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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
1. 폭풍우가 온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됐다. 7월 19일의 그날 밤은, 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을
엄습한 사상 최악의 열파가 겨우 가라앉고, 멘인주 서부의 전역이 미증유의
심한 뇌우에 휩싸였다.
우리들은 롱 레이크의 호반에 살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기 직전에 폭풍우의
예고가 호면을 때리며 이쪽을 향해 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한 시간 전까지도
대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1936년에 아버지가 보트 오두막집 위에 세운 국기
게양대의 미국기는 축 늘어져 있었다. 깃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열기는 마치 응고되기나 한 것처럼 음산하게 가라앉아버린 거울 같은 호수와
마찬가지로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오후에 우리들 가족 세 사람은 수영을 하러 나갔지만, 깊은 데까지 들어가지
않는 한 물도 더위를 식힐 수는 없었다. 빌리가 수영을 하지 못해서 아내 스테판이나
나도 깊은 데로 갈 생각은 없었다. 빌리는 다섯 살이다.
다섯시 반에 차가운 저녁식사를 했다. 호수 쪽으로 향한 지붕의 베란다로
나가서 햄샌드와 감자 샐러드를 마음이 내키지 않는 대로 조금 먹기는 했지만,
세 사람 모두 얼음통 속에 들어 있는 펲시 이외에는 손을 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식사 후에 빌리는 다시 밖으로 나가 잠시 정글짐에서 놀았다. 나하고 아내는
말도 없이 담배를 피우며, 매끄러운 거울처럼 가라앉은 호수 저편의 해리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터 보트가 두세 척 늘쩍지근한 소리를 내며 왔다갔다
하고 있다. 언덕의 상록수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듯 시들어 보였다.
거대한 뭉게구름이 군대처럼 집결하면서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옆집의
브렌트 노튼의 라디오는 뉴잉글랜드의 최고봉인 워싱턴산 정상에서 보내는
클라식 음악의 방송에 맞추고 있었으나, 번개가 칠 때마다 듣기 거북한 잡음이
들어오고 있었다.
노튼은 뉴저지의 변호사로, 이곳 롱 레이크의 집은 피서지의 별장으로 난방
시설도 없고 단열재도 쓰지 않았다.
스테판이 한숨을 지으며 팔과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의 가장자리로 가슴에
부채질을 했다. 그 정도로 시원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은
듯해 보였다.
"겁 줄 생각은 아니지만 대단한 폭풍우가 될 것 같애." 나는 말했다.
아내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밤에도 엊그제 밤에도 먹구름이 끼었죠. 그래도 그대로 지나가 버렸어요."
"오늘 밤은 그럴 것 같지가 않은데."
"그럴까요?"
"너무 심해질 것 같으면 아래층으로 내려가야지."
"어느 정도 심해질 것 같애요?"
호수의 이쪽 물가에 1년 중 살 수 있는 집을 최초로 세운 것은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아직 어렸을 때, 형제들은 함께 지금 집이 서 있는 곳에 여름 집을
세웠는데, 1938년에 여름 폭풍우로 돌담까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사했던
것은 보트 오두막집뿐이었다. 몇 해 후에 아버지는 큰 집을 세우기 시작했다.
폭풍이 왔을 때 피해를 준 것은 오래된 나무들이다. 나무가 늙으면 바람이
뿌리째 뽑아버린다. 이것이 어머니인 자연이 정기적으로 벌이는 대청소의 방법인
것이다.
"글쎄, 잘은 모르지만,"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38년의 폭풍우에 대해선
그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호수에서 돌풍이 급행열차처럼 밀어닥칠지도
모르지."
조금 있더니 빌리가 돌아왔다. 정글짐은 땀만 날 뿐 재미가 없다고 투덜댔다.
나는 빌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또 한 병의 펲시를 주었다. 이러다간 치과에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먹구름이 하늘을 젖히면서 가까이 오고 있었다. 폭풍우가 올 것은 틀림없다.
노튼은 라디오를 끄고 있었다. 빌리는 우리들 사이에 앉아서 무엇에 홀린 듯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천둥소리가 천천히 호수를 건너오더니 다시 메아리쳐서
돌아간다. 구름은 소용돌이치며 검정색에서 보라색이 됐다가 얼룩 무늬로 변하더니
다시 시꺼멓게 바뀐다. 호수 위로 퍼지는가 했더니 잔잔한 그물에서 떨어지듯
비를 뿌리는 것이 보인다. 아직은 좀 먼 것 같다.
대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람이 휙 지나가듯 깃발이 날리다가
다시 축 늘어진다. 그것이 차츰 강하고 쉴 새 없는 바람으로 바뀌더니, 몸에
흐르는 땀을 식힐 정도에서 땀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게 느껴진다.
은색의 베일이 호수 위로 퍼지는 것을 본 것은 이때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해리슨 일대를 뒤덮고 똑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모터 보트는 이미 시계에서
사라진 뒤였다.
빌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빠! 저것 봐요."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일어나서 빌리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저거, 저거 말예요, 저거 뭐예요?"
"회오리바람이라는 거야. 자, 들어가자."
스테판이 놀란 듯 이쪽을 보고 소리친다.
"이리로 와요, 빨리. 아빠 말 들어야지."
유리문을 열고 우리는 거실로 들어갔다. 나는 유리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밖을 내다보았다. 은빛의 베일은 호수의 4분의 3을 덮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과 납덩어리 같은 수면 사이에서 광란하는 커튼 같았다. 호수는 마치
큰 바다처럼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을 보고 있으니까 최면술에 걸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머리 위에 왔을 때, 무서운 번개가 치면서 한 30초 동안은 모든
것이 네거 필름처럼 망막에 새겨졌다. 돌아다보았을 때 서북쪽 끝까지 내다보이는
큰 창문 앞에 아내와 아들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서운 환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림의 유리가 깨지고, 조각난 칼날 같은
유리 조각이 아내의 어깨와 허리에, 그리고 아들의 얼굴과 목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는 광경.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덮쳐올 운명을 상상하는 두려움이 바람
소리와 함께 나를 덮쳤다.
그런데 아내와 아들은 그대로 큰 창문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을 거칠게 창문에서 안으로 밀어젖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안으로 들어가라니까?"
스테판이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빌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전등 스위치를
켰다.
그때 강풍이 불어닥쳤다. 온 집이 747점보 여객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이 끊어지는 듯한 새된 바람 소리가 때로는 낮은 부르짖음으로 변하는가
하더니 다시 새된 비명을 지른다.
"아래층으로 가라니까?" 나는 스테판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질러야 했다. 바로 지붕 위에서 거대한
합판이 마주치는 듯한 천둥이 치자, 빌리가 내 다리를 붙들고 매달렸다.
"당신도 내려오세요." 스테판이 외쳤다. 나는 끄덕이고 우선 빌리를 떼어놓아야
했다.
"엄마와 함께 가. 정전이 될지도 모르니까, 아빠는 양초를 가지고 갈게."
빌리는 엄마를 따라갔다. 나는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양초란 이상한 물건이다.
봄이 될 때마다 여름의 폭풍우 때 정전을 대비해서 양초를 비축해 두는데,
찾게 되면 안 나타나는 것이다.
네 번째 서랍을 뒤졌을 때 큐피 인형 뒤에 있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채였다.
손이 양초를 움켜쥐었을 때, 전등이 꺼졌다. 계속해서 번쩍이는 천둥번개가
간단없이 식당을 비치고 있다. 아래층에서 빌리가 울음을 터뜨리고, 스테판이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회오리바람은 지나간 듯했으나 호수는 20야드 앞도 보이지 않았다.
호수는 완전히 광란 상태였다. 누구네 집의 잔교가 호수 위에서 엎치락거리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빌리가 울며 뛰어와 다리에 매달렸다. 나는 빌리를
들어올려 안아주고 촛불을 켰다.
20분쯤 지났을 때,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바로 가까이 있는
큰 소나무가 쓰러졌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끝났을까?" 스테판이 물었다.
"아마…… 잠시 동안이겠지."
우리는 제각기 양초를 한 자루씩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집 주변의 피해 상황을 살펴보기엔 너무 어두웠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시 폭풍우가 몰아쳐 왔다. 두 번째의 돌풍은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초의 습격으로 흔들린 나무들 중의 몇 그루가 쓰러지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약간 수그러졌을 때, 마치 관 뚜껑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기는 소리가 나면서 지붕 위로 나무가 쓰러졌다. 빌리가 놀라 천장을
쳐다보았다.
열시쯤, 마지막 돌풍이 불어닥쳤다. 이것은 대단했다. 처음에 닥쳤던 것과
맞먹을 정도로, 바람은 굉음을 내고 번개는 사방에서 번쩍거렸다. 또다시 몇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호숫가에서 무엇인가 우지끈거리는 소리가 나며 스테판을
놀라게 했다. 빌리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잠들고 있었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게 좋겠어."
나는 빌리를 안고 일어났다. 스테판은 겁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음."
"정말?"
"괜찮아."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0분 후, 마지막 돌풍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2층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액자의 유리다. 아까 내가 느꼈던 환상은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끔벅거리고 있던 스테판이 작은 비명을 지르고 눈을 떴다. 빌리는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고 있다.
"비가 들이칠 텐데." 스테판이 말했다. "가구가 다 못쓰게 되겠군."
"할 수 없지, 뭘. 보험에 들어 있으니까."
"보험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어머니가 주신 화장대에다가…… 새
소파며……."
"잠자코 자."
"잠이 올 리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5분 후에는 잠들어버렸다.
나는 반 시간 동안 양초 한 자루를 상대로 밖에서 천둥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내일 아침에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폭풍우는 가라앉고 다시 돌풍이 일어날 기색은 없었다. 스테판과 빌리를
침대에 남겨두고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유리문은 무사했다.
그러나 액자의 유리는 톱날 같은 구멍이 뚫리고 그곳을 자작나무의 가지가
막고 있었다. 나는 이 노목의 가지를 보면서 보험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던 스테판의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2. 폭풍우가 지난 뒤. 노튼, 마을로 가다
"와아! 대단하다!" 빌리가 말했다.
빌리는 이웃 노튼의 땅과 경계가 되는 나무 담장 옆에 서서 사도(私道)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도를 4분의 1마일쯤 가면 캠프길이고, 그 앞은 캔서스
가도로 불리는 아스팔트길이다.
나는 빌리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더 이상 가까이 가면 안 된다! 거기서도 너무 가까워!"
빌리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빌리가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지익, 지익'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풀숲에 마치 뱀의 집단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뱀이 아니었다. 송전선이 20피트 가량 끊어져내려 마치 뱀이
몸을 사리듯 둥글게 엉켜 풀숲을 태우고 있었다. 폭우로 초목이 젖어 있지
않았더라면 집까지 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전선이 직접 닿은 부분만
검게 그을렸을 뿐이다.
"아빠, 전기가 올라요?"
"가까이 가면 안 된다. 전기회사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언제 오는데?"
"글쎄…… 오늘 아침엔 몹시 바쁜 모양이다.
아빠와 함께 사도 저쪽까지 나가볼까?"
빌리는 이쪽으로 오다 말고 발을 멈추고는 기분 나쁜 듯이 전선을 보았다.
그중의 한 가닥이 손짓이라도 하듯 지직거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빌리의 손을 잡고 사도 쪽으로 걸어갔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피해는 컸다. 사도 네 군데에 쓸어진 나무가 가로
놓여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직경이 5피트가 될 정도의 노목이었다.
엄청나게 산란해 있는 나뭇가지들을 주워 숲 속으로 던지며 캠프길까지 걸어갔다.
"아빠, 호수 쪽으로 가봐도 괜찮아요?"
"그래."
빌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마당에 늘어진 전선을 크게 돌아 호수 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차고에 들어가 자동톱을 들고 사도의 나무를 베러 가려는데, 집안의 정리를
하고 있던 스테판이 나왔다. 그녀는 사도를 가로막고 있는 쓰러진 나무를 쳐다보며
묻는다.
"저걸 어떡하면 좋지요?"
"베어버리면 괜찮아. 집안은?"
"유리 깨진 것은 대강 치웠지만, 거기도 나무가 하나 드러누워 있어요."
"그것도 나중에 베어야겠군."
마침 그때 빌리가 집 옆으로 돌아 뛰어왔다.
"아빠, 빨리 와 보세요!"
"빌리!"
스테판이 전선을 보며 날카로운 소리로 주의를 했다. 빌리는 전선까지는
충분히 거리가 있었으나 급히 발을 멈추고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걱정 마세요, 엄마."
"텔레비전에서도 늘 얘기하지 않니, 전선에는 주의하라고! 빌리! 지금 곧
집으로 들어와요."
"하지만 엄마, 아빠에게 보트의 오두막을 보여 드려야겠단 말예요." 빌리의
눈은 흥분과 실망에 얼룩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래, 아빠도 보러 갈 테니까 빌리는 먼저 가 있거라. 그 대신 전선에선
멀리 떨어져서 가야 한다!"
"네! 알았어요."
빌리는 금방 기운을 내고 뛰어갔다.
"저애는 전선에 관한 건 잘 알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전선을 무서워하고 있단 말예요. 자, 우리도 그쪽으로 내려가요."
나는 스테판과 함께 빌리의 뒤를 따랐다. 다시 빌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와 보세요. 보트 오두막이 잔교 쪽으로 쓰러지고, 호수엔 나무가 쓰러지고……
저것 보세요. 성조기가 물에 떨어져 있어요."
빌리는 그대로 호숫가로 뛰어내려갔다.
"사도에 넘어져 있는 나무를 베고 나선 포틀랜드 가도에 있는 중부메인전력회사의
영업소에 다녀와야겠군. 이쪽 상태를 전해 줘야겠어.
괜찮겠지?"
"네, 다녀오세요. 그런데 몇 시쯤 갈 수 있겠어요?"
노튼 변호사의 대지 사이에 있는 노목을 치우려면 아무래도 11시 전에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점심은 집에서 드실 수 있겠네요. 참, 슈퍼에 들러서 장도 봐 오셔야겠어요……
우유와 버터도 떨어져 가고…… 아무튼 리스트를 만들어드릴게요"
이때 성조기를 건지러 내려가던 빌리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동시에 스테판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 자신도 그것을 보았다. 호수의 해리슨 쪽 기슭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일기가 좋은 날 흰 뭉게구름이 지상으로 내려온 것처럼,
한 줄의 빛나는 백색의 안개가 기슭을 폭삭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제 밤의 꿈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스테판이 저건 뭐냐고 물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오려던 말은 '신'이라는 말이었다.
"뭐예요, 여보?"
건너편 기슭에는 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나, 롱 레이크를 오랫동안 보아온
나로서는 호안선의 감춰진 부분이 그렇게 넓은 범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안개의 맨 앞부분은 자로 줄을 그은 듯 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저거 뭐예요, 아빠?" 빌리가 소리를 질렀다. 물 속에 무릎까지 들어가 성조기를
건지며 물었다.
"안개의 봉우리야."
"호수에도 그런 게 생겨요?" 스테판이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 눈빛에는
광신자인 미세스 카모디의 영향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의 불안은 차츰 사라져가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안개와 마찬가지로
하찮은 것이니까.
"그래, 호수에 안개가 낀 것은 전에도 본 일이 있잖아."
"저런 건 본 일이 없어요. 마치 구름 같애요."
"해가 반사해서 그래. 비행기에서 구름을 내려다봤을 때하고 같은 거야."
"왜 안개가 나왔을까? 보통은 습기가 많은 계절에만 나오는데."
"지금 정말 나왔잖아. 해리슨 쪽뿐이긴 하지만, 아마 폭풍우 뒤끝이겠지.
두 개의 전선이 서로 만나서 그 선상에서 일어난 기상 현상이겠지."
"틀림없어요? 자신 있어요?"
나는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니, 사실은 그냥 말해 본 거야. 자신이 있으면 6시 뉴스에서 일기예보를
하고 있지. 자, 장 봐올 리스트나 만들어."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손을 눈 위에 펴들고 잠깐
동안 안개 봉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빌리는 벌써 안개엔 흥미를 잃고 있었다.
나는 얼마 동안 그 자리에 서서 폭풍우의 피해 상황을 쳐다보고는 다시 안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보다는 조금 가까이 온 듯이 보였으나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만약에 가까이 와 있었다면 자연의 법칙에 반한 것이 된다.
잔잔한 미풍이긴 했지만, 어찌됐건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개는 새하얀 색이다. 그 흰색은 겨울날의
푸른 하늘과 눈부신 콘트라스트를 보이고 있는, 갓내려 쌓인 눈처럼 보였다.
스테판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개인 날의 안개가 흔치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안개가 짙을 때엔 대기 중의 수증기가 무지개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무지개는
나와 있지 않았다.
이날 오후, 나는 빌리를 데리고 옆집의 노튼 변호사와 함께 마을의 쇼핑
센터에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는 세 사람 모두 스카웃의 앞좌석에 올라탔다. 나는 차를 후진시키고
폭풍우로 사방에 흐트러진 나뭇가지들을 깔아뭉개며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에서
야채밭으로 이어지는 시멘트길에 스테판이 서 있었다. 장갑을 낀 한쪽 손에는
가위와 호미를 들고 서 있었다.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의 반은
그늘져 있었다. 내가 경적을 가볍게 두 번 울리자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우리는 출발했다. 이것이 아내의 얼굴을 본 최후가 되었다.
캔서스 거리로 나가는 도중에 한 번 정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력회사의 트럭이 지나간 다음에 상당히 큰 소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노튼과 나는 차에서 내려 차가 서행해서 옆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나무를
이동시켰다. 그 작업으로 손이 온통 송진투성이가 되었다. 빌리가 나와서 거둘려고
했으나, 나는 손을 흔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쳐
눈을 찌르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캔서스 가도에 방해물은 없었다. 몇 군데 전선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비키 린 캠프장을 조금 지난 곳에서는 전주가 해자 속으로 쓰러져 그 끝에는
전선이 머리카락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폭풍우의 힘이란 대단하군!" 노튼이 법정에서 단련된 유창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예요."
"아빠! 저것 좀 보세요."
빌리가 엘리치가(家)의 창고의 잔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창고는 12년
동안이나 해바라기를 비롯한 잡초에 둘러싸여 있었다. 가을이 될 때마다 저
창고가 겨울을 견뎌낼까 생각했지만, 봄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이 드디어 없어진 것이다. 남은 것은 무너진 잔해와 지붕의 골조뿐이었다.
이제 수명이 다한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런지 내게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빌리가 라디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해서 WOXO의 방송이 나오는지 맞춰보라고
했다. 다이얼을 FM92로 맞췄으나 지익 하는 잡음이 들어올 뿐이었다.
"그럼 다시 먼저 방송으로 맞춰놔라."
빌리가 다이얼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간에 두 개의 FM방송을 거치는
동안 모두 정상적으로 방송이 됐으나, 메인주의 제일 큰 규모의 WBLM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군……."
"뭐가?" 노튼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러는 동안에 차는 마을에 도착했다.
쇼핑 센터 내의 셀프서비스의 세탁소는 문을 닫고 있었다. 정전이 됐으니
자동 세탁기가 돌아갈 리가 없었다. 브리짓 약국과 페더럴 후드 슈퍼마켓은
두 군데 모두 문을 열고 있었다. 주차장은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폭풍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미세스 카모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한 카나리아색의 옷을 입고 슈퍼마켓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샘소나이트의 소형 트렁크만한 핸드백을 팔에 걸고 있었다.
빈 자리를 찾아 한 바퀴 도는 동안 행운이 찾아왔다. 큼직한 녹회색의 캐디락이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차를 넣었다.
나는 빌리에게 스테판의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카트를 찾아서 하나하나 사서 담아라. 아빠는 엄마에게 전화하고 들어갈
테니까."
차를 내리자 빌리는 노튼의 손을 잡았다. 주차장을 지날 때는 어른과 손을
잡으라고 어려서부터 가르쳤기 때문에 그 습관을 지금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노튼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했으나 미소지으며 함께 걸어갔다.
나는 약국과 세탁소 사이의 벽에 붙어 있는 공중전화로 걸어갔다.
더위에 지친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이 송화기의 고리를 덜커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여자 뒤에 서서, 왜 이렇게 스테판의 일이
걱정되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불안은 아마도 하얗게 빛나는 안개나, 방송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국, 그리고 군부대에서 실시하고 있는 애로헤드 계획
같은 것에 원인이 있는 모양이다.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는 수화기를 내동댕이치듯 걸어놓고 돌아 서면서 나를
보며 말했다.
"10센트를 손해 볼 뿐이라구요! 지익지익 하는 잡음밖엔 안 들려요." 그녀는
불쾌한 얼굴로 가버렸다.
전화선이 어디선가 끊어져 있는 모양이다. 일부 지하로 들어가 있는 구간도
있지만 이 일대는 모두 지상에 걸려 있다. 아무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 근처의 공중전화는 스테판의 표현을 빌리면 미치광이 같다고 했다. 먼저
10센트 동전을 넣기 전에 우선 다이얼을 돌려 상대방을 불러낸다. 상대가 나오면
자동적으로 끊어지게 돼 있기 때문에, 상대가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에 10센트
동전을 넣어야 한다. 신경이 쓰이는 일이지만 이날은 덕택에 10센트의 손해를
보지 않았다. 발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 여자가 말한 대로 지익거리는 잡음뿐이었다.
수화기를 걸어놓고 천천히 마켓으로 걸어가면서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다.
연배의 부부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면서 입구로 가다가 그대로 유리문에 부딪고
만 것이다. 그들은 마주 보며 크게 웃더니 유리문을 간신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전이 되면 여러 가지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나도 도어를 손으로 열고, 우선 냉방이 안 돼 있는 것을 알았다.
여름철에는 냉방이 지나쳐서 마켓 안에 한 시간 이상 들어가 있으면 감기에
걸리거나 동상에 걸릴 정도다.
나는 통로를 지나 왼쪽으로 돌아갔다. 세 번째 줄 통로에 두 사람이 있었다.
빌리와 노튼이 스테판의 메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쯤 채워진 쇼핑 카트 사이를 누벼 두 사람 곁으로 갔다.
"잘돼 가니, 빌리?"
"응." 빌리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좀 허세를 부리는 시늉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노튼 아저씨도 못 읽는 게 많다구요."
"어디?" 나는 리스트를 받았다. 노튼과 빌리는 쇼핑 카트에 실은 몇 가지
품목에 충실하게 체크를 하고 있었다. 스테판이 요구하는 품목은 아직도 열
가지 정도 남아 있었다.
"과일과 야채가 있는 데로 돌아가야겠다."
빌리가 카트를 돌렸을 때, 노튼이 말했다.
"잠깐 정산소를 보고 오는 게 좋을 거야, 데이브."
나는 정산소를 보러 갔다. 정산소는 두 군데만이 열려 있었다. 두 줄로 서
있는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를 내장한 신형 레지스터는 모두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열려 있는 두 개의 정산소에는 여직원이 서서 포켓식 전자계산기로
물건의 가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여직원 옆에는 두 사람의 지배인, 뱃 브라운과
올리 위크스가 여직원이 계산을 끝내는 대로 손님이 내놓는 현금이나 수표를
받아 상자에 넣고 있었다. 네 사람 모두 더위에 지쳐 보였다.
"재미있는 책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군." 노튼이 옆에 와 있었다.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애."
다시금 집에 혼자 있는 스테판의 일이 머리에 떠올라 잠시 불안이 스쳐갔다.
"당신도 살 것을 찾아 가지고 오시죠." 나는 말했다.
"이젠 빌리와 둘이서 할 테니까요."
"맥주나 더 가지고 올까?"
"괜찮아요. 맥주는 요담에 합시다."
그와 함께 오후에 맥주를 마시며 지낼 생각은 없었다.
어느덧 빌리가 옆으로 와서 내 셔츠를 잡아당겼다.
"엄마와 얘기했어요?"
"아니, 전화가 통하지 않았어. 전화선이 끊어진 모양이야."
"엄마 일이 걱정이 되세요?"
"아니." 나는 거짓말을 했다. 틀림없이 걱정이 됐지만, 왜 걱정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걱정할 건 없지만…… 넌 걱정이 되니?"
"응……." 아닌 듯이 말했지만 빌리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우리는 그 시점에서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도 이미
때가 늦었는지도 모른다.
3. 안개가 온다
나는 토마토와 오이, 그리고 마요네즈 한 병을 집었다. 스테판이 요구한
베이콘은 품절이고, 대신 로냐 소시지를 넣었다.
네 번째 통로를 돌아갔을 때, 빌리가 말했다.
"군인 아저씨가 있어요."
군인이 두 명 있었다. 갈색의 군복이 밝은 색채의 여름 옷이나 스포츠웨어를
배경으로 유난히 돋보이는 것 같았다. 애로헤드 계획의 부대가 30마일밖에
안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군인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두 군인은
아직 면도를 할 나이도 안 돼 보였다.
스테판의 리스트를 다시 훑어보고 다 끝난 것을 확인했다…….
아니,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맨 아랫줄에 나중에 생각이 난 듯 '런서즈 한
병'이라고 적혀 있었다. 좋은 생각이야. 오늘 밤 빌리가 잠든 다음에 와인을
두세 잔 마시고 천천히 사랑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지.
카트를 놓아두고 와인 매장으로 가서 한 병을 들고 왔다. 큰 도어 앞을 지나올
때, 대형 발전기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냉동 케이스를 가동시킬 정도는
돼도 도어나 레지스터 등 다른 전기 시설을 움직일 만큼 큰 용량은 못 되는
모양이다. 마치 오토바이의 엔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줄에 돌아와 섰을 때, 노튼이 다가왔다. 맥주며 빵과 소시지 등을 두 팔에
안고 있다. 냉방이 안 되기 때문에 마켓 안은 찌는 것 같았다. 나는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떨어뜨리지 않게 카트에 넣으시죠."
"고맙네."
줄은 이제 냉동식품의 저쪽까지 늘어서 있었다. 줄이 느릿느릿 앞으로 줄어감에
따라 발전기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적어진다. 노튼과 나는 하찮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왜 빨리 못하죠?" 빌리가 물었다. 그 얼굴에는 아직도 굳은 표정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순간적이었으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의 안개가 찢어지고,
저쪽에서 무서운 것이 이쪽을 엿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순수한 공포의
이글거리는 금속적인 얼굴, 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졌다.
우리가 서 있는 줄은 뱃 브라운이 서 있는 정산소로 이어져 있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야한 노란색의 옷을 입은 미세스 카모디였다. 마치
황열병의 선전 같았다.
돌연 멀리서 새된 소리가 일어났다. 그 소리는 갑자기 높아지고 요란스런
패트롤카의 사이렌으로 변했다. 교차로에서 경적을 울리고,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타이어의 삐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서 있는 데서는 보이지
않았으나, 사이렌 소리는 마켓으로 가까이 오면서 최고조에 달하더니, 패트롤카가
지나가면서 소리도 멀어져 갔다. 몇 사람이 줄에서 나와 보러 갔지만 많지는
않았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기 때문에 제 자리를 잃을까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노튼은 물건을 내 카트에 내려놓고 보러 갔다. 잠시 후에 돌아와서는, "지방경찰이군."이라고
했다.
그때 마을의 화재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명처럼 새된 소리가
높아졌다가 내려가고 다시 높아졌다. 빌리가 내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아빠, 뭐예요?" 그리고 곧 덧붙였다. "엄마 괜찮을까?"
"캔서스 가도에서 불이 난 모양이군." 노튼이 말했다.
"폭풍우로 끊어진 전선 때문이지. 곧 소방차가 갈 거야."
그 말이 내 불안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 집 마당에도 전선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줄에 서 있는 것이 싫어졌다. 갑자기 몹시 싫어졌다. 그러나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지금 여길 떠나는 것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이때 누군가가 입구의 도어를 밀고 들어왔다. 헬멧도 안 쓰고 오토바이를
달리던 젊은이였다.
"안개야!" 그는 외쳤다. "다들 나가 봐요! 캔서스 가도를 따라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숨이 찬 모양이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나가 보라구요!" 그가 되풀이했지만, 모두가 그를 응시하며 더러는 발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줄서 있는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줄에 서 있지 않은 두세 사람이 젊은이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무인 정산소 옆을 빠져나갔다. 한 키 큰 남자가 출구의 도어를 열자 열두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젊은이도 그 뒤를 따랐다.
"빌리, 너도 가 보면 어떠냐?" 노튼이 말했다.
"안 돼!" 나는 즉석에서 말했다. 특별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목을 빼고 젊은이가 말한 안개를 찾았으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활짝 개인 푸른 하늘뿐이었다. 누군가가 젊은이가 농담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대답이나 하듯 또 다른 누군가가 한 시간 전에 롱 레이크에 이상한
안개가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화재경보가 귀청을 때리듯 울리고
있다. 마치 최후심판의 나팔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 몇 사람이 따라 나갔다. 덕택에 줄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이때 텍사코의
가솔린 스탠드에서 일하고 있는, 반백의 머리를 한 존 리 프로빙이 뛰어들어와
외쳤다.
"누구 카메라 가지고 있는 사람 없소?" 아무도 대답을 안 하자 다시 뛰어나갔다.
그것을 계기로 다시 동요가 일어났다. 사진을 찍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볼
만한 가치도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미세스 카모디가 쉰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밖에 나가면 안 돼요!"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밖에 나가면 안 돼요! 죽어요! 난 안다구요. 밖에 나가면 죽어요!"
사태는 급속도로 혼란의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입구의 도어를
난폭하게 열고 비틀거리며 마켓 안으로 들어왔다.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안개 속에 무언가 있다!" 남자가 외치자, 빌리가 움츠러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안개 속에 뭐가 있어! 안개 속에 있는 그게 존 리를 채갔어요. 무언가가--."
남자는 비틀거리며 창가에 쌓여 있는 잔디 비료 푸대에 부딪히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개 속에 있는 것이 존 리를 채갔다구요! 나는 비명을 들었단
말예요!"
상황은 일변했다. 폭풍우에 이어 패트롤카의 사이렌과 화재경보.
간단한 정전에 의해서도 미국인 정신에 생기는 미묘한 혼란. 이러한 사태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면서 착실하게 불안을 더해 가는 분위기. 이런 일들이
겹치면서 신경과민이 된 사람들은 이제 한 덩어리가 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그건 아직 계산이 안 됐어요! 여보세요, 그 소시지롤은 돌려
주세요!"
뱃 브라운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소리쳤다. 누군가 조소하는 듯한 웃음 소리를
냈다. 브라운은 얼굴을 붉히며 창가로 가려던 부인의 손에서 상자를 낚아챘다.
"내 물건을 누가 빼앗었어!?" 부인이 새된 소리로 외치자, 옆에 있던 두
사람이 요란하게 웃어젖힌다. 모두가 정신병원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미세스 카모디가 다시 밖에 나가지 말라고 높은 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안개 속에 뭐가 있다는 것은?" 노튼이 물어왔다.
무거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아빠, 무서워!" 빌리가 울면서 말한다. "집에 가요!"
누군가 지나가다가 나에게 부딪힌 바람에 비틀거리다 빌리를 안았다.
나 자신도 공포를 느끼고 있다. 혼란은 더해 가고 있었다. 브라운 지배인
옆에 있던 레지스터의 샐리가 뛰어가려고 하자, 브라운은 그녀의 옷을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옷깃이 찢어졌다. 샐리는 얼굴을 찡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할퀴며 소리쳤다.
"그 더러운 손 놓지 못해요?"
"이 년이!" 브라운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시 그녀에게 손을 올렸을 때, 올리 위크스가 나무랬다.
"뱃! 침착하라구!"
누군가가 또 비명을 질렀다. 그때까지 패닉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서서히 그 상태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군데의
도어에서 서로 밀치며 밖으로 나갔다.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나고, 바닥에
콜라의 거품이 퍼지는 소리가 났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돼 가는 거야?" 노튼이 소리쳤다.
주위가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아니다.
그때 나는 어두워졌다는 것보다, 마켓 안의 모든 전등이 꺼진 것처럼 느꼈다.
나는 반사적으로 형광등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때 비로소 정전이 돼서 어두워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처음부터
정전이 돼 있었고, 그때까지는 조금도 어둡게 느낀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창가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치며 손으로 가리키기 전에 나는 깨달았다.
안개가 다가온 것이다.
그것은 캔서스 가도의 입구에서 주차장 쪽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가까이
왔지만, 호수 저쪽에 처음 나타났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밝은 백색이지만
조금도 광택이 없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순식간에 태양을 거의 덮어버렸다.
태양이 있었던 곳에는 한 개의 은화가 걸려 있어서 엷은 구름을 통해 보는
겨울의 보름달 같았다.
안개가 2차선의 아스팔트길을 덮어싸듯 꿈틀거리며 다가오자, 도로는 순식간에
시계에서 사라졌다. 매키온가(家)의 보기 좋게 복원된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건물은 완전히 덮여지고 말았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이 보이는 옆의 아파트
2층은 잠시 동안 안개에서 삐져나와 있었으나, 그것도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페더럴 주차장 출입구의 '우측통행'의 간판도 검은 글씨만이 남아 있다가 그것도
사라지고, 다음에는 주차장의 차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노튼이 되풀이했지만 겁먹은 목소리였다.
안개는 푸른 하늘도 검은 아스팔트도 똑같이 먹어들어갔다. 그 경계선이
20피트 앞에 뚜렷이 보인다. 푸른 하늘은 처음에는 폭이 넓은 띠 모양으로
보이다가 다음에는 줄처럼 보이더니, 연필로 그은 선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오직 하얀색 하나만이 넓은 쇼윈도 유리 위에 철떡 붙어 있었다. 4피트쯤
떨어진 곳에 있는 쓰레기통까지는 보이지만 그 앞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
차도 앞 범퍼가 보일 뿐이다.
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요란스럽게 길게 계속됐다. 빌리가 더욱
몸을 붙여 왔다. 전깃줄 뭉치에 고압이 흐를 때처럼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아무도 없는 카운터를 가로질러 도어 쪽으로 돌진했다.
이것이 마치 눈사태라도 일으키듯, 사람들이 무작정하고 안개 속으로 뛰어나갔다.
"이것 봐요!" 브라운 지배인이 소리쳤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겁을 먹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양쪽인지 얼굴은 검은 자색에 가까웠다. 목에는 전깃줄만한
심줄이 나와 보였다. "이것 봐요, 당신네들, 물건을 그대로 가져가면 어떡해!
그걸 이쪽으로 돌려 줘요! 도둑질 아냐!"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중에는 물건을 옆에 버리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흥분해서 웃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은 소수였다. 그들은 물밀
듯이 안개 속으로 뛰어나갔다. 슈퍼 안에 머물고 있던 우리는, 밖으로 나간
사람들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열린 문틈으로 어렴풋이 코를
찌르는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출입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옥신각신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튼이 비틀거리며 방심한 듯한 표정으로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빌리를 안고 있는 팔을 바꿔 노튼이 멀리 가기 전에 그의 팔을 잡았다.
"그만둬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는 뒤돌아다보았다.
"뭐라구?"
"좀더 기다리고 있다가 상황을 봅시다."
"뭘 본다는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설마……." 노튼이 말했을 때, 안개 속에서 비명이 일어났다.
노튼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출입구 도어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더니,
이번에는 안쪽으로 역류해 왔다. 흥분한 목소리와 외치는 소리가 모두 조용해지고,
도어 옆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지면서 2차원적으로 보였다.
비명은 마치 화재경보처럼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저렇게 길게 비명을
지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계속됐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노튼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갑자기 비명이 그쳤다. 차차로 사그러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단절된 것이다.
또 한 사람의 남자가 뛰어나갔다. 작업복 바지를 입은, 기골이 장대한 남자였다.
비명의 임자를 구출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잠깐 동안 유리와 안개를 통해서
그가 밖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내가 아는 한 그것을 본 것은 나
하나뿐이다) 무엇인가 남자의 저쪽에서 움직인 듯했다. 온통 하얀 안개 속에서
회색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작업복 바지를 입은 남자는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기보다는
안개 속으로 끌려들어간 것처럼 내게는 보였다.
슈퍼 안은 잠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동시에 여러 개의 달이 비치기 시작했다. 주차장의 나트륨등이
들어온 것이다. 지하 케이블에서 전기가 들어온 모양이다.
"밖에 나가면 안 돼요!" 미세스 카모디가 까마귀를 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 나가면 죽어요."
누구 한 사람도 반론을 하거나 웃지도 않았다.
또 비명이 밖에서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목을 조이는 듯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빌리가 또 겁을 먹고 매달려 왔다.
"데이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올리 위크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자기 자리에서 나오더니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예요?"
"나도 감을 잡을 수가 없군." 나는 대답했다. 올리는 몹시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빌리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널 안고 있으니까 팔이 떨어질 것 같구나. 손을 꼭 잡고 있어라."
"엄마는?" 빌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는 아무 일 없을 거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길 나가지, 데이브." 노튼이 아무런 확신도 없이 말했다.
이때 쾅 하는 커다란 충격음이 들려왔다. 묘하게 뒤틀리는 듯한 충격을 주로
발로 느꼈다. 건물 전체가 갑자기 3피트쯤 가라앉은 감이었다.
몇 사람이 공포와 놀라움의 소리를 질렀다. 병들이 진열장에서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울려퍼졌다. 정면의 넓은 윈도우에서 유리 조각이 하나 떨어지고,
무거운 유리를 지탱하고 있는 나무틀이 휘어져 쪼개진 것이 보였다.
화재경보의 사이렌이 갑자기 뚝 그쳤다.
뒤에는 정적이 계속됐다. 그것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는, 불안을 안은
침묵이었다. 나는 쇼크로 넋을 잃고 있었다.
"여러분!" 노튼이 외쳤다. "여러분, 제 얘길 들어주세요!"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노튼은 선거 입후보자처럼 두 팔을 쳐들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혐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외쳤다.
"왜 그래요?" 한 여자가 되물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어요! 아이들한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밖에 나가면 죽어요!" 미세스 카모디가 지체없이 말참견을 했다. 그녀는
창문 아래에 쌓여 있는 25파운드의 비료 포대 옆에 서 있었다.
틴에이저의 남자가 느닷없이 그녀를 밀었기 때문에, 그녀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비료 포대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자코 있어, 이 할망구야! 아는 척하지를 말라구!"
"자, 여러분! 안개가 지나갈 때까지만 기다리고 있으면, 아마 괜찮을……."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가 말하는 대롭니다." 내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모두들 냉정해집시다."
"지금 건 지진이었죠?" 안경을 쓴 남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공포 때문에 몹시 조용했다. 한 손에는 햄버거의 봉지와 빵
봉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빌리보다 한 살 아래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는 둘째로 치고, 아까의 충격으로 진열장 끝까지 굴러간
통조림이 떨어져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빌리가 또 울음을 터뜨렸다.
4. 창고, 발전기의 고장
빌리가 히스테릭하게 보채기 시작했다. 목이 쉬도록 울면서 엄마한테로 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빌리를 다른 사람에게서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어깨를 안고 중앙의 통로를 걸어가면서 달래 보려고 했다.
나는 바닥에 앉아 빌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슴에 얼굴을 대고는 흔들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하는 대로 거짓말을 모두 모아 빌리에게
들려주었다.
"저건 보통 안개가 아니지?" 빌리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통 안개가 아니지?"
"그래,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그 일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빌리가 졸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을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릎 위에 안고
있었는데 졸다가 본격적으로 잠이 들고 있었다.
빌리가 푹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무엇인가 덮어줄
것을 찾으러 일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면에 모여서 밖의 안개를 보고
있었다.
통로에는 몇 사람이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었으나, 그 얼굴에는 쇼크가
기름처럼 떠 있었다. 나는 냉각기 옆에 있는 커다란, 양쪽으로 열리는 도어를
열고 창고로 들어갔다.
베니아판의 칸막이 저쪽에서 발전기가 소리를 내고 있었으나 어딘지 고장이
있는 것 같았다. 디젤의 배기 가스 냄새가 몹시 심하게 났다. 칸막이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나는 셔츠자락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발전기 칸막이에 붙어 있는 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배기관이 벽의 구멍으로 밖으로 나가 있는데, 그 배기관의 출구가 막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위치의 오프를 누르니까 발전기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멈췄다.
비상등이 흐려지며 꺼지자, 주위는 암흑이 됐다.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방향을 잃고 말았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베니아판 도어에 코를 부딪히고는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양쪽으로 열리는 문에는 창문이
있었으나, 웬일인지 검은 칠이 돼 있어서 창고 안은 거의 암흑에 가까웠다.
나는 창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상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머리를
들고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조급하지 말아라. 일어나서 여길 나가야 한다.
빌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양쪽으로 열리는 도어 틈새로 연필로 그린 선과
같은 가느다란 빛을 찾았다. 보였다. 나는 그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어렴풋한 그 소리, 잠깐 멈췄다가 다시 두들기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시작된다. 온 신경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리는 슈퍼 쪽이 아니라 배후에서,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 블록담 위를 미끄러지고 기어다니며 더듬고 있다. 아마도
안에 들어오려고 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벌써 들어와서 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내 구두나 아니면 목에 와 닿을지도 모른다.
또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그것이 밖으로부터 들려온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리에게 자, 걸어라! 하고 명령을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 소리가 달라졌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삐꺽
하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생각으로 가느다란 수직의 광선을
향해 돌진했다.
팔을 내밀어 도어를 열고 슈퍼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너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올리가 자기의 가슴에 손을 얹고 목멘 듯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저 소릴 들었소?" 나는 물었다. 내 목소리는 겁에 질려 들떠 있었다. "누가
저 소릴 들었소?"
물론 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왜 발전기가 멈췄는지 알아보러 온 것이었다.
"발전기는 내가 껐어요." 나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무슨 소리였어요?"
다른 남자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무언가 더듬는 것 같은 소리였어요. 질질 미끄러지는 것 같기도
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아요."
"기분 탓이겠죠." 올리와 함께 다른 남자도 그렇게 말했다.
"아뇨, 기분 탓이 아녜요."
"불이 꺼지기 전에 들었소?"
"아니, 꺼진 다음이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나를 보고 있는 눈초리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나쁜 뉴스, 새로운 공포나 이상한 일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안에 들어가서 발전기를 작동시켜 봅시다." 점원이 손전등을 나눠 주며
말했다. 올리는 내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면서 전등을 받았다.
올리가 문을 열고 불빛이 들어가도록 문을 버텨 놓았다.
손전등의 빛이 춤추듯 돌아다니며 창고 안의 물건을 비췄다. 막힌 배기구에서
창고 안으로 역류한 배기 가스 탓으로 빛이 연기처럼 보였다. 점원이 창고
우측에 있는 반입구의 셔터를 비췄다.
남자 두 사람과 올리가 발전기가 있는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앞을 비추며 셔터 쪽으로 갔다. 누군가 발전기를 돌렸으나 역류하는
배기 가스 때문에 곧 꺼버리고 말았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렇게 말한 것은 노옴이란 점원이었다. "제가
저 셔터를 열게 얼마 동안 발전기를 돌려주세요.
밖에 나가서 막혀 있는 걸 제거할 테니까요."
"노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올리가 주저하듯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또 한 사람의 남자가 말했다. "내가 나가서 할 테니까."
"안 돼요. 당신들은 몰라요." 올리가 다시 말렸다.
"정말 그렇게 하다간……."
"걱정 없다니까." 남자가 달래듯 올리의 말을 가로 막았다.
이때 노옴이 화를 냈다.
"이건 내가 제안한 거예요."
그들은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그만들 둬요!" 나는 외쳤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아니면 알려고 하지 않는 건지. 이건 보통
안개와 달라요! 안개가 온 다음에 슈퍼에 들어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저 셔터를 열면 무엇인가 들어와서……."
"무엇이 들어온단 말예요?" 노옴이 18세의 젊은이답게 업신여기듯 말했다.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난 소리를 들었어."
"들레이튼씨, 이런 얘길 해서 안됐지만 당신이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어요. 내 생각으론,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마음이 전도돼 있었던 거예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나는 말했다. "아무래도 밖에 나가봐야 하겠다면
아까 어린애를 보러 간다고 나간 부인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확인한 다음에
나가보지!"
그러나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짐이란 사나이가 말했다.
"그래, 젊은이 네가 해라. 이쪽에서 발전기를 돌릴 테니까, 너는 셔터를
사람이 드나들 만큼 올려. 그럼 배기 가스가 더 이상 심해지지 않도록 발전기를
세울 테니까. 나가서 막힌 것 제거하거든 다시 소리를 질러!"
"알았습니다." 노옴은 셔터 곁으로 달려갔다.
올리가 분명한 공포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쫑긋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머리가 돌아 있을 뿐이다.
짐과 한 패인 마이론은 우리가 후퇴한 줄 알고 발전기실로 들어갔다.
"준비됐나, 노옴?" 짐이 물었다.
노옴은 끄덕이더니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예……." 하고 소리쳤다.
"노옴, 바보 같은 짓 하지 말라니까." 올리와 나는 노옴을 말리려고 했으나,
그때는 벌써 발전기가 소리를 내고 돌아갔고, 노옴은 어느덧 셔터 옆의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셔터는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상등은
발전기가 돌아가면서 불이 들어왔으나, 셔터의 모터가 돌아가자 불빛은 곧
희미해졌다. 나는 다시 그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를 맡았다.
반입구의 셔터가 2피트 올라가고 다시 4피트 올라갔다. 셔터 저쪽에 주위를
노란색의 줄무늬로 둘러싼 네모난 시멘트의 플랫폼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란색의 줄무늬가 부옇게 보인다. 안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했다.
"됐어요. 스톱!" 노옴이 소리쳤다.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가 연기처럼 소용돌이치며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공기가 차가웠다.
발전기가 멈췄다. 노옴이 셔터 아래에 몸을 굽혔을 때, 짐이 발전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보았다. 나도 보았다. 올리도 보았다.
한 줄의 촉수가 콘크리트로 된 반입구의 플랫폼 너머로 늘어져 나오더니
곧 노옴의 정갱이를 휘어감았다. 나는 입을 벌렸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올리는 목 안에서 나오는 듯한 놀라움의 소리를 냈다.
촉수는 끝이 가늘어져 있으나 노옴의 다리를 휘어감는 데는 1피트만한 굵기로
점점 굵어지면서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부분에서는 아마도 4, 5피트는 돼
보였다. 위쪽은 슬레이트와 같은 회색인 것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살색에 가까운
핑크색이 돼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흡반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흡반은 수백 개의 입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노옴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다리를 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걸 떼어줘요! 응? 떼어달란 말예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짐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노옴은 반입구의 셔터 아래쪽을 잡고 몸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촉수가 부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팔을 굽혔을 때 알통이 나타난 것처럼.
노옴은 다시 셔터 아래로 끌려나가 머리가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촉수는 더욱 부풀어서 노옴의 다리와 허리가 밖으로 끌려나가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셔터 아래쪽을 잡고 저항을 했다. 그는 마치 턱걸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살려줘요!" 노옴은 울고 있었다. "제발 살려줘요! 다들 날 좀 살려줘요!"
"아! 하느님!" 마이론이 발전실에서 나와 무엇이 일어났는지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노옴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나는 노옴의 허리를 잡고 발뒤꿈치에 힘을
주며 몸을 뒤로 제끼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잡아당겼다. 그것은 마치 굵은
고무줄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조금 당겨지긴 해도 촉수는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세 개의 촉수가 안개 속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 한 개는 노옴이
입고 있던 붉은색의 에이프론을 휘어감더니 쥐어뜯어버리고, 촉수는 그 빨간
천을 둘둘 말아들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두 개의 촉수는 반입구의 플랫폼 위에서 꿈틀거리며 내가 앞서 들었던
이상한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드디어 그 하나가 노옴의 왼쪽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허리를 휘어감고 말았다. 내 팔에도스쳐갔다. 미적지근하며 맥이 뛰고
미끌미끌했다. 만약에 그때 그 흡반이 내 몸에 닿았다면, 나 역시 안개 속에
끌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촉수는 날 스쳐갔을 뿐, 노옴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그리고 세 개째의 촉수가 노옴의 다른 한쪽의 발목을 휘어감았다.
노옴의 몸은 내 손에서 빠져나갈 찰나였다.
"누군가 좀 도와줘!" 나는 외쳤다. "올리! 누구…… 이쪽에 와서 거들어줘!"
그러나 아무도 가까이 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노옴의 허리를 감고 있는 촉수가 그의 피부에
늘어붙은 것을 보았다. 흡반이 셔츠와 바지 사이의 살이 나온 곳을 뜯어먹고
있었다. 맥박치는 촉수가 뜯어먹은 데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옴의 다리가 다시 밖으로 끌려나갔다. 구두 한쪽이 벗겨져 있었다.
또 다른 촉수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더니 그 끝으로 구두를 감아쥐며 가져가버렸다.
노옴의 손은 셔터의 하단을 잡고 있으나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손가락은
납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외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의 머리는 끝없는 저항을 계속하고 앞뒤로 흔들어대며 긴 검은 머리가 흩어질
대로 흩어져 있었다.
노옴의 어깨 너머로 또 다른 촉수들이 뻗어오는 것이 보였다. 몇 십 개의
촉수. 그것은 촉수의 숲이었다. 작은 것도 있었으나 두세 개는 무섭게 굵어서
오늘 아침에 길가에 쓰러져 있던 노목만한 것도 있었다. 큰 놈은 맨홀의 뚜껑만한
핑크색의 흡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노옴을 잠아당겼다. 촉수가 잠시 떨어졌으나, 그놈이
다시 감아쥐기 전에 노옴의 살은 꽤 많은 부분이 흡반에 뜯어먹힌 것을 보았다.
촉수 하나가 내 볼을 스치고 마치 연설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공중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빌리의 일을 생각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노옴의 몸을 놓고 엎드렸다.
나는 올려진 셔터 바로 아래에 있었다. 한 개의 촉수가 내 왼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흡반으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그놈은 다시 노옴의 오른팔을 감아쥐었다.
나는 개구리처럼 뛰어 셔터 안으로 들어가서 어깨로부터 텀블링을 하듯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짐과 올리, 그리고 마이론이 아직 거기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만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짐과 마이론은 발전실
문 앞에 붙어 서 있었다.
"발전기를 돌려!" 나는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마약에 취해 죽음의 본능에 홀린 사람처럼
반입구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상자를 주워 짐에게 던졌다.
"빨리 발전기를 돌리라니까!" 나는 목청이 터지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나온 그것이 노옴을 산
채로 잡아먹어버린 광경을 목격한 충격인지 울면서 변명을 시작했다.
"미안해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단 말예요……."
이때 올리가 두꺼운 어깨로 짐을 제치고 넘어지듯 발전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발전기가 기침을 하듯 소리를 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반입구의 셔터 쪽으로 돌아갔다. 노옴의 몸은 거의 밖에 끌려나가 있었지만,
그래도 한쪽 손이 셔터의 끝을 움켜쥐고 머리를 흔들면서 안개 속을 응시하고
있는 눈은 공포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어느덧 여러 개의 촉수가 들어와서 창고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반입구의 셔터를 조작하는 버튼 가까이에도 수많은 촉수가 우글거리고 있어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촉수 하나가 미끄러지듯 마이론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는 공포의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서면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손을 뻗쳐서 셔터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긴 것을 찾았다. 마침 맥주 상자가 쌓여 있는 옆에 청소부가
쓰는 긴 자루가 달린 빗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노옴의 마지막 손이 셔터에서 떨어지자, 그는 콘크리트의 플랫폼으로 덜컹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손은 필사적으로 무엇인가 잡을 것을 찾고 있었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내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명백한 의식으로 빛나 있었다. 그는 자기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힘 없이 안개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비명이 일어나고 곧 사라졌다.
노옴은 죽었다.
내가 빗자루 끝으로 버튼을 누르자 모터가 슬픈 듯한 소리를 냈다.
셔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선 최초로 촉수 중에서도 가장 긁은 것에 닿았다.
마이론 쪽으로 가던 놈이다. 셔터가 그것의 껍질을 눌러내리고, 그것이 터지자
검은 점액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촉수는 심하게 요동을 치면서 창고의 콘크리트
바닥을 소의 꼬리처럼 마구 두들겼다. 그리고 납작하게 찌부러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다른 촉수들이 퇴각을 시작했다.
촉수 한 개가 도그후드의 5파운드짜리 봉지를 움켜쥐고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려온 셔터가 홈 속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 촉수를 잘라버리고 말았다. 잘린
부분은 경련을 일으킨 듯, 움켜쥐고 있던 봉지가 터지고 내용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촉수는 물에서 꺼낸 물고기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차츰 그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축 늘어지고 말았다.
나는 빗자루 끝으로 찔러 보았다. 1미터가 가까운 길이의 촉수의 단편은
순간 빗자루에 달라붙어 감아들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발전기의 소리와 칸막이 저쪽에서 울고 있는 올리의 목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올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전기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나는 다른 소리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들었던 그 미끄러지는 듯한
더듬고 있는 소리였다. 처음 듣던 소리보다 열 배나 많은 소리였다. 그것은
안에 들어오려고 셔터 밖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촉수의 소리였다.
미이론이 두세 걸음 내게로 다가왔다.
"저…… 우린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나는 화가 나서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올리의 우는 소리가 딱
그쳤다.
"너희들은 슈퍼 쪽으로 나가 있어! 나가서 맥주 냉각기 옆에서 기다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지금은 아직 안 된단 말이야!"
마이론과 짐이 스윙 도어를 열고 슈퍼 쪽으로 나가자, 올리가 발전기를 멈췄다.
나는 희미한 불빛으로 킬딩의 깔개를 찾아내서 빌에게 덮어주기 위해 그것을
집어들었다.
올리가 발을 질질 끌며 발전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데이브, 아직 거기 있어요?"
"여기 있어, 올리. 바닥에 표백제 상자가 흩어져 있으니까 조심하게."
"네."
올리는 더듬거리며 내게로 가까이 왔다.
"빨리 나갑시다."
"잠깐 기다리게. 자네하군 얘길 해야겠어. 어떡하면 좋지? 노옴의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모두에게 얘기를 해 줘야 할 텐데……."
"패닉 상태가 되면 어떡하죠?" 그는 찬성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안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두 번 다시 밖에 나갈
생각은 안 하겠지. 모두들 밖에 나가고 싶어하고 있어. 그야 당연한 일이지.
많은 사람들이 집에 가족을 놔두고 와 있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밖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그의 손은 내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알았어요. 당신이 말하는 대로예요. 나도 쭈욱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
촉수…… 무너발처럼 생긴…… 도대체 저게 뭘까? 저 촉수 끝에는 뭐가 있길래……
데이브."
"글쎄 나도 알 수 없지만, 저 멍청이 같은 둘이 떠들어대면 큰일이야. 그야말로
패닉 상태가 될지도 모르지. 자, 가세."
우리는 스윙 도어 사이의 빛을 찾아 문을 열고 슈퍼 안으로 되돌아갔다.
5. 노튼과 언쟁을 하다. 실지 검증
짐과 마이론은 버드와이저의 캔을 손에 들고 스윙 도어 옆에 서 있었다.
빌리는 아직 자고 있었기 때문에 들고 나온 깔개로 덮어주었다.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처음에 창고에 들어갔을 때부터 적어도 다섯 시간은
경과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불과 35분밖에는
지나지 않았다. 나는 올리가 짐과 마이론과 함께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올리도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며 내게도 권했다. 오늘 아침에 나무를 자르 고 있을
때처럼 단숨에 반 캔을 쭈욱 들이켰다.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모두에게 얘기를 해야겠어." 나는 말했다.
짐이 반대라도 하듯 입을 열었으나, 나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올리와 나는
당신과 마이론이 노옴을 밖으로 내보낸 일은 일체 얘기 안 하겠어. 만약에
당신들이 저 노옴을 끌고 가서 삼켜버린 괴물에 대해서 우리가 얘기하는 것을
지지한다면 말이야."
"그야 물론이죠." 짐은 가엾을 정도로 열성적인 태도를 보였다."알았습니다.
만약에 얘기를 안해 주면 다들 밖에 나갈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구말구요."
"데이브." 올리가 말했다. "그것이…… 만약에 안으로 들어오면 어떡하죠?
그 촉수가 말예요."
"들어올 리가 없잖아." 짐이 말했다. "당신들이 셔터를 닫았잖 아요."
"물론 닫았지. 하지만 이 가게의 정면은 모두 유리로 돼 있어." 올리가 말했다.
"그렇군……." 마이론이 중얼거렸다.
"이거 보통 일이 이니야."
두 번째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세 사람을 냉각기 옆에 놓아두고 나는 브렌트
노튼을 찾으러 갔다. 그는 두 번째 렛지에서 뱃 브라운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브렌트." 나는 말을 걸었다.
"데이브, 어디 가 있었나?"
"그 일로 당신하고 할 얘기가 있어요."
"냉각기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군! 저런 짓을 하다니……." 브라운은 화를
내며 말했다.
노튼과 나는 가정용품과 잡화가 쌓여 있는 옆을 지나 맥주 냉각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어깨 너머로 창문의 문틀이 아까 있었던 원인 불명의
충격 때문에 휘어 있고, 정문의 유리 한쪽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며 불안을
느꼈다. 그것을 헝겊 같은 것으로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노옴을
안개 속으로 끌어들인 촉수는 도그후드의 봉지도 손쉽게 터뜨려버렸던 것이다.
나는 불안을 잊어버리려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저기 맥주 냉각기 옆에 있는 스윙 도어 말인데요……."
그는 그쪽을 쳐다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 가게의 부지배인 올리
위크스가 아냐!? 브라운 지배인이 보면 당장 모가지를 자르려고 할 텐데."
"브렌트,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예요?"
"무슨 얘기였지? 미안해, 데이브."
"저기 스윙 도어가 보여요?"
"물론 보이지.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건가?"
"문 저쪽은 건물의 서쪽 전체를 점유하고 있는 창고로 돼 있어요. 빌리가
잠이 들어서 뭔가 덮어줄 것을 찾으로 들어갔는데……."
노옴을 밖으로 내보낸 것에 대한 시비는 빼놓고 나는 모든 것을 노튼에게
말했다. 안에 침입해 온 것……, 그리고 비명을 지르고 밖으로 끌려나간 것…….
그러나 브렌트 노튼은 그 이야기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설마--라고 한마디
했을 뿐,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짐과 마이론, 그리고 올리가 있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증언했다. 그러나
짐과 마이론은 벌써 취기가 돌아 있었다.
그래도 노튼은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는 말허리를 잘라서 말했다.
"거짓말이지! 절대로 거짓말이구말구! 미안하지만 도대체가 우스꽝스럽단
말일세. 자네들 날 놀리려고 그러나?" 그는 마치 타이르기라도 하듯 얼굴에
웃음까지 띠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 최면의 일종에 걸려 있든가 그
어느 쪽이겠지."
나는 분노가 떠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고 말했다.
"그렇다면 창고 안에 들어가 봐요. 바닥에 촉수의 끝이 잘린 것이 있어요.
셔터를 내렸을 때 절단한 거예요. 게다가 그들의 소리도 들려요! 미끄러지듯
셔터를 더듬고 있는 소리가!"
"그건 싫은데." 그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뭐라고 그랬죠?"
"싫다고 그랬지. 난 안 가. 농담도 분수가 있지."
"브렌트! 이건 절대로 농담이 아녜요. "
"물론 농담이구말구!" 그는 결정적으로 말했다. 시선을 짐에게서 마이론으로,
그리고 올리 위크스에게서 잠깐 멈췄다가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들,
나를 타지방 사람이라고 놀림감으로 만들 셈으로 그런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데이브?"
"브렌트, 보기만이라도 하면 어때요?"
"싫어. 보고 싶으면 자네나 보게." 그의 목소리는 법정에 선 변호사처럼
높아갔다. "내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 98센트짜리 고무장난감 같은 것을 보고
있는 옆에서, 이 시골뜨기들이 요절복통을 하겠다.
그럴 속셈인가?"
"아니, 누구더러 시골뜨기라고 해요?" 마이론이 대들었다.
"자, 비켜 주게."
그는 나를 밀쳤다. 나는 비틀거렸으며, 맥주 냉각기의 맥주캔이 굴러 떨어지기까지
했다.
"귀를 후비고 잘 들어요, 브렌트. 우리 모두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어요!
내 아들이라고 예외는 아녜요! 그러니까 들어달란 말이오. 더 이상 싫다고
하면 후려갈기겠어요!"
"맘대로 하지 그러나!"
노튼은 미친 사람처럼 허세를 부리며 아직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만한 나이의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후려갈기고, 자네가
얼마나 위대하고 용감한가를 보여주지 그러나!"
"괜찮아요! 후려갈겨요!" 짐이 외쳐댔다.
"자넨 가만히 있게!" 나는 짐에게 말하고 노튼에게 바싹 다가갔다. "허세를
부리는 건 그만둬요!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난 모르겠는데…… 그런 일은." 그는 숨가쁘듯 말했다.
"이것이 다른 때와 장소 같으면 당신을 가게 내버려둬도 좋아요. 아무리
당신이 겁을 낸다고 해도 알 바가 아니니까! 사실은 나도 무서운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필요해요! 모두를 설득하기 위해선 당신이 필요하단 말이오!"
"날 놔주게!"
나는 그의 셔츠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모두가 여길 나가서 밖에 있는 저것에 잡혀먹히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아직 모르겠어요?"
"날 놓으라니까!"
"나하고 함께 안에 들어가서 당신의 눈으로 볼 때까지는 못 놓겠어요!"
"놓…… 으라…… 니까!" 노튼이 소리쳤다. 도어 바로 옆에까지 와 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이야?" 브라운 지배인이었다.
군중을 헤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날 놓도록 얘기해 주게." 노튼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은 미쳤다니까!"
"아니, 미치기는커녕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지만, 정신은 똑바로 돼 있어요!"
이렇게 말한 것은 올리였다. 나는 그를 축복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통로를 돌아 우리들 뒤로 와서 브라운 앞에 가로막았다.
브라운의 눈이 올리가 들고 있는 맥주캔으로 향했다.
"너, 술을 마셨지?" 그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함께 얼마쯤은 신이 나는 듯했다.
"이제 넌 모가지다!"
"이것 봐, 뱃!" 나는 노튼을 놓아주며 말했다. "지금은 보통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야!" 브라운은 뽐내듯 말했다.
"이 일은 회사에 보고한다. 그게 내 책임이니까!"
그 사이에 노튼은 재빨리 내 곁을 떠나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흐트러진
셔츠를 고치고 머리를 뒤로 붙이고 있었다.
"여러분!" 느닷없이 올리가 소리쳤다. "여러분! 슈퍼에 있는 여러분! 이쪽으로
오셔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그는
브라운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죠?"
"암! 되구말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와 노튼과의 다툼을 구경하고 있던 인원의
두 배가 되고 3배가 됐다.
"지금 당장 그 맥주을 놓으라니까!" 브라운이 말했다.
"당신은 가만 있어요!" 올리가 브라운 앞으로 한 발 다가서자, 브라운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데이브 들레이튼씨로부터 여러분에게 이야기가 있습니다."
올리가 말했다. "여러분이 집으로 가고 싶으시다면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기서 나는 노튼과 이야기한 같은 일들을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웃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야기를 마칠 때쯤에는 모두에게 깊은 불안감이 감돌았다.
"거짓말이 뻔하죠!" 노튼이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지!" 브라운이 동조했다. "바보 같은 소리야! 그 촉수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이야, 들레이튼씨?"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실제로 저기 있단
말이오."
"그건 저기 있는 맥주캔에서 나온 게 아니오?" 동조하는 듯한 웃음 소리가
두세 사람에게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쇠된 쉰 목소리의 카모디 부인의
목소리로 지워져 버렸다.
"죽음이야!" 그녀가 소리치자, 웃고 있던 사람은 서먹하게 되고 말았다.
"당신들은 귀가 있어도 들으려고 안 하고, 들어도 믿지 않아요. 밖에 나가서
자기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그녀는 일동을 돌아다보고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들레이튼씨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말해 두지만 이것은 마지막이에요! 종말이 온
거예요! 움직이는 손이 불꽃이 아니라 안개가 그것을 글씨로 나타낸 거예요!"
"그만해 두쇼! 카모디 부인!" 올리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걸 놔요! 내가 말했잖아요. 종말이라구! 죽음이라구!"
"웃기는 소리야!" 낚시꾼 모자를 쓴 남자가 내뱉듯이 말했다.
"천만에!" 마이론이 거들었다. "아마도 마약 중독자의 잠꼬대처럼 들리겠지만
이건 사실이에요! 내가 봤으니까."
"나도 봤어요" 짐이 말했다.
"나도 봤소!" 올리도 말했다. 이것으로 당장은 카모디 부인의 입을 막을
수가 있었으나 불안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거짓말이야!" 노튼이 말했다. "모두들 공모해서 거짓말을 날조한 거야!"
"도대체가 믿을 수가 있는 이야기라야지." 브라운이 가세했다.
"좋아요. 여기서 왈가왈부해 봤댔자 소용없어요." 나는 브라운에게 말했다.
"같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들어가서 보고 소리를 들어봅시다."
"뱃!" 올리가 말했다. "같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 문제의 끝장을 봅시다."
"좋아." 브라운이 말했다. "들레이튼씨, 이 우스꽝스런 이야기의 결말을
지읍시다!"
우리는 스윙 도어를 밀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소리는 불쾌한 소리였다--불길한 소리라고 해도 좋다.
브라운도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느닷없이 그는 내 팔을 잡더니 숨을
몰아쉬고 차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반입구의 셔터 쪽에서 낮은 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엇인가 더듬는
듯한 소리. 나는 한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손전등을 찾아내서 불을 켰다.
브라운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는 아직 그것을 본 것이 아니다. 다만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셔터의 표면에 마치 넝쿨처럼
꿈틀거리며 기어오르고 있는 모습을 되새길 수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쇼? 이래도 믿지 않겠소?"
브라운은 혀로 입술을 적시며 바닥에 산란해 있는 봉지며 상자들을 보았다.
"저들이 했단 말이오?"
"이쪽으로 와 보쇼."
그는 겁을 먹고 가까이 왔다. 시들어서 오그라들은 촉수의 단편이 창고 한구석에
뒹굴고 있는 곳을 전등으로 비쳤다. 브라운은 몸을 굽혔다.
"만지지 말아요?" 나는 말했다.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나는 빗자루를 들고 촉수를 건드렸다.
서너 번 건드리자 그것은 서서히 움직이더니 두 개의 흡반과 절단된 세 개의
촉수가 함께 엉키며 동그랗게 도사리더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브라운이
구역질을 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보았소?"
"봤어요. 그만 나갑시다."
손전등의 빛을 따라 스윙 도어를 열고 슈퍼로 나왔다. 모두의 얼굴이 이쪽을
향하며 말소리가 딱 그쳤다. 노튼의 얼굴은 오래된 치즈와 같은 빛깔을 하고
있었다. 카모디 부인의 눈이 빛났다. 모든 눈들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뱃 브라운은 두 손을 가지런히 잡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무래도 우리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6. 이야기를 계속하다. 불신자 그룹의 말로
그로부터 4시간 동안은 꿈처럼 지나갔다. 브라운의 증언에 이어서 히스테리에
가까운 토론이 계속됐다.
노튼 일파의 끝까지 불신을 표명하는 그룹이 있었다. 인원은 10명 정도로
의견상으로는 소수파였다. 노튼이 되풀이해서 지적한 것은 그 불가사의한 촉수가
슈퍼의 점원을 끌어간 현장을 목격한 것은 네 사람뿐이고, 그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짐이나 마이론으로서는 노옴에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한다면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불신자 그룹의 이야기들이 격해지자, 올리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좋아요, 노튼씨. 한 가지 제안을 합시다. 뭣하면
정면의 도어를 열고 뒤로 돌아와 보세요. 거기 반품용의 맥주와 소다의 빈
병들이 잔뜩 쌓여 있어요. 거기까지 갔다 왔다는 증거로 그 빈 병을 두 개만
가져와요. 그럼 내 이 셔츠를 벗어서 먹어보일 테니까!"
노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올리는 여전히 조용한 소리로 가로막았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덮어놓고 믿지 못하겠다고 소리만 지르고 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집에 가서 가족들이 무사한지 알고 싶은 거예요.
내 누이동생도 한 살짜리 딸아이를 데리고 집에 있어요. 나도 두 사람이
무사한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 모두가 당신 말을 믿고 집에 가려고 했다가
노옴과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단 말예요."
노튼을 설득할 수는 없었지만, 의견이 기울고 있던 일부의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는 있었다.
불신자의 그룹 다음에 시끄럽게 한 것은 카모디 부인의 존재였다.
"신의 마음을 거역할 수는 없는 거야! 올 것이 오고 만 것이야! 나는 그
징조를 보아왔지! 눈을 뜨고도 보지 않으니 그게 바로 장님이야! 이제 모두들
신을 맞이할 각오를 해! 신은 제물을 요구하고 계셔, 제물을!"
카모디 부인은 계속해서 떠들어댔으나, 몇 사람의 남자들이 주먹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말았다.
의논은 점차 건설적인 방향으로 돌아서, 슈퍼의 분명한 약점인 유리로 된
창문의 일이 문제가 되었다.
"저 창문은 어떡하면 좋지? 저 할머닌 미친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어두워진
다음에 뭔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건 맞을지도 몰라요." 마이크 하틀렌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겠지요?"
나는 뱃과 올리에게 물었다.
"잠깐!" 하틀렌 옆의 남자가 말했다. "난 던 밀러라고 해요. 무엇보다도
방벽을 쌓는 게 급선무예요. 저기 화학 비료며 잔디 비료의 푸대가 있는데
그걸로 모래 주머니 쌓듯 쌓아올리고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간격만 남기면 어때요?"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끄덕이며 서로 흥분해서 말들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곧 착수를 하자고 나서자, 밀러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건 꼭 알아둬야 할 일인데, 누군가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모두가 잠자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한 여인이 나섰다.
다크그린의 슬랙스를 입은 아름다운 몸집에다 젊고 예쁜 얼굴을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안에서 중형의 피스톨을 꺼냈다. 모두가 감탄의 소리를
냈다. 여인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다시 핸드백에 손을 넣어 스미스 앤 웻슨의
탄약 한 상자를 꺼냈다.
"저는 아만다 댄프리즈라고 해요. 이 권총은 주인이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탄환을 넣지 않고 2년 동안이나 가지고 다녔어요."
"주인은 여기 계십니까?"
"아뇨, 주인은 뉴욕에 있어요. 일 때문에 출장이 많으므로 절더러 갖고 다니라고
했어요."
"쓰실 수가 있으면 부인이 그대로 가지고 계시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전 사격 연습장엔 한 번밖엔 못 갔어요. 전혀 쏘아본 일이 없어요."
밀러는 권총을 받아들고 탄환이 안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요. 피스톨은 손에 들어왔는데 누구 사격에 자신 있는 사람 있어요?
난 전혀 아니거든요."
모두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처럼 올리가
나섰다.
"난 사격 연습을 제법 했습니다. 콜트45와 라마25도 가지고 있습니다."
"뭐, 자네가?" 브라운이 말했다. "어두워질 때는 곤드레가 돼서 제대로 보지도
못할 텐데."
"당신은 이름이나 적어서 회사에 보고나 하면 돼요!" 올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권총을 열어보더니 허리춤에 싸고 탄환을 가슴의 주머니에
넣었다. 담배 한 갑 넣을 만큼만 부풀었다.
"인제 모두들 푸대를 쌓아올립시다."
노튼의 그룹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자원해서 일어났다. 노튼은 혼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으며,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4시 반까지는 화학 비료와 잔디 비료의 포대가 쌓아올려져 커다란
창문은 작은 감시용 틈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히게 되었다.
내다보는 창문 옆에는 감시자가 배치되고, 감시자 옆에는 뚜껑을 연 액체
연료의 깡통과 자루 걸레가 붙은 횃불 자루가 몇 개씩 놓이게 되었다.
밖을 살피는 창문은 다섯 군데가 있어 댄 밀러가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감시의
교대 순번을 짰다. 4시 반이 되자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빌리를 데리고 창문
앞에 쌓아올린 푸대 위에 걸터앉았다.
창 밖으로 밖의 안개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창문 바로 밖에는 붉은 벤치가 있었다.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식료품을 옆에
놓고 앉는 벤치이다. 그 저쪽은 주차장으로 돼 있었다. 안개는 여전히 천천히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습기를 잔뜩 품고 있는 듯한데 어둠침침하고 음울하게
보였다. 그것을 보고만 있어도 기력이 없어지고 절망적인 기분이 돼 왔다.
"아빠,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야?" 빌리가 아빠 무릎에 놓인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사이를 두고 물었다. "어째서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지? 주경찰도
FBI도?"
"글쎄 말이다."
"엄마는 괜찮을까요?"
"아빠도 알 수가 없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를 안아주었다.
"엄마 죽도록 보고 싶어." 빌리는 떨어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아빠가 나빴다고 생각해. 엄마를 괴롭혔을 때의 일들을 말이야."
"빌리!" 그 다음에 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올라와서 목소리가 떨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곧 끝나는 거야?" 빌리가 묻는다. "아빠 곧 나가요?"
"아빠도 몰라." 빌리의 얼굴을 어깨 옆으로 눕히고 머리 뒤를 쓰다듬어주었다.
빌리가 울기 시작했다.
"조용해, 빌리. 조용히 해요."
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흔들어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울었다. 이럴 때 그만
울게 하는 방법은 엄마만이 알고 있었다.
페더럴 후드 가게 안에는 어느덧 저녁의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밀러와 하틀렌과 브라운이 가게에 있는 스무 개 가량의 손전등을 나눠주었다.
나는 빌리를 기대게 한 채 감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의 우유빛
안개는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몇 번쯤 무엇인가 본 듯했으나 신경과민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감시원의 한 사람이 애매한 경고를 했지만 잘못 본 것이었다.
빌리가 터먼 부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몹시 반가운 듯 뛰어갔다.
그녀는 올 여름에는 한 번도 아이를 보러 와주지 않았지만, 빌리는 뛰어가서
그녀에게 안겼다.
"스테판은요?" 그녀가 물었다.
"집에 있어요. 이런 데서 만나다니 반갑군."
"저두요. 거기 있는 동안 빌리는 내가 데리고 있을 게요."
"고마워요."
터먼 부인은 빌리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갔다.
5시 반쯤 슈퍼 안쪽에서 흥분한 소리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밖으로 나가다니,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야?"
대여섯 개의 손전등이 모여서 입씨름을 하며 슈퍼의 정문 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속에서 노튼의 목소리가 한결 높게 울리고 있었다.
"자! 가게 해 주시오. 가게 해 줘요! 부탁이오!"
내 곁에서 창문을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 갔다. 나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기로 했다. 가보지 않더라도 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마이크 하틀렌이 말했다. "부탁이니까 서로 이야길 해 봅시다."
"이야기할 건 하나도 없어요." 노튼이 잘라서 말했다.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다. 결심을 한 듯하지만 얼굴이
핼쑥하고 오히려 참담하게 보였다. 그는 몇 사람 안 되는 인원수--처음의 9인인가
10인이던 것이 5인으로 줄어들었다--의 선두에 서 있었다.
"우린 나갈 겁니다."그가 말했다.
밀러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을 고집하는 게 아닙니다." 밀러가 말했다. "마이크가
말하는 대롭니다. 우리 천천히 다시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요? 미스터 맥비가
가스 그릴에서 닭의 바베큐를 만들고 있는데 다들 함께 먹으면서--."
노튼의 앞을 가로막은 밀러를 노튼이 밀어젖혔다. 노튼은 화가 났다.
곧 얼굴을 붉히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당신은 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그러는 건가!"
대단한 결심을 한 탓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망상 때문인지 노튼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에게도 구원을 불러주지."
"여보시오." 마이크 하틀렌이 말했다. "노튼씨, 웬만하면 닭이라도 먹고
가시오. 뱃속에 따뜻한 것이 들어 있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야기할 찬스를 당신들한테 주라고? 나는 법정 경험이 많지만
그런 수는 안 통해요. 당신들은 벌써 우리 편을 다섯 사람이나 변심시키지
않았나!"
"뭐요? 당신 편이라구요?"
"글쎄 여러 말 할 건 없고! 그래, 아까부터 두 시간이나 감시를 하고 있는데
뭘 봤다는 사람이 있소?"
"그러니까 뒤쪽에 있다고, 창고에--."
"거짓말 말어!" 노튼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여러 번 검토했소.
우리는 나갑시다."
"안 돼요!" 누군가가 속삭이자, 같은 말이 합창처럼 퍼져나갔다. "안 돼!
안 돼요! 안 돼요……."
"당신네들은 우리들을 감금할 작정입니까?" 쇠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노튼
지지자의 한 사람으로 노안경을 낀 초로의 부인이었다.
"우리들을 감금할 작정이오?"
"아닙니다." 마이크가 대표로 대답했다. "아무도 감금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때 나는 빌리에게 무엇을 가져오라고 가만히 속삭였다. 빌리는 나를 쳐다보더니
사람들 틈을 누비고 뛰어갔다.
노튼은 두 손으로 머리를 뒤로 붙였다. 브로드웨이의 배우 못지않은 연기였다.
노튼은 침착을 잃은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더 할말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서 네 사람의 추종자를 데리고 정산소 한 군데를
빠져나갔다. 그 초로의 부인 외에 20세 정도의 뚱뚱한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골프모를 쓴 블루진의 남자였다.
"브렌트! 잠깐 기다려요." 내가 말했다.
"더 이상 논의할 건 없어. 특히 자네하곤 싫어."
"그건 알고 있어요.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나는 목을 돌려 빌리가
정산소 쪽으로 뛰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뭐야?" 노튼이 경계하듯 묻는데, 빌리가 뛰어와서 세로판으로 포장된 봉지
하나를 내게 주었다.
"빨랫줄이오."나는 말했다. "이것은 큰 봉지로 3백 피트는 돼요."
"그래서?"
"나가기 전에 이 끝을 허리에 매고 나가 줄 순 없겠소? 내가 끈을 풀어서
내보내 줄 테니까, 끝이 다 되거든 어딘가 적당한 곳에 잡아매 줘요. 거기까지는
안전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그래요."
그의 눈에는 동요의 빛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의 일이었다.
"못하겠어." 노튼은 말했다.
"그렇담 좋아요. 아무튼 무사히--."
갑자기 골프 모자를 쓴 남자가 말했다.
"내가 하죠, 그런 것까지 거절할 이유가 뭐 있겠소."
노튼이 그쪽을 보며 뭔가 퍼부을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골프모의 남자는
조용히 노튼을 다시 보았다.
"고맙소." 나는 말했다.
포켓 칼로 포장을 뜯고 빨랫줄을 꺼내 한 끝을 그의 허리에 조금 느슨하게
감아주었다. 슈퍼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내 나이프를 가지고 가겠소?" 나는 골프모의 남자에게 물었다.
"가지고 있어요." 여전히 조용한 말투로 나를 쳐다보며 그는 말했다. "당신은
빨랫줄이나 잘 풀어내는 것만 조심하면 돼요.
끝까지 가서 당기면 어디든지 잡아맬 테니까."
"다들 준비 됐소?" 노튼이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대답은 안 했지만, 노튼은 돌아섰다.
"브렌트." 나는 손을 내밀었다. "무사하기를 빌겠소."
그러나 그는 마치 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구원대를 불러다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출구'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렴풋이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새어들어왔다. 나머지 사람들도
뒤를 따라 나갔다.
마이크 하틀렌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노튼 등 다섯 사람은 유백색의 흐르는
안개 속에 서 있었다. 노튼이 뭐라고 말했다. 잘 들어뒀어야 하는데, 안개에는
기묘한 소음 효과가 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다섯 사람은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틀렌이 문을 조금 열고 잡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빨랫줄을 풀어냈다.
아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들의 의복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섯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부분적으로 흐려져 가는 으시시한 인상을 받았다.
수초 동안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안개가 이상하리만큼
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계속 빨랫줄을 풀어냈다. 4분의 1이 나가고 반이 됐다. 잠시 동안 움직임이
멈췄다. 빨랫줄은 내 손 안에서 생명이 있는 것에서 죽은 것으로 일변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은 4분의 3이 나갔다. 줄의 끝쪽이 바로 빌리의 발밑에 있었다.
다시 줄의 흐름이 멈췄다. 한 5초 동안 멈춰 있다가 다시 5피트 정도의 줄이
급하게 당겨져 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왼쪽으로 당겨지며 출구의 문을 흔들었다.
다시 20피트 가량의 줄이 당겨지며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안개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높고 낮게 들려왔다. 비명의 주인이 남잔지 여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빨랫줄이 다시 손 안에서 몹시 심하게 앞뒤로 마찰을 일으키더니 다시 한
번 문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2, 3피트 당겨지더니 멀리서 개가 크게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하틀렌은 망연히 정신을 잃은 듯 서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입가엔 경련이
일고 있었다.
신음 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긴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노부인의 절규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노부인의 소리라고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놔요--아--하느님! 놔 주세요--."
그리고 그녀의 소리도 끊어졌다.
빨랫줄은 모두가 그대로 당겨지고 손바닥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그 다음 줄은 축 늘어지고, 안개 속에서 짐승이 외치는 듯한 쉰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입 속의 침이 모두 말라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짐승의
신음 소리…… 그 광포한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오고…… 그 다음은 조용해지더니
낮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계속되다가 그것도 멎고 말았다.
"문을 닫아요." 아만다 댄프리즈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에요."
"곧 닫아요." 나는 줄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줄은 안개 속에서 거치는 것 없이 거두어졌다. 줄은 내 발밑에서 둥글게
뭉치고, 그 끝의…… 빨랫줄의 하얀 끝은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죽음이야!" 카모디 부인이 외쳤다. "밖에 나가면 죽어요! 인제 알았지!?"
빨랫줄 끝은 누가 물어뜯은 듯 실이 풀어져 있었고, 거기에 핏자국이 역력했다.
아무도 카모디 부인에게 말대꾸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이크 하틀렌은 잡고 있던 문을 놓고 닫았다.
7. 공포의 첫 밤
새로 교대한 여섯 사람의 남자가 창문의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은
올리로 닭살을 뜯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자루가 달린 횃불용 걸레가 각
초소마다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액체 연료의 통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신음 소리를 듣고, 물어뜯긴 빨랫줄에 묻은 핏자국을 본
다음 이 횃불의 효과를 믿으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밖에 있는 것이 우리를 습격하러 왔을 때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밤엔 어떻게 될까요?" 터먼 부인이 물었다.
목소리는 침착해 있었지만 눈에는 불안과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빌리는 내가 데리고 있을 게요. 사실은 죽을 만큼 무섭지만 빌리가 옆에
있으면 왜 그런지 안심이 돼요."
그녀의 눈이 불안에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오후 8시. 새로 8명이 경계를 맡았다. 올리가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왔다.
올리는 맥주를 쭈욱 들이키고 나서 소리친다.
"밖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어요."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냉정한 얼굴로 뒤돌아다본다.
"나 취하지 않았어요. 취하려고 하는데 취할 수가 없어.
취했으면 좋겠는데."
"무슨 말이야, 밖에서 뭐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건 모르겠어요. 월터에게 물어보니까 같은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안개의 어떤 부분이 순간적으로 검게 돼요. 작은 얼룩처럼 됐다가 어떤 땐
커다란 그림자가 점박이처럼 보이기도 해요. 검게 보였다간 엷어져서 회색으로
변하고……, 게다가 그게 움직이는 거예요. 애니 스미스까지도 밖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데요. 애니는 거의 앞을 못 볼 정돈데……."
"다른 사람들은?"
"타동네 사람들이라서 물어보지 않았어요."
"본 것 뿐만 아니고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틀림없나?"
"틀림없는 것 같아요." 그는 통로 저쪽에 혼자 앉아 있는 카모디 부인을
쳐다보면서 덧붙였다. "한 가지만큼은 저 할머니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어두워지면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나타났을 때 빌리는 거의
보지 않았다. 미세스 터먼이 안에서 빌리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리가
아직 나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정면에 있던 남자 한 사람이 두 손을 풍차처럼
휘저으며 감시 장소에서 내려와 뒤로 물러났다.
한 개의 창문 유리창 밖에 무엇인가 붙어 있었다.
"우와--!" 거기서 지키고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저게 뭐야! 저걸
어떻게 해 주세요!"
그는 감시 장소에서 내려오더니 원을 그리고 외치며 뛰어다녔다.
눈은 얼굴에서 튀어나올 것 같고, 입가에서는 침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냉동식품 케이스를 넘어 멀리 떨어진 통로로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몇 사람이 또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정면으로 보러 나오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유리창
밖을 기어다니는 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올리와 함께 창문 가까이 갔다. 올리는 댄프리즈 부인의 권총이 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장소에서 다시 비명이 일어났다.
공포라기보다 혐오의 소리였다.
올리와 나는 소리지르며 도망간 남자를 놀라게 한 것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모습을 볼 수는 있었다. 그것은 고야의
'지옥의 악귀'를 그린 벽화에 나오는 작은 생물을 닮았다. 몸의 길이는 2피트
정도, 몸에는 매디가 있고, 화상이 치료된 피부처럼 핑크색을 하고 있다. 구근처럼
생긴 눈이 짧은 자루 끝에 붙어 있어서 양쪽을 응시하고 있으며, 흡반처럼
생긴 다리로 유리에 부착돼 있었다. 등에는 대단히 큰 파리와 같은 날개가
붙어 있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창문에도 이와 같은 세 마리의 생물이 유리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기어다니는 대로 달팽이처럼 점액질 흔적이 묻어 있었다. 큰 놈은 4피트 정도나
되며, 서로의 몸 위로 지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누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카모디 부인은 땅 속에서 나타난 저주스러운
생물의 일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누군가가 우격다짐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
이것도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올리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기 때문에,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엉뚱한 짓은 하지 말게!"
그는 내 팔을 뿌리쳤다.
"그만한 분별은 내게도 있어요."
그는 권총의 총신으로 창문을 가만히 두들겼다. 그의 얼굴은 혐오감으로
가면처럼 굳어 있었다. 그가 창문을 두들기자, 날개짓이 빨라지더니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른 몇 사람이 올리가 한 대로 빗자루를 들고 창문을 두들겼다.
그들은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패닉 상태에 가까웠던 것이 수그러지고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생물이 사람을 습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뜸해졌을 때, 올리가 이쪽을 향해서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나 역시 입을 벌리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 창문에 붙어 있는 생물을 유리창에서 잡아떼 간 것이다.
나는 비명을 지를 것 같았으나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날으는 짐승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올리가 이야기한 대로 안개 속에서 검은
얼룩처럼 나타났었다. 허여멀그레한 동체와 가죽처럼 펄럭이는 날개, 그리고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창문을 진동시킬 만한 기세로 날아와 부리를
열고 핑크색의 생물을 물고 날아갔다. 불과 5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또다시 날아오는 생물이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다시
비명을 지르고 슈퍼 안쪽 깊숙이 도망 갔다.
오른쪽 맨 위에서 잔디 비료의 푸대 하나가 조금씩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바로 아래에서는 톰 스몰리가 창문으로 안개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물리!"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위험해! 조심하라구!"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푸대가 움직이더니 그대로
떨어지면서 스몰리의 머리를 치자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날짐승 한 마리가 유리의 뚫어진 구멍 사이로 들어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붉은 눈이 이쪽을 쳐다보며 무시무시한 부리가 탐욕스럽게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었다.
나는 횃불용 빗자루를 들어 액체 연료통에 처넣었다. 그 바람에 통이 쓰러지고
액체 연료가 바닥에 엎질러졌다. 그 사이에 날짐승은 슈퍼 안으로 들어와 푸대
위에 올라앉았다. 날개를 펴려고 했지만 천장이 낮아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대로 밸런스를 잃고 아래로 떨어지면서 날개를 퍼덕거리며 톰 스몰리의 등
위에 내려앉았다. 내려앉으며 발톱을 움츠렸을 때, 톰의 셔츠가 찢어지고 등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횃불에 불을 붙이려고 성냥을 찾았으나 주머니 속에는 성냥이 없었다.
주위는 대혼란에 빠져들어갔다. 횃불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성냥이 없다.
스몰리 등에 내려앉은 괴물은 부리로 스몰리의 목덜미 살을 뜯어먹고 있었다.
스몰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가 들고 있는 빗자루에 불이 붙었다.
밀러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죽여버려!" 누군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옆에선 올리가 권총을 꺼내
겨냥을 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초점이 맞지 않았다.
괴물은 다시 날개를 펄럭거렸다. 그것은 날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더 단단히 휘어잡기 위해서였다. 가죽과 같은 날개로 스몰리의 몸을 감싸고
말았다. 무서운 비명이 공기를 진동했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소리였다.
모든 것이 수초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괴물을 향해 횃불을 들이댔다.
반응이 있었는지 다음 순간 괴물은 불 덩어리가 되었다. 날카로운 울음 소리를
내고 날개를 펄럭거리더니 불꽃과 함께 날아올랐다. 그것은 불타는 깃을 여기저기
날리면서 마지막에는 한 진열장에 부딪치더니 바닥 위로 떨어졌다.
괴물의 몸은 재와 뼈뿐이었다. 타는 냄새는 몹시 강렬해서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는 코를 찌르는 안개의 악취가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빌리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브라운이었다. 눈과 함께 틀니도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또 딴 놈이 들어왔어!"
거대한 날벌레가 한 마리 들어와 잔디 비료의 푸대 위에 앉더니 날개를 부릉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횃불의 불은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선생인
미세스 레플러가 나보다 빨랐다.
그녀는 두 손에 한 개씩 살충제 통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괴물을 향해 살충제의
버튼을 눌렀다. 살충제의 진한 스프레이가 괴물을 엄습했다.
괴물은 고통 속에서 몸을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져 있는 스몰리
위로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울부짖고 있었다. 신음 소리도 들렸다.
아만다 댄프리즈가 몽유병자 같은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한 손에는
플라스틱 바케츠를 들고 한 손에는 자루가 달린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눈을 공허하게 뜬 채 몸을 굽혀 핑크색 괴물을 바케츠 속에 쓸어넣었다.
그녀는 출고 앞으로 다가갔다. 도어에는 벌레는 앉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도어를 조금 열고 바케츠째 밖으로 내던졌다. 바케츠는 옆으로 쓸어져 뒹굴었다.
핑크색의 날짐승 한 마리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 날개 소리를 내며 그 위에
앉아 기어다니고 있었다.
아만다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옆으로 가서 어깨를 안아주었다.
새벽 한시 반.
나는 매장 옆의 벽에 기대 앉아 졸고 있었다. 빌리는 내 무릎에 머리를 얹고
잠들고 있었다.
나는 꿈 속에서 어제 밤으로 돌아와 있었다. 빌리와 스테판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창문 앞에 서서 회색에 가까운 호수를 보며 폭풍우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은빛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었다. 돌풍이 불면 창문이 깨지고 무서운 유리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갈 것이다.
나는 그들 곁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조금도 그들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 마리의 새가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났다.
한 마리의 붉은 부리를 가진 '죽음의 새'가 거대한 나래를 폈다.
그러자 호수의 서쪽에서 동쪽까지가 모두 그 그림자에 가려졌다. 그리고
부리를 열고 아내와 아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로헤드 계획…… 애로헤드 계획…… 애로헤드 계획…….
잠이 깊지 못한 것은 나나 빌리뿐만이 아니었다. 자면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계속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4시경 빌리가 눈을 떴다. 반쯤 눈을 뜨고 잠꼬대 같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아직 여기 있었어?"
"그렇단다."
빌리는 울기 시작했다. 아만다가 눈을 뜨고 이쪽을 보았다.
"아가, 일루 와." 그녀는 빌리를 끌어안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그래 그래, 오냐 오냐." 아만다가 빌리를 얼러주자 다시 잠이 들었다.
"고마워요." 나는 말했다. "빌리는 당신한테 응석을 떨고 싶었을 거예요……."
이때 전등 위에 여자의 블라우스를 덮어씌우고 올리가 가까이 왔다.
"데이브." 그는 속삭였다.
아만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겁을 먹은 표정이 되었다.
"올리, 무슨 일이야?"
"데이브, 잠깐 이쪽으로 와 주겠어요? 부탁입니다."
"빌리의 곁을 떠날 수가 없는데…… 겨우 잠이 들었단 말이야."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아만다가 속삭였다. "가 보세요." 그리고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8. 군인들 몸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나는 올리를 따라갔다. 그는 창고 쪽을 향해 갔다. 냉각기 옆을 지나갈 때
그는 맥주를 한 캔 꺼내 들었다.
"올리, 무슨 일이야?"
"당신이 봐 줬으면 해서 그래요."
스윙 도어를 열고 우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조금 바람이 일었다.
춥다. 노옴이 그렇게 된 다음 여기 들어오는 게 꺼려진다. 죽음의 촉수의
단편이 아직도 여기 어딘가에 뒹굴고 있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에 집요하게
늘어붙어 있기 때문이다.
올리가 손전등의 렌즈에서 블라우스를 거둬냈다. 빛을 머리 위로 향하게
했다. 처음에 나는 천장을 가로지르고 있는 난방용 파이프에 누군가가 두 개의
마네킹 인형을 매달아놓은 줄 알았다. 아이들이 만우절 때 하는 것처럼 피아노선인가
무슨 철사로 매달아놓은 줄 았았다.
그 다음에 시멘트 바닥에서 7인치쯤 위로 매달려 있는 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둥근 상자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얼굴을 올려다봤을 때 목구멍 속에서 비명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것은
백화점에 있는 마네킹 인형의 얼굴이 아니었다. 둘 다 얼굴을 옆으로 기울게
하고 무슨 농담이나 즐기고 있는 듯…… 아니, 그 농담 때문에 너무 웃어서
얼굴이 보라빛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그 그림자가 뒤쪽 벽에 길게 늘어져 있다. 그리고 축 늘어져나온
그들의 혀. 모두가 군복을 입고 있었다. 훨씬 전에 우리는 그 두 사람을 알아차렸지만,
그 후에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젊은 군인들…….
비명이 목구멍 속에서 신음하듯 일어나서 차츰 패트롤카의 사이렌 소리처럼
올라가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올리가 내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소리를 내지 말아요! 이 일은 당신하고 나밖엔 모르는 일예요.
이 일은 다른 사람들에겐 알리고 싶지 않단 말예요."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간신히 비명을 참았다.
"이 군인들은?"이라고 묻는 것이 간신히 나온 목소리였다.
"애로헤드 계획의 군이들이에요." 올리가 말했다.
"틀림없어요." 내 손에 무엇인가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캔맥주였다.
"쭈욱 마셔요."
나는 캔이 비워질 때까지 단숨에 들이켰다.
올리가 말한다.
"미스터 맥비가 쓰고 있던 가스 그릴의 카트릿지가 더 없는지 보러 왔다가
이 두 사람을 발견한 거예요. 내 상상으론 두 사람은 미리 목을 맬 줄을 매달아놓고
서로 손을 뒤로 묶은 다음 둥근 상자 위에 올라가서 목을 줄 안에 넣고 발밑의
상자를 걷어찼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 입이 바짝 말라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은
뒤에서 묶여 있었다. 나는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죽었을까?"
"왜 죽었는지는 알겠죠? 관광객이나 피서객 같으면 모르겠지만, 이 지방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애로헤드 계획 말인가?"
"그래요, 하루 종일 레지스터 옆에 서 있으면 여러 가지 일들이 귀에 들어오거든요.
금년 봄에는 줄곧 애로헤드 계획에 관한 이야길 들었는데, 좋은 소문은 하나도
없었어요. 호수의 검은 얼음이라든가……."
나는 차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내 얼굴에 알콜 냄새를 풍기던 빌 조스티의
일이 떠올랐다. 단순한 원자가 아니라 또 다른 원자란 말…….
"20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죠." 올리가 말했다.
"저스틴 로버츠, 니크 토카이, 펜 마이클슨, 작은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비밀로 해둘 순 없는 거예요. 어떤 때는 샘물처럼 땅 속에서 끓어올라 퍼져나가지만,
그 원천이 어딘지는 모르는 겁니다. 금년 봄부터 여름까지 들려오는 소리는
모두 애로헤드 계획뿐예요."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아마……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겠죠. 아니면 어떤 문제에…… 애로헤드
계획에 대해서 어떤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자기들에게 질문을 퍼붓게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최종이라는
때가 있다고 친다면 말예요."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군!"
"그때의 폭풍우입니다!" 올리가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폭풍우
때 애로헤드 계획의 본부가 파괴되고 무엇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아마 사고겠죠.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강도가 높은 레이저라든가
메이저라는 것을 주무르고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죠. 가끔 핵융합력이라는 말을
들은 일도 있었어요. 그리고 만약에 그 본부에 있는 치들이 똑바로 2차원의
세계에 통하는 구멍을 뚫어버렸다고 한다면……!?"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정말 그럴까요……?" 올리는 매달려 있는 사체를 가리켰다.
"알았어, 우선 당면한 일은--어떡하면 좋지?"
"사체를 내려서 숨기는 게 좋을 거예요." 그는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도그후드라든가 세제 상자 같은 것 밑에다 숨기면 되겠죠. 이 일이
알려지면 사태가 더 험악해질 것 같아서 당신한테만 알린 거예요. 데이브,
정말 믿을 수 있는 건 당신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는 중얼거렸다.
"전쟁에 지고 독방에서 자살한 나치스의 전범 같군."
"그래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입을 다물었을 때, 반입구의 셔터 밖에서 미끄러지며 더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빨리 끝내고 여기서 나갑시다." 올리가 말했다.
"로프를 끊고 한 사람씩 끌어내리기로 하죠."
슈퍼 안으로 돌아왔을 때, 아만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터먼 부인이 빌리와
함께 있었다. 둘이 모두 자고 있었다. 통로를 걸어가는데 목소리가 났다.
"데이브." 아만다였다. 눈이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지배인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녜요."
그녀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은은하게 향수 냄새가 풍겼다. 나는 심한 욕망을
느꼈다.
"거짓말!"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정말 원한다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을 잡았다. "위의
지배인실에 가 보았어요. 아무도 없었고, 도어에는 잠금 장치도 있었어요."
얼굴은 평온했지만 눈이 조용히 그리고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냥……."
"아녜요. 당신이 나를 보는 눈으로 알았어요."
나는 얼른 생각했다. 지금 당장 올리와 내가 하고 온 일을 깨끗이 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계단을 올라가서 지배인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말한 대로 아무도 없었다.
도어의 열쇠를 잠갔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단순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팔을 내밀어 그녀를 만지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9. 약국에의 탐험
"여기서 탈출하겠다는 겁니다." 던 밀러가 말했다.
"나는 해 보겠어요. 점심 때쯤이 좋을까. 나가겠다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데리고 가겠어요. 당신과 당신 아들도 같이 왔으면 좋겠어요."
날이 샜을 때 던 밀러가 나를 불러 한 말이다. 날이 샜을 때 이상하게도
거대한 벌레와 날짐승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개 속에는 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노튼이 저렇게 됐는데도 나가겠다는 건가?"
"노튼은 도살장에 끌려간 양 같았죠. 그러니까 우리들도 그렇게 된다고 결정된
건 아니지 않소?"
"어떻게 방어를 하지? 권총은 한 자루밖에 없는걸."
"한 자루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만약에 네거리 저쪽까지만 간다면 수영
클럽에 갈 수가 있을 거예요. 거기엔 총은 얼마쯤이라도 있어요."
밀러는 나를 데리고 창문 있는 곳으로 갔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밀러가
말했다.
"밖에 무엇이 보입니까?"
밖에는 밤새 그 거대한 날짐승이 와서 엎어버렸는지 쓰레기통 속의 쓰레기들이
아스팔트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 저쪽에는 마켓과 가까운 곳에 있던 차들이
하얀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말했다.
"저기 푸른색의 시보레 소형 트럭이 내 차요." 그가 가리키는 쪽에 푸른색이
보이는 듯했다. "어제 여기 왔을 땐 상당히 붐볐는데."
나는 내 스카우트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끄덕였다.
"그런데 어제 노튼 일행이 나갔을 때 지독히 큰 소리가 났는데, 어째서 차가
부서지거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죠?"
"그건…… 글쎄……." 나는 할말이 없었다. "모르겠는걸."
"뭔지 모르지만 그 괴물이 자동차들에 부딪친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은 많은
차들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땅이 꺼져서 없어졌는지 증발했는지도 모르고…….
안개가 온 다음에 그 무시무시한 충격이 온 것, 기억하고 계시죠? 마치 지진
같았어요."
한참 생각하다가 나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고 하고, 당신의 픽업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내 트럭이 아니라 당신의 사륜 구동차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잘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물었다.
"그 밖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밀러는 열을 띠고 말했다.
"저 이웃에 있는 약국의 일이죠. 거긴 어떻게 됐을까요?"
무슨 이야긴지 짐작이 안 간다고 말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브릿지 약국은 어제 우리가 슈퍼에 왔을 때엔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슈퍼와 약국은 불과 20피트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약국의 사람들은 여기 안 왔을까요? 벌써 18시간이나 지났는데 그들은
배도 고프지 않을까요? 설마 정제나 메모지를 먹고 살 수는 없을 텐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탈출을 한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괴물의
희생이 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우리들 너댓 사람이 거기까지 가서 약국의
상황을 보고 오자는 거예요. 말하자면 일종의 관측 기구와 같은 거죠."
"그것뿐인가?"
"아니, 또 하나 있어요."
"그건?"
"저 여자요."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중앙 통로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 미친
여잔 마녀예요."
그가 가리킨 것은 카모디 부인이었다. 그녀는 이미 고립해 있지는 않았다.
어느덧 두 사람의 여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내가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저 여자 때문이에요.
오늘 밤쯤에는 저 여자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은 여섯 사람으로 늘어날 겁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도 핑크색의 벌레나 날짐승이 또 나타난다면, 내일 아침에는
여기 있는 전원이 저 여자 밑으로 모이게 될 겁니다. 그때 저 여자가 사태를
호전시키기 위해서 누구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할지…….
어쩌면 나나 당신이나 하틀렌일지, 아니면 당신의 아들일지도 몰라요."
"말도 안 돼!" 나는 말했다.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찬 것이 등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모두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마녀나 다름이
없는 카모디 부인이 모두를 휘어잡고 그야말로 산 제물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신은 어떡하겠어요?"
"거기까지라면 갑시다." 나는 대답했다. "당신하고 나하고, 그리고 가겠다고
한다면 올리와, 그 밖의 한두 사람 더…….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한 시간만 여유를 주시오."
나는 터먼 부인과 아만다에게 이야기하고 빌리에게도 이야기했다.
그중에도 빌리를 설득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아빠! 가지 말아요. 밖엔 뭔가 있었어요.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아빠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이 와서 우릴 다 잡아먹을 거예요! 아빠, 가지
말아요."
"꼭 돌아올 거야, 빌리!"
오전 9시 반에 행동을 개시했다. 갈 사람은 7인이었다--올리, 던 밀러, 마이크
하틀렌, 짐, 버디 이글튼, 나, 그리고 일곱 사람째는 힐더 레플러 부인이었다.
밀러와 하틀렌이 만류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쇼핑백에 살충제의
스프레이를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뚜껑을 빼서 넣고 있었다.
밀러가 여러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우리들은 저 건너편에 있는 약국까지 가서 저쪽의 상황을 보고 올 생각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험을 할 생각은 아닙니다. 위험한 징조가 있으면 곧 슈퍼로
뛰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의 악마들을 데리고 오지!" 이렇게 외친 것은 카모디 부인이었다.
"모두가 죽는 거야! 이 세상의 종말이 온 걸 몰라? 악마가 모두 풀려난 거야!
묵시록의 '고뇌의 별'이 불꽃처럼 빛나고, 모두 저 문을 나서면 죽는 거야!"
카모디는 계속해서 외쳐댔다.
"가는 거예요? 아니면 하루 종일 여기 서 있을 거예요?" 레플러 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출발했다. 신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던 밀러가 선두에 섰다. 올리가 2번. 내 앞에는 레플러 부인이 서고 내가
맨 끝이었다.
코를 찌르는 안개의 냄새가 표류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나설 때는 밀러와
올리의 모습은 이미 안개 속으로 가려지고, 세 번째의 하틀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단지 20피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단지 20피트. 나는
앞으로 천천히 확실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테니스 라켓이 안개 속에 보인다. 20피트라고 하면 겨우
열 걸음밖엔 안 된다.
"지독하군." 밀러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 이리로
좀 와서 봐요!"
밀러가 약국에 들어간 것은 틀림없었다.
우리 모두가 밀러 곁으로 다가갔다. 어깨 너머로 돌아다보니 슈퍼는 안개
속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할 만큼 고독을 느끼며, 세상엔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은 마치 학살 장면을 연상케 했다.
밀러와 나는 바로 그 현장을 밟고 서 있었다. 안개 속의 생물들은 모두 후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각이라는 것은 전혀 소용이 되지 않았다.
슈퍼에 있는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정전 때문에 살아났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자동 도어가 작동하지 않았다. 안개가 닥쳐왔을 때 슈퍼는 말하자면
밀폐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국의 도어는 열린 채 고정돼 있었다. 정전으로
냉방이 끊어졌기 때문에 문을 열어 바람이 들어오게 했는데, 그것이 쓸데없는
것까지 불러들였던 것이다.
다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입구에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처음 나는 다색
셔츠를 안 것이 아래쪽에 두세 군데 하얀 것으로 보였다. 다색으로 보인 것은
말라붙은 피의 색깔이었다. 그 밖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머리속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버디 이글튼이 구역질을
시작했을 때까지도 그것이 무엇인지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의 머리가 없었다. 목으로부터 그 위가 없는 것이다.
짐이 참을 수가 없었는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외면했다.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슈퍼 쪽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밀러는 이미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마이크 하틀렌이 그 뒤를 따랐고, 레플러
부인은 라켓을 손에 들고 양쪽으로 열리는 문 한쪽에 서 있었다.
올리가 다른 한쪽에 서서 아만다의 권총을 들고 총구를 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점점 희망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데이브."
"아직 체념하긴 일러." 이렇게 올리에게 말하고,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사실 나는 약국 안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으나, 빌리에게 만화책을 갖다 준다고
약속을 했었다.
브릿지 약국은 광란의 수라장 바로 그것이었다. 페이퍼북이며 책들이 아무데나
산란해 있었다. 나는 발밑에 있는 두 권의 만화책을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병이나 상자가 통로에 흩어져 있고, 책장 안에서는 손이 하나 불쑥 나와
있었다.
비현실의 파도가 나를 덮쳤다. 난파선…… 학살…… 아무튼 너무 잔혹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나 화려하게 떠들어댄 파티의 뒤끝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장식줄처럼 보이는 것이 방안 가득 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테이프처럼 편편하지도 않고, 오히려 굵은 실이나 가느다란 광케이블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색깔은 안개처럼 흰색이었다. 등골에 차가운 안개가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머리에 떠올랐다. 안개가 다가왔을 때 불행하게도 약국에
있던 사람들을 몰살시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그들은 냄새를 맡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가!" 나는 소리쳤다. 입 속이 말라붙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야 해!"
올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건 거미줄이야." 나는 말했다. 그때 안개 속에서 비명이 두 번 들려왔다.
처음의 것은 공포의 비명이었고, 두 번째 것은 고통의 비명이었다. 짐의 소리였다.
"밖으로 나가!" 나는 마이크와 밀러에게 소리쳤다.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나왔다. 배경이 하얗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는 회초리
소리 같은 소리, 그리고 그것이 버디 이글튼의 진을 입은 다리에 휘어감기는
것이 보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얼떨결에 손에 잡은 것이 전화기였다. 수화기가 코드
길이만큼 날아서 거미줄처럼 흔들렸다.
"아이구, 아파!" 버디가 소리쳤다.
올리가 손을 뻗쳐 그를 잡았다.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입구에서 죽은
남자의 목이 없는 까닭을 알았다. 버디의 다리를 비단실처럼 감아들인 가는
케이블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진의 바지가 그 부분에서 잘려나갔다.
케이블이 살 속으로 조여들면서 거기서 피가 솟아나왔다.
올리는 힘껏 그를 잡아당겼다. 케이블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고, 버디는 풀려났다.
입술이 총격으로 새파래졌다.
마이크와 던 밀러가 나왔으나, 너무 늦었다. 그때 던은 위에서 내려온 몇
줄의 케이블에 걸려 파리 끈끈이에 걸린 벌레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주위에는 허공을 가르는 회초리 소리가 들리며, 가늘고 흰 케이블이
여기저기서 풀려나왔다. 모두가 부식성 물질로 쌓여 있었다.
나는 운 좋게 두 줄의 케이블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 하나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졌을 때 거품을 내는 소리가 났다. 다른 한 줄이 공중에서 날아왔을 때
레플러 부인의 라켓이 그것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케이블은 라켓을 휘어감고
조여들면서 핑! 핑 하며 라켓의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안개 속으로
삼켜버리고 말았다.
"다들 돌아가요!" 올리가 외쳤다.
우리들은 움직였다. 올리는 한 손으로 버디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던 밀러와 마이크 하틀렌은 레플러 부인 옆으로 따라왔다. 하얀 거미줄은
수없이 안개 속에서 나타났는데 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할 때만 볼 수가 있다.
그 하나가 아미크 하틀렌의 팔을 감고 또 다른 거미줄은 그의 목을 감았다.
경동맥이 끊어지고 피가 솟아났다. 그는 목을 늘어뜨리고 그대고 끌려갔다.
버디가 갑자기 쓰러지고, 올리가 무릎을 꿇을 뻔했다.
"정신을 잃었다! 도와줘, 데이브!"
나는 버디의 허리를 안고 끌고 갔다. 그의 한쪽 다리는 거미줄에 얽혀 달랑달랑했다.
"위험해요." 레플러 부인이 돌아다보며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뒤를 조심해요!"
내가 돌아다보니 한 줄의 거미줄이 던 밀러의 머리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치며 쥐어뜯었다.
내 뒤에도 한 마리의 거미가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미는 상복부에 있는
구멍에서 거미줄을 토해내면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올리는 침착했다. 사격 연습장에 있을 때처럼 권총을 겨냥하더니 사정 거리
안에 들어온 거미를 향해서 천천히 사이를 두며 탄창이 빌 때까지 쏘아댔다.
동체에서 검은 농집을 뿌리며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더니 안개 속으로 도망가
사라졌다. 어쩌면 이것은 마약에 의한 환각이 아닌가? 그가 남긴 검은 점액이
없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위험해요." 레플러 부인이 다시 소리쳐서 우리는 그쪽을 보았다.
또 다른 거미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 던 밀러의 몸에 다리를 감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분전하고 있었다. 거미는 다시 그 하얀 거미줄로 그를
얽어매고 있었다. 던은 마치 죽음의 무용을 하듯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레플러 부인이 살충제의 통을 든 손을 뻗치고 거미 가까이 갔다.
거미는 또 다른 다리를 그녀에게 뻗치고 있었다.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분무가 된 약이 거미의 붉은 눈 언저리를 얼게 했다. 거미는 마치 고양이와
같은 울음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더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끌어안고
있는 던의 몸은 놓지 않았다. 레플러 부인은 살충제의 통을 거미를 향해 힘껏
던졌다.
통은 거미의 몸에 맞고 아스팔트 위를 구르더니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는 레플러 부인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좀 어지러운 것뿐이에요."
"다행이에요." 나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이를 구해 주고 싶었는데."
"네, 알고 있어요."
올리도 옆으로 왔다. 사방에 거미줄이 비오듯 하는 속에서 우리는 슈퍼의
문을 향해 뛰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이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7명이 나가서 돌아온 것은
3명뿐이었다.
올리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문에 기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아만다의
권총에 총탄을 넣었다. 그의 흰 셔츠는 땀으로 몸에 딱 붙어 있었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다.
"무엇이었습니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거미예요!" 레플러 부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놈이 내 쇼핑백까지 채
갔지 뭐예요."
빌리가 울며 내 팔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10. 결 말
우리는 더욱 남쪽으로 내려갔다. 40마일 더 가라는 이정표에서부터 세어온
마일 표시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마일 1>까지 오면 뉴햄프셔주와의 주경에
온 것이다. 유료도로를 통과하는 데는 더욱 시간이 걸렸다.
체념을 하지 않은 운전자가 있었는지 여러 군데에 추돌한 차가 있었다. 나는
간신히 중앙 분리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지금 세 사람을 태우고 내 스카우트차로 그 지옥을 벗어나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란 물론 나의 아들 빌리와 레플러 부인, 아만다 댄프리즈와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다.
우리가 약국에의 탐험을 끝낸 다음--그것은 함께 간 사람들 중 네 사람을
잃을 정도로 대실패였다--예상했던 대로 카모디 부인은 우리를 비난하면서
산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나왔다.
나는 올리와 의논해서 밖의 무서운 괴물들이 다시 활발해지기 전에 여기를
뻐져나가자고 했다. 다행히 내 스카우트차에는 6, 7명은 탈 수가 있었다.
나와 빌리, 올리, 그리고 터먼 부인, 아만다 댄프리즈, 그리고 코넬 노인과
레플러 부인.
우리는 식료품을 푸대에 넣고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자기 편으로 만든 카모디 부인이 악마처럼 두 손을 벌리며 우리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제물로 빌리를 요구했다.
올리는 그들에게 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올리의 총은 카모디 부인의 복부에
관통상을 냈다. 그들은 흩어졌다.
우리는 밖으로 탈출했다. 밖에서는 새로운 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리가 그들과 분전했으나 그 무서운 가위를 들은 괴물들은 몇 사람의 동행자와
올리까지를 희생시켰다. 결국 우리는 올리 때문에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캔서스 가도를 손으로 더듬는 것처럼 시속 5마일로 갔다.
모든 라이트를 켜도 7피트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밀러가 말한 대로 지면은 지독할 정도로 휘어지고 함몰되고 금이 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방송국이 문을 닫은양 차의 라디오도 들어오지 않았다.
32호선으로 나와 포틀랜드로 향했다.
안개는 여전히 짙었다. 한 번은 큰 고목이 쓰러져 있는 줄 알았으나 그것은
촉수였다. 차가 가만히 서 있자, 촉수는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결국 스테판의 생사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1시 20분쯤 됐을 때--공복을 느끼기 시작했다--빌리가 내 팔을 꽉 잡았다.
"아빠! 저게 뭐야? 저게 뭐예요?"
무슨 그림자 같은 것이 검은 얼룩처럼 안개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덕처럼 치솟은 것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졸고
있던 아만다가 앞으로 넘어졌다.
무엇이 다가오고 있었다--또다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거뿐이다.
안개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두뇌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암흑과 공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리가 여섯 개였다. 피부는 슬레이트처럼 회색이고, 여기저기 암갈색의
반점이 있었다. 그 반점이 미세스 카모디의 손이나 팔목에 있던 검버섯을 연상케
했다. 피부는 깊은 주름으로 덮여 있고, 그곳에는 수십 마리 수백 마리의 핑크색
날것들이 붙어 있다. 괴물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괴물은 우리 차 위를 지나갔다. 나중에 레플러 부인이 말한 바에 의하면,
두 개의 다리가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탑처럼 안개 속에서 올려졌다가 내려지고
그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괴물이 지나간 지면에는 스카우트차가 폭삭 들어갈
만한 자국이 생겼다.
얼마 동안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생물'이 멀어지면서 작게
들려오는 땅울림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빌리가 말했다.
"아빠, 아까 그건 공룡이에요?"
"그렇지 않을 거야. 저렇게 큰 동물이 있다고는 믿어지지가 않아. 적어도
지구상엔 말이야."
나는 애로헤드 계획의 일을 생각했다. 도대체 거기서 무슨 터무니없는 연구를
했을까? 다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앞으로 가지 않아요?" 아만다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되돌아올지도
몰라요."
그렇다. 앞으로 가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됐든 우리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 그 터무니없이 큰 자국이 길에서 없어질 때까지 그 사이를 누비는
것처럼 차를 달렸다.
이상이 이 사건의 전부이다. 아니,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적으려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산뜻한 결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개로부터 벗어나 태양빛이 넘치는 새로운 하루를 맞을
수가 있었다" 라든가,
"우리가 눈을 떴을 때 주의 군대가 구원하러 왔다"라든가, 아니면 옛날부터
곧잘 쓰던 수법인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은 꿈이었던 것이다"하는 식의 결말은 없다.
우리가 유료도로의 세 번째 출구에서 가까운 하워드 존슨에 찾아온 것은,
저녁의 어둠이 가까이 와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코강에
걸려 있던 다리가 안개 속에서도 크게 휘어져 있고, 과연 저쪽까지 이어져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이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내일의 일이다.
이것을 적고 있는 시간은 7월 23일의 오전 1시 15분. 이 사건의 전조였다고
생각되는 폭풍우가 온 것은 불과 4일 전의 일이다. 빌리는 로비에서 내가 깔아준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있다. 아만다와 레플러 부인도 바로 옆에 있다. 나는
커다란 델코 손전등의 빛으로 이것을 적고 있다. 밖에서는 핑크색의 날것이
유리를 두들기고 있다. 때때로 더 큰 소리가 나는 것은 새와 같은 괴물이 벌레를
잡아먹으로 온 것이다.
스카우트에는 아직 90마일은 달릴 수 있는 가솔린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어디서 가솔린을 구할 수 있을 것인지…….
지배인실에서 대형 전지식 라디오를 발견했을 때, 나는 금방 그 라디오에서
소리가 날 줄 알았다. 라디오를 켜고 다이얼을 앞뒤로 돌렸으나 아무데서도
제대로 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공중파의 잡음 소리뿐이었다.
내가 라디오를 끄려고 했을 때, AM밴드의 맨끝에서 나는 단 한마디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아니, 들었다고 꿈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만약 그 한마디가 정말 들려온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소리도 전달하지 않는 아주 작은 변화--다시 말해서 일순간에 다시 막혀버린
아주 작은 틈새--를 통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 한마디.
정말 그 한마디를 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 글을 이곳 식당 카운터에 놓아두고 가서 자야겠다. 나중에 누가
읽어줄지도 모르겠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우선 내 아들에게
키스를 하고 그의 귀에 두 가지 말을 속삭여 줄 것이다. 지금부터 볼지도 모를
꿈과는 상관없이…….
조금 비숫한 느낌을 주는 두 가지 말을…….
하나는 하트포드.
그리고 또 하나는 호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