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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적 세계관
정성구
최근 한국교회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또 라브리 그룹이나 기독교대학설립 동역회들이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사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말미암아 곤혹스러우리 만큼 격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노사문제, 학원문제, 정치의 양극화 현상, 인신매매와 향락산업과 퇴폐문화의 번창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더구나 소련연방이 소멸되고 공산주의가 역사의 뒤안길에 퇴조하고 남북통일의 가능성이 성큼 다가온 이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 문제는 세계관과 인생관의 문제이다. 사람은 그가 가진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데, 우리는 각 사람이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과 신앙관을 정립함으로써 개인은 물론 민족과 국가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세계관이라 해서 다 같은게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란 말도 쓰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쓰여지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말해 보려고 한다. 이미 필자는 다른 글에서 칼빈주의를 해설하면서 부분적으로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해서 약간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칼빈주의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1. 칼빈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전이해
모든 문화에는 세계관이 있다. 또 모든 사람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고 있다. 사람이 어떤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학문, 예술 심지어 종교관까지 결정된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확실히 어떤 세계관을 갖는가에 따라서 민족이나 국가의 장래까지도 변화되기도 하고 신앙의 방향까지도 결정된다. 이원설 박사는 말하기를,
“역사를 움직이는 수많은 동력들―자연조건, 사회, 경제제도, 정치적 리더쉽 등등―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을 나는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큰 차이는 그가 정신적 존재(a psycho-spiritual being)인데 있다고 나는 믿으며, 개개인의 정신구조와 한 사회의 정신풍토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오늘날은 확실히 세계관의 혼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가치관을 결정짓기도 하고 오늘의 당면한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문제는 결국 세계관의 문제이며, 어떤 세계관을 갖는가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참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이런 본질적인 물음은 바로 세계관이 방향을 결정한다. 예컨대 우리가 최근에 흔히 말하는 민주화라는 말도 쓰는 사람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서 다르다. 신앙방법도 신학함의 방법도 세계관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 무엇이길래 우리의 삶의 전분야를 결정짓는 것일까? 앞으로 세계관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말하겠지만 사람이 무엇을 기점으로 해서 인생과 새계와 우주를 보는가에 따라서 퍽 다른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물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볼 때 물질을 모든 것의 출발과 과정 그리고 결과로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유물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물질이 곧 희마이며 생명이며 법이 되는 것이다. 유물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유물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다니지 않더라도 그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 물질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게 된다. 가령 유물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하자.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의 정치철학과 정치행동은 물질로 해결된다. 그런 사람들의 정치목적은 부의 축척이되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 그러한 정치를 비판하는 쪽도 유물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면 결론은 같이 될 것이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세계에 살지만, 유물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부의 추척만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덕적 판단기준이 되기도 하고 인생관과 윤리관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래서 목적이 수단을 신성시하게 되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든지 목적만이 이루어지면 된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사실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유물주의 세계관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는 세속화되고 윤리나 도덕의 규범은 휴지화 되어가고 모든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세계관은 하나의 종교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유물주의 세계관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대중들 앞에 나타나서 군림하는 것이다. 필자의 지론은 세상과 사회를 바꾸려면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고,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면 그가 가진 세계관을 바꾸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런데 그 세계관을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기는 하나 결국은 종교관 또는 신관(神觀)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적이든지 또는 무의식적이든지 세계의 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가설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세계관이 있지만 그 중에서 몇가지로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즉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문명체가 대부분 자연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대서양문명의 세계관은 인간 중심 또는 기술 중심의 세계관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히브리문명 또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자가 말하려는 세계관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며 또한 성경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와 성경을 보는데 있어서도 어떤 세계관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모두가 성경을 기독교신앙의 가장 핵심으로 보는데는 일치한다고 해도, 어떤 시각에서 또 어떤 세계관으로 성경을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면 인본주의 곧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성경을 볼 때는 굳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성경의 몇몇 구절을 적절히 표절해서 인본주의적인 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접근할 때 처음부터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보기 때문에 그 성경이 인간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를 묻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신이 좋다고 생각되는 말씀들은 수용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제거해 버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볼 때 상황윤리(Situation Ethics)가 나오게 된다. 즉, 인간이 좋은 것은 선이 되고 인간이 싫어하면 악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법은 앞서 말한 대로 유물주의 세계관을 가진 경우에도 일어난다. 유물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성경을 볼 때도 혁명의 이론을 만들어 낸다. 꼭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데 왜 이렇게 서로 달라지는 것인가? 그것은 성경을 보는 시각과 입장의 차이다. 세상에서는 무슨 학문을 하든지 전제(presurosition)가 없을 수 없다. 신학도 신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 뜻에서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바로 성경적 세계관이며 신본주의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세계관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 보다 극심한 가치관의 혼돈과 도덕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 더러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오늘의 상황을 염려하는 글들이 나오기는 하나 누구든 뾰족한 묘수는 없는 모양이다. 세상이 하도 빨리 변화되기 때문에 세대간의 격차는 심화되고, 깊어진 골짜기를 메우기가 단순한 정치적 결단이나 정책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달라져 버린 것이다. 사회와 세상이 달라진 것은 사람이 달라진 것이고 사람이 달라진 것은 곧 사람의 생각이 달라진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은 왜 달라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을 정상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바로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도대체 무엇을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인지의 표준도 문제가 될 것이다. 필시 현대인의 사상구조는 무엇을 기점으로 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를 규명해야 하리라고 본다. 이와같은 상황을 이해하면서기독교 세계관 더 나아가서 칼빈주의 세계관을 말해 보려고 한다. 그에 앞서 우리는 세계관이란 무엇인지가 해명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세계관이란 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인 세계관이 개인생활과 문화와 사회와 정치와 학문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병이 걸렸을 때 의사를 찾아가서 정밀검사를 받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서 치료를 했다고 치자. 이런 서로 다른 행동양식은 바로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계관은 그 민족이 가진 기후, 토양, 문화, 역사, 종교, 정치 등 다양한 조건 위에 형성된다. 그리고 세계관이 문화와 역사와 종교와 정치의 형태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은 다르다. 그리고 미국 사람과 한국사람은 다르다. 그런데 그 차이는 피부나 머리새깔의 차이라기 보다는 세계관의 차이다. 그 세계관의 차이가 바로 삶의 모든 영역에 열매로서 나타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관은 의식주의 생활에서부터 정치나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가령 월쉬(B.J. Walsh)나 미드레톤(J.R. Middleton)이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일본인과 미국인의 세계관은 대개 다음과 같다.
일본인의 세계관을 보면 “나는 태양신의 직계후손인 일본국가 가족의 한 구성원이다. 나는 자연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된 해뜨는 땅에서 살고 있다. 내가 나의 가족이나 국가에 수치를 끼친다면 불화가 생긴다. 나의 인생의 사명은 나의 국가가족의이름을 드높이는데 있는데, 이는 일본의 우월성이 세계의 다른 국가들 위에 두드러질 때만 참된 축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일본인의 세계관은 심지어 전자제품을 만드는데까지 나타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반면에 미국사람들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그들은 생가하기를 “나는 나일 뿐이며, 하나의 개인이며, 내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인이다. 나는 개발잠재성이 가득한 자연세계 속에 서 있으며, 나의 사명은 그 가능성을 이용하여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것이다. 비록 자연에 대한 무지와 자연을 지배할 도구의 부족으로 인하여 나의 이 사명이 방해를 받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망은, 자연이 그 풍성한 자원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내어 놓을 때 풍성한 생활의 향상이 이루어진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 모두는 결핍도 없고 의지할 필요도 없는 풍요의 삶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미국인의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세계관은 어떨까? 한국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 시점에서 볼 때 유교적 세계관, 불교적인 윤회사상, 유물주의 세계관과 인본주의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는 듯 하다. 결국 오늘의 사회적 혼미와 소용돌이는 세계관의 혼돈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개인이나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는 그 문화의 역사적 발전과 쇠퇴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세계관에 대한 학자들이 의견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바커(R. Bakker)에 의하면 세계관이란 때로는 인생관이란 말과 유사하게 쓰이고 있지만 “세계”란 말은 보다 실제성의 전부(De totaliteit der Werkelijkheid)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독일어의 세계관(Weltanschauungen)은 독일 낭만주의 문화형태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의미로 다양하게 쓰이기도 했으며 특히 1919년 야스퍼스(jaspers)의 “세계관의 심리학”(Psychologie der Weltanschuungen)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세계관이란 이 말은 독일어와 화란에만 있고 영어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특히 화란사람들이 세계관(Wereldbesehouwing)이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가 189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스톤 강의(Stone Lecture)인「칼빈주의」를 강의할 때 세계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즉, “두 개의 세계관이 생사를 겨루는 격전장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1913년에 기독교 세계관(Christelijke Wereldbeschouwing) 책을 썼다. 바빙크는 이 책에서 사상과 존재, 존재와 말, 말과 행위 등에 대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화란의 칼빈주의 철학자인 폽프마(K.J. Popma)는 그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해설서의 제목을 인생관(Levensbeschouwing)이라고 한 것도 독특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그는 생각하기를 세계관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전제하고, 아무리 기초적이고 간단하더라도 세계관이 전제되지 않고는 전혀 사고활동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세계관을 정의하면서, 세계관이란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한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혹은 가정)둘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심지어 사고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갖고 있는 첫 번째 가정은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세계관들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 보다는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사이어에 의하면 세계관으로서 제 구실을 하려면 대개 다섯가지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첫째,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제는 누구인가? 둘째, 인간은 무엇은가? 셋째,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내세문제, 넷째는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다섯째, 인간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각각 다를 수 있는데 그 대답에 따라서 각각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위에서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 대답을 회피하면서 살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이의 질문에 대해서 이런 입장을 취하든가 저런 입장을 취하게 된다. 분명하고 명백한 세계관을 취할 것을 거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거나 적어도 하나의 철학적 입장임이 입증될 수 있다.
최근 이원설 박사의 저술에는 세계관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설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세계관이란 “삶의 정신적 설계”, “신앙체계”, “사회적 가치의 총체”또는 “지적 풍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관이란 단순히 이념체계나 원리라기 보다는 더 넓고 깊은 의미에서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이 개별적 혹은 집단적으로 가지는 우주관, 자연관, 인간관, 사회관, 신관, 내세관 등을 종합한 신념체계(belief systen)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세에 세계관은 모든 관점 즉, 인생과, 물질관, 우정관, 가정관, 저치관, 교육관 등의 모체이며 틀이 된다는 것이다. 올트 하이스(James H. Olthuis)에 의하면 19세기이 빈델반트와 리케르트 등은 세계관을 “인간정신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역사 발전의 기본주동(主動, prime mover)라고 했다. 워거(W. Warren Wager)는 세계관을 ”삶의의미를 부여하는 자연과 실제에 대한 초괄적 개념“이라 했고, 레드포드(Robert Redford)는 ”세계관은 사람이 자신과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보는 눈“이라 했고 겔쯔(C. Geerz)는 세계관을 정의하면서 ”한 문화의 특유한 성격, 가치, 도덕, 심미감 등의 종합인식체로서 종교와 사회의 기반“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에 의하면 세계관은 단순한 자료(data) 혹은 지식이나 무엇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행위를 통제하는 신념(control belief)이다. 세계관은 어떤 지식을 좋아하거나 버리는 취사선택을 동기화할 뿐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자아낸다. 세계관은 사람의 도덕적, 경제적, 사회적 결단을 유발한다.
결국 세계관은 한 집단이 사물을 판단하는 기본가설(basic assumption)이다. 이 가설에 따라서 모든 판단의 차이가 생긴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세계관은 개인이나 한 집단의 인식 및 신념체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는 정신구조로서 사람의 가치와 행동을 일으키고 조정하는 바탕이 되는 요소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세계관을 갖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고 결혼을 하고 학문을 하고 장사를 하든지 간에 실제로 그가 가진 세계관에 의해서 방향이 결정된다. 인간은 시각(vision)을 가진 피조물이다. 적어도인간은 그가 가진 세계관에 의해서 좌우된다. 세계관은 단순히 삶에 대한 시각일뿐 아니라 삶을 위한 시각도 되는 것이다. 세계관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 기준을 결정하기도 할 뿐 아니라 세계관에 의해서 무엇이 더욱 가치있고 무가치한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세계관은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며,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신봉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제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각 세계관은 하나의 종말론, 즉 미래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걸음걸이를 지도하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한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이다. 모든 사람은 사물을 이해할 때 반드시 첫 번째 전제가 있다. 그 전제들은 세상을 보는 안경이 되고 교리가 되고 윤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불(火)이 세상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물(水)이 세상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연중심적인 세계관의 소유자는 큰 돌, 큰 산, 큰 나무를 경배하고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이런 세계관을 갖는 한 적극적인 문화개발은 곤란할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 서양문명의 세계관은 아무래도 인간 중심 또는 기술 중심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을 갖게되면 인간만이 사고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들은 점차 유물주의적 진화론적 무신론적 세계관으로발전해 버리는 것이다. 한편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이 세상은 영원자존자인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였으며, 그가 우리를 구속하였으며 또한 그는 우리의 심판주가 되신다는 세계관을 갖는다.
19세기 이후 세계관이란 말이 서구 대학사회에 널리 통용되었고 최근 북아메리카의 기독교사회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와서 젊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자주 사용되어진 세계관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한국교회처럼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양승훈씨의 최근의 글에서 올바른 세계관이 갖는 힘에 대해서 세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로, 올바른 세계관은 통일적인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삶의 통일성은 곧 생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인생의 목적은 통일적인 삶이 전제될 때 가능한 것이다. 둘째, 올바른 세계관이 역동적인 삶을 가능케하며, 그런 삶은 올바른 생의 의미가 확립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로 올바른 세계관은 사고와 행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관은 특정한 과제를 선텍하도록 지시하고 삶의 전반적인 목적을 부여하며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하였다.
3. 세계관과 철학
화란 칼빈주의자들은 세계관과 철학을 구별하였다. 물론 세계관과 철학과의 구별도 19세기 독일철학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며 주로 딜테이(Wilhelm Dilthey)와 리케르트(Heinrich Rickert)의 작품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사람들은 세계관(Weltanschauung)을 세계에 대한 전(pre)학문적인 견해로 보았다. 한편 철학은 학문적 시각으로 보았다. “전학문성”이란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의미들과 감정적 종교적 편애를 함축한다. 반면에 “학문성”이란 중립적 이성적 원리에 기초한, 객관적이면서 일관된 인식적 방법을 취한다. 한편 헬라의 고대철학은 세계관과 철학의 구별이 없다. 이 둘은 전체적 안목에서는 같은 의미일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서로 다른 면을 지닌다. 오늘날 독일 철학 용어 중에 “세계관의”(Weltanschaulich)라는 형용사는 “비철학적”(Unphilosophical)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한편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세계관”이란 말이 1858년에 처음 나타나는데, 이는 엄격한 이성적 철학과는 대조적 의미를 나타내며, 20세기 이전에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았다. 그런데 1917년에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 워필드(B.B. Warfield)가 이 말을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인생관“과 같은 의미로서의 세계관은, 대학의 따분한 학과로서 철학과는 달리 가치체계 또는 세계를 보는 시각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학문을 선행하며, 순수한 이론적 의미에서의 철학과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전이론적(pre-theoretical)상식이 이론적인 학문보다 불확실하며 세계관의 인식을 무가치화 시킨다는 주장은 부당한 억지일 뿐이다. 사실 세계관은 철학보다 인식적 차원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학문적 지식으로서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철학자들이 품었던 세계관에 의존한 전학문적 직관들과 전제 위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관이 철학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세계관과 철학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사고를 자기의 세계관을 향하여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철학에서의 많은 혼란과 대화의 어려움들은 바로 세계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하편 기독교철학자들은, 그들의 철학화를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그 방향을 정하고, 동시에 신앙―즉, 성경적 세계관―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 칼빈주의이다. 그러한 성경적인 세계관은 신앙고백을 갖는다. 예컨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가 애용하며 진술했던 삼위일체 교리(Trinitarian Formulation)―성부 하나님께서 이 타락한 세상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회복시키시고,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로 재창조하신다.―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동일하게 얻은 신앙고백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전학문적 시각(pre-scientific overall perspective)(또는 세계관)은, 그들이 매일의 삶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고백하게 되는 하나의 양식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적 특성은 전포괄적인 의미에서, 모든 유익한 진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창조된 세계는 인간의 문화와 사회전반에 걸친 모든 경험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전우주적 범위를 포함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타락과 그 회복의 범위 또한 모든 피조세계에 그 영향을 미친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의 재창조는 모든 현세적 실체들이 그 본래의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죄와 은혜와는 무관한 철학을 거부한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 철학은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전이론적인 것이므로 오히려 철학에 선행한다.
4. 칼빈주의 세계관
앞에서 우리는 세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사실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가에 따라서 거기에 대한 판단기준도 다를 것이고, 열매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말하기 전에 여러 가지 세계관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야 할 터이나 그 보다는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분명히 함으로써 다른 세게관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되겠기에 칼빈주의 세계관을 말해 보기로 하겠다.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과 성경적 세계관 그리고 칼빈주의적 세계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함이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적 세계관이며 참된 성경적 세계관이 칼빈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개혁주의 세계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주의가 바로 하나의 세계관이기도 하려니와 그것은 성경적 세계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란 말이 하나의 통합된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기독교세계관이란 말로 가끔 쓰기는 하겠으나 칼빈주의적 세계관이란 말로 통일해 보려고 한다. 또 독자들에게 밝히고 싶은 것은 칼빈주의 세계관은 곧 필자 자신의 세계관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세계관도 따지고 보면 필자의 학문의 배경과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자요 칼빈주의자들인 박형룡, 박윤선, 명신홍 박사 등의 문하에서 학문과 신앙을 쌓았고, 후일에 화란의 개혁주의 사상의 본산인 뿌라야 대학교 신학부에서 칼빈주의자들의 신학과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 특히 공부하는 동안 요한 칼빈을 비롯해서 19세기 칼빈주의자들인 흐룬 봔 프린스터와 아브라함 카이퍼 등에 심취했으며 그러는 동안 칼빈주의 철학자들인 헤르만 도예베르트(H. dooyeweerd)나 볼렌호번(Th. D. H. Vollenhoven), 봔 리센(H. Van Riessen), 뎅그링크(J. D. Dengerink), 베인호프(C. Veenhof)등과 교분을 가졌으며 쉐퍼(Francis Schaeffer), 로끄마꺼(H. Rookmaker), 벨까일(J. Verkuyl) 등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서 필자의 신학과 신앙함의 방법들을 배웠다. 그래서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신학과 신앙과 세계과 우주와 인생을 보는 시각이 열렸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1) 칼빈주의적 세계관의 의미
헨리 미터는 칼빈주의를 설명하면서, 칼빈주의란 신학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 사회, 과학, 예술분야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는 전포괄적인 사상체계(an all comprehensive system of thought)라고 했다. 여기서 칼빈주의를 전포괄적 사상체계라고 한 이유는 칼빈주의적 세계관의 범위가 삶의 전분야에 걸쳐 형용사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앞서 말했지만 영어권에서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은 삶의 체계(life-system)란 말로 더 많이 사용되 잇는 실정이다. 최근 로버트 눗슨(Robert Knudsen)은 “오늘의 칼빈주의적 세계―인생관”(World and Life View)에서,
“칼빈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이며, 근본성, 전체성, 배타성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는 내면적인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삶 전체와 연관을 가진다.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는 하나님게서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성경적 진리와, 죄로 찢겨진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된다는 진리로 부터 생명력을 갖는다. 칼빈주의의 시야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만큼 넓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칼빈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이란 뜻이다. 즉, 칼빈주의는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칼빈주의가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의 근원들에 집중한다. 사실 세계관이란 무엇을 근원으로 출발하는가가 중요하다. 예컨대 문예부흥(Renai-ssance)기의 종교개혁과 인문주의(Humanism)는 다함께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인문주의는 그 근원을 고대 헬라와 로마의 지혜에서 찾았다. 인문주의자들은 그것이 진정한인간성을 가지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예배함으로써 참된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둘다가 문예부흥을 갈구했지만 서로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곧 칼빈주의인데,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그 양자간에는 언약관계가 있다는 성경적 계시의 의미를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분명히 밝혀 왔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것을 거절한다. 칼빈주의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자율성에서 기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깨달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주의를 성경적 세계관이며 인생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칼빈주의는 한두개의 교리적 해설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돌트총회(1619)의 결과로 얻어진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도 칼빈주의에 대한 해석일 수 없다. 즉, 인간의 전적타락, 무조건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적 은혜, 성도의 견인 등을 모두 말한다고 해도 칼빈주의가 충분히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적 세계관이며, 성경적 세계관은 곧 칼빈주의이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사상을 전제한 것이며,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보는 시각을 열어준다.
2)칼빈주의적 세계관의 기본적 골격과 전제
앞서 말한대로 인생과 우주를 어떤 시각에서 보는가는 세계관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물을 어떤 세계관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열매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본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두말할 필요없이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중심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유신론(有神論)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과거 헬라문화에서는 신들을 인간화하거나 도는 자연세력을 의인화하거나 신격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태양이나 하늘, 달 등을 신앙의 대상으로 승화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 중심적 세계관이었다. 그래서 자연은 헬라사상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종착역이었다. 헬라사람들은 창조주와 섭리주로서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며 자연현상에다 신성을 부여하고 인간성을 신적인 이해능력 정도로 생각함으로써 자연 중심의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후 로마의 문화도 헬라 문화의 세계관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문명들 예컨대 인도, 중국, 마야, 헬라, 로마 등은 모두가 자연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으나 유독 히브리인들 만이 자연을 비인격이라 하고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던 것이다 왜 세상의 다른 민족들은 모두가 자연중심적이거나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을 거졌는데 하필 히브리인들만이 유일신관을 갖고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관을 가졌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죄로 어두어져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 중심 또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갖게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알 수 있다면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역시 하나님 사상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격적이며, 초월해 계시면서도 내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주권자이시며 선하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떤 측정이나 범위를 뛰어 넘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우주의 어떤 존재도 그의 본질에 도전할 자는 없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시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 또한 하나님은 유일한 자존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모세가 선포한대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고 한 것 처럼 하나님은 최고의 실체요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는 단순히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하나님은 삼인칭 단수인 그(He)로서 지칭되는 인격이시다.하나님은 초월하여 계시나 상한 심령의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시나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모든 지성의 궁극적 원천이다. 하나님은 만유와 만사의근원이시며 주권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의 인격적 본질은 선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선은 거룩과 사랑이란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된다.
위의 표현은 모든 참된 기록자들이 고백하는 내용이며 사도신경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란 표현에서 이미 고백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천지를 창조하였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웅장한 선언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선언임과 동시에 우리의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웅장한 진리를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의 세계관은 구원론에 앞서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한다. 창조는 성경 메시지의 기초가 된다. 실제로 성경적인 창조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죄와 구원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는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말 것이다. 세계관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우리느 도대체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치유책인지를 설명할 걸이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골격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첫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천지창조 이전에 말씀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우주는 무질서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고 의미있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질서있게 만드셨다. 이런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깨닫는데서부터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자리를 잡는다.
앞에서 우리는 칼빈주의 세계관의 전제는 곧 하나님 중심사상임을 설명하였다. 이에 반해서 인분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높이고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려고 한다. 대부분의 이교도들은 반신반인(半神半人)들이고 영웅숭배를 요구한다. 이슬람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노예가 된다 사람이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비천한 굴종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또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처럼 높이고 인간을 우상시하게 된다. 또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문화적 명령(cultural mandate)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한 문화를 건설해야 할 것을 확신한다. 이 세상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소명(召命)의 장소이다. 재배 곧 문화(culture)는 경작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문화건설의 소명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성은 본질적으로공동체적 인간성(Cohumanity)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피조세계를 발전시키고 재배함에 있어서 함께 일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성경에서 인간만이 충만한 문화적 피조물로서, 즉 나아가서 땅을 개발하라는 부름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런 세계관과 인간관은 우리의 문화창조의 기초를 열어준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 Dei)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종교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전도서 3:11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였다. 인간은 영원한 것으로만 만족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물질은 소유한다고해도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 자체가 종교성을 가진 증거이다. 그래서 칼빈(John Calvin)은 말하였다. 인간의 마음 속에 뿌려진 종교의 씨앗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이 인간속에 진정한 종교적 표현을 심어주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7:22에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섬기려고 하는 태도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종교적 인물로 지음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는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 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스스로 회복될 수 없으 만큼 훼손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구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높여서 스스로를 자율적 존재로서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독립된 생활을 소유한 것 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인간의 이런 교만과 타락은 자신들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오고 오는 긴 세월 동안 그 자손들의 인격적, 사회적, 자연적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일그러지고 자기 초월성도 손상하고 말았다. 그래서 진정으로 바른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김으로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도 무너지게 되었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지상도 어둡게 되었고 도덕적으로 분별력도 흐리게 됐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말한대로 인간의 철저한 타락을 믿는 것은 구원을 기대하게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영접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구원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있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함을 받은자는 그의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창조성 등 모든 부분에서 실질적인 회복을 누리는 자이다. 인간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며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세계관의 전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오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철저한 유신론이요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사 66:1)이 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할 수 없다고 본다. 사람이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그의 모든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성경적 세계관이며 인생관이 될 것이다.
5.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세계관
1) 카이퍼와 그의 후계자들
카이퍼는 1837년에 태어났다. 당시 화란 갱신교회(Hervoumde Kerk)는 근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대단히 황폐해져 있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의 화란교회에 대해서 카이퍼가「근대주의에 직면하여 연약하게 끝없이 퇴각하였다.」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교회는 모두 근대주의 곧 자유주의가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교회인 갱신교회는 개혁교회의 결정체인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나 벨직신경, 돌트신경에 충실하지 않았고 교리훈련을 경시하고 더구나 신학자나 목회자가 개혁교회의 교리와 신앙에서 떠나있었다. 특히 당시의 국립대학 라이텐, 우트레흐트, 흐로닝건 대학들은 현대의 자유주의 사상을 청년들의 가슴에 심는 기관이 되었고 특히 이들 대학의 신학부는 자유주의 신학의 아성이 되었다.
이 때문에 카이퍼 이전에 이미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빌더다익(Willem Bilderdijk)또는 흐룬 반 프린스터(Guilliume Groen Van Prinsterer)에 의한 레배이(Revue)운동이라고 불려지는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또한「참된 개혁파 교회에로의 복귀」를 역설하다가 파멸된 콕크(Hendrick de Cock)목사를 중심으로 약 2만명 이상이 이미 국교회를 탈퇴하였다. 그래서 카이퍼가 태어날 무렵이 교회는 국교회와 거기서 분리된「십자가 아래있는 화란 개혁파교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란 국교회의 내부에서는 자유주의자들과 역사적 개혁주의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그리고 중도파들로 섞여 있었다. 국교회의 목사였던 카이퍼의 부친 영 프레드릭 카이퍼도 보수적이긴 해도 신조에 충실한 칼빈주의자는 아니였다 다만, 개혁교회의 신조를 근근히 따르는 온건파 대표였다.
아브라함 카이퍼 자신에게도 젊은 날의 고통스런 체험이 있었다. 그는 현대주의자의 아테네라고 불려지는 라이텐 대학(Leiden Universiteit)재학 중(1855년 입학~1855년 졸업) 자유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라이덴 대학 신학교(1858년 입학~1861년 졸업)시절 카이퍼는 당대의 첫째가는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조직신학자였던 스콜턴(Joannes Gendricus Scholten)으로부터 신학을 배웠는데, 절대 영향력을 자랑하던 이 교수의 강의에 완전히 매료되어 근대자유주의신학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카이퍼가 교회개혁과 아울러 개혁주의 원리에 입각한 대학건설에 몰두한 것은 무신론적이고 이교적인 현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모든 학문과 과학이 얼마나 젊은 청년의 마음을 좀 먹었는지를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국교회의 목사가 되어 베이스트(Beesd)라는 작은 농촌교회에 부임함 카이퍼는(1863년 부터 4년간) 그 교회의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 특히 발투스(Pietronella Baltus)라는 경건한 부인의 순수한 개혁파 신앙의 위력있는 간증을 들은 후 격심한 정신적 갈등을 거쳐서, 완전히 현대주의와 손을 떼고 개혁주의 정통사상을 견지하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바뀌었다.
그 후 카이퍼의 인생은 엄정한 칼빈주의자 순정(純正)한 개혁주의 신앙의 투사로서의 삶이었다. 그는「개혁주의 기반에 기초한 고등교육협회」(1878),「암스텔담 뿌라야대학」(1880)을 창설하여 고등교육의 개혁에 몰두하였다. 또한 자유주의적인 교리교육을 회원들에게 실시하는 것을 거부하자 카이퍼를 위시해서 암스텔담 교회의 당회의원 대다수가 징계에 회부된(1866) 데에서 발단이 된 교회개혁운동은 1887년 제2차 분리(Afscheiding)로 발전되어 1892년에는 제1차 국교에서 분리된 사람들과 결합해서 새로운「화란개혁파 교회」(Gereformeerde Kerk van Nedesland)가 설립되었다. 그 후 카이퍼는 칼빈주의적인 정당인 A. R. P 정당의 총재가 되었고 1901~1904년에 내무장관 겸 수상이 되었다. 카이퍼는 신학적, 영적 부흥과 함께 정치, 경제, 교육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칼빈주의적 세계관의 원리를 세웠다. 카이퍼의 이런 개혁주의 사상을 신칼빈주의(Neo-Calinism)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 말은 카이퍼의 반대자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지만, 카이퍼와 그의 후계자들이 16~17세기의 고전 칼빈주의를 계승,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 칼빈주의 운동은 카이퍼 이후 뜻을 같이하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특히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카이퍼와 거의 같은 이상과 학문적 명성을 가졌다. 그의 부친은 1838년 갱신교회와의 분리(Afscheiching) 후에 세원진 개혁교회에 속했기에 바빙크 자신도 개혁주의자로 자랐고 개혁교회를 하나로 뭉치자는 카이퍼의 권유에 동의하며 그 뒤를 이었다 비록 바빙크 자신은 정통신앙을 떠난 일이 없지만 그도 라이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년간 목회한 후 12년간 캄펜신학교(Kampen Theologische Hooge school)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후 20년간 뿌라야 대학(Vrije Universiteit)에서 카이퍼의 뒤를 이어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불후의 명작「개혁주의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 전 4권을 비롯해서 맣은 저술을 냈고 그의 만년 10여년간 칼빈주의적 철학에 몰두하였다. 바빙크는 관대한 마음과 학문적인 조화를 갖춘 인물이었으며, 특히 자신과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걷는 사상가들의 생각과 시각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이들 두 거성에 이어, 두명의 또 다른 뿌라야 대학의교수인 볼쳐(Jan Woltjer)와 게싱크(W. Geesink)를 살펴 보려고 한다. 볼쳐(1847~1917)는 로마의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룩레티우스(Lucretius)에 관하여 학위논문을 썼던 고전주의자였으며, 일생동안 개혁주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세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해를 위해서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Logos)에 대한 중요한 글들을 남겼다. 한편 게씽크(1854~1929)는 뿌라야 대학의 윤리학과 철학교수로서 칼빈주의적 성경이해의 철학적 접근을 시도했으며, 방대한 책의 저술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가 카이퍼의 친구들로서 동시대에 칼빈주의 운동의 기수들이었다.
그들을 이은 사람사람들은 볼렌호번(Th. d. H. Vollenhoven)과 도예베르트(H. Dooyeweerd) 그리고 스톡커(Hendrik Stoker)를 들 수 있다. 먼저 게씽크의 후계자였던 볼렌호번(1892~1978)은 바빙크의 관심이 기독교 철학에로 옮겨졌던 1911년에 뿌라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1918년「유신론적 입장에서의 수리철학」이란 제목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후 다년간 목회사역을 한 후 모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철학분류에 관한 연구 외에도, 철학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 저작으로는「칼빈주의와 철학의 개혁」(Het Calvinisme en de Reformatie van De Wijsbegeerte)(1933)과「철학사Ⅰ」(Geschiedenis Der Wijsbegeerte)(1930)이 손꼽힌다.
볼렌호번의 매부이자 칼빈주의 철학의 대부인 헤르만 도예벨트(1894~1977)는 1926년부터 1963년까지 뿌라야 대학의 법학교수였으며 칼빈주의 철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볼렌호번과 함께 일생동안 헌신하였다. 도예벨트의「법개념의 철학(De Vijsbeggeerte der Wetsidee)(1936)」은 1950년에 영어로「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라고 번역되었다. 그는 칼빈주의 철학회를 창설하고 잡지인「개혁주의 철학」(Philosophia Reformata)를 발행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스토커(1900~)는 남아프리카에서 1921년 바빙크의 사사를 받기 위해서 암스텔담으로 왔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바빙크가 세상을 떠남으로 뿌라야대학에서의 철학연구를 포기하고 독일의 콜로그네(Cologne)에서 현상주의자인 쉘러(Max Scheler)에게서 철학 수업을 받았다. 또한 스토커는 “의식”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후 포체스트토롬(Potcheststroom) 대학에서 1964년 은퇴할 때까지 철학을 가르쳤으며, 볼렌호번이나 도예벨트와 매우 친숙한 관계를 주고 받았다. 특히 그의 사상은 “창조사상의 철학”으로 통한다. 위에 언급한 세 사상가들을 이른바 “암스텔담 학파”(Amsterdam School)라고 칭하며, 바로 이들이 뿌라야 대학의 칼빈주의 철학운동의 장본인들이다.
이들 외에도 바빙크의 조카이며 선교학자였던 바빙크(J. H. Bavinck), 그리고 헤르만 바빙크의 후계자였던 헤프(V. Hepp), 그리고 칼펜신학교 교수 훅스트라(H. Hoekstra)등이 이 운동의 후계자들이 다. 그리고 뎅그링크(J.d. Dengerink)나 봔리센(H. Van Riessen), 베인호프(G. Vecnhof), 로그마커(H. Rookmarker)등도 이 칼빈주의 운동의 기수이며 결국 쉐퍼(Francks Schaffer)도 바로 이 영향 아래 있었다.
위에서 우리는 칼빈주의 세계관이 성립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과 카이퍼와 그의 후계사상가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는 칼빈주의 세계관 정립의 배경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이런 배경을 전제하면서 카이퍼의 칼빈주의 세계관을 자세히 말해보자.
2)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새계관
앞서 말한대로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논함에 있어서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주장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세계관은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세계관은 전포괄적인 실제관(all-inclusive of all-embracing wiew of realities)이란 점이다. 세계관은 하나님, 인간, 세계를 포괄적으로 보는 전체관이다. 둘째는 수미일관된 통일적 시점(from a consistent point of view)으로부터 모든 실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어떤 사물의 실제를 설명할 때 통일된 시각을 가져야 세계관이란 것이다. 어떤 것에는 이런 원리를 어떤 때는 저런 원리를 적용한다면 그것은 통일된 세계관일 수가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대신(對神), 대인(對人)원리에서 유신론적 입장을 취한다면 대세계(對世界), 대자연(對自然), 대사회(對社會)에 관해서도 명백한 하나님 중심의 입장을 나타내야 한다. 카이퍼는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주장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은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서 자연계시를 바르게 해석하여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봉사해 가는 전포괄적인 기독교를 주장하였다.
카이퍼는 세계관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문장을 제구성해 보면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세계관이란 대신(對神), 대인(對人),대세계(對世界, 對自然, 對社會)라는 세가지 인간의 근본적 관계에서, 특정의 수미일관된 통일적 관점으로부터 제기되는 전포괄적인 실재관(全包括的 實在觀)이다.」
그러면 왜 카이퍼는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강조했을까? 그것은 18세기 후반으로부터 19세기에 걸쳐 화란에 독일로부터 새로운 근대철학적 세계관이 노도와 같이 흘러들어와 화란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카이퍼는 이런 근대철학적 세계관을 현대주의라고 부르고, 이는 매우 강력한 포괄적인 사상체계임을 강조했다. 독일의 근대철학은 학문적 인식, 과학적 인식의 구조를 철저히 분석하여 학적인식의 기초를 세운 후에, 그것에기초하여 신, 인간, 세계(자연과 사회)에 관한 포괄적인 사물의 시점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입장은 자율적(自律的)이며, 배교적(背敎的)인 자유주의 세계관이었다. 이런 사상이 기독교와 학문, 예술, 과학, 사회, 정치 전반에 걸쳐서 퍼졌기 때문에,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안에서의 속죄와 중생, 성경의 권위 등 믿는 신앙 위에 세워진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 필요했다.
① 전포괄적 원리(全包括的 原理)
위에서 말한대로 카이퍼는,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독일에서 밀려들기 시작한 자유주의 사상에 직면해서, 화란교회가 힘없이 유린당하는 이유가 현대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전포괄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을 갖지 못한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중심한 통일된 세계관은 칼빈주의 뿐임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논리는 젊은날의 그 자신이 현대주의와의 피나는 각투속에서 얻어진 귀중한 체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통일된 실제관 곧 세계관은 칼빈주의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가 함이다. 카이퍼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주의도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입장은 인간의 피는 이성을 포함한 인간본성을 부패시키기까지는 침투하지는 않고 단지 상처를 입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 이상은 신(神), 인간(人間), 세계(世界)에 관하여, 비록 불완전하다고 할지라도 바른 진리치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더 나아가서 이 불완전성을 보충하는 거룩한 말씀(聖言)에 의하여 계시적 진리를 계속 쌓아감으로 진리인식체계(眞理認識體系)의 완결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로마카톨릭의 주장은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면에 죄로 인하여도 부패하지 않은 자연적 이성을 원리적으로 승인하고, 이 자연적 이성이 자율적으로 세우는 신, 인간, 세계에 자연적 진리의 기반위에서 계시적 진리를 수용한다.
따라서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침을 받기 전에, 먼저 자연적 이성이 진리에 관하여 발언하는 원리를 채용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진리는 이 이성에 의한 최초의 발언을 보충하는 의미정도 뿐이다. 로마 카톨릭의 이런 사상은 종합(綜合)과 순응(順應)의 사상이다. 진리는 이 세상의 철학이라든가 과학의 합리주의적 기반 위에 설립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 세상의 철학과 세계관에 대하여 수용적(受容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굳이 칼빈주의 세계관을 고집하는이유는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해서 모두 성경적이거나 유신론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실례로 루터주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루터신학은「그리스도 왕국」(Regnum Christi)과「이성의 왕국」(Regnum Rationis)이라는 두 왕국론을 기본구조로 하고 있다. 자연이성은 그리스도의 왕궁에 속하는 천상적 사실(天上的 事實)들 , 구원에 관한 사항들, 즉 영적 지혜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지만, 이성의 왕국에 속하는 지상적 사실(地上的 事實)에 관하여는 자연적 이성은 여왕으로서 땅을 다스리게 한다는 것이다. 지상적 사항은 실제로 자연적 이성의 구원에 내어 맡긴 것이 되어서, 현제적 일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고찰하는 통일된 사상체계가 결여되어 있다. 루터주의는 세계관에 있어서는 로마카톨릭적 종합구조의 잔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카이퍼는 루터의 개혁원리가 칼빈보다 협소하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칼빈뿐만 아니라 루터도 하나님과 직접적 교제를 위해 싸웠지만 루터는 그것을 주관적(主觀的)이고 인간론적(人間論的)인 측면에서 문제 삼을 뿐, 칼빈이 했던 것 처럼 객관적(客觀的)이고 우주론적(宇宙論的)인 측면에서 다루지 아니했다. 루터의 출발점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구원론적 원리에 있음에 비해 칼빈의 출발점은 그 보다 훨씬 번위가 넓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일반적이고 우주적(宇宙的)원리에 있었다.
즉 루터의 주장의 핵심은 구원의 방법을 둘러싼 것이며, 루터주의는 교회적 신학적 성격에 한정되어 있는 것에 비해서, 칼빈주의는 그 특징을 교회안팎으로, 즉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만이 바른 대신관계(對神關係)를 기초로하여 대인(對人), 대세계(對世界)에 대해서도 하나님 중심한 시각으로 보려는 전포괄적인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단지 구원론적 의미만을 갖는 편협한 종교적 체계가 아니라, 종교적 또는 구원론적 영역 못지 않게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과학적 영역 등 삶의 모든 분야에 관룐되어 있는 체계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자들은 피조세계에 대하여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들은 세계의 창조 후에 모든 피조물 속에 명백히 보여지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선한 신성(神聖)을 인정하여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경배하며 감사하는일을 버리고, 도리어 불의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변명할 여지가 있는 자로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8~20절을 로마 카톨릭신학에서 보는 것 처럼 자연신학(自然神學)의 기초로서의 신인식(神認識)의 주장으로 이해할 수 없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 자연계시는 죄인에게 변명의 여지를 봉쇄하여 죄를 죄로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되어 영적 맹목(盲目)과 경화(硬化)가 제거된 마음을 가지는데, 이 마음에 자리잡은 중생된 이성은 피조세계에 있어서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으 보이지 않는 선한 신성(神聖)을 인정하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분명히 속죄의 종교이며 구원의 종교이다. 그렇지만 기독자가 피조세계에 대해서 바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도 됨을 정당화 해서는 안된다. 기독자는 세계, 현세적 사항들, 우주적 사물에 대하여 어떤 관계에 있는것일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 받고 새로워진 기독자는 믿음의 눈으로, 성경이란 안경을 쓰고, 이 자연이라는 대서적을 읽으며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한 신성을 밝히보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이교도와는 전혀다른 관점에서 자연계시의 해석적 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기독자는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 안에, 즉 사계절의 변화, 역사의 진전 그리고 인생의 생사화복 등에서도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선하신 신성(神聖)을 밝히 볼 줄 아는 자이다. 도 기독자는세계, 현세적인 것, 우주적인 사물에 관계되는 학문, 과학, 예술, 시민적 정의, 노동, 일상생활에 있어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감사와 찬양과 예배를 드려야 한다. 또한 기독자는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힘써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있어서 칼빈주의 전포괄적인 원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은총(Gemeene Gratia)의 교리를 강조한다. 일반은총으로 하나님은 세계와 창조질서를 유지하시고, 저주를 경감하시며, 부패의 진행을 억제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자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높이며 경배하는 생활을 방해 받지 않도록 해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기독자는 이 세상에 수도원적 은둔생활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국면과 처지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물론 중생치 못한 자라고 일반은총 등을 근거로 하여 이 세상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이웃에게 자신을 베풀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 들을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창조자로서 경배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감사도 드리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것으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독자들은 불신자들이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여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이 땅의 것, 세계, 우주적 사물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투철한 칼빈연구로부터 이와같은 비중생자와 중생자를 대립관계로 보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칼빈의 노선에 충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갖기 전에는 이 땅의 생활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축복을 위한 공적 쌓기 정도로 생각하였고 이 땅의 모든 삶의 현실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땅은 기독자들에게 있어서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헌신의 장(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은 우리의 공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을 통해서 주어지고 성도의 견인(堅認)에 의해서 보증되어진다. 따라서 오히려 기독자는 하나님의 명령 따라 우주의 사물에 관한 커다란 임무(A grand task with regard to the cosmos)를 이 땅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주의는 기독교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창조의 명령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카이퍼는 속죄의 목적을 이 창조의 목적과 관련시켜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우주론적 의의(宇宙論的 意義)에 관하여 말하였다. 중생에 관한 이원론적 관념은 자연생활과 은혜생활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그것은 천상의 사물에 대한 지나친 명상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대하여 정당한 관심을 못 가지게되었다. 그것은 단지 영원한 것만 바라보게하고 현세적 의무수행을 뒤로 미루게하였다. 즉, 그것은 영혼에만 주의를 기울여서 신체에 대한 배려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단지 영혼의 구속주로만 알았지 그리스도의 우주적 의의(His cosmological significance)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원론(Dualism)사상은 성경적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하였다. 또 사도바울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은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하였다. 바울의 논리는 속죄사역의 대상은 개개인 죄인구원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의 구원에 이르며, 만물의 으뜸이시오,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일체의 모든 것의 유기적 재결합(有機的 再結合:The originic reunion)에 이른다. 바울은 말하기를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롬 8:19). 한편 밧모섬의 요한은 모든 영광과 부귀를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니께 돌리고 있다.
결국 요한 계시록은 창세기 1장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종말은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심판하는 정도가 아니고 전우주의 회복(the restorationof the entire cosmos)이다. 그때 하나님께서새하늘과 새땅에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된다. 바로 복음의 이 넓은 포괄적인 우주의 의미(the wide, comprehensible, cosmical meaning of the gospel)가 재차 칼빈에 의하여 파악되어진 것이다. 칼빈주의는 세계의 멸시, 현세적 사물의 무시, 우주적 사물의경시(Udervaluationof cosmical things)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카이퍼는 이와같이 창조목적의 완성과 성취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우주론적 의미를 강조하여 기독자의 세계, 현세적 사항, 우주적 사물과의 관련을 유신론적(有神論的)으로 기초를 놓았다. 현대주의 위에 선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합리주의적(合理主義的)학문과 과학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화란교회 성도들이 단단히 발목을 잡히게 된 것은, 이 “복음의 포괄적, 우주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카이퍼는 체험했다. 그러므로 카이퍼는「세계의 멸시」,「현세적 사물의무시」,「우주적 사물의 경시」를 극복하여, 기독자가 이세상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일치시켜 보는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기독교를 주장하였다. 대세계문제(對世界問題)를 무시하는 이원론적 기독교는 대신문제(對神問題)를 어둡게하나, 대신문제에 밝은 기독교는 대세계문제를 중요시한다. 카이퍼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사상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기독자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명령을 무시하고 방관했기에 자유주의 사상에 삼켜버렸던 것이다. 근대주의 사상이 삶의 전영역에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에 반대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칼빈주의 사상도 삶의 전영역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는 포괄적인 사상을 갖는다. 복음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깨닫는 전체적 기독교의 주장이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이다. 즉 카이퍼는 나약해진 기독교에, 로마 카톨리과 현대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전 포괄적 원리를 제시하려 했다. 칼빈주의의 근본사상은 인간생활 전체가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는다는 확신이다. 오늘날 기독교들의 자녀들은, 젊은날의 카이퍼 때 이상으로, 현대주의의 아테네와 같은 일반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인본주의적 무신론적 제 과학을 배움으로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주의 고등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에 반대하는 하나님 중심의 전포괄적 사상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②「종합」(Synthesis)에 반대하는「대립」(Antithesis)의 원리
앞서 언급한 대로 세계관은 두 가지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세계관의 포괄성이고 다른 하나는 수미일관적 통일성(首尾一貫的 統一性)이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전자는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문제이고, 후자는 인식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퍼의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 주장은 기독교철학에 선구적 공헌을 하였다. 그래서 세계관과 철학 사이에 구별이 때로는 어려울 때도 있다. 어쨌든 카이퍼는 칼빈주의적인 인식이 현대주의적 인식과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Antithesis)는 것을 명배히 깨달았다. 즉, 중생자와 비중생자는 원리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자가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비기독자와 공통된 인식을 갖는다든가 종합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카이퍼의 신학강요(神學綱要) 제2권 제3장「두 종류의 학문의 발전」제13장「두종류의 인간」과 제14장「두종류의 학문」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 세상 학문과의 관계를 종래에는 변증학적인 입장에서 다루었다. 즉, 그것은 신앙과 이성과의관계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신앙은 반과학적, 비합리주의적 입장을 취하든가 신앙과 학문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중생자와 비중생자는 마음 혹은 자기 의식의 내용이 원리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의식은 과학자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이 마음을 가진 이성의 활동도 중생자와 비중생자가 서로 다르고 학문(또는 과학)도 두 종류라는 것이다. 중생자와 비중생자의 대립(Antithesis)은 신앙과 이성의 대립이 아니라, 중생자와 비중생자의 자기의식의 대립이며 세계관의 대립이다. 참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중생자의 신앙과 이성, 비중생자의 신앙과 이성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중생자의 자기의식 내용은「죄의 의식」「신앙의 확신」「성령의 증언」임에 반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엃어버린 비중생자의 마음은「어두어진 미련한 마음」(롬 1:21),「굳어진 마음」(엡 4:18)이다. 물론 비중생자의 속에도 칼빈이 말한대로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가 있지만 이들은 종교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요 신의식(神意識)이 있어도「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것」이며, 중생치 못한 자의 종교의 씨는 참되신 하나님을 향하여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상숭배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가르침은 오히려 신자와 불신자의 의식이 필연적으로 불일치 하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였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에 대해서 실질적인 지식을 갖지 못하며, 회개하지 못한 자는 신앙의 확신을 갖지 못하며, 성령의 증언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다 이는 이미 예수께서 말씀한대로「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져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구속할 수 없고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통해서 새롭게 된다. 또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고 하였다. 결국 신앙과 이성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자와 비중생자 사이의 대립이며, 이것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나누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종류의 인간, 두 종류의 자기 인식으로부터 일어나는 두 종류의 과학론(two wywtem of science)을 주장하였다. 꼭 같은 교육을 받고, 꼭 같은 연구 테마를 갖고 연구하는 두 과학자가 있다해도 한사람은 창조주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믿고 또 다른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자라면, 그 두사람의 연구의 방향과 목적이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자기 판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판단에서 나오는 논리적 결론도 어떤 세계관을 가졌느가가 중요하다. 즉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는가 아니면 인본주의적이고 유물주의적 세계관을 가졌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중생자와 비중생자가 각각 이루어 놓은 결과를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양자(兩者)가 같은 것을 했다고 할지라도 양자의 일은 서로 다른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대로 그들은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완전히 본성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서 이 일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물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각각 다르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열매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다른 부분을 건축하고 있다기 보다는 각각 자기의 집을 건축하고 있는 셈이다.
카이퍼는 독자적으로 개혁파원리(Gereformeerde Beginseln)에 입각한 학문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기독교를학문이나 과학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이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실제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봉사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종교개혁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고 하면, 학문적 사색도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과거룩한 하님의 말씀의 권의 아래 놓여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이퍼가 수학이라든가, 논리학, 자연과학 등의 몇 개의 학문영역에서 중생자와 비중생자의 인식적 공통역역을 인정했다는 것이 그의 획기적인「대립의원리」에 불충실한 것이라고 반 틸(C. Van Til)과 도예벨트(H. Dooyeweerd)에 의해서 비판되고 있다. 물론 카이퍼는 이른바「이론 사유의 초월적 과제」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그것을 그의 후계자들에게 위임하였다. 카이퍼에게 있어서는 인간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자아와, 지식과 이론적 사유의 구별이 분명치 않았다. 예컨대, 수를 센다든가 길이를 잰다든가 무게를 측정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 중생자와 비중생자의 공통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카이퍼에게 그 시대의 제약으로부터 오는 다소 그의 논리전개가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해도, 그가 종합을 배제하고 ‘대립의원리’를 개척했다는 것은 개혁교회의 위대한 거보였다. 그가 구체적으로 ‘개혁주의 원리’에 기초한 「고등교육협회」라든가 개혁주의 원리에 따라 뿌라야 대학을 창설한 것은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카이퍼는 현대주의와의 처절한 싸움 속에서 개혁주의적 학문의 기초를 놓았으며, 칼빈주의적 성경관의 토양 위에 모든 학문의 건축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이와 같은 제학문의 기초공사를 위한「개혁주의 원리」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이 기초 위에 설 건물의 건축은 후대의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웅대한「신학대전」(Encyclopaedie der Heilige Godgeheergeid) 전3권을 저술한 후에도 “칼빈주의 운동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지상에는 하나의 돌도 쌓아지지 않았다. 기초공사를 위하여 막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고 말했다.
베인호프(C. Veenhof)는 이와 같이 제학문의 원리에 관한 비판적 고찰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그는 기독교 철학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사실 카이퍼는 “우리들은 이 세상 철학으로는 살 수 없다. 우리들은 칼빈과 함께 기독교 철학(Philosophia Christiana)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철학을 계속 주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6. 칼빈주의적 세계관의 역할
1) 칼빈주의 세계관과 이원론(Dualism)의 극복
우리는 앞서 칼빈주의 세계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즉 창조, 타락, 구속으로 연결되는 성경의 세계관은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포괄적이다. 문제는 칼빈주의 세계관과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세계관과는 서로 다르다는데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삶전체(The totality of life)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기독교세계관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 영적인 삶 외에는 전혀 무관심한 듯이 보인다.
만약 우리의 관심이 예수믿고 구원얻어 병 고치고, 축복받는 삶에 한정된다면 그것은 바른 세계관이 될 수 없다. 우리 크리스챤은 그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구체적이고 전반적인 삶속에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관련되지 않는 곳이없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고 나머지 부분은 마귀가 통치해도 좋은 듯이 버려두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앙이며 성경에대한 불신앙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는 하나님의 주권이 교회안에서만 있고 다른 모든 영역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전혀 없는 듯이 여기는데서, 오늘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관과 실제 크리스챤의 삶과는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원론사상 때문이다. 이원론은 이 세상을 둘로 나누어 버린다. 즉, 이원론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범주 곧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성스런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이원론과 이중성(Duality)은 구별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기독교의 제자도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이중성을 인정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우상을 따르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이원론이란 하나님나라의 한가지 영역만 귀히 여기고 그 나머지의 삶은 구속(救贖)과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을 극복하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 칼빈주의 세계관이다.
2) 칼빈주의 세계관과 이신론(理神論)의 극복
이신론은 이 우주의 배후에 인격적인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계의 태엽을 감아 놓은 후 제 스스로 가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막연하게 이 세계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어서 우주를 창조하기는 했어도 창조하는 것으로 끝내었을 뿐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완전한 인격자와 주권자로 믿지 않는다. 이신론은 하나님께서 성경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서 자신을 나타내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의 조물주이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거나 인격적인 분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우주는 인과율에 의해서 창조되었기에 결정론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적적인 것은 없다고 본다. 이 사람들은 사람을 볼 때도 이 우주에 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본다.
물론 사람의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신론 사상을 가진 사람은 인간의 타락을 믿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옳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윤리도 공허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크리스챤들 가운데도 실제로는 이신론적 세계관을 그대로 갖고 있다. 이신론도 하나님, 성경 등과 같은 내용을 잘 쓰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진리요 세계관인 듯이 오해되기 쉽다.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 유신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듯하지만 실상은 이신론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이런 이신론 사상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칼빈주의 세계관 뿐이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성경이 가르친대로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의 하나님, 심판주의 하나님을 믿고, 그 인격적인 하나님 중심 사상에 충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 칼빈주의 세계관과 허무주의의 극복
현대인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 중에는 허무주의가 있다. 허무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든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마침내 어떤 종류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모든 의미를 부정한다. 모든 것은 우연에서 온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허무주의는바로 세계관을 형성한다. 오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은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빠져있고 이러한 세계관이 학문과 예술, 인간과 사회이 전반적인 삶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확실히 허무주의 세계관은 비뚤어진 세계관이다. 허무주의 세계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으로 몰아 넣고 병든 사회를 만들고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고 있다. 20세기를 이해하려면 허무주의의 정체를 알아야 하고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허무주의세계관이 극복되고 성경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 성경적 세계관은 곧 칼빈주의적 세계관이다.
허무주의는 우리의 삶의 주변에도 널리 퍼져있다. 화랑에 있는 그림들, 소설, 시,음악, 연극, 삶의 모든 영역에 허무주의는 깊이 침투되어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허무주의는 하나님을 버린 인간의 자연주의 세게관에서 출발한 것이다. 즉 이 세상은 물질이 존재의 근원이며 그것만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시각이다. 우주는 우연에서 나서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되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을 가질 때 필연적으로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허무주의는 한마디로 어떤 존재도 인정치 않고 또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가치까지도 부정하려는 사상적 입장이다. 물론 허무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사람들은 허무주의의 사상적 지주로 삼았던 합리주의와 과학적 인식마저 부정하고 도 신(神)을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하지 못하는 정신적 모순 속에서 허무주의를 발견하려고 했다.
물론 허무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고 강조점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허무주의는 자연주의에서 나온 것이기에 인본주의이고 이는 또한 무신론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모든 것이 헛될 수 밖에 없다. 허무주의자는 이 세상이 온통 불가지(不可知)의 먹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의미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다.
그런데 실제로 허무주의자도 정말 허무로 살아갈 수 없는 데서 저들의 고민이 있다. 그러면 허무주의는 극복될 수는 없는 것일까? 허무주의 세계관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은 허무주의자에게 세상과 우주와 인생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때 시각교정은 이루어진다.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적인 세계관 곧 칼빈주의적 세계관만이 가능하다.
4) 칼빈주의 세계관과 세속주의적 세계관의 극복
오늘 우리시대는 세속주의 시대이다. 근대화 과정 자체가 세속적이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세속주의란 말을 단순히 성(聖)과 속(俗)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세속주의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속주의 세계관의 구체적 예를 살펴보자.
첫째로, 세속주의적 세계관의 핵심은 인간의 자율성(Homo Autonomous)을 우상화, 절대화하는 시각이다. 이 사상은 단순히 무신론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 자리에다 사람을 앉혀 놓는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는 세계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인간의 자율성을 예찬한 나머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인간을 그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이다. 또는 이는 물질을 중심으로 윤리적 판단기준으로 삼는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타락해서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이미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 노릇을 하려고 했다.
둘째로, 세속주의 세계관은 과학혁명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래서 과학으로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고 보는 사상이다. 일찍이 프란시스 베이컨(F. Bacon)은 말하기를 “인간의 타락에 의하여 순결한 상태로 떨어졌고 동시에 피조세계에 대한 지배의 위치에서도 떨어졌다. 하지만 이 두가지 상실은 부분적으로는 이성에서 회복될 수 있다. 전자는 종교와 신앙에 의해서 회복되고 후자는 과학기술에 의해서 회복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면 베이컨은 인간의 타락을 믿은 성도였지만 영적인 측면과 자연적 측면을 분리하고, 구원의 이중적 수단을 제안한 점으로 봐서, 그도 역시 중세이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과학주의란 것도 인본주의의 다른 얼굴이다. 과학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과학을 현대인의 우상으로 세워놓은 것이다. 마치 과학이 우리시대의 절망과 비애와 고통을 해결할 수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세속주의 세계관의 입장이다. 바로 이런 세속적인 세계관 즉, 과학 우상주의 사상이 현대인을 외골수가 되게하고 과학을 우상화하고 그것을 세계관이 되게 하였다. 그런데 칼빈주으의 세계관과 세속주의적 세계관은 그 출발과 접근 방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서 현대세계의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에 반해서 칼빈주의 세계관 곧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의 회복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칼빈주의 세계관은 오늘의 인본주의적 세속주의적 세계관에 대답을 주는 세계관이다.
7. 결론과 전망
칼빈주의는 성경적 세계관이다. 즉 그것은 성경적 우주관이다. 또 그것은 성경적 인생관이기도 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운동 속에 나타난 인생관 또는 세계관이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가르 지적하는데 사용된다.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칼빈주의는 언제나 우주적 사상체계로써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칼빈주의 우주관 또는 세계관을 규정하는 몇가지 원칙을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우주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원칙이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의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의 왕이시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다. 피조물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만사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 사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성경적인 세계관의 중심이 된다. 칼빈주의 세계관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차이를 하늘과 땅 깥은차이로 구별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을 사용하지만 땅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는 안간의 창조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인간의 임무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 또한 시편 18편은 인간이 땅 위에서 어떠한 지위를 가져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그것은 온 땅 위에서 어떠한 지위를 가져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그것은 온 땅 위에 엄위로우신 이름을 가진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만물을 다스릴 우주적인 임무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셋째로, 위에서 말한 것은 인간은 땅 위에서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다 그만이 온 우주에 주권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한 무리의 반역적 천사들이 그의 주권에 도전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인간을 유혹해서 인간의 소멸을 상실케 하였다. 인간의 타락은 땅 위에 하나님의 저주를 일으켰다. 인간을 이런 타락상태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기 시직했다.(롬1장) 인간의 타락 대문에 만물도 어두움에 처하게 되었다.
넷째로, 그러나 그런 마귀의 책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골 1:15~20은 우리에게 간단하게 이 영광스런 소식을 전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셔 흑암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이 자기의 위치를 회복하여 그에게 맡겨진 순종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인간은 통치의 지위를 회복하였던 것이다.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해 주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편8편이 성취되었다. 둘재 아담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세상에 대한 지위와 책임과 소명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여섯째로, 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시작되었으나 인간의 심령은 여전히 죄와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임무를 여전히 갖고 있다. 새로운 인간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지상주권과 구원선포의 책임을 갖는다. 하나님 중심의 칼빈주의 세계관은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이며 대답이다.
Soli Deo Gloria!!!