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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못지 않게 검소한 종교인은 한경직 목사님이셨다. 대교회 원로목사답지 않게 너무 검소하게 생활하시던 그 분은 교인이 새옷을 선물하면 그 날로 남에게 주고 늘 헌옷차림으로 지내셨다. 이분이 1980년 8월에 당시 전두환 장군도 참석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축도 순서를 맡았다는 이유로 2,000년 4월 19일 하오 1시 15분에 이 땅 위에서의 나그네 여정을 마치시기 전까진 모진 수모를 당하셔야 했다.
5.18 광주 사태 때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의 소리가 컸으므로 최규하 대통령께서 그해 7월 하야의 뜻을 밝히심과 더불어 전두환 장군에게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구국의 결단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반민주적 시위를 반년간 선동한 김대중이 아니라, 본분에 충실한 전두환 장군이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국가의 기강을 잡고 국력을 발전시킬 적임자였다. 우유분단했던 최규하 대통령의 큰 업적은 전두환이라는 새 지도자를 발굴하여 내각에 추천한 일이었다.
내각이 최규하 대통령의 뜻을 받듦에 따라 그해 8월에 전두환 장군을 국가의 새 지도자로 띄우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전두환 장군이 참석하는 조찬기도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이 축도 순서를 맡으셨다. 그리고 그 기도 중에 "여호수아와 같은 장군이 되게 하소서"라는 글귀가 있었다 한다. 그래서 어째서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지도자가 5.18 광주 학살의 책임자을 위해 축복 기도할 수 있느냐는 비난이 이십 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광주 사태 당시 발포 명령과 전두환 장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한경직 목사님의 판단이 옳았다. 문익환과 홍근수 같은 정치 목사들의 정치적 판단은 늘 그릇되며, 한경직 목사님 같은 진정한 복음의 전도자는 남보다 더 맑은 혜안을 가지고 있다. 편견과 아집과 탐욕이 있는 자들의 눈은 사실을 보는 힘이 있기에는 너무 흐리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정계의 원로로서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은 교계의 원로로서 전두환 장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사단장 시절 청렴하며 사병들의 맨앞에서 사병들과 더불어 뛰던 그의 모습을 본 군인들도 그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보았다.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결코 밝혀질 수 없는 두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이 발포명령자였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5월 18일 오후 4시 40분에 시작된 진압 작전의 명령자는 호남 출신이요 광주향토사(31사단) 사단장이었던 정웅 소장이었다. 그리고 그 위 명령자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었다. 광주 일대의 경찰서들이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모두 파괴되고 경찰들과 그 가족이 대피한 상황에서 내무부의 요청에 따라 광주향토사가 시위 진압 작전에 나섰던 것이다.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은 미국인은 육하원칙의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는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직 일반 시민들은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자조차 들어본 적이 없던 때에 폭도들은 그 시위 진압 명령자가 전두환이라며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외쳤다. 그러면, 만일 그 유언비어를 조작해 낸 폭도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그런 지시를 하였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육하원칙에 입각한 사실이 없는 유언비어는 미국에서는 코웃음거리도 안된다. 그러나 한국 사림들은 그 유언비어에 사반세기 동안 속아왔다. 미국과 한국의 국력의 차이는 이런 의식 수준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같은 장성이라도 이희성 장군은 당시 전두환 장군과는 비교도 안되는 상급자였다. 일개 합수부장이 계엄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 단순 명료한 사실이 그토록 어려워서 유언비어에 속아넘어간다는 말인가!
5.18 광주 사태에 대하여 또 하나 증명될 수 없는 사실은 그것이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도지사를 강제로 축출하고 도청을 점령하여 해방구 사령부의 기지로 삼았던 폭동지도부(그들은 항쟁지도부라는 표현을 씀) 삼백 명은 노동자, 양아치, 무직자,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들 및 십대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들의 도청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 사무실에 폭약을 설치한 것을 항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단 한 쪽이라도 그들의 민주주의 철학을 진술하는 글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단 한 장의 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전혀 민주주의 사상이 없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윤상원은 무엇 때문에 폭동을 선동하였을까? 그가 북한과 내통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잠시 접어둔다면 아마 상대적 빈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이나 박정희 대통령처럼 집 한채 없었던 분들에게는 상대적 빈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숭고한 정신적 가치관이 있는 자는 가난해도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지난 5월 31일 자살한 서울대 시간 강사에게는 상대적 빈곤을 절실한 문제였다. 서울대 박사요 부부가 대학 강사이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상대적 빈곤감은 그에게 자살을 택하게 하였다. 윤상원도 남달이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성격의 사람이었던 듯하다.
1950년 8월 15일 당시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샘골에서 부친 윤석동씨의 3남 4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상원은 임곡국민학교와 광주북중학교를 거쳐 1967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71년 전남대학교 문리대 정외과에 입학해 생활하던 그는 부친의 가업이 기울면서 잠시 휴학하고 막노동을 해야 했으며 누이도 공장에 여공으로 취업했다. 이때부터 그는 공산주의 서적 독서에 심취했다. 1978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다시 막노동을 하며 노동자들 의식화 교육을 하였다는 점에서 좌익 혁명가였다. 그는 막노동자이되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노동자였으며, 크고 작은 분규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자기 패거리를 데리고 나타났으니 아주 독특한 인물이었다.
자살한 서울대 시간강사의 문제는 소망을 상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한 미국의 노숙자는 48세에 버클리대 수석 졸업을 하였다. 인생길에는 비오는 날도 궂은 날도 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좌절을 이기며, 소망을 상실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다.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패배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패배감, 명문대에 혹은 인기학과에 진학하지 못한 패배감이 있다. 배움의 대열에서 낙오된 자들의 패배감이 있다. 그 서울대 강사에게는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때 주변에서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는 현실 때문에 우울해졌다고 한다.
윤상원도 전남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던 중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막노동을해야 했던 것이 그토록 가슴아팠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상대적 빈곤감에 대한 해답은 자살도 폭동 선동도 아니다. 5.18 광주 사태의 근본 원인은 하층 서민의 혁명이었을진대 그 소외된 서민의 상처에 대한 치유책은 윤상원이 아니라 한경직 목사님께 있었다. 무엇이 영락교회의 출발이었던가? 이북에서 피난온 삼팔 따라지들의 천막교회였다. 그 당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무시받는 집단이 삼팔 따라지들이었다. 맨손으로 월남한 그들에게 소망은 무엇인가? 그들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도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윤상원이 북한과 내통하고 있었는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는 우리 사회의 상대적 빈곤의 문제를 계급 투쟁으로 해결하려는 혁명가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비록 그가 정당으로는 김대중의 신민당 소속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경제를 멍들고 병들게 하는 그 길이 해결책인가? 그의 꿈대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오히려 국가 경제를 병들고 시들게 한 후에 그 고통은 서민에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광주 서민의 상처는 전국의 서민들이 공유하는 상처요 그 상처 치유책은 폭동 선동이 아니라, 한경직 목사님처럼 가나한 서민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설교이다.
5.18항쟁 자료는 의하면 광주향토사 정웅 장군(호남출신)이 시위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1980년 5월 18일의 상황 전개를 이렇게 기록한다:
시위대는 錦南로3가 가톨릭 센터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페퍼포그에 밀려 중앙 로로 꺾어진 다음 때마침 忠錦지하상가 공사로 자갈이 나뒹굴던 중앙로에서 일제히 돌을 집어들어 忠壯로 파출소를 향해 내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유리창이 박살나고 내부에 있던 경찰들이 옥상으로 대피했다...
일단 불붙은 시위대의 군중심리는 경찰에 대한 계속된 공격으로 이어졌 다. 낮 12시 45분엔 山水동 파출소가 습격을 당했고 黃金동학생회관 앞에서 는 도시락을 먹던 경찰들을 시위대가 기습, 경찰이 도주하자 페퍼포그 차 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미 錦南로 시위군중은 1천 5백명, 忠壯로 골목골목 에는 1천 6백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음료수 병과 돌을 던지며 시위의 강도를 더해갔다.(시위대수:95년 7월 18일 검찰수사기록)>>
당시 상황을 광주의 한 언론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필자는 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동에 위치한 지방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 차장직에 재직하면서...18일 오후 7시가 되자 전남도청 앞에 자리잡은 전투경찰 중대병력 규모가 시위 대학생들의 도청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방패와 진압봉을 앞세우고 두겹 세겹으로 정문을 막고, 수백명의 시위 대학생들은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조선대학교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해 나갔다. 어둠이 깔린 밤8시 조선대학 광장에 집결한 학생 시위대는 평화적인 횃불시위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5.19일 정오 사무실의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받으니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숨찬 목소리가 귀에 익는다. "김 차장이요? 나 서울지사 오세성이오. 본사 전화가 불통인데 광주 소식 좀 알려주시오"한다. (....)
초조함과 불안이 엄습한 가운데 경찰 경비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수화기를 집어들자 "경무과장 김계수요. 보안대장님 계십니까?"나는 급한 김에 "예 그렇소"하니 그는"나주 경찰잔여 인원은 지금 서를 철수합니다. 현재 폭도들에 의해 점거 당했습니다" 라는 말만 남기고 황급히 전화는 끊겼다.
벽시계를 쳐다보니 19일 정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나주의 치안을 책임질 경찰서가 광주 차량 통제이후 3시간만에 피습당했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소문으로만 들려왔던 광주의 소요사태가 1시간거리인 나주경찰서까지 점거되었다니 소요나 폭동이 아닌 반란이자 전쟁이다. 나는 유년기 6.25동란을 체험했고 60년대 군 생활 중에 월남전에 참전했던 지난날의 경험으로 이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며 더욱 불안해진다.
우선 폭동으로만 여겨왔던 광주사태가 농기구나 몽둥이가 아닌 총기로 무장한 자들로 인해 27키로 떨어진 나주경찰서가 피습 점거되었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불안감이 온몸을 스치고 손에 손에 각목과 몽둥이로 무장한 무리들이 버스와 트럭등에 몸을 싣고 시가지를 질주하는 모습이 마치 6.25동란때 7살의 나이로 우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남평으로 피난했든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이 때 사무실 입구에 인기척이 나면서 사복차림의 정보과 박정남 경장이 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들어선다. 경찰서가 피습되고 무기고도 털리자 피신처를 찾아온 것이다. 다행히 사복근무인지라 골목길로 더듬어 여기까지 왔다는 거다. 12시 40분경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지사 오 부장이다 "김 차장 빨리 대피하시오. 서울에서 접한 보고는 광주지역 방송국 은 물론 신문사도 피습되어 불에 타고 있다는 거요. 지사간판도 내리고 피신하시오"하는 소식이다. (....)
경비전화는 불통이고 일반 전화로 금파를 불러댔다. 금파직원들 조차 철수해버린 모양이다. 응답이 없다. 제발 총기나 은닉하고 철수했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다. 이 때 아시아자동차(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한 군용트럭이 사무실 앞을 질주하며 파출소쪽을 향해 소음을 내며 달린다. 수분이 흐르자 무기고 블럭담이 굉음과 함께 트럭의 후진으로 부서진다. 창문을 열고 쳐다보니 대한통운의 화물차량(진홍색)으로 무기고를 무너트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 곧바로 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
이 때 숨을 헐떡이며 누군가가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보니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은 보안대 주재관 이 준위가 사무실 문턱을 들어서며 자신의 권총을 찾아댄다. "김 차장 내 권총! 내 권총!"하고 빈 허리춤을 더듬으며 실성하듯 오른손을 흔든다. "이 대장 정신차려 자네 권총 여기 없네"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정신을 가다듬도록 박 경장과 함께 진정을 시켰다. 냉수 한 컵을 단숨에 들이마신 이 준위는 "김대중의 내란 폭동!"이라 지적하고 달려온 경위를 설명했다.
그가 나주군청 군수실을 찾아가 유회장 군수를 금성산 5포대로 피신토록 한 후 군청 정문을 나서는데 몽둥이와 각목으로 소지한 20여명의 폭도들이 몰려오는데 그 중 낯익은 30대 후반의 대장격인 듯 지휘를 하는데 그 자는 이 나주 사람이 아닌 고향이 함평 사람으로 그는 함평에서 야당 선봉자로 자임하며 유일한 김대중의 추종자이자 도서 활부장사로 유관기관을 떠돌며 강매하는 건달이며, 평소 이 준위와 호형 호제하던 사인데 이 날 몽둥이를 든 체 "어이! 보안대장 어디 가는가?" 라며 말을 건네며 행동이 돌변하여 접근해 오자, 놀란 이 준위 500미터 거리인 이곳까지 2키로나 골목길을 헤매며 줄달음쳐와 사무실 앞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이 준위에게 금파 무기고가 방금 털린 사실을 알려줬다. 그는 곧바로 나주 예비군 대대로 털린 총기류 파악에 나섰다. 예비군 대대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으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M1과 칼빈소총만 1600정. 중화기인 M60기관총과 수류탄이 든 상자 등이 보관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네 사람은 머리끝이 곤두섬을 느끼고 안절부절 어쩔줄 모른체 발만 구르고 있었다.
정확히 무기고가 피습된 시간은 5.19일 오후 3시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로에 질주하는 차량들에는 차창문을 열고 각목들을 휘둘러대며 요란스럽게 함성을 지르며 사무실 앞 6미터 지방도로를 휩쓸더니, 이제 시가지 곳곳에서 총성이 들린다. 그러나 사무실에 묶인 우리 네 사람은 긴장된 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체 속수무책이다. 전화가 왔다. 서울지사 오 부장이다. "김 차장 본사가 불타고 있고 본사 식구들이 이미 철수했으니 김 차장도 대피하시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이제 우리는 안절부절이다.
그 때 바로 담벼락 사이에 붙어있는 청수식당에서 칼빈 소총소리가 요란하다. 왁자지껄 젊은이들의 소리와 함께 들려온 총소리는 우리 세 사람을 더욱 두렵게 한다. 주인공이 그 식당 주인 아들인 20대 후반의 망나니이기에 더욱 가슴이 떨린다. 저런 무리들이 탈취한 총기를 지녔다면 이건 큰일이다. 민주화 운동이 아닌 폭동이자 반란이다. 서울 지사 오 부장의 피난하라는 전갈과 광주에서 신문사가 불타고 있다는 게 사실 같다. 아침나절 정류장에서 전투복 차림으로 만난 보안과장이 전해준 광주소식과 똑같다. 이미 치안을 담당할 나주경찰서까지 피습되어 폭도들에게 점거되지 않았는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우리 세 사람은 두꺼운 벽쪽으로 몸들을 피했다. 그러고 있는 도중 어둠이 짙어지는 밤 9시께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다. 두렵지만 서울 소식인가 하며 수화기를 들었더니 "거기 유신 언론인 집이지 방문할테니 기다려"하는 험악한 목소리인 장년의 협박전화가 쩌렁쩌렁 울린다. 시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내게 "별일이야 있겠는가"하며 이 차장이 위로하며 걱정을 한다. 걱정스러워 하는 나의 모습을 보던 이 차장이 "김 차장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테니 자네는 피신해야겠네. 분명 자네와 감정있는 자가 무기를 소지하고 찾아올 것 같네 빨리 피하게" 내가 "갈곳이 어딘가. 경찰이 후퇴하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절망적인 탄식에 이 차장이 예비군대대로 피신할 것을 권한다.
곧바로 2키로 거리에 있는 예비군 대대로 전화를 했다. 바로 대대장 정 소령이 응답한다. "정 소령 나 김 차장인데 대대로 피신해야겠네 그곳 사정은 어떤가?"하자 정 소령이 "여기도 어렵습니다. 이미 전화국 앞 송전탑 부근에 버스에 무장한 폭도들이 부대 정문을 차단하고, 마구 위협 사격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튼 부대만은 지켜야 하네. 그곳 마저 무너지면 큰일이네 날이 밝는대로 부대로 가겠네" 하고 끊었다. 사태의 심각함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음을 느낀다. 단순협박전화로 생각할 수 없다.
당시 공화국 군부정권이 끝나고 계엄령이 선포되자 사회곳곳에서 번지는 속어가 '유신잔당'이요. '유신1중대'니. 특히 언론에까지 던지는 '유신언론'이란 어휘는 대학가나 정치권에서 사용하던 어원으로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생겨난 신종어인데 '유신언론인'이란 협박전화를 받고 보니 분명 야당 정치권이 관련된 사태로 보인다. -실제 우리신문인 '전남매일' 신문은 지방 야당지 이기에 내가 이런 협박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 준위가 몽둥이와 각목으로 무장한 야당 선동군으로 부터 놀라 도망쳐온 일들, 경찰서가 피습되고 총기가 탈취되어 예비군부대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면 이는 분명 폭동이요 반란이다.
육이오 전쟁 때 7살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하나로 쫓겨다니며 피난 생활 수개월 중 동네 개울속에서 학살된 아버지와 형님의 주검앞에 통곡하시던 어머니의 치마폭을 붙잡고 아무 영문도 모른 체 울기만 했던 나의 기억들, 그후 성장하여 아버지와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군에 자원 입대했던 일들, 제대 4개월을 남기고 월남전이 발발하자 파월을 지원했던 지난날들, 반공을 국시로 알고 지난날을 반공주의자로 자처하며 살아온 날들 지금 나는 지난 날 경험한 전쟁을 떠오르게 하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 하자 전신에 피가 끌어 오른다.
이렇듯, 광주 언론인의 증언에 따르면 폭도들이 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간은 5월 19일 오후 세시였다. 이와 유사한 무장 시민군의 민중 봉기가 1975년 월남 중부지방에서도 있었다. 아마 그들은 그것이 북쪽의 공산군에 남침의 기회를 줄 의도는 없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민중 봉기를 기회로 월맹군이 남침하여 4월 15일에 월남이 패망하였다. 나라가 패망하고 난 후에 민주화 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김대중은 5억불을 대북비밀송금할 때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던가.
광주사태 때 휴전선의 집결한 인민군은 광주 사태가 다른 도시들로 확대되는 것을 총공격의 신호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향토사 사단장 정웅장군(호남출신)이 2개 공수대대를 보내어 시위 진압 작전을 실시한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던가. 그리고, 5월 18일~19일 양일간의 시위 진압 책임자는 광주의 정웅 장군이었는데, 어째서 그 책임을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뒤집어씌우는가?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것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국력을 소모시키며, 국력이 약해지면 그 피해는 서민에게 돌아간다. 거짓말은 결코 광주 사태의 상처를 치유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사실에 충실하고 진실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 광주 사태 상처를 치유하는 올바른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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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제가 2003년 2월 14일에 작성한 시사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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