 덤덤한 맛이다. 아마도 빗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풀 섶을 헤치고 간 산악대장의 부름 소리. 길을 찾은 모양이다.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와(100여m) 切開地를 치고 올라 잡목 사이로 접어드니 완전 밀림지대를 온 것 같다. 갈대는 키를 훨씬 넘게 자랐고 산초나무는 가지를 뻗어 얼굴과 목 언저리를 할퀴고 산딸기 가시는 손등에 상처를 내기로 작심을 한 것 같다. 고개를 숙여봐도 길이 확인되지 않는다. 간간이 줄기를 뻗은 칡넝쿨은 턱을 걸어 당긴다. 아마존의 어느 밀림지역을 탐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산악대장은 어디쯤 가 있는가? 앞서가며 길을 마련했는데도 이내 풀이 덮여 길을 찾아 나가는 것도 힘겹다. 이대로 樹林의 늪에 빠져 樹中 孤魂이 될 것만 같다.
樹中 孤魂의 신세를 면하고 도착(10: 00)한 곳이 삼각점이 있는 351.7봉. 樹林을 빠져나와 하늘을 보니 꽉 막혔던 숨통이 툭 튀는 것 같다. 이마며 팔 뚝, 손등에 온통 긁힌 자국이다. 산악대장은 풀쐐기에 쏘였는지 목 언저리가 벌겋게 부풀어올랐다. 밀림을 탈출한 영광의 상처라 해야 옳을지 ---- ? 훗날 고약한 산행을 한 적도 있었다는 추억거리로 생각하자.
[6] 돌고개(石峴)
잠시 숨을 돌리며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풀고 계속되는 雜木 樹林을 통과하여 10 : 20분 경에 『돌고개』 신설 도로에 내려섰다. 이 고개(돌고개(石峴)는 풋내(草川里)에서 新川里(음성읍) 냇말로 넘어가는 고개가 된다.
신설 도로를 버리고 구도로를 따라 오르다 보니 쓰레기 반입 장이 있고 약 50여 m를 더 진행하니 삼거리에 돌고개 개통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원남-음성간 도로 확·포장공사, 3.3km, 공사기간 97. 5.∼ 99. 7. 시공자 (합)서방건설, 대표 박화서, 발주자는 충북"이라고 씌어 있다.
찌푸린 날씨가 개는 모양이다.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햇빛이 열기를 뿜어낸다. 돌개개 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갖고 시멘트 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니 하영특수유리(주, 0446-872-0680~1) 공장이 나온다. 공장 앞을 통과하여 우측 비포장 길을 따라 가다보니 손질을 잘 해 놓은 묘가 있다. 표시기도, 길도 보이지 않는다. 묘의 가장자리를 따라 숲 속으로 접어드니 표시기와 길이 뚜렷이 나타난다.
[7] 보현산 약수터
10 : 50분 시멘트 도로
11 : 05분, 철탑 봉 삼거리, 우측 내림 길로 철탑 밑을 통과하여 완만한 능선을 따라 가노라니 쓰러진 참나무에 목이버섯이 짙은 회색 빛을 띄고 꽃같이 피어 있다. 가던 걸음 잠시 멈추고 버섯을 채취하는데 후미로 따라오던 김명자부장이 돕는다. 바삐 가는 걸음에도 이런 작은 수확을 얻는 것도 산행에서 얻는 재미이지 싶다.
11 : 30분, 『보현산약수터』표지석을 세워 놓은 뱀거리에 도착했다. 표지석 뒤로 소나무 두 그루가 있고 약수터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로 최근에 포장을 한 것 같다. 이 도로는 초천리에서 동음리까지 연결되어 있는 산악 林道라고 한다.
해가 구름에 가렸다고는 하지만 습도가 높고 기온은 30도를 오르내려 준비해 온 물 두 병은 바닥을 더러 낸지 한참 지난 터라 빨리 약수터를 찾아 원 없이 물을 마시고 싶다. 이미 11 : 30분을 넘긴 시간이라 점심도 먹어야 할 것 같고.
쉬는 것도 잠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노라니 반사열 때문인지 땀을 닦아도 금새 눈언저리에 땀이 고인다. 모롱이를 돌아 골짜기를 만나면 약수터라 생각하고 다다르면 약수터는 없고 길은 휘돌아 급한 오름으로 이어진다. 입구에서 약 20여분을 시멘트 포장길을 돌아 오르니 마루쯤에 물통을 실은 차가 세워져 있고 정자(普賢漢錦亭)가 보인다. 도로변에 보현산 약수터 20m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정자에는 먼저 온 10여명의 남녀(40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정간 산행 중 이런 약수터(※ 안내표지판 : (보현약수는) 우리 군에서 지정하여 관리하는 시설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깨끗하게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지정번호 : 2. 검사일 : 2005. 11. 5 3. 검사결과 : 음성군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비 온 뒤 乾水가 흘러든 때문인지 물빛이 맑지는 못해도 한 바가지를 퍼 마시니 그 차기는 어느 약수 못지 않다. 어질어질하던 머리도 맑아지고 주변 산색도 훨씬 밝게 보인다.
먼저 온 팀이 자리 잡고 펴쳐 놓은 돗자리에 양해를 구하고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 놓는다. 인심 좋은 충청도(음성) 아저씨,아줌마. 자리 양보도 고마운데 갓 삶아낸 감자랑, 아스박스에서 잘 식힌 참외와 소주도 3병 곁들여 권한다. 뜻하지 않은 대접을 받고 보니 넉넉한 향토 인심이 너무 고맙다.
각자 싸온 饌에 소주 한 잔 곁들이니 산행의 珍味가 절로 난다. 점심을 겸한 휴식도 잠시. 오후 산행을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山色이 좋고 酒案까지 곁들였으니 남은 산행 접고 音色을 높이다 下山을 했으면 싶다.
출발 때부터 감기몸살로 못 올 산행 왔다는 노부장, 혼자 두기 안쓰러워 명자부장도 함께 下山을 하겠다고 한다. 어려운 여건임에도 오전 산행이나마 참여해 준 노부장의 집념도 놀랍고 명자부장의 따뜻한 배려도 아름답다.
[8] 보현산 오르는 길
약수터를 출발해서 고개 마루쯤에 올라 보니 『 小地名由來碑』세워져 있다. 가는 길이 급해 비문 제목만 확인하고 내용확인은 후일로 미뤘다.
* 小地名由來碑 : 이 곳은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 173-11 보현산 해발 430m이다. 고구려 시대 양홀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음성으로 개칭함. 1895. 5. 26. 현감제를 폐지하고 군수를 배치할 때 처음으로 東道面을 관장, 가섭산을 발원지로 하여 용산, 읍내, 신천, 평곡, 한벌, 석인리를 관할하였고, 近西面은 보현산 漢南錦地를 발원지로 사정, 감우, 성주, 소여, 덕전, 초천, 월창, 동음, 삼생리 9개 촌락을 관할함. 이곳 산아래 큰 마을에는 한때 근서면을 관할하던 근서면 사무소 터가 있다. 1914. 4. 1. 군면 폐합에 따라 근서면과 동도면이 음성면으로 개칭, 1956. 7. 8.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산은 6.25. 전란시 최초의 승전지로 소여리 전투에서 적 1개 소대 40명을 사살한 곳으로 유명함. 또 이 산은 萬生山으로 불리워졌는데, 先人들의 말에 의하면 萬生山下 可活 萬人之地라 하여 예로부터 수많은 난을 피하여 목숨을 유지한 사람의 수가 만 명은 된다 하여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생산이란 더 깊은 뜻은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흐르다 머무른 산이며 금강의 발원지로서 萬種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 분포되어 자연과 함께 숨쉬고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 정설일 것이다. 지금도 이 산은 많은 산악인들이 줄지어 오르내리는 淸淨지역이다. 동북 방향의 국도변에 소여리 산 1-1번지에 무극 전적 국민관광단지엔 조국의 독립과 자유평화를 위해 거룩하게 숨져간 음성군출신 독립유공자, 군/경의 영령들 864명의 위패를 모신 충혼탑과 전승비가 있다. 매년 6.6. 및 6.25 엔영령의 충혼을 기리고 있다. 서쪽 백양동에는 3.1 운동 독립유적지가 마을 앞 광장에 있다. 후손들에게 이 곳 유래를 전하고자 1998년 林道 개설 준공기념으로 이 곳에 이 비를 세운다. 1998. 11. 16.
『小地名由來碑』를 뒤로하고 林道를 따라 좀더 올라 左側으로 꺾어드니(12 : 40분) 「普賢山神祭壇」이 있다. 碑石 앞에는 종이컵이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막걸리 병도 놓여 있다. 강동규사장, 두고 간 병술을 잔에 따르고 再拜를 올린다. 아마도 事業의 繁昌과 無事 山行을 빌었으리라.
山神祭壇에서의 소망을 빌고 울창한 松林 속으로 접어든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보현산 정상 오르는 길이 다소 가파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산봉에 올랐다(12 : 50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길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기를 10여분, 산불감시초소가 자리 잡고 있는 해발 430m 普賢山 정상에 도착(13 : 00시)했다. 사방이 툭 터져 금왕읍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좋은 곳이다.
※ 음성읍 방향으로 가엽산(710m)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부용산(644m)도
감시초소의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유리창문을 통해 안을 보니 책이 의자 밑으로 가득 쌓여 있다. 어떤 책들일까? 아마도 감시원이 독서를 즐겼던 모양이다. 벽면에는 방한복과 산불감시원 완장도 걸려 있다. 초소의 면적으로 보아 숙식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8] 승주고개
잠시 휴식, 高度票로 보면 보현산을 내려서는 것으로 오늘 산행의 목적지까지 平地 같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룰랄라 길이다.
보현산 정상을 뒤로하고 雜木 樹林을 헤치며 쉬엄쉬엄 내려오니 비포장도로(승주고개 : 좌측 승주마을과 우측 감우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나온다(13 : 20분).
도로를 가로질러 오른 봉이 삼각점((음성 410-2003 재설)이 있는 375.6봉을 지나고 13 : 40분, 능선봉(429.9봉)에 올라 휴식을 가졌다. 이쯤이면 당초 점심을 먹기로 한 『승주고개』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아직도 승주고개는 멀었는가? 어디쯤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산악대장에게 확인을 해 보니 좀 전에 지나 온 비포장도로가 『승주고개』라고 한다. 앞으로 3시간이면 오늘 산행의 목적지에 도착하겠다. 보현산 약수터에서 물도 넉넉히 보충했고 룰랄라 길만 남았으니 주변 景物을 마음껏 취한다고 부담될 일도 없겠다.
휴식도 잠시. 능선 봉에서 급하게 내려서니 벌목지대가 나오고 고사리가 군락을 이루고 자라고 있다. 見物生心, 내년 봄에는 이곳으로 고사리 산행을 필히 해야겠다.
[9] 林道의 誘惑
14 : 10분, 휴식, 벌목지대. 오전 내 구름 속에 있던 해가 얼굴을 내민다. 한낮이고 습도가 많은 때문인지 숨이 턱턱 막힌다. 땀을 얼마나 닦아 냈는지 눈언저리가 부어오르는 것 같고 얼굴도 따끔거린다. 그늘진 나무 숲 속으로 빨리 기어들고 싶다.
잠시 해, 고온, 땀과 한판 승부를 겨루며 벌목지대를 벗어나 숲 속으로 접어든다. 넓게 이어진 숲 속 林道. 동네 뒷산의 산책 길 같다.
능선 봉에서 다시 휴식(430봉)분). 이어지는 능선 林道. 작은 봉, 휴식을 가진 것이 20분 남짓한데 산악대장이 쉬며(242.9봉?, 14 : 47분) 지도를 살피고 있다. 참 이상하다. 오늘은 산악대장이 善心을 팍팍 쓸 모양이다. 한참 지도를 살피다 주변을 살피고 오더니 길을 잘못 잡았다며 난감해 한다. 아마도 430봉을 지나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 가야하는데 무심코 룰랄라 林道에 誘惑을 당한 모양이다.
한 시간 여를 되돌아 가 목적지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음 구간을 『승주고개』에서 시작할 것인지 잠시 說往說來하다 도저히 되돌아 갈 수 없다하여 「무극저수지」와 「용계저수지」사이의 능선 임도를 따라 금왕으로 가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오늘 산행도 마무리다. 이번 오후 산행구간을 다음 산행에 보태야 한다. 다음은 다음 일이고 우선은 신나는 일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배낭을 메고 날개 달린 발걸음으로 임도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40여분을 내달려 두 저수지가 左右로 보이는 능선 끝 지점에 내려섰다. 내를 건너고 금왕읍으로 진입하는 포장도로를 횡단하여 16 : 05분에 소문난 숯불갈비집(맞은편 : 백야가든)에 도착했다.
[10] 산행 마무리
잠시 휴식(소문난집)을 갖고 금왕 시가로 이동, 먼저 하산한 명자·승애부장 상봉, 「백두사우나(금왕읍 무극리)」에서 찌든 땀 닦아내고(10분) 「장충동왕족발집」에서 족발, 보쌈으로 막걸리, 소주 몇 巡杯와 山蔘 이야기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오늘 山行의 日辰은 특별히 山神靈이 點指한 날이 아니었나 싶다.
온다 던 暴雨도 없었고 山蔘을 캐는 千載一遇의 幸運을 얻기도 했으며 雜木 樹林을 헤쳐 나가는 縮小 정글 탐험도 했으며 새콤달콤한 산딸기도 원 없이 따먹었다. 더하여 生面不知의 因緣을 만나 뜻하지 않은 음식까지 대접을 받았고 룰랄라 林道의 誘惑으로 고단한 다리품을 덜기도 했다. 더하여 샤워로, 보쌈·족발을 안주로 酒席을 마련하여 칼칼한 목을 축이는 福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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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草川里
초천리는 본래 음성군 근서면 지역으로 냇가에 풀이 많아 풋내 또는 초천이라 하였다.
옛기록을 보면 여지도서에 陰城懸 鎭管忠原.....坊里...北近西面....0 草川里 自官門 西距十五里編后一百四十男二百五十一口女三百五十七口)라 기록되어 있어 그내용을 보면 음성현 방리조에 음성현북쪽 근서면이 있고 초천리가 있다. 현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졌다.
1912년 작성된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서 근서면에 초천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덕전리를 병합하여 초천리라 해서 군내면에 편입. 그후 음성면에 편입되었다.
1956년 음성면이 음성읍으로 승격되어음성읍의 한 리(里)가 되었다.<출처 : 음성신문>
<참고자료 2> 신천1리(냇말유래비문)
냇말은 동쪽으로 송장산, 북쪽으로 소첩산, 서쪽의 서당산, 남족의 어리산이 에두른 매화낙지격의 분지형으로 그 가운곳에는 넓은 전답이 있고 그 사이로 란초가 자생하여 란초의 난(蘭)자와 매화의 매(梅)자가 합성되어 난매동(蘭梅洞)이라불리었다.
란매동 분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은 달천의 한 지류인(한강의 새암이 솟는 남한강의 최상류인) 란매천(蘭梅川)이라 하다가, 1760년대 행정구역 재편으로 음성현 동도면 일마속리(陰城縣 東道面 日馬俗里)로 정하여졌다.
마을앞에는 영남지역으로부터 서울로 가는 길이 있어 행인이 오갔는가 하면 그윗쪽 찬오별고개(벼리동)아래 초막을 짓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신이 떨어진 자에게는 신을 주는등, 오래도록 구휼적선한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곧 의령남씨 양정공파 19세손인 기명공(紀明公)으로 1781년 족지골에서 태어나 약30세 되시던 1811년경 자자손손이 영주할 길지를이곳 일마곡리(낱말)에 정하니 지금의 냇말이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음성현 동도면 신대리 (陰城縣 東道面 新垈里)로 봉하니 당시는 신대를 새터라고 하였지만 문헌으로는 일마(日馬)의 뜻이 낱말, 냄말이므로 이것이 냇말이라고 되어있다.
1914년 개편으로 한천, 중리, 신대,남촌일부를 병합하여 신대의 신(新)자와 한천의 천(泉)자를 써서 신천리(新泉里)라 하고 동도면(東道面)에서 군내면(郡內面)에 편입되었으며 군내면이 음성면이 되고 1956년 음성면이 음성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신천1리가 음성읍의 한리가 되었으며 구성은 냇말, 주막거리, 새동네로 3분 되어있다.
1962년 새마을 운동의 시작으로 마을 교량을 건설하고 마을회관을 신축, 주택개량, 하수정비, 도로포장, 농로확장등 젊은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복지 농촌건설에 박차를 가하며 특수작물인 고추, 담배등을 경작하고 음성지역으로서는 최초로 인삼을 재배하니 각 농가에 경제적인 부흥을 안기어 전국최고의 부농부락으로 발돋움하였다.
단위부락으로는 군내에서 가장 많은 인재가 우리마을에서 배출되어 국회의 원, 군수, 초대교육감, 읍장, 교장, 기업체사장, 공학박사등 정, 경, 사, 학계에 폭넓게 진출하여 부락의 명예을 드높였으니 이제 이곳 신천리 냇말 부락은 이 모든 바탕과 근본으로 년년히 맥을 이어 인재를 배출하여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고자 오늘에 이르러 마을앞 넓은 광장에 란매정과 이 비를 세운다.
냇말 유래비 뒤편 비문에는 증재록 향토시인의 냇말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 내고향 냇말
보현산(普賢山) 줄기는 북쪽으로 향하고
신천(新泉)내 냇물은 남쪽으로 흐르니
음양의 조화이룬 경이로운 풍치로고
되벵기터 금방아는 풍요를 찧는다.
옥녀(玉女)가 분(紛)을 바른 돌고개 석현(石峴) 분티(紛티)는
남한수(南漢水)와 금수(錦水)의 분수령 고갯길
만남과 이별의 인생사 엮으며
애틋한 연정을 전설로 익힌다.
선진의 인삼영농 신기의 바람은
땅을 일깨워 행복을 안기고
정성과 인내의 유장세월 흔적은
새천년 청정무구 냇말 번영 기린다.
첫댓글 글산행 잘 읽었습니다.
잡초만 많은 야산인 줄 알았는데 산행기를 대하고 나니 한남금북정맥에 대한 마음이 달라집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토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