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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2월, 입학한지 10년차 되는 해에 드디어 뒷문으로 졸업을 하게되었다.
비록 지방대학 산업디자인과이지만 졸업 동기들은 삼성전자며 현대자동차며 디자인 졸업생들이 꿈꾸는 직장에 취업을 했다.
나 때문에 우리과 졸업생 취업률이 100%가 달성되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분위기가 좋았다.
지금은 취업 경기가 얼마나 안 좋은지 우리나라 미술의 상징적인 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졸업생 중에 겨우 한 명 만이 취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서울에서 디자인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들었다. (대학교 때 가장 친했던 이 친구는 삼성전자 디자인실에 근무를 했었다.)
졸업하고 무엇을 했는지 별 기억이 없다.
95년 5월 어느날,
프리랜서로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하며 대구YMCA에서 청년Y활동을 하며 놀며 돈벌고 있을 때
대구Y 근무하던 짝여(짝사랑 여자)로부터 청소년지도사 연수 같이 받은 사람이 수련원에 근무할만한 사람 소개를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며 적당한 사람을 소개 해 달라고 했다. 마침 직장 경험을 하고싶던 차에 전화가 와 내가 한번 해 보겠다고 했다.
(짝여는 나에게 첫 강의와 첫 직장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갓바위 근처에 위치 해 있는 화랑수련원 교육부에 입사를 했다.
화랑수련원은 어수선 했다.
건축 때 부터의 자금 문제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영업팀이 따로 있어 2원화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청소년 교육도 영업팀이 외주교육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비록 첫 직장이었지만 나는 우리교육부와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우선 수련활동비의 20%를 가져가는 영업팀과 별개로 직접 학생단체를 모집하는 것이고, 외주교육단이 아닌 우리 교육부에서 직접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입사 초기에는 교육의 주도권이 영업팀에 있어 의자와 책상을 셋팅하는 생노가다로 하루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아름아름 자체 영업을 통해 수련활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기획과 진행을 경험한 직원이 없어 1박 2일과 2박 3일 프로그램 진행을 대부분 내가 맡아야 했다.
자체 진행 수련활동이 조금씩 늘어나자 교육부 직원의 충원도 이루어 졌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도 교육에 대한 경험이 쌓이자 프로그램을 하나씩 맡아 담당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우리 교육부와 외주 교육단 2개의 교육팀이 교육을 전담하자 임원진에서는 저쪽 교육팀에서는 학생들 혼을 쏙 빼놓는데 우리 교육팀은 왜그리 약하냐며 비교를 당하기도 했다.
이등병 신세를 막 지나 이제 일병 생활에 접어든 우리 교육부와 경험많은 병장생활을 하고 있는 외주 교육단과의 비교가 부당하기도 했지만 특히 여학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교육방법에 대해 우리는 부러움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기도 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했든가?
청소년 교육에 있어 후발주자인 우리교육부는 외주교육단의 진행방법에 대해 벤치마킹을하기위해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퇴소식을 마치고 대성통곡을 하며 여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뽑아 주게하는 감동적인 교육의 방법이었다.
외주 교육단이 음료수캔 한 가마니를 숙소로 끌고갈 때 우리 교육부 직원들은 너무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학생들을 사로 잡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교육 내용이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쓰레기 사기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입소식 교육단 소개 때 대부분 우리나라 최고의 S대 휴학생 내지는 졸업생이고 모두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이 있는 청소년을 사랑하고 뜻을 실천하고 있는 역사적 사명을 지닌 훌륭하고 위대하신 선생님들이라고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잘 나갈 수 있는 사회적 기회를 마다하고 우리를 위해서 교육 해 주시는 위대한 S대 출신 청소년지도사님들, 얼마나 고마웠을까!
교육과정에서 약발이 잘 먹혀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기의 절정은 퇴소식,
가장 인기가 있었던 2명 지도자가 퇴소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궁금했다.
사회자는 조금 뜸을 들이고는
"두 분 선생님이 여러분이 걱정할까봐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사실은 여러분을 너무나 열심히 지도를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걱정과 탄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분 선생님 뿐 만아니라 고생하신 모든 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헤어질 때 음료수 캔 하나라도 드리면서 '감사 합니다 교육 잘 받았습니다'라는 인사를 꼭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학생들의 이성은 완전히 상실되어 감성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눈시울이 젖은 상태에서 자판기에 있는 음료수 캔을 뽑아 감성이 풍부한 아이들은 입원한 선생님에게 드릴 편지와 음료수까지 전해달라며 눈물 콧물 목이 메여 '감..사.합니다~ 교육 잘~받았습니다' 캔에서 손을 땐 여학생들의 손은 자동적으로 입으로 향했다.
외주 교육단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은 '이런 사기꾼 놈의 새끼들'로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우린 너무 허무했다.
정말 훌륭하고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이 있는 줄 알았는데 '감성'을 건드리는 치사한 방법을 사용하다니...
이때 감성만을 건드리는 프로그램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이런 사기꾼들이 훌륭한 지도자로 인정받아 활개를 치고 있기도 하다.
교육장 셋팅과 청소년수련활동 진행의 고유 업무와 상관없이 나는 몇 개월의 근무를 통해 내 스스로 수집한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수련원의 문제점과 방향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다. 그리고 실적 현황을 매번 기록하여 분석자료를 만들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군대에서 사단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불온전단 분석보고서를 작성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96년 한해 동안 연인원 14만명이 수련원을 다녀 갈 정도로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교육부는 교육과로 재편되었고 직원도 10명이 되었다. 나는 입사 1년 만에 계장으로 진급을 했다.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신 부원장님은 나를 자주 찾았다.
청소년 금연교실, 소년소녀 가장 돕기 등 업무지시가 내려지면 나는 누구도 지적하고 부정(?)할 수 없는 기획안을 만들어 냈다.
그때는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갔다.
내 위로 과장님과 부장님의 절차없이 부원장님은 나에게 바로 일을 맡기기도 했다.
일반 기업체 교육의 진행도 나에게 맡겼는데 과장님께서 아랫사람을 보조해야 하는 그림이 안좋은 상황도 여러번 있었다.
성격이 모난 사람 같았으면 벌써 사단이 났을텐데 마음씨 고운 과장님은 내가 없는 술자리에서 그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영업팀에 대한 의존도가 거의 사라져가고 청소년수련활동과 교육과의 업무가 정착되면서 나는 캠프파이어와 기획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캠프파이어를 진행하다보니 '한국적인 캠프파이어'에 대한 스스로의 요구가 생겨났다.
우리나라 식의 캠프파이어가 없을까?
나름대로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다보니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원칙을 정했는데 캠프파이어 진행 음악을 가능한 민요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우리식의 캠프파이어는 전통놀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나는 전통놀이에 빠져 자료수집과 연구에 들어갔다.
그래서 였을까! 똑같은 패턴으로 진행되는 수련원 업무가 싫어졌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수련원의 문제로 인해 미래에 대한 전망도 그리 밝지 못하다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청소년수련활동 교안을 제대로 만들고 싶은 욕심에 나의 주도로 진행했던 교안 만들기 작업을 대충 마무리하고 나는 첫 직장을 1년 8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수련원에 근무를 하면서 2명의 후배를 입사시키고 퇴사 후 대구YMCA레크리에이션대학 수료생 1명을 입사 시켰는데 이 친구는 나를 사부로 대접하며 아직도 나에게 연락을 해 오고 있다. 자기가 결혼하면 주례를 맡아달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결혼 이야기가 없다.
겉으로 엄한 캐릭터라 나는 수련활동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인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진면목을 볼줄아는 여학생에게 무려 99통의 편지를 받았다.
마지막 편지에는 대학 입학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 연락은 없다.
그 여학생은 항상 노란봉투의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 고이 모셔두고 있다.
그 여학생에게는 비밀이며 미안하지만 독자들을 위해 2통의 비밀을 공개 해 본다.(나 이정도로 인기 있었다우^^)
송종대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000입니다. 혹시 저를 기억 못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선생님께서 기억을 잘 못하실까봐 약간의 도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현관 앞에서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던 학생입니다. 이제 기억하시겠어요?
제가 느낀 선생님의 첫 인상이 어떠하였는지 아세요?
"아! 이제 우리의 즐거운 2박 3일은 이제부터 끝인가 보구나"하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판단이 너무 서투르고 또 판단을 내리는 시기를 너무 서둘렀다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엄격한 교육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적당한 유머감각을 발휘하여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뇌리속에 깊숙히 박히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친구들로부터 선생님이 결혼을 하셨다는 것과 사모님이 임신 6개월 째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적지않은 충격이었습니다. 저 뿐만아니라 선생님을 좋아하는 제 친구들도 계속 울상만 짓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제가드린 쪽지 읽어보셨어요? 시간이 부족하여 글자를 예쁘게 적지 못하였으니 그 점은 이해해 주세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 지금 이렇게 편지를 드리는 것을 결코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선생님께서 부담스러워 하시면 선생님께 무척 죄송하니까요.
선생님, 어느덧 밤 12시가 지났습니다.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가정생활 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1996. 6. 12 선생님의 영원한 제자가 되고픈 000 드림.
선생님께.
선생님,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지 못한 날이었습니다.
5교시가 끝난 후 반 친구로부터 선생님의 부인되시는 분이 바로 화랑수련원 여자 교관 선생님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무척 미웠습니다. 오늘 편지지를 예쁜 편지지로 택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둘러 쌓인 채 '엉 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친구들이 저마다 "잊어버려 그러게 내가 임자있는 몸은 거들떠보지도 말랬잖아" 또는
"00아 울지마 내가 키 크고 안경 끼고 목소리 멋있는 남자 소개시켜 줄께"라고 말하였습니다. 저 정말 이상하죠?
선생님의 부인이 누구인들 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말입니다.
선생님 혹시 제 편지를 부인께 보여드리는 것은 아니시겠죠?
만약 그렇담, 제 편지를 그대로 휴지통에 버려 주세요. 아님 불태워 주시던지요. 그런 후에 제가 다음에 보내는 편지는 절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말고 보관 해 주세요. 오늘 제 편지는 제가 생각해도 버릇없고 너무나 비관적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럼 전 이만 7월초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펜을 놓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1996. 6. 13
추신1) 편지에 이러한 글을 적은 제 의도를 제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파악하기 힘듭니다.
추신2) 편지 읽으신 후에 절대 웃으시거나 하면 안돼요.
* 진짜 미안하다 그때 많이 웃었다.
첫댓글 흠...
제가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ㅠㅠ
흠 잡을데가 없는데요...ㅡㅡ
히히 호호 ㅋㅋㅋㅋㅋ
재미있는것으로 착각하면서 다음편 시작합니다.
깨끗하고 맑은 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도 저 학생들처럼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표현하고 싶고 그러나 내마음의 전부를 보이지 않고 숨겨가면서 조금씩 표현하고 싶었었을때.....그립습니다
저도 저런 존경을 받은적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마누라가 인정을 안 해주는지 주눅이 들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