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협 회보(2005년) 축사
교회 밖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교구 평협 지도신부/ 사목국장 황양주 안토니오 신부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로마 12,21) 악은 결코 악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악을 선택하게 되면, 악을 무찌르기는커녕 악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는 선으로 악을 물리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힘들고 기나긴 싸움의 성과입니다. 악은 인간과 상관없이 세상에 작용하는 비인간적인 어쩔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악은 언제나 이름과 얼굴이 있습니다. 악에는 악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악은 사랑의 요구를 거부하는 비극입니다. 반면 도덕적 선은 사랑에서 생겨나며, 사랑으로 드러나고, 사랑을 지향합니다. 평화라는 선을 얻으려면, 폭력은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이며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비극적 상황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한 신뢰의 마음으로, 개인과 민족들이 악을 이기고 선을 이루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선이 악을 정복할 때 사랑이 승리하고, 사랑이 승리하는 곳에 평화가 흘러넘칩니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평신도들은 “이러한 희망을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지만 말고, 끊임없이 회개하며 ‘이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악령들’(에페 6,12)을 거슬러 싸움으로써 세속 생활의 구조를 통해서도 이 희망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자신 있게 증언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을 통하여, 개인과 사회가 완성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며, 사랑은 역사의 흐름을 선과 평화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2005년 평화의 날 담화문에 나온 말씀입니다. 이렇게 길게 인용한 이유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평협회원들이 올 한 해 동안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올해는 교구 설정 70주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그 첫 해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해입니다. 따라서 오랜 세월동안 부정과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움켜쥐고 권력을 휘둘러온 악의 세력에 의해 한국 사회가 골병을 앓고 있는 동안 그들을 거슬러 싸우기 보다는 현실을 핑게대면서 부정과 불의를 묵인하거나 동조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물론 교회 밖에서, 가정과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다했었는지 진솔하게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육화하셨듯이, 평신도들은 이 사회 속으로 육화해야 합니다. 평신도의 진정한 역할(예언직, 사제직, 왕직)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지는 않았는지? 올 한해는 교회 안에서보다는 교회 밖에서 즉 비신자들로 가득 찬 이 사회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됨으로써 평신도의 역할에 충실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